
낙동강을 배수진으로 승기를 잡은 유엔군은 압록강까지 진격해 벅찬 통일이 손에 잡힐 듯 했다.
그것도 잠시, 중국군이 인해전술(人海戰術)로 한국전에 개입해 그 전세는 순식간에 수세로 전환한 것이다.
1950년 12월 23일 오전 11시. 성탄절을 이틀 앞둔 그날.
한국전의 영웅 주한 미8군사령관 월튼 해리스 워커(Walton H. Walker) 장군 일행이 의정부 남방 5km 지점,
서울 도봉구 도봉동 596~5번지 이곳을 달리고 있었다.그는 중국군의 공세를 막아내는 데 수훈을 세운 자신의
외아들 워커 대위에게 이승만 대통령이 수여하는 은성무공훈장을 전달하기 위해 의정부로 가던 중이었다.

미8군사령관 월튼·워커 장군이 이날 지프로 의정부남측을 달리고 있었다. 한국군 6사단 2연대 「드리쿼터」와 충돌했다.
그는 야전병원으로 옮겼으나 끝내 사망했다. 워낙 후퇴의 혼잡 길에서 졸지에 벌어진 일이라 이 사건에 대한 보도나 조사내용은
다소 엇갈리고 있다.
"12월 23일 상오 11시께 우리 2연대소속 「드리쿼터」가 의정부남방5㎞지점에서 워커장군 지프를 들이받았어요.
우리 차는 옆길서 나가고 전선 시찰차 나온 「워커」장군의 지프는 본 도를 전속으로 달려오고 있었어요. 「워커」중장은
평소에도 과속으로 달리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날은 후퇴하는 「유엔」군를 한 명이라도 더 많이 격려하려고 더 바삐 차를
몰았던가 봐요. 거기다 공교롭게도 옆길 우측에 국군 트럭 6대가 나란히 정거하고 있어 우리 「드리쿼터」는 달려오는 장군 차를
보지 못하고 본 도로 뛰어 나간 거예요. 이상이 사고직후 한미합동조사대가 현장으로 달려가 조사한 내용인데, 우리편에 과실이
있다고 판명이 됐어요. 옆길에서 본 도로 나갈 때에는 일단 정차하고 좌우를 살핀 다음에 차를 몰아야한다는 것이 교통 규칙이니깐요. 운전병과 동승병 3명은 조사보고와 함께 사단 법무부로 송치됐는데 운전병만 군재에서 과실치사로 3년형을 받고 동승 병들은 석방된 것으로 기억됩니다."-최영철씨(당시 6사단2연대 헌병대장)의 증언
"2차 대전 때 고「조지·S·패튼」장군의 막료였던「윌튼·워커」중장은 지프사고로 인한 부상으로 23일 사망했다. 장군은 후퇴하는
미 군 사단을 시찰하는 도중 외아들인「샘·심스·워커」대위를 표창하고 영연방사단도 방문할 목적으로 의정부남측을 달리고있었다. 부상한 워커 장군은 서울근교의 야전병원에서 숨졌다. 미24사단에 근무하는 워커대위는 이 비보를 듣고 병원에 달려갔으나 이미
임종 후였다. 장군의 야전가방에는 아들에게 주려던 표창장이 그대로 간직돼 있었다. 동승한 장군의 보좌관「데이트·C·타이너」중령은 부상했는데 그는 장군이 지프를 직접 운전했다고 말했다. 2차 대전 때 워커장군이 3군단장으로 보필하던「조지·패트」미제5군사령관 역시 독일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둘은 다 탱크전의 권위였는데 같은 차 사고로, 해는 다르지만 같은 12월에 죽었다."
-AP통신 종군기자「윌리엄·T·와프」의 보도
워커 장군의 유해는 장례를 위해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당시 워커 장군의 외아들 샘 워커 대위도 참전 중이었다.
미국정부는 샘 워커 대위에게 아버지 유해를 모시고 귀국할 것을 명령한다. 샘 워커 대위는 이렇게 대답한다
“전우들을 두고 혼자 갈 수 없습니다.”
맥아더 사령관은 샘 워커 대위를 도쿄 사령부로 불러 '아버지 유해 운구 지시' 명령을 했다.
“아버지의 장례식에 아들이 없어서는 안된다”
워커장군은 미국에서 장례를 치르게 된다. 그리고 아들 샘 워커 대위는 다시 전선에 복귀한다.
맥아더 사령관은 워커 장군이 사망하기 며칠 전에 미국 정부에 그의 대장 진급을 상신해 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전 전선에서의 이승만 대통령과 워커 장군
낙동강 전선이 무너지면 대한민국은 지구상에서 사라질 위기였다. 낙동강 전투 당시 미국 정부는 대한민국 정부 요인과 피난민
62만 명의 인원을 배에 태워서 사모아를 이주시켜 새로운 망명정부를 세우기로 했다는 것이다. 바로 '새 한국건설게획(New Korea
Plan)'이다. 미국정부는 8군사령관을 통해 한국군 육참총장에게 영천방어선이 무너지면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서 사모어로 가서
망명정부를 구성할 것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도쿄에 있던 맥아더 사령관도 남한을 포기하는 문제를 검토했었다고 한다.
미국 정부는 한국전 초기에 그 전쟁은 사실상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것같다. 남한 사수를 끝까지 주장한 인물이 바로 워커 장군이다.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
그는 한국군 장병들에게 다짐했다.그리고 미국군 장병들에게 명령한다.
"우리는 절대 물러설 수 없다. 물러설 곳고 없고 물러 서서도 안 된다.
낙동강 방어선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후퇴란 있을 수 없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한국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
이때 그는 " Stand or Die!"(지켜라 그렇게 하지 못하면 죽어라)라는 전설적인 명언을 남긴다.
워커 장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을 막아내 마침내 대한민국을 지켰다.

2009년 한국과 미국의 노병들이 사재를 털어서 워커 장군이 사망한 그 현장에 <미 육군 대장 월튼 헤리스 워커 전사지>비를
세운다. 그 <전사지> 앞면에는 4성(星) 장군임을 알리는 별 넷이 새겨져 있고 <미 육군 대장 월튼 헤리스 워커 전사지>
<전사일 1950년 12월 23일> 등을 기록하고 있다. 워커 장군이 이곳에서 200미터 떨어진 곳에서 전사하였다. 그 전사지에는
건물이 들어서 부득이 길 옆 이곳에 기념비를 세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