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묘비(六臣墓碑)
육신묘비
유명조선국육신묘비명
유명조선국 육신묘비명 -서문을 겸함-
태종백태학사 조관빈 지음
당 안진경 글씨를 집자함
서울에서 남쪽으로 노량진을 지나 남향 언덕에 묘역을 함께 한 다섯 무덤이 있다.
각기 작은 돌에 성씨만 쓰여져 있어 마치 부인의 묘표와 같은 데도
그곳을 지나는 사람은 다 말에서 내려 손으로 가리키며 탄식하기를
‘만고 충신의 무덤이다.’하니, 곧 이른바 육신의 묘이다.
육신은 참판 박팽년, 승지 성삼문, 교리 이개, 사예 유성원, 참판 하지위, 도총관 유응부이다.
세종과 문종을 섬기면서 은총을 받았고, 단종이 나라를 내놓을 때에 와서는 제공이 의리를 내세워 순절하였다.
그러한 사실은 추강 남효온의『병자육신열전』에 실려 있는데 박공의 못가에서의 결심과
성공이 옥새를 가슴에 안고 통곡한 것과, 이공이 현릉의 송백을 슬퍼한 것과,
유공이 집현전 조서를 통곡한 것과 하공이 녹을 모아 창고에다 둔 것과,
유공이 열이 식은 쇳조각을 땅바닥에 던진 일 등에서 그 실적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광묘가 후세의 충신이라고 칭찬한 말은 해와 별에 게양하여 우주에 전하기에 충분하고,
선· 효 두 왕조에서도 충성을 가상히 여겨 후손을 녹용한 은전이 있었다.
우리 숙종대왕은 예 사람의 은혜에 감사하고 높이 보답하는 뜻에 더욱 마음을 쏟아,
기미년에 노량진에서 열무할 때 강 건너 묘를 바라보고 그 묘역을 손질할 것을 명하였고,
많은 선비의 소청에 따라 교 곁에 사우를 세워 병향하였다.
신미년에 장릉에 거동하면서 지나다가 다시 관직을 도로 주고 제사드릴 것을 명하였으며,
사액을 민절이라고 하사 하였다. 무인년에 예전에 거행하지 못한 예를 닦아 단종을 태묘에 부묘하고,
또 관원을 보내 육신의 사당에 제사하였다.
이리하여 단종의 지극한 덕은 역대의 조상에 배향이 되고 제공의 높은 충성과
큰 절개가 동시에 빛이 나 마침내 유감이 없게 되었다.
아! 이 다섯 묘는 이미 박· 유· 이· 성 이란 성씨로 표석이 세워졌으니 육신 중 네 공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 하나 성씨가 있는데 이는 성공의 아버지 승으로서 같은 날에 화를 입어 이곳에 묻혔다고 하며,
하공의 묘는 영남 선산에 있는데 몸의 일부만 묻혔고, 유공의 묘는 어디에 있는지 듣지 못하였다.
대체로 그 당시 화가 일어났을 때 가족까지 전부 몰살되어 제공의 시신을 거둘 사람이 없는 상황일 때에
어떤 중이 그 시신을 업어와 이곳에 묻었다 하고, 어떤 사람은 매월당 김시습이 묻었다고 하는데,
그때는 사태가 다급하여 일을 제대로 격식을 차리지 못해 무덤이 서로 뒤바뀌어
어느 무덤이 누구의 것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되었으니
하공과 유공의 무덤 또한 이 중에 섞여 있지 않은 줄을 어찌 알 것인가?
아! 신하가 임금을 위해 죽은 것은 대의이다.
그러나 국명이 바뀌지 않고 천운이 정해졌을 때는
제환공의 관중이나 당태종의 위징과 같이 된 자도 예부터 몇 명이 있는데도,
제공은 그 때를 당하여 차마 선왕이 어린 것을 부탁한 뜻을 저버리지 못해,
능히 한번의 죽음을 결정하기를 명나라 방효유 등처럼 하였으니,
세운 그 절개는 뛰어나다고 할만하다.
무인년에 있는 국가의 전례가 시행됨에 있어서는 더욱 제공의 죽음이 끝내
임금의 뜻을 감동시킨 하나의 큰 도움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충신의 피가 묻힌 곳이 여러 해 동안 황폐하였으나 때에 따라 숨겨지고 드러난 것이
국시와 함께 정해지니 어찌 슬프고 또 기묘하지 않은가.
육신의 후손은 오직 박공의 유복손 만이 다행히 화를 모면하였는데
몇 대를 지난 뒤에 비로소 녹용되었다. 7대손 익찬 숭고가 이곳의 무덤을 증축하고
의심나는 것을 분간하였으며, 금상 정묘년에 연신의 아룀에 따라 경기관찰사에게 명하여
비석을 다듬어 묘도에 세우게 하니 민절사 유사인 장보 민백흥 · 심 우 등이 나에게 거기에 기록할 글을 부탁하였다.
이를테면 여러 선생의 의열은 천하 후세에 떳떳하게 할 말이 있으니
비석의 있고 없고가 무슨 영향이 있겠는가마는 성주께서 충성을 표창하고 여러 선비가 간절히 요청하였으며,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비석 끝에 이름을 붙이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고 삼가 그 사적을 서술하고 명을 덧붙인다.
명은 다음과 같다.
사람의 윤기는 오륜이 있고 신하의 절개는 두 임금 없는데,
성조께서 이를 배양하여 후손에게 끼쳤도다.
그 중에 육신은 단종 위해 죽었으니,
꺼려할 것 뭐 있나 곧은 글 사책에 올려있네.
노량진 언덕바지에 줄지은 무덤들, 빗돌에 이름 없어 몇 세대 의문 남겼네.
노인이 분명타 하는 말 신빙하기 충분한데,
오랜 동안 묘역 숨겨져 시신 끝내 보전되었네.
하공은 장소가 다르고 유공은 흔적조차 없으니,
다급한 때 있던 일이라 그 까닭 알 수 없네.
어쩌면 이 두공도 이 속에서 섞여 있지 않을까.
사철에 제사가 없으니 의사가 눈물 뿌렸네.
우리 숙종 임금 충절을 포장하여, 무덤 바라보고 추모하여 사당 세워 제향 올리니,
밝은 태양 환히 비춰 이운 풀잎 생기 돋고,
노릉을 추존하니 신이며 인간 마음 흡족하네.
훌륭하신 단종의 덕 어찌 종묘 배향 않을손가.
임금 신하 한 몸 되었으니 충신이로다 공들이여,
옛적엔 금기되었으나 이제는 높이 칭송받고,
예전에 황폐한 데를 나중에 정성껏 받들었네.
아울러 제물 올리니 박취금의 후손인데,
큰 비 세우라 임금님 명하여 옛법을 계승하였네.
관찰사는 돌을 다듬고 사림은 역사 감독하니,
남추강 육신전 기록에다 정론은 변하지 않음이로세.
빗돌에 크게 새겨 강가에 높이 세우니,
도도히 흐르는 강물은 저 멀리 영월과 통하누나.
아! 육신묘비문이 완성된 것은 영조 정묘년이었고,
그 후 2년이 지난 무인년은 곧 장릉이 복위 된지 주갑이 된 해이다.
임금은 명하여 박공· 성공· 유공· 하공에게 이조 판서를, 유공에게는 병조 판서를 증직하고,
박공은 충정, 성공은 충문, 이공은 충간, 유공은 충경, 하공은 충렬, 유공은 충목이라 증시하였으며,
을미년에는 임금이 박공의 후예가 서울에 와서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명하여 그 마을을 정표하였다.
당저 정유년에는 영남도신에게 명하여 하공의 마을을 정표하였다.
이는 숙종조에 공의 종자로 그의 후사를 추정하였는데 그의 집이 안동에 있으므로 이때 이 명이 내린 것이다.
무술년에는 민절사에 예관을 보내 치제하였다.
각 성조의 충의를 드러내고 포장한 것이 이렇듯 지극하니 제공의 크고 높은 명절은 천추만대에 명백히 드러날 것이다.
용머리 거북받침의 있고 없고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 성고가 특별히 현각을 명한 후의를 아직까지 받들어 게양하지 못하여
사림의 한이 되고 있으므로 민절사 유사 이동직이 그의 동료와주선하여 돌을 새기고
박고의 사손 전 현감 기정이 정성껏 도와 일을 마치니, 아! 그 또한 훌륭하다.
나는 일찍이 노량진을 지난 적이 있었는데 무덤의 수목이 울창하여 지난날의 황폐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이제 큰 비석이 또 높이 서게 되니 어느 누가 충신의 무덤인 줄 모를 것 인가마는
더욱 존경과 감탄이 터져 나오는 것은 참으로 세 성조에서 높이 보답하는 후덕 때문인 것이니,
이 점은 마땅히 태사씨의 큰 글이 있을 것이다.
이제 장보의 부탁에 따라 대강 정묘년 이후 나라의 은전과 비를 세우게 된 전말을 위와 같이 서술한다.
원임 우의정 이휘지는 삼가 기록함
숭정기원후 세 번째 임인년(정조 6, 1782년) 월 일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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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홈페이지의 해석문을 옮긴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