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원(1973~92)
정약용 형제의 부친. 영조 38년(1762) 생원시에 급제했고, 대과는 보지 않았으나 음보로 지방관에 나가 진주목사로 있던 중 사망했다. 첫 부인 남씨가 장남 약현을, 후취 윤씨가 약전, 약종, 약용과 이승훈의 부인이 된 딸을 낳았다.
정약현(1751~1821)
정약용의 이복 맏형으로 정조 19년(1795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다. 자신은 천주교도가 아니었으나 첫 부인이 이벽의 누이였으며, 딸 명련은 황사영과 혼인한 관계로 고초를 겪었다.
정약전(1758~1816)
정약용의 둘째형으로 정조 14년(1790) 문과에 급제하고 병조좌랑 등을 역임했다. 정조 사후 흑산도에 유배되어 [자산어보], [논어난], [자산역간] [송정사의]등의 저술을 남겼다.
정약종(1760~1801)
정약용의 막내형으로 다른 형제들보다 늦게 천주교를 받아들였으나 다른 양반들이 천주교를 버릴 때도 신앙을 굳게 지켰다. 정조 사후 국문을 받고 참수당했다.
이승훈
정조 7년(1783) 말 부친을 따라 베이징에 가서 서양인 선부에게 영세를 받고 이듬해 돌아옴으로써 천주교를 자발적으로 수용한다. 이때 그가 가져온 천주교 서적들은 여러 차례 정국에 파란을 일으켰다. 정약용 형제의 매형이기도 한 그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사형당했다.
이가환
성호 이익의 종손으로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당대 제일의 천재 학자로 정조와 서양의 과학문명에 대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채제공 사후 남인 영수가 되었으나 천주교라는 공격을 받아 자리에서 물러났다. 천주교를 버렸음을 언행으로 입증했으나 신유박해 때 사형당했다. 저서로 [금대관집]이 있다.
이벽
정약현의 처남으로 정약용에게 처음으로 천주교를 가르쳐 주었다. 박식했으나 천주교를 접한 후 벼슬을 포기했다. 문중으로부터 강한 배교 압력을 받아오다가 병사했는데, 일각에는 독살설도 있다.
체제공
정조 때의 남인 영수로 좌의정을 지냈다. 정조 때 사도세자 문제를 거론했다가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가 죽고 나서 남인들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홍화보
정약용의 장인. 영조 47년(1771) 훈련초관으로 국자시에 1등했으며 무관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동부승지에 발탁되기도 했다. 정조 15년(1791) 황해도 병마절도사로 있을때 사망했다.
정학연
정약용의 맏아들로 시문과 의술에 밝았다. [종축회통]이란 저서가 있다.
정학유
정약용의 둘째 아들로 [농가월령가]의 작자이기도 하다.
정학초
정약전의 아들로 학문에 뛰어나 정약용이 학문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17세에 요절했다.
목만중
남인으로 정약용 집안과 가까웠으나 천주교에 반대해 벽파로 돌아서면서 정적이 된다. 정약용을 죽이기 위해 여러 차례 공격했다.
서용보
노론 벽파로 정약용을 비롯한 남인들이 공격한다. 영조때 대사헌 등을 지냈으며 순조 때 우의정으로서 신해박해를 주도하면서 정약용의 석방을 방해했다. 1819년에는 영의정에 오른다.
심환지
영조 47년(1771)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온 이후 정조 때 벽파의 영수가 된다. 정조 사후 영의정을 맡아 신유박해를 주도했다.
혜장
젊어서 대둔사의 주지가 되었다. [주역]을 공부하다가 정약용을 만난 후 다산을 사실상 스승으로 삼았다. 그가 일찍 죽가 정약용이 [아암장공탑명]을 써주었다.
황사영
서울 출신으로 정약현의 딸 명련과 결혼하면서 천주교에 입교한다. 정조 14년(1790) 사마시에 급제한 후 정조의 부름을 받았으나 벼슬을 포기하고 전교에만 전념한다. 은둔지 배론에서 신유박해의 전말을 담은 [백서]를 작성해 베이징 주교에게 전달하려다 발각되어 능지처사되었다. 가족들은 모두 노비가 되어 귀양갔으며 그의 집에는 우물이 만들어졌다.
주문모
중국 장쑤성 쑤저우 출신으로 베이징 신학교 졸업 후 정조 18년(1974) 지황 등의 안내로 입국했다. 이후 7년동안 숨어 다니면서 천주교를 전파했는데, 신유박해때 국경 부근까지 도망갔다가 되돌아와 의금부에 자수했다. 1801년 새남터에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했다.
최필공
궁중 전의 집안에서 태어난 중인으로 배교를 거부해 사형당할 뻔했으나 정조의 배려로 목숨을 건졌다. 정조가 평안도 심약관으로 임명했으나 다시 신앙생활을 하다가 1801년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최인길
중국어 역관 출신으로서 주문모의 거처를 마련했으며 정조 19년(1795) 주문모를 체포하려 오자 주문모 행세를 하다가 포도청에 잡혀가 장살당했다.
권철신
이익의 학통을 이었는데 많은 제자들이 따라서 녹암계를 형성했다. 양명학과 천주교를 수용하는 등 열린 가슴을 갖고 있었고, 정조 때 천주교를 버렸다고 주장했으나 1801년 천주교 신자라는 이류로 체포되어 옥사했으며, 시신은 이가환과 함께 기시되었다.
권일신
권철신의 아우이자 안정복의 사위이다. 양명학을 연구하다가 이벽의 권유로 천주교 입교하고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진산사건 때에 체포되자 80세 노모로 인해 마음이 흔들려 회오문을 지어 올렸는데, 유배 도중 고문에 의한 상처로 객사하였다.
최창현
서울 출신으로 중인 역관이다. 이벽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했으며 1791년 신해옥사로 양반들이 배교하자 조선천주교회의 주도적 인물로 활동하다가 신유옥사 때 사형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