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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新羅) 사람 최항(崔伉)은 자(字)가 석남(石南)인데,
애인이 있었지만 그의 부모가 금해서 만나지 못하다가 몇 달 만에 그만 덜컥 죽어 버렸다.
그런데 죽은 지 여드레 만의 한밤중에 항은 문득 그의 애인 집에 나타났는데
그 여자는 그가 죽은 뒤인 줄도 모르고 좋아 어쩔 줄을 모르며 맞이해 들였다.
항은 그 머리에 석남(石南)꽃 가지를 꽂고 있었는데, 그걸 나누어서 그 여자한테 주며
"내 아버지 어머니가 너하고 같이 살아도 좋다고 해서 왔다."고 했다.
그래 둘은 항의 집까지 가서 항만 잠긴 대문을 보고 혼자 먼저 담장을 넘어 들어갔는데
밤이 새고 아침이 되어도 웬일인지 영 다시 나오질 않았다.
아침에 항의 집 하인이 밖에 나왔다가 홀로 서 있는 여자를 보고
"왜 오셨소?"하고 물어 여자가 항과 같이 왔던 이야기를 하니 하인은
"그 분 세상 떠난 건 벌써 여드레나 되었는데요. 오늘이 묻을 날입니다.
같이 오시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했다.
여자는 항이 나누어 주어 자기 머리에도 꽂고 있었던 석남꽃 가지를 가리키며,
"그 분도 이걸 머리에 틀림없이 꽂고 있을 것이다."고 했다.
그래, 그런가 안 그런가 어디 보자고 항의 집 식구들이 두루 알고 따지게 되어
죽은 항이 담긴 널을 열고 들여다보게 되었다.
아닌게 아니라 항의 시체의 머리에는 석남꽃 가지가 꽂혀 있었고
옷도 금시 밤 풀섶을 거쳐 온 듯 촉촉이 젖은 그대로였고
벗겼던 신발도 다시 차려 신고 있었다.
여자는 항이 죽었던 걸 알고 울다가
너무 기가 막혀 금시 숨이 넘어가게 되었다.
그랬더니 그 기막혀 숨 넘어가려는 바람에
항은 깜짝 놀라 되살아났다.
그래 또 서른 핸가를 같이 살아 늙다가 갔다. < 대동운옥(大同韻玉) 중에서 >
- 위 기사는 「수삽석남(首揷石枏)」이란 이름으로『수이전』에 실려 있던 것인데,
『수이전』은 지금 전하지 않고 이 설화만 『대동운부군옥』제8권에 전해온다.
이를 소재로 서정주는「소연가(小戀歌)」란 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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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업연구가 임주훈 선생에 의하면,
석남은 한라산 정상 바위에 붙어 자라는 희귀한 나무인데
관목 중 제일 키가 작고 나무보다 큰 흰색의 꽃이 6-7월에 줄기에 한 개씩 핀다고 한다.
'암매'(岩梅)라고도 하는 돌매화나무는 세상에서 가장 키 작은 나무로 다 자란 키는 2cm이다.
사나운 바람과 안개 속에서 겨울을 지새고 뜨거운 햇살이 쏟아지는 6월, 돌매화는 순백색의 꽃을 피워낸다.
청초하게 피어난 꽃잎이 마치 매화를 닮아서 돌매화란 이름을 얻었다는 것이다.
지구상에서 돌매화나무과에는 오직 이 돌매화만이 존재하며
한라산 정상의 오래된 바위틈에서 새벽마다 맺히는 차가운 이슬을 머금고 자라는 돌매화나무는 이곳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돌매화가 남획되어 지금은 개체수가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환경부에서 지정한 멸종위기 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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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면서 피어나는 꽃.
석남꽃.....
석남꽃은 중부이북의 높은 산에서 자라는 노랑만병초를 두고 부르는 이름이라고 합니다.
윤후명 산문집 `꽃`과 `삼국유사 읽는 호텔`에 석남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글을 읽어 보면 작가는 노랑만병초를 보며 `걸어 나오는 저 사랑의 화신. 놀랍게도
그는 천 년을 단숨에 건너 뛰어 바로 내 앞에 서 있었다.` 라고 합니다.
삼국유사 속의 꽃을 관련된 몇 편의 시와 함께 감상하시며 죽어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오는 멋진 신라남자를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小戀歌 / 서정주
머리에 석남(石南)꽃을 꽂고
내가 죽으면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
너도 죽어서…
너 죽는 바람에
내가 깨어나면
내 깨는 바람에
너도 깨어나서…
한 서른 해만 더 살아볼거나
죽어서도 살아나서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
한 서른 해만 더 살아볼거나
석남꽃 꺾어 / 송수권
무슨 죄 있기 오가다
네 사는 집 불빛 창에 젖어
발이 멈출 때 있었나니
바람에 지는 아픈 꽃잎에도
네 모습 어리울 때 있었나니
늦은 밤 젖은 행주를 칠 때
찬 그릇 마주칠 때 그 불빛 속
스푼들 딸그락거릴 때
딸그락거릴 때
행여 돌아서서 너도 몰래
눈물 글썽인 적 있었을까
우리 꽃 중에 제일 좋은 꽃은
이승이나 저승 안 가는 데 없이
겁도 없이 넘나들며 피는 그 언덕들
석남꽃이라는데......
나도 죽으면 겁도 없이 겁도 없이
그 언덕들 석남꽃 꺾어 들고
밤이슬 풀 비린내 옷자락 적시어 가며
네 집에 들리라
석남꽃 / 문정희
새벽 두 시인데 잠을 이룰 수가 없어요
나 아무래도 잘못한 것 같아요
저녁 때 사거리에서
청담사거리를 묻는 노인에게
그만 봉은사거리를 가리키고 말았어요
그 노인은 지금쯤 어디를 헤매고 있을까요
청담사거리를 찾다 지쳐
수 천 마리 귀뚜라미들을 데리고 쓰러져 있을까요
외줄에서 떨어진 줄광대처럼
산발한 어둠 속에 떨고 있을까요
정육점의 불빛처럼 충혈된 밤
사방에서 컹컹 내지르는 짐승소리를 들으며
모래바람 날리는 자동차들 속에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아
성직자처럼 기도를 올리고 있을까요
죽어서도 석남꽃 머리에 꽂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온 신라의 남자처럼
벌써 죽어 아름다운 관에 누워 있을까요
내 불면의 가지 끝에 검은 눈썹 달이
갈매기처럼 끼룩거리고 있어요
세상에는 왜 이리 길을 묻는 사람이 많을까요
여보, 나침판과 지도는 모두 어디에 있지요
- Daum 블로그 '붓꽃각시가 노는 뜰(http://blog.daum.net/bom129)'에서 퍼왔습니다.
첫댓글 초 저녁 잠에 잡힌지 한참 되였습니다.눈 뜨자 컴 열어 석남꽃 볼수있을까? 역시 바람재는 신통한 내 궁금증 풀어주는 곳간 입니다.좋은 시.사진.그리고 친절한 해설까지.감사 합니다.
렛테님 덕분에 '수삽석남'의 내용을 확실히 알게 되었고 좋은 시들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석남꽃이 노랑만병초이든 암매(돌매화나무)이든 사랑의 전령사임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두 분 덕택에 좋은 글과 시 모두 즐감하고 갑니다....
넵.
감사합니다.
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