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의 교회, 북한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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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상품으로 전시된 베를린장벽.
여러 독일인들이 필자에게 설명했듯, 동독의 교회들은 교회의 활동을 제약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들로 박해를 가했던 공산정권에 맞서 전통적인 기독교신앙을 지키고 전파하기 위해 참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교회들은 동독의 공산정권에 굴복하지 않은 최후의 중요한 섬[島]들이었다. 달리 표현해, 동독사회 전체를 철저히 공산통치에 종속시키려던 동독정권의 권력행사는 교회 앞에서 일정한 한계에 직면했던 것이다.
서독의 교회들은 그 사실에 용기를 얻었다. 동독에 그러한 교회들이 남아 있었기에 서독의 교회들은 기독교의 정신인 화해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동독의 교회들을 상대로 여러 구상들을 제의했으며, 동독의 교회들은 그 구상들이 동독정권에 의해 수용되도록 비록 제한적인 범위 안에서나마 노력했다. 동서독 교회들의 시도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통독을 향한 독일 내부의 기반이 형성됐던 것이다.
한국의 많은 교회들도 일찍부터 남북의 화해와 상생을 위해 그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이 사실과 관련해, 이 연구소를 방문한 전 숭실대학교 철학과 교수 이삼열 박사가 7월 6일에 특강을 했다. 괴팅겐대학교에서 철학박사를 받아 독일어에 능통하고 독일교회가 수행한 역할에 대해서도 밝으며 그 스스로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한반도의 통일운동에 참여했던 이 교수는 남북한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한국의 교회들이 전개한 선지자적 발언들과 실천운동들을 감동적으로 설명했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북한의 교회들이 과연 지난날 동독의 교회들이 수행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공간을 갖고 있는가 조용히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날 동독의 여러 상황들이 북한의 그것들과 달랐듯, 동독의 교회들과 북한의 교회들 사이에도 차이가 크다. 쉽게 말해, 동독의 공산정권은 기독교 교회들을 전면적이면서도 철저하게 통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북한의 독재정권은 기독교 교회들에 자율적 공간을 조금만큼이라도 허용하지 않았다.
다시 주제로 돌아오기로 한다. 독일인들은 통독 20주년을 맞이한 오늘날의 시점에서 통일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해 필자는 한마디로 단순화시켜 대답할 수 없다. 앞으로 더 깊이 연구하기로 하겠다. 다만 현재의 시점에서 다음과 같이 개괄적으로 대답하기로 하겠다.
첫째, 독일인들은 동독인이었건 서독인이었건 가리지 않고 대체로 통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통일에 만족해한다. 특히 서독인들의 경우, 초대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의 이념과 지도력을 높이 평가한다. 그는 통일을 서두르지 않고 서독 그 자체를 하나의 ‘완결된 국가’로 키우고자 노력했다. 구체적으로 말해, 서독을 민주화된 복지국가로 성장시키고 서방국가들과 친하게 지내는 평화국가로 성장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이 정책이 통독의 기초를 닦은 것이었다고 서독인들은 칭송한다.
아데나워와 관련해 칭송되는 점은 그가 동독의 공산국가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동독의 이른바 독일민주공화국을 도덕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신념에서 이 국가가 붕괴한 뒤 서독의 독일연방공화국으로 흡수될 때 독일의 통일은 성취된다는 입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했던 것이다. 독일의 통일은 실제로 그러한 방향으로 성취됐다.
아데나워와는 대조적으로 동독의 실체를 인정하는 전제 위에서 동독을 비롯한 동유럽공산국가들에 대해 과감히 접근하는 이른바 동방정책을 전개했던 총리 빌리 브란트의 비전에 대해서도 독일인들은 높이 평가한다. 그가 통독의 꿈을 안고 동방정책을 전개함으로써 동서독관계에서 전환의 기초를 놓았다고 칭송한다. 그들은 특히 브란트가 동방정책을 전개하면서 원칙을 중시했음을 강조한다. 동독과 비밀거래를 한다든지 또는 의회를 경시한 채 총리부가 일방적으로 정책을 집행한다든지 따위의 불법적 및 탈법적 방법을 쓰지 않았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동방정책을 집행함에 있어서 언제나 법을 존중하고 의회의 동의를 확보했음을 그들은 강조했다.
여기서 잠시 상기하게 되는 것은 아데나워와 브란트의 소박한 무덤이다. 아데나워는 지난날 서독의 수도인 본에 위치한 자신의 집 부근의 천주교공동묘지에 묻혀 있다. 묘지의 넓이와 크기는 다른 시민들의 그것들과 똑같다. 브란트는 베를린의 시민공동묘지에 묻혀 있다. 묘지의 넓이와 크기는 역시 다른 시민들의 그것들과 똑같다. 그 무덤들 어디에도 거창한 기념비는 세워지지 않았다.
이것은 다른 집권공산당의 지도자들이 보인 행태와 크게 대조된다. 옛 소련을 비롯한 공산국가들은 거대하면서 화려한 국립묘지를 건설하고 심지어 그 지도자들을 미라로 처리해, 국민들로 하여금 성인을 추모하는 것과 같은 예배를 올리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마지막으로 독일인들은 헬무트 콜 총리의 지도력을 높이 평가한다. 콜 총리의 날카로운 정세판단과 과감한 대외정책수행이 결국 급변하던 국내외정세 속에서 통독의 꿈을 실현시켰다는 것이었다. 특히 콜이 소련에 대한 경제지원을 약속하고, 그 일환으로 동독에 주둔하던 소련군의 본국으로의 귀환 및 본국에서의 정착에 소요되는 경비를 모두 독일이 부담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으로 하여금 독일통일을 지지하게 만들었음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최근에 팔순을 넘긴 콜은 국가원로로 조용히 생활하고 있다.
둘째, 독일인들은 독일의 지방분권형 정치체제가 통독의 충격을 완화시켜주었다고 강조한다. 독일은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통일의 역사가 짧다. 오늘날 우리가 독일이라고 부르는 나라의 강역에는 여러 독립적 왕국과 공국 등이 존재했었으며 그것들은 모두 상당한 자율적 통치권을 보유하고 행사했었다. 그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독일은 지방분권주의를 발전시켜왔던 것인데, 동서독이 하나로 통일돼도 자신들의 자율성은 크게 제약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통독에 대해 반대하거나 비판하지 않게 만들었다고 독일 학자들은 필자에게 설명했다.
셋째, 지난날 동독에 속했던 사람들로 나이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통일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는 비율이 높다. 오늘날의 현실이 지난날의 그것보다 미흡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날 동독에 속했던 사람들로 40대 이하의 연령층에서는 통일에 대한 만족의 표시가 상당히 높다.
숙제는 심리적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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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 學 俊 ● 1943년 중국 선양(瀋陽) 출생 ●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 미국 켄트주립대 대학원 석사(정치학) ● 미국 피츠버그대 대학원 박사(정치학) ●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 제12대 국회의원 ● 대통령비서실 공보수석비서관 ● 단국대 이사장 ● 인천대 총장 ● 세계정치학회 부회장 ● 한국신문협회 부회장 ● 동아일보 회장 ● 現 동아일보 고문 | |
넷째, ‘지리적’ 통합은 이뤄졌으나 ‘심리적’ 통합은 미흡한 것 같다. 지난날 동독에 속했던 사람들 가운데 자신들은 통일독일에서 ‘2등 국민’이 됐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적잖게 남아 있다. 다른 한편으로, 지난날 서독에 속했던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통일 이후 옛 동독의 재건을 위해 통일정부가 재정적 지원을 많이 베푼 까닭에 자신들의 경제적 부담이 늘어났고 독일 경제가 부담을 안게 됐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앞으로 ‘심리적 통합’을 어떻게 진전시키느냐가 중요한 과제로 제기된다.
통일독일에서 나타난 이러한 심리적 간격은 우리로 하여금 한반도통일의 미래상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동서독은 서로 사이에 전쟁을 겪지 않았다. 이에 비해 남북한은 37개월에 걸친 전쟁을 겪었으며 그 이후에도 군사적 대결을 유지했다. 그 결과 남북 사이의 불신은 참으로 깊다. 그럴진대, 남북통일은 남북 사이의 심리적 조정기간을 넉넉히 두면서 급하지 않은 속도로 추진돼야 하지 않을까?
(끝)
신동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