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내가 일곱 살 되던 그 해 어느 날 아버지께서 심부름을 시키셨다.
“덕길 아! 창동에 가서 담배 좀 사 오너라!”
“예, 아버지”
창동 까지는 나의 걸음으로 30분 정도 걸어가야만 가게가 나왔다. 건빵봉지 만큼 크기의 봉지에 담뱃가루가 가득 담긴 봉초 담배 한 갑과, 청자라고 적힌 담배 한 갑을 털레털레 들고 걸어왔다. 필터 없는 담배는 피우면 바로 연기가 목구멍을 타고 넘는다. 그 만큼 몸에 해롭다. 그래도 아버지는 필터 없는 담배를 파이프에 끼워 피우곤 하셨다. 파이프 담배를 물고계신 아버지가 어린 나의 눈에는 셜록 홈즈로 보였다. 아버지는 심부름 시킨 지 언제인데 이제야 오느냐고 화를 내셨다. 난 속으로 ‘자전거가 있었으면 금방 다녀올 텐데’ 라며 자전거 없는 서러움을 속절없이 돌멩이에다 화풀이를 하였다. 발로 퍽 걷어찬 돌멩이는 송아지의 뒷다리에 맞았는지 갑자기 송아지가 펄쩍 뛰었다. ‘저 소를 타 보면 안 될 까? 카우보이들은 말도 탄다는데?’ 나는 담배를 사오며 카우보이도 되었다가 목동도 되어보았다. 저 광활한 들판을 종횡무진 누비는 그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한가로운 날들이다. 그 당시만 해도 유치원이 없어서 우리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기만 하면 되는 나이다. 내 이름 석자 쓸 줄 알고 들어가는 것은 그야말로 자식 교육에 철저하신 분들이 아니고서는 생각도 할 수 없다. 학교 들어가기 전에 아버지께서는 농협에서 가지고 온 달력을 한 장 툭 뜯었다. 달력은 총 13장으로 되어있다. 첫 장은 “00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쓰여 있고, 다음 장을 넘기면 올 해 12월의 달력이 있고, 그 다음 장부터는 내년도 달력 12장이 담겨있다. 달력 제일 위 칸에는 굵은 글씨로 월이 표시되어있고, 왼쪽에는 항상 그 해가 무슨 해인지 표기가 되어있다. 그 아래는, 요일과 날짜가 새겨진 한달 분의 날짜가 새겨지고, 작은 글씨로는 음력이 적혀있다. 아래쪽에는 세로줄로 다시 한 달의 날짜와 메모 칸이 새겨져 있다. 아버지께서는 흔들리는 필체로 깨알 같은 글씨를 몇 글자씩 적어놓으셨다. 1월 1일 : 내 생일 (아버지 생신임), 1월 15일 : 아랫동네 부안 양반 아들 결혼식 정읍 행복예식장 오후 1시 , 1월 30일 담배 수매하는 날 등등, 아버지는 1년의 농사와 각종 경조사를 세심하게 적어놓으셨다.
달력 제일 마지막은 항상 ‘이평 농협협동조합 전화 00-0000’ 이었다. 아버지는 제일 첫 장을 툭 뜯어서 글씨가 없는 빈 공간으로 달력을 뒤집었다. 달력은 힘없이 아버지의 팔놀림을 따라 휙 넘어졌다. 대나무로 만든 큰 자를 가지고 오신 아버지는 달력에 네모 칸을 치셨다.
“아버지! 뭐하실라꼬 그런데요? 시방?”
“응. 너 내년이믄 학교들어가야제. 학교 가믄 가나다라는 알아야 할 것 아녀? 그니 깬 내가 여기다 써 줄텡게 잘 보고 외어라 알겄냐?”
눈이 펄펄 내리는 겨울 어느 날, 토방마루 아래에서 개가 짖었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아마 우리 강아지도 창호지 얼기설기 붙인 초가집 안방에서 연일 가갸 거 겨’만 외우는 나의 낭랑한 목소리를 은연중에 외워버렸나 보다. 그런데, 강아지는 항상 멍멍 글자만 외웠으니 여기까지가 강아지의 한계는 아닌지 모른다. 멍멍 소리만 내던 강아지가 성장하여 제법 큰 어미 강아지로 둔갑을 할 때쯤인 이듬해 3월 강아지는 이제 한글을 다 깨우쳤는지 멍멍 소리 대신 컹컹 소리도 곧잘 하곤 하였다. 걸어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 개는 ‘깨갱’ 소리도 하였다. 부뚜막의 고양이도 덩달아 넘어진 개의 폼이 우스운지 연신 입을 벌리며 히죽히죽 웃으며 야옹글자를 외웠다.
난 학교에 입학을 하였고, 학교에서는 아버지 이름을 써 보라는 받아쓰기가 있었다. 내 나이 세 살 때, 남의 밭에 일 나가신 엄마 따라 밭고랑에서 놀고 있는 나에게 이웃집 아저씨가 오셔서 하는 말이 “야 꼬마야! 느네 아빠 이름이 뭐냐?” 그 때만 해도 난 아버지 이름을 몰랐다. 아무리 기억해 내려 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모른다는 소린 하기 싫어서 어디서 들은 풍얼은 있었는지 난 서둘러 “울 아버지 이름은 김 아버지에요”라고 말해버렸다. 동네 아줌마들은 나의 말을 듣고 얼마나 우스웠는지 배꼽을 잡고 난리가 났다. 이 사건이 얼마나 큰 사건이었는지 지금도 시골에 내려가 어머니를 뵈오면 가끔 그러신다. “그 때 김 아버지라 하던 네가 이렇게 컸구나, 그 때 참말로 징허게 웃었었는데 아이고 호호호”
그런 경험 때문인지 난 1등으로 아버지 이름을 착 써서 제출하였다. 선생님은 당연히 날 칭찬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칭찬의 말은 도통 기억에 없고, 맨 날 야단맞은 일들만 기억에 남으니 이상하기만 하다.
모내기가 한창이던 봄 어느 날 아버지께서는 자전거를 놓아두시고 양간다리로 모를 찌러(못자리한 논의 벼를 한 움큼씩 뽑아 묶는 행위)가셨다. 난 기어이 일을 내기로 작정을 하였다. 딴 애들 다 타는 자전거를 나만 못 타면 이 나의 체면이 말이 아니라는 걸 그때도 알았나 보다. 아버지의 자전거는 짐 자전거였다. 뒤에 짐받이가 커다랗고, 보통 자전거보다 훨씬 무거운 자전거라서 넘어지면 혼자 일으켜 세우기도 버거웠다. 그 무거운 자전거를 질질 끌고 학교 운동장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언덕 쪽에 자전거를 세우고 타 보았다. 당연히 나는 쓰러지고 말았다. 자전거에 올라타면 페달이 발에 닿지 않았다. 페달이 위로 올라올 때까지는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없이 페달을 힘껏 굴렸다. 한바퀴 돌고서야 다시 페달이 위로 올라오면 그때 다시 힘껏 페달을 밟았다. 조금만 언덕이 있어도 자전거는 힘없이 푸욱 고꾸라졌다. 무릎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피가 줄줄 흘렀다. 운동장 모래땅에 찢어진 무릎이 쓸려 흘리는 피사이로 모래가 섞여 나왔다. 팔꿈치도 이미 까지고 생채기가 나서 마치 나는 전쟁터에 나가 용감히 싸우다 결국 적군의 포탄에 맞아버린 상이군인처럼 절뚝거리며 자전거를 끌고 집으로 와야만 했다. 자전거는 핸들이 휘어져서 아버지 오시면 그 불호령을 어찌 견뎌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였다. 다행이 형이 먼저 자전거를 보고 똑바로 펴 주셨다. 형이 한마디 거들었다.
“자전거가 네 키에 안 맞으면 옆으로 타 보렴, 이 형도 그렇게 배웠단다.”
다음날부터 나는 자전거를 안장에 올라타지 않고, 옆으로 다리를 넣어 타기 시작하였다. 자전거의 중심과 나의 중심이 일치해야만 자전거가 쓰러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처음엔 어렵더니 며칠을 연습한 후로 나는 서서히 자전거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한 손으로 안장을 잡고, 옆으로 자전거를 타는 것은 묘기 대행진 하는 것처럼 보는 이들로 하여금 스릴을 심어주었다. 한 달 후, 난 자전거를 위로 타기로 결심을 하였다. 처음엔 자전거를 받혀놓고 위로 타서 자전거를 굴렸다. 타긴 탔는데 속도를 낼 수 없어 중심을 못 잡았다. 할 수 없이 방법을 바꾸어, 자전거를 옆으로 타다가 일정한 속력이 붙었을 때 위로 오르기로 마음을 먹었다. 힘차게 자전거를 굴린 다음 평평한 길이 나왔을 때 난 살금살금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 재빨리 양손으로 자전거 핸들을 잡았다. ‘자전거 아래만 보지 말고 멀리 봐야 한다. 는 진리를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난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 가끔 형이 일찍 오면 뒤에서 자전거를 잡아주기도 하였다.
그렇게 자전거를 배우던 가을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코스모스는 학교 진입로를 따라 울긋불긋 키 자랑을 하고 있었다. 큰 형님께서 나보고 자전거 뒤에 타라고 하셨다. 난 거리낌 없이 자전거 뒤에 탔다. 20여 미터나 갔을 까? 자전거는 이미 속력이 붙어서 달리고 있었는데, 난 그만 커다란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아 얏.아……아….악…. 내 바 발…….발………’
내 발목은 이미 자전거 뒷바퀴 회전하는 체인 속에 물려 살점이 찢겨지고 있었다. 뒤에 탈 때는 다리를 옆으로 벌려야 하는데, 난 그걸 몰랐던 것이다. 기차표 검정 고무신에 흥건하게 핏물이 고였다. 닭똥 같은 굵은 눈물방울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다. 고통의 끝은 어디까지인지 생각할 수도 없이 아픔은 가슴 저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다리를 부여잡고 도로 위를 나 뒹구는 내 모습 속에서 전투 중 부상을 당한 상이용사의 모습이 자꾸만 부각되는 이유를 나는 몰랐다.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때 유행했던 텔레비전 드라마 ‘전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넌지시 추측을 해 보곤 한다. 그 사건 이후로 난 자전거를 타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발의 상처가 완전히 아문 그 해 겨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함박눈이 펄펄 내렸다. 하얀 눈이 소리 소문도 없이 시골들녘을 덮어나갔다. 들에도, 길에도, 나무에도, 지붕에도, 한 아름씩 눈을 안고 세상은 고요 속에 행복을 안고 잠이 들려 하고 있었다. 갑자기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덕길 아! 창골 가서 막걸리 한 병만 달아놓고 오렴! 자전거 가지고 갔다 와! 조심허구 알겄냐?”
동지섣달 기나긴 밤. 술 없이 온 밤을 버티기엔 아버지는 어딘가 무척이나 허전하셨나 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외상으로 달아놓고 오라 시는 말씀에 풀이 죽은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자전거를 몰았다. 그냥 눈 위를 걸었을 때 들리는 발자국 소리는 ‘뽀드득’ 이었다. 아무도 건너가 보지 않은 눈길 위를 스르르 자전거 한대가 미끄러져갔다. 분명 뽀드득 이 아니었다. 눈은 자전거 쳇바퀴에 스르르 밟혀 ‘지이익 지이익’ 소리를 토해냈다. 분명, 페달이 발에 닿아 힘껏 밟으면 강한 하중이 바퀴에 실려 눈은 ‘저어벅 저어벅’ 소리가 났다. 속도를 내 보았다. 눈은 이제 더 이상 ‘저어벅’ 소리를 내지 않았다. 눈은 이제 바람소리를 내기 시작 하였다. ‘쉬 이익 쉬이이이이이이…….’한 손은 막걸리 한 병을 들고, 한 손은 핸들을 잡고, 눈 덮인 시골 들길을 달리고 또 달렸다.
사립문을 깡충거리는 개는 컹컹거리지도 않았다. 마치, 이제는 ‘가나다라’ 든 ‘가갸거겨’든 다 아는 듯 코만 연신 눈 속에 묻으며, 한사코 내 자전거 뒷바퀴에 차이는 눈보라를 맞으며 내 달렸다. 멀리 서 눈보라 울음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오늘 밤에는 폭설이 내리려나 보다.
첫댓글자전거!!! 라 지금도 못타긴 마찬가지지만 자전거 못타는 20살에 친구들과 구미에서 김천까지 자전거 타고 가다 사고난 기억이 내 생애 최고 큰 사고였습니다. 큰 부상이 아니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장면입니다. 차가 깨진 아저씨의 호의가 지금도 생생하고 찾을 수만 있다면 그때 그 아저씨를 찾고 싶네요.......^^
에고... 정말이지 힘들게 배운거 같아요. 그래도 혼자 힘으로 배웠다는게 뿌듯한데 울 아들 인라인 스케이트도 저 혼자 배우더라고요. 그게 자랑스러운가 봐요 가끔 이야기 하더군요.. 울 아들 자전거는 제가 가르켜주었어요. 울 아들 그것도 고마운지 또 이야기 합니다. 대견한 아들인데 ㅎㅎ 갑자기 아들자랑을 ㅎㅎ 머쓱
첫댓글 자전거!!! 라 지금도 못타긴 마찬가지지만 자전거 못타는 20살에 친구들과 구미에서 김천까지 자전거 타고 가다 사고난 기억이 내 생애 최고 큰 사고였습니다. 큰 부상이 아니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장면입니다. 차가 깨진 아저씨의 호의가 지금도 생생하고 찾을 수만 있다면 그때 그 아저씨를 찾고 싶네요.......^^
시인님은 어린나이에 자전거를 배울려고 눈물 나는 노력과 아픔이 있었네요......키가 조금만 더 자란후에 배워도 늦지 않을 것을 평생을 탈 수 있는 자전거를 그 어린나이에는 왜 그토록 배우고 싶었을 까요 . 도전정신이 강한 시인님인가 봅니다.......잘 계시죠?
에고... 정말이지 힘들게 배운거 같아요. 그래도 혼자 힘으로 배웠다는게 뿌듯한데 울 아들 인라인 스케이트도 저 혼자 배우더라고요. 그게 자랑스러운가 봐요 가끔 이야기 하더군요.. 울 아들 자전거는 제가 가르켜주었어요. 울 아들 그것도 고마운지 또 이야기 합니다. 대견한 아들인데 ㅎㅎ 갑자기 아들자랑을 ㅎㅎ 머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