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의 고혼이 서린 곳, 영월
나이 어린 몸으로 천 리 타관에 귀양와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한양 땅을
그리는 답답한 심회를 짝해줄 이 뉘 있으랴.
세조의 권력욕으로 희생 당해
단종은 1441년(세종 23년) 문종의 아들로 태어나 8세에 왕세손이 되고, 10세에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부왕이 신약(身弱)하여 불과 재위 2년 만에 세상을 떠나니,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야 했다.
문종은 천품이 관인효우(寬仁孝友)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문무를 중히 여겨 신민의 앙망을 받았으나, 사직을 받들기엔 명이 허락하질 않았다. 문종의 서거와 어린 단종의 등극으로 피비린내 나는 협잡과 살육은 시작되었다.
상왕의 명을 받아 단종을 보필해 국가 대계를 굳건히 하려던 황보인(皇補仁), 김종서(金宗瑞), 남 지(南智) 등 삼정승이 수양대군의 일세에 밀려 피살되면서 대세는 기울고 단종의 신변에 암운이 짙어졌다.
성삼문(成三問), 신숙주(申叔舟), 정인지(鄭麟趾) 등도 단종을 협찬하라는 부탁을 유언으로 들었건만, 시운을 탓하기엔 이미 역부족이라, 단종 즉위년에 좌의정 정창손(鄭昌孫),이조 판서 한명회(韓明澮),권 남(權擥) 등에 의해 일격에 보필신들이 제거당했다. 이에 수양대군은 아우 안평대군 마저 강화로 귀양 보내 죽인 후, 친히 영의정에 올라 실질적 병마대권을 잡게 되니, 이 사건이 계유정란(癸酉靖亂)으로 1453년의 일이다.
계유난으로 실권을 한손에 장악한 수양은 이어 위압으로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찬탈하여 세조가 되니, 단종 재위 3년만의 일이다.
왕권의 정통성을 보전하고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대의를 명분으로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등이 중심이 되어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다, 김 질(金珥)의 배반으로 참형을 당하매, 세조 원년의 일로 이들이 세칭 사육신 충신들이다.
이에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추방되고 비련의 최후를 맞을 때까지 애달픔을 간직한 채, 영영 불귀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해 가을 금성대군이 경상도 순흥에서 다시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노산군은 서인 신분으로 폐출되고 말았다, 인간만사 악이 우선하는지라, 간악한 인간의 매몰함은 세조로 하여금 끝내 사약을 내리게 하여, 10월 스무 나흔날, 단종은 한과 원으로 응어리진 채,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17세의 약관으로 왕권 피탈 2 년 만에 관풍원에서 생의 막을 내렸던 것이다.
단종이 첫 유배지 청령포(淸冷浦)에서 관풍헌 객사로 옮겨져 죽음을 당하게 된 것은, 당시 청령포 일대에 홍수의 범람이 있었기 때문이 었다.
단종의 피눈물 어린 자규루
나이 어린 몸으로 천 리 타관에 귀양와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한양 땅을 그리는 답답한 심회를 짝해줄 이 뉘 있으랴.
관풍헌 인근 자규루에 올라 자신의 외로운 신세를 한 편의 '자규사(子規詞)'로 읖었으니, 전편이 누각에 기록되어 있다.
두견새 슬피 우는 달 밝은 밤에
수심을 안고 누각에 기새었노라.
피나게 우는 네 소리, 내 듣기 최롭구나
네 울음 없으면 내 시름도 없을 것을
이 세상 괴로움 많은 사람들아
춘삼월 자규루엘랑 오르지 마소.
月白夜蜀魂
含愁情依樓頭
爾悲我聞苦
無爾聲無我愁
寄語世上苦勞人
愼莫登春三月子規樓
이 자규루는 세종 10년 당시, 군수로 있던 신원근(愼元近)이 창건하여 누명을 매죽루(梅竹樓)라 하였으나, 그 후 단종께서 자주 누에 올라 자규시까지 지었다 하여 후인이 자규루라 불렀다는 것이다.
관풍헌과 자규루는 시내 중심지 주택가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관계로, 간선도로에서 불과 10여 미터의 근접한 거리이나, 온통 건물로 가리워져 부근에서 한 동안 헤맬 만큼 찾아내기가 힘들다.
자규루 주위가 정돈되지 못하고 방치 속에 퇴락해 가고 있음은 조상의 얼을 받들고 문화재를 보호하자는 등, 언행이 일치하지 못하는 우리의 사고가 여기서 너무도 이율배반이었음을 느끼게 된다. 구호 뿐인 행정과 후손들의 무관심 속에 단종의 애혼이 또 한번 호곡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침울한 나그네의 뇌리엔 자규의 울음이 떨쳐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