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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뿌리아름역사동아리 원문보기 글쓴이: 麗輝
B.C 2세기때 쓰였다고 전해지는『이아(爾雅)』를 보면 이미 ‘가는 쓴 도다(檟苦荼也)’라는 문구가 등장하고 있어 오래전부터 차가 가(檟)로 불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이아주소(爾雅住疏)』에는 ‘촉인들이 가를 고도라고 불렀다.’고 적고 있어 촉인(蜀人)이라 하는 특정 지역의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다. 이 촉(蜀)이 바로 오늘날 사천성 지역을 의미하는 지명이다. 또한『다경』에는 양집극이 ‘촉의 서남쪽 사람들은 차를 일러 설(蔎)이라고 부른다.’1)라는 문구가 나오고 있어 촉 지방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차에 대한 명칭이 여러 가지로 불릴 정도로 차에 대한 정보도 많았고, 나름의 차문화가 일찍부터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진대(晉代)에 쓰여진『화양국지(華陽國志)』「파지(巴志)」를 보면 이미 주(周) 무왕(武王)이 주지육림(酒池肉林)으로 유명한 상(商) 주왕(紂王)을 토벌할 때, ‘파촉지사(巴蜀之師)’의 지지를 받았으며 이때 파촉 지역에서 주나라 왕실에 바치는 공물로 찻잎이 들어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2). 그렇게 봤을 때 중국의 음다 풍속은 지금으로부터 3,000여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다. 하지만 그 이후로 찻잎과 관련된 공식 기록이 없기 때문에 이를 보편적인 현상으로 보기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적어도 당시 중화문화권에 포함되지 않았던 촉 지역에서 음다의 풍속이 오래전부터 보편화되었다는 것만은 알 수 있겠다.
물론『다경』에는 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3)가 가장 먼저 차를 마셨다고 적고 있다. 그는 B.C 2,517~2,475년까지 재위했던 삼황오제시대를 연 역사의 첫 번째 인물로서4) 오늘날 ‘차의 신’이자 ‘차의 시조’로 숭앙받는 인물이다. 실제 차는『신농본초(神農本草)』에 ‘신농씨가 일찍이 100가지 풀을 맛보면서 하루에 72가지 독을 만났는데 차를 얻어 그 독들을 해독했다.’는 기록이 내려오는 만큼 신농씨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듯 한데 역대 중국측 문헌에서 그와 관련된 자세한 언급을 하고 있지는 않다.『다경』에서도 그가 가장 먼저 차를 마셨다고만 적고 있을 뿐이며 한국측 문헌인 초의선사의『동다송(東茶頌)』에서도 역시 신농씨에 대한 언급은 없다5).
그렇게 봤을 때 염제 신농씨가 생존했다고 하는 B.C 25~26세기까지 음다의 풍속이 올라갈지는 증빙할만한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의문의 여지가 있겠다. 마찬가지로 주 무왕이 공물로 차를 받았던 B.C 12세기에 대한 편년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주 무왕에게 촉 지방에서 공물로 바친 차에 대해서 알아보는데 증빙할만한 자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황하 일대에서 하(夏), 상(商), 주(周) 삼대(三代)라고 불리는 세 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중화문화권을 형성해나갈 무렵, 장강 상류에는 고촉국(古蜀國)이라고 불릴만한 독자적인 남방문화권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고로 이 고촉국과 삼대와의 교류 관계를 살펴본다면 차문화에 대해서도 어떤 실마리가 풀리지 않을까 한다.
이미 소병기(蘇秉琦)에 의해 중국문명의 기원과 형성과정에 대한 다원설(多元說)이 제기된 바 있으며 그는 중국 신석기문화의 전체적 틀을 수립하기 위해서 구(區) ․ 계(系) ․ 유형론(類型論)에 입각한 연구방법론을 수립했다6). 그는 동정호(洞庭湖) 주변과 사천분지(四川盆地)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을 ‘서남부(西南部) 구역’으로 설정했는데 고촉국은 여기에 해당한다 할 수 있다. 중국문화의 편년을 보면 초기 신석기시대가 B.C 8,000~5,000년경이며 앙소문화의 등장은 B.C 5,000년 무렵으로 볼 수 있다7). 그렇게 봤을 때 B.C 2,500여 년에 형성되기 시작한 고촉문화는 서남부 구역의 신석기문화를 계승하여 성립된 것으로서 이후 하은주 삼대가 끝날 무렵까지 무려 1,500년 가량을 중화문화권과 독자적인 존재로서 교류한 셈이 된다.
1931년 사천성 지역의 농민이 도랑의 물을 퍼내다가 각종 옥기(玉器)를 발견하였고 이는 곧 골동품들 뿐만 아니라 학자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으니 이가 곧 광한옥기(廣漢玉器)로 불리며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고촉국의 유물이었다. 이후 1986년 1호갱과 2호갱이 발견되면서 훗날 ‘삼성퇴(三星堆)’라고 불리게 된 중국 고고학상 위대한 발견이 이뤄진 것이다. 중국 근대의 저명한 학자 왕국유(王國維)는 지하에서 출토된 유물의 고고학 자료와 문헌의 기록을 모두 중시하고 그것들을 비교 연구하는 이중증거법(二重證據法)을 제창하였는데 삼성퇴에 대해서도 그 방법론이 그대로 적용되었다.
고촉국의 역사 문헌 기록은 간략하고 모호하여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는데 기록에 따르면 한대 양웅(揚雄)의『촉왕본기(蜀王本紀)』에 의하면 ‘魚鳧王田于湔山’, 즉 ‘어부왕이 전산에서 밭을 일구었다.’고 하여 고촉국의 어부왕 시절 이미 농경을 행하고 있었으며8) 두우왕때는 백성들에게 농사에 종사하도록 하여 촉 지역은 이미 농업이 발전 단계에 이르러 경제와 사회 생활이 상당한 수준에까지 발달하였다고 한다. 즉, 삼성퇴 유적은 어부왕 시절의 유적으로서 이후 두우왕 시대때 중요한 도읍지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는 것이다.
『화양국지』를 보면 잠총(蠶叢), 백관(柏涫), 어부(魚鳧), 두우(杜宇), 개명(開明) 등 역대 고촉국의 왕들이 등장한다9). 이들이 전설상의 인물인지, 아니면 실존인물인지 이견이 있지만 현재 중국 학자들은 삼성퇴 유적에서 발견된 상나라 초기(B.C 18~17세기) 고촉국 도성의 성벽을 두고 어부가 촉 지방을 통일한 후에 축조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흙을 틀에 넣고 다져서 담의 외곽선을 만드는 식의 분단항축법으로 축조된 성벽은 오늘날 일부만 확인이 되고 있는데 성터의 면적이 2.6㎢로서 상나라 초기 수도인 정주(鄭州)의 상성(商城)과 규모가 비슷할 정도로 거대하다. 성벽의 축조시기는 상나라 초기로 보여지며 서주 초기까지 사용하다가 고촉문화가 점차 성도(成都)의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유적지는 점차 폐기되는데 일부에서는 5대 개명왕때 엄청난 홍수의 피해 때문에 천도가 이뤄졌다고 파악하기도 한다10).
『다경』에서 육우는 당대 전국의 중요한 차산지를 산남(山南), 회남(淮南), 절서(浙西), 검남(劍南), 절동(浙東), 검중(黔中), 강남(江南), 영남(嶺南)등의 8대 차구(茶區)로 나누고 각각의 차구에서 생산되는 차의 품질을 상 ․ 중 ․ 하 ․ 우하(又下)의 네 등급으로 분류하여 각기 상세한 품평까지 곁들이고 있다. 그 중 검남차구(劍南茶區)가 바로 사천성 일대로서 육우는 팽주(彭州)의 것을 상품으로, 면주(綿州)와 촉주(蜀州)의 것을 차품으로, 공주(邛州)와 아주(雅州), 노주(瀘州)의 차를 하품으로, 미주(眉州)와 한주(漢州)의 차를 우하품으로 평하였다.
검남차구는 차의 발원지 가운데 하나로서 성도 일대의 고차구(古茶區)처럼 당대에 빠르게 발전한 곳이다. 검남차구 중 한주는 고대에 북방으로 가는 길과 통해있는 전량상의 요충지로서 예로부터 ‘촉과 싸우려면 반드시 먼저 한주를 쳐야한다(爭蜀必先破漢州).’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공주와 아주, 노주는 고대 차마(茶馬) 교역의 중심지였으며 공주와 아주는 더욱이 운남(雲南), 서장(西藏)으로 가는 요지이기도 했다11).
당대에 이 곳에는 작은 농가의 작은 차원을 제외하고도 장수규(張守珪)와 같은 대지주들이 운영하는 차원도 있었다12). 이들 지역은 하나같이 성도를 중심으로 한 사천분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는 곧 주 무왕에게 공물로 찻잎이 도착했다면 분명 이 일대에서 생산된 차였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고촉국의 차 생산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섣불리 속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추정할만한 근거가 있다.
먼저 당대의 기후를 보면 수 문제 개황 20년(600) 이후, 전한 말엽 이래 장장 600여 년에 이르는 한랭건조 기후가 끝난 시점이다. 당 고조(高祖) 무덕(武德) 원년(618)부터 소선제(昭宣帝) 천우(天祐) 4년(907)까지 약 300여 년간 중화문화권의 기후는 극히 온난다습하였다. 심지어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은 횟수가 무려 19차례 이상으로 중국 역사상 각 왕조 중에서 최고치를 자랑한다13). 그처럼 온난다습했기 때문에 육우가『다경』을 쓸 무렵의 당나라는 차 생산에 있어서 최적화된 상태였다고 그런 시기에 이와 같은 책이 나온 것 또한 결코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유소민(劉昭民)은 중국사에서 온난기가 몇차례 계속되었다고 했는데 당대는 제3차 온난기에 해당했으며 제1차 온난기는 바로 하, 상, 그리고 주나라 초기였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 서안 동쪽 교외 15㎞ 떨어진 지점의 반파촌 앙소문화 유적지에서 고고학자들은 대량의 죽서(竹鼠) 유해를 발굴했다. 죽서는 오늘날 장강 이남과 화남의 온난다습한 삼림에서만 살고 있는 것으로서 방사성 탄소 원소(C14) 측정법으로 반파촌에서 출토된 목탄, 과일 껍질, 죽서유해 등을 측정한 결과, B.C 5,000년전 서안 일대에서 죽서가 살았음이 확인되었다14).
오늘날 황하 유역과 장강 유역의 기온 분포를 보면 전자는 14~15℃이며 장강 유역이 16~18℃인데 5천년 전에는 황하 유역의 평균 기온이 현대보다 2~3℃ 가량 높았음을 알 수 있다15). 심지어 산동성 성자애(城子崖)의 흑도문화 유적지에서는 남방 동물이라 할 수 있는 노루는 물론 다량의 대나무, 그리고 대나무 마디 모양을 모방한 도기와 청동제 및 옥제 술잔까지 발견된 바 있어 당시 화북 일대가 대나무가 자랄 정도의 온난다습한 기후였음을 알려준다16).
또한『서경(書經)』을 보면 ‘우 임금께서 토지를 구획하시고 산에 따라 나무를 베시며 높은 산과 큰 내를 정하셨다.’는 문구가 나와17) 하나라때 황하 일대가 강우량이 많고 초목이 아주 무성했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황하 일대가 그 정도의 기후를 가지고 있었다면 장강 유역의 남방문화권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했을 때 당시 고촉국 내에 무성하게 차나무가 자라고 있었을테니 당시 촉인들이 이미 차를 음용했다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1959년 하남성 언사현에서 거대한 왕궁 유적이 발견되면서 초기 청동기시대 문화인 이리두문화(二里頭文化)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오늘날 하나라의 도성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삼성퇴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이리두문화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양 문화권간의 교류 사실이 확인되었다. 즉, 도기로 제작된 조미용 그릇(盉), 술잔(觚), 제기(豆), 항아리(罐) 등의 기물들 모두 작고 밑바닥이 평평한 형태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양자의 형태에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하나라의 문화가 촉 지방에 영향을 준 것이라고 하지만 이는 일방적인 영향으로만 볼 수만은 없다. 이리두문화에서 그러한 유물들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곧 그 이전부터 양자가 서로를 인식하고 있었고 교류했었다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했을 때, 차문화에 대해서도 이미 양자가 오래전에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하나라 대신 상나라가 들어선 뒤에도 기후는 여전히 온난다습했다. 위트포겔(Karl August Wittfogel)은 은허에서 출토된 각종 갑골문자(甲骨文字)를 갖고 상 말에서 주 초(B.C 1,400~1,100년)에 이르는 300여 년간의 기후 상황을 연구하였다. 그 결과, 1~5월까지 평균 10회 이상의 강우와 관련된 기록을 발견할 수 있었고 은허에서 출토된 물사슴과 죽서, 물소, 인도코끼리 유해를 갖고 황하 유역이 당시까지 온난다습했다고 주장하였다18).
그런 따뜻한 기후 속에서 상나라에서는 황하 유역임에도 불구하고 이모작이 가능했으며 수확 시기 또한 2월에 조생벼를, 7~8월에 만생벼를 수확하여 오늘날에 비해 1개월 이상 수확시기가 빨랐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상나라 때에도 역시 연평균 기온이 오늘날보다 2℃ 이상 높았으며 1월 평균기온은 오늘날보다 3~5℃ 이상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19).
하지만 하~상대에는 자연 비료를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으므로 한 곳의 토지를 경작하다가 지력이 소모되면 다른 곳의 경작지로 이동하여 농사를 지었다. 이러한 종류의 농업 방법을 ‘작유농(作遊農)’ 또는 ‘유경(遊耕, shifting cultivation)’이라고 칭하였으며 하~상대에 여러번 천도해야만 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서주시대때 생산 기술의 발전과 농업 생산력의 제고에 따라 ‘정경(定耕)’의 비율이 높아질때까지 이런 현상은 계속되었는데20) 그렇다고 했을 때 하~상대 황하 유역에서 이모작이 행해졌다 하여 그 생산량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높지는 않았던 듯 싶다.
이 시기에 이르러 고촉국과 상나라의 교류는 더욱 심화되었는데 삼성퇴에서 발견된 각종 청동제 긴 항아리(尊)나 술독(罍) 등은 상대 청동기와 그 형태가 매우 유사함을 확인할 수가 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고촉국이 일방적으로 상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고촉국은 주도적으로 상나라의 문화를 수용할 줄 알았고, 당시에는 단순한 물적 교류뿐만 아니라 인적 교류까지도 성행했었다.『화양국지』를 보면 당시 노팽(老彭)이라는 촉나라 인물이 은나라의 태사(太師)로 있었다고21) 적고 있는데 중국 역사학자 고힐강(顧頡剛)은 촉 사람이 상나라 조정에서 관리된 자가 노팽 하나에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라 추정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고촉국은 오랜 시간 촉 지방에서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하면서도 중화문화권과 대등한 존재로 존속했는데 수많은 촉인들이 상나라에서 활약했다는 것은 그만큼 촉인들의 지식이나 능력이 뛰어났음을 알려주는 것이며 이는 곧 고촉국의 문화적 수준에 대해서 짐작하게 해 주는 부분이다. 특히 삼성퇴의 거대한 도성은 초기 상나라의 그것과 규모상 별반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도 당시 고촉국이 어느 정도 수준의 국가였는지 잘 알 수 있는데 그렇다 했을 때 고촉국과 상나라 사이에 있었던 수많은 교역 중 차 역시 교역되지 않았을까 하는 조심스런 추측을 해 본다.
또한 섬서성 일대는 고촉국과 상의 문화가 혼재되어 복합적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고촉국 입장에서는 섬서의 남부가 곧 촉의 북쪽 국경이며, 상나라로 볼 때 이 지역은 상의 서쪽 땅이었다. 그런 국경 지대였기 때문에 양측의 문화가 혼재된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런 문화적 교류는 이후 주대까지 이어지는데 특시 섬서성 보계(寶鷄) 지역에서 발굴되는 서주 시기의 어국묘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주거지와 묘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하나같이 상 ․ 주 시기의 전통적인 중화문화, 서남 지역의 고촉문화, 서북 지역의 강족(羌族)과 저족(氐族)의 원시문화인 사와문화(寺洼文化)까지 유기적으로 혼합된 양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고촉국은 예로부터 누에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으로서『산해경(山海經)』22)에는 양잠(養蠶)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고23), 실제 촉 지역에는 잠녀(蠶女)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었다24). 고대 촉 땅에는 청의신(靑衣神)을 제사지내는 전통이 있는데 기록에 의하면 청의신은 백성을 교화하고 누에를 치는 ‘잠총씨(蠶叢氏)’라고 한다. 잠총의 시기는 고촉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로 고촉의 씨족 부락에서부터 고촉왕국의 건립은 잠총 때 시작된다고 한다.
문헌에 의하면 고대 촉족(蜀族)의 최초 명칭은 촉산씨(蜀山氏)인데 이후 잠총씨가 촉산씨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건국하여 왕을 칭한 후에도 여전히 촉이라는 명칭을 씨족과 국가의 명칭을 썼던 것이다. 실제『설문(說文)』에는 촉(蜀)자를 ‘뽕나무에 누에가 있다(葵中蠶)25)’이라고 풀어놓고 있다고 한다26).
그런데 이 뽕나무는 뿌리(桑根), 뿌리껍질(桑白皮), 여린 가지(桑枝), 종자(桑椹), 잎에서 나오는 즙(桑葉汁), 목재 부분을 태워서 나온 재(桑柴灰), 나무껍질에서 나오는 즙(桑皮汁)을 모두 약용할 정도로 귀한 식물이다. 동상엽(冬桑葉), 상상엽(霜桑葉),철선자(鐵扇子) 등으로 불리는 뽕잎은 10~11월 서리가 내린 후 따서 햇볕에 말려 음용하는데 맛과 성질은 쓰고 달며 차갑다27). 그 맛이 마치 찻잎과 같은데 단순히 뽕나무를 누에 기르기에만 쓰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차로 만들어 마셨을 가능성이 높다.
즉, 당시 촉 지방에서 뽕나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었다면28) 분명 식용으로서의 뽕나무에 주목했을 것이고 뽕잎을 차로 마셨다는 의미는 곧 차나무 활용에 대해서도 추측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준 셈이라 본다. 이미 산서성(山西省) 앙소문화 유적에서 반쯤 잘린 누에가 출토된 바 있었고 절강성에서는 집누에로 만든 사직물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렇게 봤을 때 신석기시대 이전에 이미 야생누에를 이용해 사직물을 생산했고 집누에는 B.C 2,700여년 전에 사육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29). 이런 고고학적 근거를 살펴본다면 중국에서 오래전부터 뽕나무를 활용했고 이는 비단 누에 사육에만 국한되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겠다.
고로 주 무왕에게 헌납했던 촉 지방의 찻잎이 뽕잎이었는지 아니면 정말 찻잎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촉 지방에서 이미 차를 달여 마셨다는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실제 삼성퇴에서 출토된 각종 청동준(靑銅尊)이나 청동뢰(靑銅罍) 등을 보면 무엇인가를 마셨을 때 썼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것이 어떤 액체로 이뤄진 것이라면 차 종류 중 하나가 그 안에 담겨졌을 가능성도 없지만은 않은 셈이다. 고로 차나무의 재배지와 차나무의 식물학적 특성 등을 살펴봤을 때 촉 지방에서 B.C 2,500여년 전에 차나무에 대해 인지하고 음용했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고 볼 수 있겠다.
중국의 기후는 주대 전기(B.C 1,122~1,000)에도 역시 이전과 같이 온난다습하였기에 여전히 밀림지대에 살만한 동물들이 황하 일대에서 살고 있었고 겨울 12월에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에 꽃이 필 정도로 따뜻한 기후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주대 중엽 이후(B.C 1,000년)가 되면 한차례 한랭기후가 찾아왔는데『죽서기년(竹書紀年)』을 보면 장강(長江)과 한강(漢江)이 얼어 많은 소와 말이 얼어죽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때가 주 효왕 13년(B.C 897)인데 장강과 한강은 오늘날 겨울에 결코 얼지 않는 지역이다. 당시 장강과 한강에 대한 기록과 꽃가루 화석에 대한 연구 결과 당시의 연평균기온이 오늘날보다 0.5~1℃ 가량 낮았다고 추정하고 있다.
주대 후기 한랭건조한 기후는 주 여왕 31년부터 선왕, 유왕, 평왕까지 약 100여 년간 계속 한재(旱災)를 일으켜 주나라를 파탄 지경에 빠뜨렸으니 이 시기 견융(犬戎)의 침입으로 동주가 멸망하고 평왕이 동쪽으로 도읍을 옮긴 것 또한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30). 그리고 이 시기 촉 지역의 고촉국 역시 쇠퇴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중화문화권의 쇠퇴와 제1차 소빙하기(Little ice-age)의 영향 때문으로 보인다. 더불어 촉 지방에서 산출되는 각종 특산품 생산과 교역에도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고 보이는데 차도 어느 정도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는 못 했을 것이다31).
당시 고촉국과 삼대는 육로와 수로로 교류했으리라 보는데 육로로는 절벽에 구멍을 뚫어 그 위에 나무를 걸쳐 길을 만든 잔도(棧道)와 철삭으로 된 적교(吊橋)인 삭교(索橋)가 있었지만 그 험난하기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였을 것이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수로가 더 활발하게 이용되었으리라 보는데 중화문화권에서 촉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회수를 경유해 장강으로 들어선 후에 동정호를 지나 강을 거슬러 올라가 촉으로 향하는 교통로가 이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길 말고도 한중(漢中) 지역을 경유하여 농(隴)과 촉 사이를 통과하는 또 다른 경로도 있었다. 서주 초에 주 무왕이 상 왕조의 주를 토벌하기 위해 서쪽 땅 여덞 나라의 우두머리와 목야(牧野)에서 회맹을 하고 난 뒤에 고촉국 사람과 말들이 이 경로를 통해 정벌에 참여했는데『화양국지』에는 당시 촉의 영역을 언급하면서 이미 대규모의 물자가 그러한 교통로를 통해 이동했음을 알려주고 있다32). 더불어『사기(史記)』「화식열전(貨殖列傳)」에는 이미 상나라와 주나라 시기에 옹과 촉 사이에 상업의 왕래가 활발했다33)고 적고 있어 고촉국이 상과 그 뒤를 이은 주와도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덧붙여 삼성퇴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살펴보면 청동상에서는 서방문화권 혹은 그 이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알 수 있으며 상 문화권 내에서 출토되는 1만개가 넘는 엄청난 숫자의 조개 껍질은 태평양 혹은 인도양 등지에서 수입된 것임을 알려주어 당시 문화권들 간의 교류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 밖에 사천성 지역의 고대 석관묘에서 바륨(Ba)이 포함되지 않은 서방문화권에서 제작된 유리 구슬이 출토된 것 등을 보면 단순히 우리가 생각하는 교역의 범위가 아닌, 원시적인 실크로드(Silk-road)에 대해 추론할 수 있을 정도다34).
특히 차나무의 기원지로 꼽히는 운남, 귀주, 사천을 핵심으로 하는 중국 서남부 일대는 많은 하류의 발원지로서 운남의 원강(沅江)은 월남 홍하(紅河)의 상류이며 난창강(瀾滄江)은 라오스 메콩강의 상류이고, 노강(怒江)은 미얀마 살온강의 상류, 용천강(龍川江)은 미얀마 이라와디강의 상류이다. 아마 이들 강을 따라 형성된 각종 수로와 해상항로를 통해서 고촉국은 이른 시기부터 서방문화권 혹은 남방문화권 내 타 지역, 즉 남아시아와 태평양 일대까지도 문화 교류의 장(場)으로 여기고 활약했을 것이다.
이처럼 고촉국을 중심으로 하여 오늘날의 사천성 일대는 당시 문화 교류의 중심지로서 그 곳에서 타지역으로 전해진 문화 중에는 분명히 그 지역만의 독특한 차문화가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앞서 뽕나무를 통해 비교 검토하기는 했지만 얼마든지 차나무를 비롯한 여러 식물들을 음용할 줄 알았던 촉인들이었기 때문에 차문화를 언급하는데 있어 고촉문화는 반드시 언급되어야만 하는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한다.
실제로 중국 서남부 일대에서 퍼져나간 차는 각지에 변종을 만들며 오늘날까지 번성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수로를 따라 각지로 퍼져나간 차는 비단 중화문화권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남아시아 각지에도 그 자손을 퍼뜨렸다. 그리고 앞서 살펴봤던 여러 강들의 양안에는 수많은 야생 차나무가 분포하고 있는데 오늘날 세계에서 차를 가장 많이 수출하는 스리랑카 뿐만 아니라 일본, 인도네이사 등지에도 적지 않은 차나무가 재배되고 있으며 이는 모두 중국 혹은 남아시아 각국의 항구를 통해서 수입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1)『茶經』上「一之源」, “揚執戟云 蜀西南人爲茶曰蔎.”
2)『華陽國志』券1「巴志」第2, “周武王伐紂, 實得巴蜀之師, 著乎.《尚書》巴師勇銳, 歌舞以淩商人, 商人倒戈. 故世稱之曰, 「武王伐紂, 前歌後舞」也. 武王既克商, 以其宗姬於巴, 爵之以子. 古者, 遠國雖大, 爵不過子. 故吳楚及巴皆曰子. 其地, 東至魚復, 西至僰道, 北接漢中, 南極黔涪. 土植五榖. 牲具六畜. 桑、蠶、麻、苧, 魚、鹽、銅、鐵、丹、漆、茶、蜜, 靈龜、巨犀、山雞、白雉, 黃潤、鮮粉, 皆納貢之.”
3) 왕웨이 외 著 / 박점옥 譯, 2001,『손에 잡히는 중국 역사의 수수께끼』, 대산출판사, p.90~105. 저자들은 염제와 신농씨가 동일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신농’이라는 단어는 전국시대에 생겨났으며 그 당시의 저작인『국어』와『좌전』의 기록을 보면 염제와 신농씨를 직접적으로 연관시키지 않고 있으며 두 사람의 발상지도 신농씨는 후베이 쉐현(水縣), 염제는 산시의 웨이수이(渭水) 유역으로 다르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세본』이라는 책에서부터 동일시되다가 사마천의『사기』를 거쳐 동한시대 반고의『한서』에는 염제와 신농씨를 완전히 동일인으로 여기게 되었다 한다. 그래서 오늘날 염황(炎皇)이라는 단어를 일반적으로 쓰지만 엄밀히 말해서 권력의 강약이나 시기적인 관계로 봤을 때 황염(皇炎)이 옳다고 한다.
4) 김대성, 2002,『금문의 비밀』, 컬처라인, p.46~66. 그는 중국학자 駱賓基의『金文新攷』(산서인민출판사 ․ 1987) 등을 참고하여 한국사에 맞게 새롭게 금문을 해석하고 있다.
5) 김대성, 2006,『초의선사의 동다송東茶頌』, 동아일보사, p.299~301. 저자는 초의선사가 신농씨가 ‘차의 신’이라는 사실과 ‘동이족의 시조’라는 사실을 몰랐을 리 없었지만 구태여 밝히지 않았을 것이라고 적고 있다. 즉, 조선시대 상국이었던 明과 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염제 신농씨가 차와 연관되어 이해되는 것이 상당히 후대에 의도적으로 시행된 것이라면 그 부분에 대해서도 재고해볼 필요는 충분히 있다고 본다.
6) 蘇秉琦, 1981,「關于考古學文化的區系類型問題」『文物』제5기. 저자는 앙소문화와 하남용산문화 사이의 문화적 계승관계 및 馬家窯, 紅山, 大汶口文化 및 良渚, 齊家文化 등의 주변지역 신석기문화를 중원지역의 앙소문화 혹은 하남용산문화의 지방형태로 파악하는 당시의 견해에 비판을 가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발견되는 신석기시대문화를 독립된 6개 區域으로 나눌 수 있으며 비록 지역간 발전단계는 불균형적이지만 개별지역마다 각기 독립적인 文化淵源과 특징 및 발전단계를 이루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구분한 6개 구역은 대체로 (1) 燕山 남북과 長城地帶를 중심으로 하는 北方: (2) 山東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東方: (3) 關中(陝西), 晋南, 豫西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中原: (4) 太湖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東南部: (5) 洞庭湖 주변과 四川盆地를 중심으로 하는 西南部:: (6) 鄱陽湖와 珠江三角洲로 연결하는 南方으로 구획했다.
7) 崔夢龍, 2004,「인류 문명 발달사」『동북아 청동기시대 문화 연구』, 주류성, p.341.
8)『華陽國志』券3「巴志」第1 “魚鳧王田於湔山.”『화양국지』에도 똑같은 문구가 등장하고 있다.
9)『華陽國志』券3「巴志」第1 “周失紀綱, 蜀先稱王. 有蜀侯蠶叢, 其目縱, 始稱王. 死, 作石棺、石槨. 國人從之. 故俗以石棺槨為縱目人冢也. 次王曰柏灌. 次王曰魚鳧. 魚鳧王田於湔山, 忽得仙道. 蜀人思之, 為立祠於湔.”
10) 黃劍華 著 / 이해원 譯, 2002,『삼성퇴의 황금가면』, 일빛, p.23~27.
11) 치우지핑 著 / 김봉건 譯, 전게서, p.320~324.
12)『太平廣記』券37, “九隴居人長守珪 家甚富 茶園在陽平化仙居山內 每歲召采茶人力百餘輩 男女傭工者雜之園中.” 해석하자면 “구롱에 사는 장수규는 집안이 대단히 부유했지만 차원이 있는 양평에서 신선으로 화하여 산속에서 살았다. 매년 차 따는 사람 백여명을 불렀는데 남녀 일꾼들이 차원에서 함께 일을 했다.”는 의미다. 즉, 사천성에 살던 巨富가 거대한 차원을 조성해 차를 생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라 할 수 있으니 사천성 일대에 장수규와 같은 대형 차원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13) 劉昭民 著 / 朴基水 ․ 車瓊愛 譯, 2005,『기후의 반역-기후를 통해 본 중국의 흥망사』,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p.59. 저자가 정리한 중국의 이상기후 통계 자료표에 의하면 겨울 ․ 봄에 눈과 얼음이 없었던 햇수는 춘추전국시대에 8번, 전한대에 2번, 남북조시대에 2번, 당대에 19번, 북송대에 14번, 남송대에 15번, 명대에 7번으로서 당대 기후가 어느 정도로 온난다습했는지 알 수 있겠다.
14) 徐中舒, 1930,「殷人服象與象之南遷」『中央硏究員歷史語言硏究所集刊』제2본.
15) 劉昭民 著 / 朴基水 ․ 車瓊愛 譯, 전게서, p.63~65.
16) 姚寶猷, 1935,「中國歷史上氣候變遷之一新硏究」『中山大學語言歷史硏究所彙刊』12月.
17)『書經』「禹貢」, “禹敷土 隨山刊木 奠高山大川.” 해석하자면 “우 임금께서 토지를 구획하여 다스리시고 산에 이르러 나무를 베어 길을 내고 높은 산과 큰 내를 정하셨다.”는 의미로서 전체적으로 우 임금이 중화문화권을 다스리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 배경 묘사가 흡사 온난다습한 열대우림에 대한 묘사와도 같다.
18) 이태진, 1996,「소빙기(1500~1750) 천변재이 연구와 조선왕조실록-grobal history의 한 章」『歷史學報』149, 歷史學會, p.204.
19) 胡厚宣, 1945,「氣候變遷與殷代氣候之檢討」『甲骨學商史論叢續集』, 成都齊魯大學國學硏究所.
20) 류제헌, 2004,『중국 역사 지리』, 문학과지성사, p.122.
21)『華陽國志』券12「序志」第1, “孔子曰:「述而不作, 信而好古, 竊比於我老彭.」則彭祖本生蜀, 為殷太史.” 해석하자면 “공자가 말하길 ‘옛 것을 이어받아 전하되 함부로 창작하지 않고 확고한 신념으로 옛 것을 좋아하는 이런 나를 적이 우리 노팽에게 견주노라’라고 하였는데 팽조는 본래 촉에서 태어났으며 은나라의 태사였다.”는 의미다. 즉, 촉인 중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중화문화권 등 다른 문화권에서 활약할 수 있었으며 이는 당시 고대 문화권들 사이의 활발한 교류상황을 알려주는 것이라 하겠다.
22)『山海經』은 중국 고대 역사지리서인데 편찬자와 편찬시기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전통적인 견해대로라면 하나라 우임금과 그의 신하 백익이 국토를 정리하고 각지의 산물을 파악한 결과를 편찬한 것이라 하지만 이 견해는 거의 신뢰성이 없다. 편찬시기에 대해서는 서주 초기(B.C 12세기)부터 가장 늦게는 위진시대(A.D 3~4세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그 지리적 범위도 燕을 중심으로 한 주변 지역, 楚人이 쓴 楚國 주변, 고촉국인이 쓴 蜀國 주변까지 다양한 주장들이 있다. 한편으로는 동이계의 신화적 내용을 담은 고서로 보는 견해도 있는 등 아직 일관된 의견이 없기 때문에 그 기록을 인용하는데 있어 조심성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23)『山海經』「海外北境」, “歐絲之野在大踵東 一女子跪據樹歐絲.” 해석하자면 “구사의 들은 대종의 동쪽에 있는데 한 여인이 무릎을 꿇고 나무에 기대어 실을 토해내고 있다.”는 의미이다. 즉, 養蠶과 연관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24)『太平廣記』券479, “蠶女舊迹 今在廣漢.”. 해석하자면, “잠녀의 옛 자취가 지금의 광한에 있다.”는 의미다.
25)『爾雅』에 보면 葵를 뽕나무 桑으로 쓰고 있다. 葵는 해바라기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桑과는 다른 식물이다.
이창복, 2006,『원색 대한식물도감』2, 향문사, p.352. 해바라기는 국화과 식물로서 아메리카산 1년초이며 그 종자로 기름을 짜서 식용으로 하거나 종자 자체를 식용으로 하고 있다. 뽕나무와 종이 다른 것은 물론 잎이나 가지 등의 모양, 개화기 등이 모두 다른데 그럼에도 이와 같은 설명이 가능한 것은 당시 식물학적 지식이 오늘날처럼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지만 그보다는 지역마다 다른 식물의 명칭 사용 혹은 의미하는 상징성 등이 비슷했기 때문일 가능성도 없지만은 않다.
26) 黃劍華 著 / 이해원 譯, 전게서, p.133~134.
27) 자향한의원(http://www.jahyang.net).
28)『天工開物』券2「衣服」〈葉料〉, “又有柘葉三種, 以濟桑葉之窮. 柘葉浙中不經見, 川中最多.” 해석하자면 ‘또 구지뽕나무(산뽕나무)에는 3가지가 있는데 뽕잎이 부족할 때 보충용으로 쓴다. 구지뽕나뭇잎은 절강에서는 잘 볼 수 없으나 사천에 가장 많다.’ 라는 뜻이다. 구지뽕나무는 뽕나무과의 갈잎작은큰키나무로서 황해도 이남의 산기슭 양지쪽이나 마을 근처에서 자라고 있으며 뽕잎이 모자랄 때 이것을 代用한다고 적고 있다. 즉, 사천성 일대에는 타지역에서는 잘 나지 않는 이와 같은 독특한 식물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비단 뽕잎만 활용하던 다른 지역에 비해 보다 풍부하게 이런 것들을 활용할 수 있었던 셈이다.
29) 박선희, 2002,『한국 고대 복식-그 원형과 정체』, 지식산업사, p.133~134.
30) 劉昭民 著 / 朴基水 ․ 車瓊愛 譯, 전게서, p.80~87.
31) 권태원, 1980,「土山茶와 茶禮考」『호서사학』8·9집, 호서사학회, p.12. 이미 중국에서 주대에 '물(水)', 우유류(牛乳類)를 총칭한 '장(漿)', '식혜(醴 혹은 甘酒)', '빙수(凉)', 산매탕(酸梅湯), 즉 매실차인 '의(醫)', '미음' 이렇게 6가지 식음료가 있었다고 하면서 당시 차는 일반적으로 음용되었던 것은 아닌 듯 하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주대에 차에 대해서 몰랐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단순히 보편적인 식음료가 아니었던 듯 싶다. 혹은 갑작스런 한랭기후를 맞아 촉 지방에서의 차 생산에 심대한 타격이 있었고 차문화의 지속적인 전파가 불가능해졌기에 저런 결과가 생겨난 것이 아닐까 한다.
32)『華陽國志』券3「蜀志」第1, “周顯王之世, 蜀王有褒漢之地. 因獵谷中, 與秦惠王遇.” 해석하자면, “주나라 현왕치세때 촉왕이 포와 한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계곡에서 수렵을 하던 중 진나라 혜왕을 만났다.”이다.
『華陽國志』券3「蜀志」第1, “以褒斜為前門,” 해석하자면 “포야로 앞문을 삼았다.”이다.
『華陽國志』券3「蜀志」第1, “功秦至雍.” 해석하자면 “진나라를 공격하여 옹에 이르렀다.”이다.
즉, 당시 촉나라는 포와 한의 땅을 차지하고 있고 그 국토가 포야와 옹에 이르렀는데 포야란 포곡과 야곡을 의미하며 옹은 현재 섬서성 봉상현 남쪽 보계(寶鷄)를 의미한다. 즉, 당시 촉의 영토가 단순히 사천지역에만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섬서성 일대에까지 폭넓게 미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기록들이라 하겠다. 게다가『蜀王本紀』에는 “촉왕이 만여명을 이끌고 동쪽으로 포곡에 수렵을 나갔다.”는 기록까지 남기고 있어 잔도 등의 교통로가 대규모 물자를 수송하는데 사용되었음을 알려주기도 한다. 이들 교통로를 따라 촉 지역의 문화는 중화문화권 각지로 뻗어나갔을 것이다.
33)『史記』券129「貨殖列傳」第69, “及秦文、(孝)[徳]、繆居雍,隙隴蜀之貨物而多賈 … 巴蜀亦沃野 … 然四塞,桟道千里,無所不通,唯褒斜綰轂其口,以所多易所鮮.” 해석하자면 “진 문공, (효)덕공, 목공이 옹에 도읍하였는데 이 곳은 농, 촉의 물자가 교류되는 요지였고 상인들도 많았다. … 파촉 또한 비옥한 땅이다. … 연이어 사방이 가로막혀 있어 잔도를 천리에 걸쳐 만들어 이를 통해서 통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포야의 통행로에서는 사방의 도로를 이곳 출입구로 묶어 집중시킴으로써, 여유 있는 물자와 부족한 물자가 교환되었다.”라는 의미이다. 주석에는 “「在漢中.」索隠言褒斜道狹,綰其道口,有若車轂之湊,故云「綰轂」也.”이라 하여 “포야의 통행로가 굉장히 험난하고 협소한 도로여서 곡식을 실은 마차가 진나라를 다니기에 힘들었기 때문에 그 길을 두고 ‘綰穀’, 즉 ‘얽어 맨 곡식’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34) 정수일, 2005,『씰크로드학』, 창비, p.219.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연구자들은 주대와 춘추시대 전기의 b적에서 출토된 파이앙스 구슬류(珠玉)를 유리로 착각하여 중국 유리의 제조 편년을 서주 시대까지 올려잡았으나 1927년 주대의 고성 낙양현 금촌에서 만들어진 유리 제품을 확인한 결과, 그 제조연대는 전국시대 말기(B.C 3세기 말)로 추정되었다. 이 유리들은 서아시아의 소다유리와는 달리 바륨을 다량 함유한 납 유리로서 중국의 독창성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고로 고촉국에서 발견된 바륨이 포함되지 않은 유리는 타 문화권의 산물이 틀림없으며 이는 곧 실크로드의 한 단면을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