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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성경 암송을 통해 누리는 유익
성경 암송을 잘하기 위해서는 성경 암송의 목적과 함께 그 유익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고상한 목적으로 어떤 일을 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상한 목적과 함께 자신이 하는 일의 유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일에 관심을 갖게 마련입니다. 유익이 많을수록 하는 일에 자극을 받습니다. 열심을 가지고 그 일을 하게 됩니다.
고상한 목적과 유익이 함께 만날 때 열정이 불탄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다윗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그가 골리앗 장군을 쓰러뜨리게 된 이유 중에는 상을 받기 위함도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무엘상 17:26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다윗이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느냐”
다윗은 “블레셋 사람, 골리앗을 죽이면 어떤 대우를 받을 수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골리앗을 향해 의분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윗의 마음 속에 두 가지가 함께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 골리앗과 싸운다는 고상한 목적과 그 일을 이루고 나서 자신이 누리게 될 유익을 함께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상한 목적과 유익이 함께 만날 때 우리가 하는 일은 뜨거운 열정으로 불타게 됩니다. 열정에 불을 붙여 주는 기름이 바로 고상한 목적과 누리게 될 복입니다. 어떤 일은 당장에는 유익이 되지 않지만, 두고두고 유익이 되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교육이 그렇습니다. 교육이란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개발하는 훈련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개발에 투자하는 일은 정말 소중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개발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릉ㄹ 더욱 잘할 수 있고, 풍성한 삶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매일 기초를 다지는 성경 암송을 하면서 놀라운 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저의 구주로 영접했던 고등학교 1학년 때 시작한 성경 암송이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제가 받은 복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 암송을 통해 누릴 수 있는 유익은 무엇일까요?
1. 깊은 묵상을 통해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성경 암송은 우리를 깊은 묵상의 세계로 인도해서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합니다. 깊은 묵상은 성경 암송에서 비롯됩니다. 암송한 말씀을 깊이 묵상할 때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려면 우리 내면에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 암송이란 우리 내면에 말씀을 담는 행위입니다. 말씀에 생각을 심고, 마음에 심으려면 성경을 읽고 암송해야 합니다.
‘묵상’은 ‘반추’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소가 풀을 먹은 다음에 꺼내어 다시 씹어 먹는 반복 행위를 반추라고 합니다. 말씀 묵상을 하려면 먼저 소가 풀을 먹는 것처럼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말씀을 우리 내면에 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꺼내어 소가 다시 씹어 먹듯이 반추하는 괴정을 거칠 때 말씀을 소화할 수 있습니다.
음식을 먹는 것보다 음식을 소화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음식 자체가 힘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음식은 소회되어야 우리 안에서 능력이 됩니다. 에너지가 됩니다. 기운이 되고 생명이 됩니다. 소회된 음식이 피를 만들어 내고, 피가 곧 생명을 공급해 주는 것입니다. 말씀 암송은 음식을 먹는 것과 같고, 말씀 묵상은 말씀을 소화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 암송을 많이 할수록 깊은 묵상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씨에 비유하셨습니다.(눅 8:11) 말씀은 작은 씨처럼 역사합니다. 씨앗은 가능성으로 충만합니다. 잠재력으로 충만합니다. 생명으로 충만합니다. 씨앗 속에는 풍성한 미래가 담겨 있습니다. 작은 사과 씨앗 속에는 수천 그루의 사과나무가 담겨 있습니다. 작은 호박 씨앗 속에 수천 개의 호박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 로박 하나 속에 담긴 수많은 씨앗을 생각해 보십시오. 생명의 신비는 씨앗 속에 담겨 있습니다.
씨앗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씨앗을 소중히 여깁니다. 씨앗을 생명처럼 여깁니다. 씨앗을 소유한 사람은 미래를 소유한 사람입니다. 말씀을 암송한다는 것은 미래를 위해 충만한 씨를 소유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부요는 말씀의 부요함에 있습니다. 그 내면에 얼마나 많은 말씀을 소유하고 있느냐가 하나님의 사람의 영적 부요를 결정합니다.
말씀으로 양을 먹이는 목자는 그가 소유한 말씀이 풍성할 때 진정으로 풍성하다 말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양을 먹일 수 있으며, 양들을 어마나 건ㄴ강하게 양육할 수 있느냐는 목자가 말씀을 얼마나 풍성하게 소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자는 무엇보다도 말씀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충만해지는 길은 말씀의 씨를 많이 소유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씨를 소유하는 것이 성경 암송입니다. 성경 암송은 씨앗을 우리의 마음밭에 심는 것과 같습니다. 농부는 심는 것을 거둡니다. 심은 조율대로 거둡니다. 심지 않은 것은 거둘 수 없습니다. 또한 심는 것보다 많이 거두게 됩니다. 그것이 농작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미래는 그 마음에 말씀의 씨앗을 얼마나 많이 심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많이 심을수록 많이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농부는 씨앗을 심고 가꾼 후에 우리에게 열매를 줍니다. 씨앗을 심고 열매를 맺는 과정이 깊은 묵상입니다. 소는 풀을 먹은 후에 사람들에게 젖을 줍니다. 풀이 젖이 되는 과정이 깊은 묵상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소가 풀을 먹는 것같이 성경 말씀을 암송하고, 소가 반추하듯이 깊은 묵상을 통해 젖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때 말씀은 신령한 젖이 됩니다.(벧전 2:2) 딱딱한 씨와 같은 말씀이 깊은 묵상으로 풍성한 열매가 되고, 깊은 묵상을 통해 순전한 젖이 되는 것입니다. 풍성한 열매와 신령한 젖을 주는 묵상의 시작이 바로 성경 암송임을 기억하십시오.
2. 말씀의 꿀맛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경 암송을 꾸준히 하면 말씀의 꿀맛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습니다. 시편 119:131절을 보면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이 입을 열고 헐떡일 정도로 말씀을 사모했던 것은 말씀의 맛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가 엄마 젖을 먹기 위해 입을 열고 헐떡이는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어린 새들이 어미 새가 가져다 주는 먹이를 먹기 위해 입을 열고 소리를 지르며 받아먹는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음식으 맛을 알고 식욕이 강렬해지면, 음식을 사모하게 마련입니다.
말씀의 맛을 아는 사람은 말씀을 강렬하게 사모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이 꿀보다 더 달다고 고백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 19:9-10)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시 119:103)
저는 성경 암송을 통해 말씀의 꿀맛을 경험했습니다. 성경 암송을 처음 시작할 때는 무척 힘들었습니다. 말씀의 맛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말씀을 암송하는 중에 그 맛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암송한 후에 그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말씀의 깊은 세계를 맛보기 시작했습니다. 깨달음과 함께 진리의 세계가 열리면서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둔함이 점점 사라지고, 말씀을 묵상하고 설교 말씀을 듣는 것이 고상한 낙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시 119:130) 어느덧 저도 다윗처럼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잘 먹는 것처럼 말씀 역시 많이 암송하고 묵상할수록 더욱 잘 먹을 수 있습니다. 말씀의 맛은 어느 경지에 오르면 더욱 맛이 있습니다. 갈비탕이나 곰탕도 오래 삶은 국물에서 제 맛이 납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 암송으로 오래도록 마음에 묵상하면 진국처럼 제 맛이 납니다. 또한 오래 씹을수록 음식 맛을 더 잘 느끼게 되듯이 성경 암송을 함으로써 더욱 진한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경 암송을 통해 누리는 복은 말씀의 맛을 경험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까지 맛보아 알게 된다는데 있습니다. 다윗은 이같이 말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4:8)
성경 암송을 통해 말씀이 마음에 가득 찬 사람은 설교를 들을 때 더욱 큰 은혜를 경험합니다. 말씀에 관한 지식이 증가하면 말씀에 대한 흥미도 증가합니다. 그리고 더욱더 깊이 알고 싶어집니다. 똑같은 설교를 한 자리에서 듣는다 할지라도, 말씀을 깊이 암송하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설교를 듣고 은혜 받았다고 고백하곤 합니다. 언제 그런 고백을 하게 됩니까? 보통 우리가 은혜 받았다고 말할 때는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할 때입니다. 말씀을 알긴 했지만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될 때 은혜 받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설교자가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에 대해 분명한 체계를 잡아 주거나, 고민하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줄 때 은혜를 받습니다. 또한 설교를 통해 새롭게 기억하고 깊은 진리를 성령님이 생각나게 해 주실 때 은혜를 받습니다. 성경 암송은 설교자가 전하는 말씀을 잘 깨닫도록 우리의 영적 감각을 개발시켜 주는 은총의 도구입니다. 성경 암송을 통해 깊은 깨달음의 낙을 누리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꿀, 곡 송이꿀보다 더 맛이 있습니다.
3. 성경 통달의 기초를 쌓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성경 말씀에 통달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통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는 성경 전체를 통달하고, 사람들에게 때를 따라 적절히 말씀을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하고 통달한 성경 교사와 영적 안내자를 존경하고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성경 통달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서경 통달이란 성경 전체를 연결시키는 능력입니다. 성경의 짝을 찾아 연결시키고, 성경의 금맥을 찾아 주제별로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성경의 맥을 잡고 흐름을 발견하는 작업이 성경 통달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성경을 쪼개는 것이 아니라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연결할 때 기적이 나타나고 관련 지을 때 살아 있는 능력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부딪쳐 옵니다.
깨달음이란 성경 전체가 하나로 연결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는 순간에,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산발적으로 알았던 진리가 실에 구슬 꿰이듯이 하나로 연결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관통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스데반의 설교는 성경을 통달한 설교의 모델입니다. 스데반은 평신도였지만 성경에 통달했습니다. 그는 구약의 핵심이 되는 말씀을 다 암송하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성경의 맥을 알았고 흐름을 알았습니다. 스데반은 그가 암송한 말씀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구속의 역사를 증거했습니다. 스데반은 바울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바울에게 끼친 영향력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경을 연결시키는 성경 통달의 원리였습니다.
성경 통달은 성경의 주제인 예수님을 중심으로 성경 전체를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통달한 사람은 모든 성경 속에서 예수님을 보는 사람입니다.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는 사람입니다.(고후 10:5)
성경 통달이란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그리스도이십니다.(골 1:27) 복음입니다.(엡 6:19)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창세로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시기 위해서였습니다.(마 13:34-35) 하나님의 비밀은 교회입니다.(엡 5:32)
성경 통달이란 성경의 점진적인 계시를 깨달은 것입니다.(히 1:1-2) 구약의 말씀이 신약에 어떻게 점진적으로 계시되는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 통달이란 구약에서 신약을, 신약에서 구약을, 전체에서 부분을, 부분에서 전체를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통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성경 통달을 하실 수 있었던 뿌리는 성경 암송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말씀에 통달하셨고, 그것을 구속사적으로 연결시키셨습니다. 성경 통달이란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지속적으로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이 있어야 하고,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은혜는 성경 암송을 위해 대가를 지불한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가슴에 새기십시오. 성경 통달은 하나님의 사람의 목표입니다. 그 목표에 이르는 길이 바로 성경 암송입니다.
4. 성경적인 가치관을 형성하게 됩니다.
한 사람의 인격은 그의 가치관에 따라 평가될 수 있습니다. 가치란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가장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치는 우리가 어떤 가치를 소유하고 있다고 말하는데서 결정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치는 가장 많이 생각하고, 가장 즐거워하고, 가장 많이 시간을 투자하는 것으로 결정됩니다.
우리는 스스로 정직하게 점검할 수 있습니다. 한 주간을 돌아보며 무슨 생각을 가장 많이 하고, 무슨 책을 읽었으며, 무엇을 즐거워했는지 점검해 보십시오. 누구와 시간을 가장 많이 보냈으며 어디에 물질을 가장 많이 투자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원리는 변하지 않지만 가치는 변할 수 있습니다. 교육학자들은 사람이 가치관을 형성하는데는 어린 시절이 가장 중요하다고 합니다. 특히 모태에서 다섯 살까지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녀 교육의 중요성을 절실ㅇ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일찍 손을 쓰지 않으면 자녀들은 세상적인 가치관 속에서 살게 됩니다. 어려서부터 성경적 가치관을 심어주는 것이 자녀에게 가장 고상한 선물을 주는 것입니다.
자녀에게 성경 암송을 가르치면, 일평생 그들에게 복이 됩니다. 부모는 성경 암송을 가르칠 뿐 아니라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가치란 모범을 통해 전수됩니다. 성경 암송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가치를 두고 말씀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보여 줄 때, 자녀들은 말씀을 존귀히 여기게 됩니다.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말씀이 그들의 가치관을 형성하고, 그들의 안내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 암송은 자녀들의 영혼 깊은 곳에 성경적 가치관을 심어 줍니다. 유대인의 자녀 교육은 그런 면에서 훌륭합니다. 그들은 자녀들에게 일찍부터 성경 말씀을 가르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을 그 마음에 새겨 주었습니다. 잠언 22: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우리 민족은 고난의 민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 형통, 성장, 성취 그리고 축복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안전에 대한 보장 때문입니다. 그것이 결코 나쁘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거나 정당치 않는 방법으로 쟁취되면 대단히 위험해집니다.
새 천년을 맞이하면서 우리 민족이 성서 한국, 선교 한국이 되기 위해서는 성경적 가치관을 형성해야 합니다. 성경적 가치관이란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에 가치를 둔다는 뜻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영원한 말씀과 영원한 인간의 영혼에 최상의 가치를 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세계 사이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 나라에 두어야 합니다. 애미 카미이클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어디에 고정되어 있는가를 살피라 그것이 곧 자신의 참모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당에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적인 것보다는 천국의 것에, 일시적인 것보다는 영원한 것에,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에 가치를 두는 것이 성경적인 가치관입니다. 물론 우리는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해야 합니다. 일상적인 삶 속에서 깊은 영성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 땅에 사는 데 필요한 성공이나 성취를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 암송을 통해 성경적인 가치관을 형성하십시오. 화려한 꽃과 같은 인기보다는 예수님을 닮은 인격을 사모하십시오. 성공을 넘어서 섬김을, 성장을 넘어서 성숙을 추구하십시오.
5. 말씀으로 연단된 지성을 갖게 됩니다.
뿌리 깊은 영성은 지성에 기초합니다. 영성 개발은 지성 개발에 근본을 두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앎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아는 것만큼 느끼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지성이 감성에 영향을 끼칩니다. 우리의 감정은 생각의 영향을 받습니다. 또한 지성은 의지에 영향을 낍니다. 우리가 선택하고 결단하는 것도 우리의 지성에 근거합니다.
지성이란 안다는 것 이상입니다. 진정한 지식은 단순히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알고, 온 몸으로 느끼는 것을 의미합니다. 몸소 경험하여 알 때 우리는 그것을 진정한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참된 지식의 지평을 넓혀 갈 때 우리 인생의 지평도 넓어집니다. 지식의 지평을 넓혀 가는 일이 지성 개발입니다.
지성은 단순히 지식의 소유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 능력입니다. 지성은 깨어 있는 능력이며, 세심한 주의력입니다. 깊이 보고, 본질을 보는 능력입니다. 지성은 영적인 민감성입니다. 훌륭한 지성은 사물을 마음의 창으로 보고, 영혼의 창으로 봅니다.
켄 가이어의 말처럼, 영적인 민감성을 개발하는 훈련은 가장 혹독한 훈련 중 하나입니다. 영적인 민감성은 지각을 개발함으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지각은 딱딱한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함으로써 분별력을 키우고 예민함을 키울 때 개발됩니다. 성숙과 미숙의 차이는 바로 지각 개발에 달려 있습니다. 히브리서 5:14절을 보면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미숙한 사람은 지각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성한 사람은 지각을 사용하고 또한 훈련합니다.
지성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생각을 훈련해야 합니다. 생각을 길들여야 합니다. 생각을 날카롭게 다듬어야 합니다. 생각을 훈련하는 가장 중요한 훈련이 성경 암송 훈련입니다. 성경 암송을 통해 말씀을 생각에 새기고,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훈련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풍성합니다. 성경 암송을 통해 지각이 개발되면 지성의 감각이 발달하게 됩니다. 지성의 감각이 발달할 때, 모든 것을 새롭게 보고 깊이 있게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같습니다. 다만 보는 눈이 다를 뿐입니다. 보는 방식이 다를 뿐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보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보는 것입니다. 지성이 개발된 사람은 작은 들풀 하나가 떨어질 때 우주가 떨리는 것을 봅니다. 작은 씨앗 속에서 수많은 열매를 보고, 씨앗 하나를 심으면서 거대한 숲을 봅니다. 작은 물방울에서 대양을 보고, 모래 한 알 속에서 영원을 봅니다.
지성이 개발된 사람은 누구보다도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그 사람의 세계는 다른 사람들보다 풍부합니다. 그의 경험은 다른 사람들보다 인상적이고 매력적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세계는 우리 각자가 만드는 것입니다. 그 세계의 풍요함과 생명력은 우리 지성의 풍요함과 생명력에 달려 있습니다.
지성 개발은 언어 개발에서 시작됩니다. 언어를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지성 지수가 높습니다. 그러므로 지성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단어를 많이 익혀야 하고, 다양한 언어를 소유해야 합니다. 모든 언어 뒤에는 언어가 담고 있는 세계가 있습니다. 언어를 많이 알고 지성이 개발되면 다른 사람이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암송하고 있는 사람은 다양한 언어를 소유한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 지성이 점점 개발됩니다. 깊이 생각하고 분별력 있게 생각하는 사람이 됩니다. 성경 암송은 지성 개발의 열쇠입니다.
6. 지혜가 충만하게 됩니다.
성경 암송을 통해 누리는 축복은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저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은 성경 암송을 통해 제 마음에 품은 말씀을 꺼내어 묵상하는 시간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만도 제게는 큰 기쁨입니다. 그런데 묵상 중에 지혜까지 얻게 된다니, 최상의 환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지혜를 통해 최고의 낙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거나 세상의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고상하고 고고한 낙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낙이 바로 바로 지혜의 낙입니다. 잠언 10:23절은 말씀합니다. “미련한 자는 행악으로 낙을 삼는 것같이 명철한 자는 지혜로 낙을 삼느니라”
지혜로 낙을 삼기 위해서 우리는 말씀을 암송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말씀은 지혜의 원천입니다. 내면에 말씀을 많이 소유한 사람은 지혜의 저수지를 소유한 사람입니다. 지혜의 저수지에서 지혜를 끌어올리는 작업이 말씀 묵상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지혜입니다. 지혜 속에 모든 복이 담겨 있습니다. 지혜는 세상의 어떤 복과도비교할 수 없음을 성경은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잠 3:15-17)
지혜를 소유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명철한 자요, 강한 자입니다. 잠언 24:3-5절을 보면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히 되며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 모습을 묘사한 누가복음 2:52절 말씀은 지혜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 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 예수님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골 2:3)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지혜에 장성한 자가 되라고 권면합니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전 14:20)
지혜는 세상의 꾀와 다릅니다. 지혜는 수직적입니다. 꾀는 수평적입니다. 지혜는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꾀는 마귀적입니다. 지혜는 영적이며, 꾀는 육적입니다. 지혜는 원시적인 안목을 가졌다면 꾀는 근시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혜의 핵심은 분별력입니다. 선악을 분별하고, 때를 분별하고, 장소를 분별하고, 위치를 분별하고, 언어를 분별하고, 사람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지혜를 얻은 자는 하나님을 알 뿐만 아니라 인간의 심층까지 이해하게 됩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삶의 원리입니다. 지혜는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입니다. 문제의 핵심을 보고, 문제 속에서 해결책의 씨앗을 보는 것입니다. 위기를 맞이할 때,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다시 말해, 지혜는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순발력입니다. 순발력을 키우는 것이 바로 성경암송입니다. 암송으로 훈련된 지성과 묵상으로 소유하게 된 지혜를 가진 사람은 어떤 상황에 처해도 지혜롭게 대처합니다. 올바로 분별하고, 선택하고, 결단합니다.
지혜는 환경을 초월해서 승리할 수 있는 형통의 원리와 같은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승리 비결도 지혜에 있었습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안수했을 때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했습니다.(신 34:9) 성령님은 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말씀과 함께 역사하십니다. 성령님은 여호수아 속에 담겨 있는 말씀을 통해 지혜를 주심으로써 그를 형통케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