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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북정맥 7구간 산행기
(각흘고개 ↔ 차동고개)
1. 산행일자 : 2007년 6월 3일 (일요일)
2. 산 행 지 : 충남 예산
3. 날 씨 : 맑음
4. 참 가 자 : 김미환, 박봉하, 박상호,안상경, 이용준, 장현옥(6명)
5. 예상 산행 거리 및 소요시간
[1]구간별 거리 : 총 산행 16.2km
◆각흘고개(213m)←[3.5km]→봉수산(534.4m)←[3.5km]→천방산(478.9km)←[3.7km]→극정봉(424.0m)←[5.5km]→차동고개
[2]경유지 및 소요시간 : 약 8시간 정도
◆수원(05:00)∼경부고속∼천안IC∼온양(06:20/아침/07:00)∼39번국도각흘고개(07:30)
◆각흘고개(07:40)→송전탑 87번(08:05)→탑곡리안부(08:30)→봉수산/삼각점(09:20)→송전탑 82번(08:35)→460봉/능선분기(09:50)→천방산(10:50)→방산리안부(11:10)→소기리안부(12:30)→극정봉/삼각점(13:00)→굴 있는 봉(13:50)→봉/능선분기(14:10)→비포장차도(14:30)→안부/성황당(14:50)→293.8봉/옛 삼각점봉(15:20)→차동고개(15:30)
◆ 32번 국도(15:40) ∼ 유구 ∼ 온양(16:30/식사/17:30) ∼ 평택 ∼ 수원(19:30)
◆ 탈출로 :
6. 산행의 실제(산악대장 제공 자료)
① 수원(05:10)∼경부고속∼천안IC∼온양 송악(06:20/아침/06:50)∼각흘고개(07:05)
② 각흘고개삼각점(07:08)→송전탑(07:26)→탑곡리안부(08:15)→봉수산/삼각점(08:32)→460봉/능선분기(09:03)→천방산(09:52/10:21)→방산리안부(10:33)→소거리안부(11:12)→극정봉/삼각점(11:47/12:58)→굴있는봉(14:04)→비포장차도(14:33/14:55)→안부/서낭당(15:09)→ 294.2봉(15:27)→차동고개(15:36)
③ 외암민속마을(18:07)∼온양∼천안IC∼수원(20:00)
7. 산 행 기
[1] 산행 전에 있었던일
산행 전 날 다음 카페를 방문해 보니 7구간 정맥산행을 가겠다는 인원이 7명(김명자,김미환, 박봉하, 박상호,안상경, 이용준, 장현옥)이다.매 구간마다 빠지지 않던 윤사장님은 집안 행사로 참석하지 못한다고 한다.부득이한 일인 줄 알면서도 공백이 생긴 것 같아 허전하다.개인 사업으로 짬을 내기 어려운 김미환,박상호사장이 동참한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이번 산행에서 차량 운행은 박사장 차지다. 매번 신세를 지는 것이 미안스럽고 한편으로는 고맙다.
얼린 물과 간식(삶은 계란,감자)을 참여 인원만큼 챙겨 출발 장소로 나갔다.산악대장,김미환사장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고 안교장선생님도 곧이어 도착했다. 김명자부장은 몸이 불편에 산행을 할 수 없다는 연락(03:05분)이 있었다고 한다.
05:00시를 좀 넘긴 시간에 장부장 도착,바로 출발이다.참여 대원이 적어서인지 차가 가볍고 빠르게 달리는 것 같다.
[2] 온양 송학리 『돌집』과 각흘고개
부지런히 달려온 차가 지난 산행 때 점찍어 두었던 『돌집(온양,송학리,☎ 041 -541-9876)』마당에 멈춘다(06:20분경).
미리 전화로 연락을 해 둔 터라 곧바로 아침식사가 마련 되었다. 시골 손 두부집이라 두부 전골로 아침식사를 하려고 했는데 전날 연락을 줘야만 두부로 만든 음식을 먹을 수 있다며 양평 해장국으로 아침 밥상을 내놓는다.기대는 어긋났어도 고속도로 휴게소 황태나 우거지 해장국에 비하면 兩班에 兩班이다.
든든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밥 한 공기와 묵은지(김치)로 점심 도시락을 준비해서 오늘 산행의 출발지『각흘고개』로 이동을 했다.
각흘고개에 도착(07:05분경)했다. 주유소며 넓은 공터(주차장)와 「전통과 온천문화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아산시」와「어서오십시오. 백제의 고도 공주시입니다」/「공주시, 유구읍」라고 쓴 표지판은 지난 산행 때 본 그대로고 도로 양쪽의 해태상은 고개를 넘나드는 길손들의 안녕을 빌기라도 하듯하여 정답게 여겨진다.
[3] 봉수산
해발 213.0m의 각흘고개 마루에 올라 標識石과 三脚點 확인하고 오늘은 좀 수월한 산행이기를 바라면서 07:10분, 정맥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소망과는 달리 능선에 올라(07:20) 우측으로 꺾어 들면서 급한 오름 길로 이어지고 숨소리도 덩달아 거치러 진다. 초반부터 만만치 않은 것으로 보아 오늘 산행도 녹녹치는 않을 것 같다.
07 : 27분,송전탑이 보이는 능선에 오르고
07 : 37분 송전탑 설치를 위해 만들어진 넓은 길을 만나 100여m를 진행하다 임도 좌측으로 내려섰다. 소나무가 군락을 이룬 곳으로 모처럼 전망이 툭 터진다.
내림이 있으면 오름이 있는 것이 산행의 俗性.그런 줄 알면서도 편함을 구하는 것은 나만의 심정인가? 급하게 봉 하나를 올라 잠시 휴식, 가쁜 숨을 고르고 다시 하늘과 맞닿은 봉으로 숨을 헐떡이며 오른다.
「↙각흘고개/● 현위치/길상사 960m↘ /정상,260m ↑」라 표시된 사각 표지석에 알미늄 판을 덧씌운 이정표가 놓여져 있는 곳에 도착했다. 260m를 오르면 오늘 산행의 1차 관문 『鳳首山』정상에 닿게 된다.빨리 정상에 올라 느긋하게 쉬겠다는 생각으로 급경사 오름 길을 다리로 버티고 지팡이에 힘을 주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08 : 33분, 힘들게 정상에 올랐다. 먼저 도착한 대원(김미환, 이용준, 장현옥)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대장은 보이지 않고 배낭만이 나무에 기대져 있다.정상이라 생각하고 배낭을 내려 놓고 주변을 살펴보니 좀 전에 보았던 이정표 표지석이 또 하나 놓여 있다.
「←각흘고개․ 길상사 1.05km/ ● 현위치/천방산․극정봉↗/정상160m↘」라 표시되 있다. 봉수산은 정상은 방금 오른 봉에서 직진하여 160m를 더 가야 되고 천방산,극정봉(마루금)은 좌측으로 꺾어 내려가는 것으로 표시 되 있다.
가파른 산봉을 오르느라 지쳐 咫尺에 있는 봉수산을 눈으로 확인만 하고 대장이 되돌아 올 때까지 물 한 모금으로 갈증을 풀며 휴식을 가졌다.
「봉수산(鳳首山, 534m)은 충남 예산군 대술면과 공주시 유구면 및 아산시 송악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산세가 봉황의 머리를 닮아서『봉수산』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산기슭에는 887년(진성여왕 1)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봉곡사(鳳谷寺)가 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47년(인조 24)에 중창하였다.」고 한다.
<출처 :네이버 백과>
[4] 천방산
잠시 쉬었다 싶었는데 대장이 되돌아 왔다. 3분여를 더 쉬고 오늘 산행의 두 번째 관문『천방산』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름 길이 급경사였으면 내려가는 길은 수월했으면 싶은데 내 생각일 뿐 내림 길도 만만치 않다.
오늘은 날씨도 쾌청하고 바람도 알맞게 불어 산행하기에는 최상의 날씨다.오르고 내리는 길이 여간 힘들지 않은데 날씨라도 도우니 다행이다.더하여 겹겹이 나무 잎이 하늘을 가려 강렬하게 내려 쏟는 햇살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樹林이 터널을 이뤄 상쾌하고 시원하기까지 하다. 오늘은 자연의 혜택을 톡톡히 보는 것 같다.
09 : 05분, 무명봉, 급한 내림 길
09 : 20분, 무명봉
09 : 30분, 임도, 묘 1기를 지나 5분여를 더 가니 네 갈레로 길이 갈라지는 안부에서 좌측 길을 버리고 묘 앞을 지나면서 다소 완만한 능선으로 이어진다. 취나물이 자주 눈에 띄는데 산악대장, 부지런히 앞만 보고 간다. 지난 산행 때 취나물 유혹을 받아 몇 번 알바를 했다고 했는데 오늘은 마음을 비운 모양이다.후미로 따라가는 대원들을 생각하면 굳이 마음을 비우지 않아도 되는데 ---
안교장선생님도 덩달아 마음을 비우겠다며 취나물을 지나친다. 멀리 한다고 생각해서인가? 취나물이 더 자주 눈에 띈다. 취나물의 유혹에 현혹되지 않는다 하면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급기야는 비닐봉지를 꺼낸다.見物生心인 것을 ---.
09 : 49분, 묘 2기를 지나 급경사를 이룬 봉을 힘들게 오른다. 봉 정상에 올라보니(10 : 05분)『천방산』표지판이 나무에 매 달려 있다. 오늘 산행 중 봉수산에 이어 두 번째 고비를 오른 것이다.
「천방산(478.9km)은 충청남도 서천군 판교면, 문산면, 시초면 등 3개 면에 걸칠 만큼 산자락이 넓고 큰 서천 제일의 산이다. 산이 험하거나 거칠지 않아 보는 이로 하여금 다정함을 느끼게 하는 천방산은 동서남 방향으로 7개의 봉우리가 둘러쳐져있고 동남북방향이 훤히 트여 시원한 풍광을 자랑하는 영산(靈山)이다.
좌청룡 우백호인 듯 천방산 정상을 중심으로 좌우로 서 있는 봉우리들은 남으로 가면서 5개의 봉우리를 더하며 마치 병풍인 듯 둘러쳐진 모습이 있어 아늑한 감이 있는 천방산은 서북에서 동북방향(또는 그 반대 방향)으로 펼쳐진 시원한 풍광이 함께하고 있어 좋은 곳이다. 발치에 잡히는 낮은 산과 그 아래와 너머로 펼쳐지는 논밭과 아득한 마을의 풍경이 저수지와 함께 그림처럼 펼쳐져 있어 정상에 올라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마저 시원함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이 산을 천방산이라 命名하게 된 것은 「백제말기 소정방이 백제를 치기 위해 기벌포(현재의 서천군 장항읍)에 진입하면서 시작되는데 멀쩡했던 하늘이 갑자기 흐려지며 풍랑이 일기 시작했다. 소정방은 풍랑이 자기를 기다렸으나 풍랑은 좀처럼 그칠 줄을 몰랐다. 그 때 그들의 앞을 어느 도승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소정방은 너무 답답하던 참이라 그를 붙들고 그곳의 지세를 물어보았다.
"도승 이곳은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우리들이 이곳에 오자마자 이렇게 풍랑이 심하오?"
도승은 소정방의 말을 듣고 한참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이곳은 길이 험한 곳이오. 다른 곳에 비할 바가 아니오. 더구나 멀리서 원정군으로서는 이곳을 통과하기가 어려우니 이 산에 하룻저녁에 천 칸의 집을 짓고 千日祭를 지내어 山神의 보호를 받으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대가 개선할 가능성은 조금도 없소."
"그렇다면 우리 군사가 무사하겠소?"
"그렇소이다."
도승의 확답을 듣고 소정방은 군사들을 시켜 단번에 천 칸의 방이 있는 큰집을 지으라고 명령하였다. 군사들은 정신없이 소정방의 말에 따라 집을 지었다.
소정방은 그날 저녁으로 제사를 지내고 군대가 무사히 부여에 입성할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 후 삼일 째 되는 날이었다. 이튿날 날씨가 씻은 듯이 개이고 풍랑도 가라앉았다. 소정방은 군사를 이끌고 사비성으로 진격하여 백제군을 꺾고 승리를 거두었다.
그 뒤 소정방이 지은 천 칸의 집은 절이 되어 천방사라고 하였으며 산 이름도 이때부터 천방산이 되었다고 한다.
소정방이 남겨 놓은 천방사는 사찰로서 조선시대까지 존속되어 오다 1664년에 승려들의 반란으로 불타버렸고 천방사(千房寺)는 다시 중건하지 못하게 되었다. 현재는 『은적사』라는 조그만 암자가 있을 뿐 대찰의 영화는 간데없다.」라고 천방산 지명과 천방사 緣起傳說을「충남관광포탈(천방산풍광)」에서 소개를 하고 있다.
천방산 정상, 오늘 산행의 두 번째 고비다. 배낭의 무게도 줄이고 출출한 배도 채우기 위해 간식을 먹으며 잠시 휴식을 갖고 다시 출발이다.
방산리(方山里) 안부를 지난다.방산리(方山里)는 본래 예산군 대지동면의 지역으로서 천방산(도 산천) 밑이 되므로 「방산골 또는 방산동, 방산」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고동, 음산리, 양산리, 단지동」을 병합하여 방산리라 하고 대술면에 편입시켰다고 한다.
[5] 극정봉
천방산을 지나면서부터 산의 起伏이 더 심해지고 다리 힘도 점점 빠진다. 김미환사장, 장현옥부장, 대장을 바짝 따라붙으며 앞서가고 나를 포함해 박사장과 안교장은 취나물을 뜯는다는 핑계로 쉬엄쉬엄 가다보니 앞서 간 대원들과 거리가 점점 멀어진다.
울창한 송림이 군락을 이룬 능선을 지나고 안부 삼거리를 지나 다시 급경사를 이룬 봉에 오른다(11 : 00분).
휴식, 다시 출발. 능선 아래로 마을이 언뜻 언뜻 보이는데 지도를 보니 소거리(좌)와 머그네미(우)사이에 있는 능선 길을 가고 있는 것 같다.
松林이 鬱鬱한(울울한:울창한)능선을 지나 안부(소거리 안부?)로 내려서자 바로 급경사로 이어진다. 이 봉을 오르면 오늘 산행의 마지막 고비『극정봉』에 도착하게 되는 것 같다. 오늘 산행 구간의 5/2 정도가 남았는데도 마지막 고비가 자꾸만 腦裏에 와 닿는 것은 아무래도 心身이 지쳐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안부를 지나 급 오르막을 중간쯤 올랐는데 김미환, 장현옥 대원이 쉬고 있고 대장은 보이지 않는다. 좀 전에 쉬었는데 배낭을 내리고 또 엉덩짝을 땅에 붙인다. 그리고 산행 도증 뜯은 취나물을 장부장에게 건네고 ---.
장부장, 대장이 좀 달라고 사정사정 하면 조금 나눠 주겠단다.
11 : 45분, 봉 정상.『극정봉』표지판은 보이지 않고 평지 능선으로 이어지다 다시 내려간다. 극정봉은 아직도 멀었는가?
다시 높은 봉이 앞을 가리는데 벌목이 되 모처럼 하늘이 훤히 보인다. 저 봉이 극정봉이라 생각하고 다시 힘을 모아본다.
12 : 10분, 된 땀을 흘리며 봉 정상에 오르니 『극정봉,424.0m』표지판이 나무에 매달려 있고 삼각점도 눈에 띈다. 삼각점 때문에 나무를 잘라 약간의 공터가 형성 되 있고 별다른 특징은 없다. 오늘 산행의 마지막 고비『극정봉』에 오른 것이다.
공주시 지명 유래에 극정봉은 공주시 유구읍 명곡리 사기장골 정상으로 측량을 했던 터가 남아 있다고 하는데 정상에는 별다른 흔적이 없다.
[6] 곰취와 골뱅이 무침
일찌감치 정상에 오른 대장 혼자 느긋하게 쉬고 있다. 무려 30분이나 기다렸다고 한다.부지런히 따르지 못한 미안한 생각이 들지만 이것이 내 산행 행보의 한계인 것을 탓해 무엇하랴.
앞으로 6km, 3간은 더 산행을 해야 하는데도 정상에 오른 것으로 오늘 산행을 다했다는 생각이 든다. 남은 산행 길은 지금까지 온 산행 길 같이 起伏이 심하지 않을 것이란 기대 때문이리라.
12 : 10분, 점심시간이 됐다. 그늘진 곳에 자리를 잡고『돌집』에서 준비해 온 도시락을 꺼낸다. 모처럼 山中에서 먹어보는 점심이다. 박사장, 강원도 구룡령에서 뜯어 온 곰취와 쌈장을 준비했고 장부장, 어제 밤늦도록 준비했다는 골뱅이 무침을 꺼내 놓는다.돌집에서 마련해 준 묵은지며 각자 준비해 온 찬을 꺼내 놓으니 바닥이 찬으로 빼곡하다. 어디로 손이 먼저 갈까 망설여진다.
곰취에 골뱅이 무침을 얹어 밥 한 술 입에 넣으니 향과 맛이 어우러져 입안이 절로 즐겁다.이런 때 ‘이슬이’가 있으면 錦上添花일 텐데 미리 준비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7] 마루금을 벗어났던 일
점심 식사 후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손님, 졸음이 눈 주변을 얼씬거린다. 낙엽으로 자리 보고 솔향내 맡으며 단잠에 빠져 들고 싶은데 무엇이 그리 급한지 점심이 끝나자 약속이나 한 듯이 배낭을 지고 일어선다.다리의 무게가 여간 아니다.눈까풀 무게, 다리의 무게를 지고 극정봉 아래로 걸음을 옮긴다.
오후 산행의 시작이다.충분한 휴식에 내림 길이라 출발에 큰 부담은 되지 않는다. 내림 길이 끝나고 편안한 능선을 5분여 진행하다보니 능선이 분기 되는 데 좌측 길(배실이 마을로 내려 가는 길)이 더 뚜렷하고 내림 길이다. 선두가 좌측으로 방향을 잡고 내려간다.무심코 선두를 따라 내려가노라니 또 갈림길이 나타난다.아무래도 길을 잘못 가고 있는 것 같다. 마루금 표시기도 보이지 않는다.가던 길을 멈추고 대장에게 확인 전화를 해 보니 지나 온 능선 분기 지점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진행해야 한다고 한다. 잠시 긴장을 풀고 길을 살피지 않은 것이 힘든 다리 품을 팔게 만든다.
내려 왔던 길을 7, 8분 되돌아 올라 능선이 분기되던 봉을 가로질러 가다보니(13 :30분) 마루금 표시기가 보인다. 표시기를 확인하고 3분여를 진행하니 묵묘 1기가 있어 잠시 숨을 고르며 휴식을 가졌다.
[8] 차동고개 가는 길
마루금을 제대로 밟아 간 대장과 장부장은 멀리 앞서 가고 있을 것 같아 급한 대로 가쁜 숨만 진정시키고 걸음을 빨리 했다.
다시 능선이 분기되는 봉에 도착. 이쯤이 지도상에 표시된 『鳴牛山,368m』인가? 명우산은 공주시 유구읍 명곡리 서쪽에 있는 산인데 소가 울 때의 모습과 같이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공주시 지명 유래)
14 : 05분, 산악대장이 달아 둔 표시기를 따라 봉에 오르니 마루금을 약간 벗어난(약2m) 곳에 7,8m 깊이의 굴이 있다. 어떻게 해서 굴이 생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 번 빠지면 헤어나기가 힘들 듯 싶은 굴이다. 굴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하고 앞서 간 대원들을 따라잡기 위해 걸음을 빨리 했다.
14 : 15분, 그리 높지 않은 봉에 오르니 평지로 이어진다.
14 : 20분, 안부에서 휴식.
다시 급경사를 올랐다 내려서니(14 : 45분) 비포장도로 넓은 공터(서재)가 나타나고 100여m 앞쪽에 石物로 ‘예수’상을 세워 놓은 납골묘가 눈에 띈다. 비포장도로는 아마도 납골묘를 만들 때 만들어진 도로가 아니가 싶다.
정맥 표시기는 도로를 가로질러 산비탈 오르막으로 매달려 있다. 먼저 온 대원들과 相逢해서 짧은 휴식을 갖고 바로 출발 했다.
산허리를 돌아나가 삼거리에서 우측 오르막을 잠시 올랐다 완만한 능선을 따라 나가니 잘 손질 된 묘 1기가 나오는데(15 : 09분)「平山申公諱亨秀之墓 配慶州金氏 左」라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문 내용을 메모하고 내려 선 곳이 성황당 터.人迹이 끊어진지 오래라 고개를 넘나들던 길은 폐허가 되 잡초만 우거져 있고 흩어진 돌 자갈과 두 그루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쓸쓸히 성황당 터를 지키고 있다.
성황당 안부를 지나 능선 봉에 올라보니 (좌)능선 아래로 묘 2기가 있고 희미하게 차 소리가 들려온다.
15 : 30분, 삼각점이 있는 294.2봉에 올랐다. 온 길을 돌아보니 아침에 봉수산을 오르면서 보았던 송전탑이 전선을 달고 산봉을 넘고 넘어 멀리 사라지고 타원의 절반을 돌아 294.2봉에 도착해 있다. 직선으로 세, 네 시간이면 봉수산에 갈 수 있는 거리 같은데 이른 아침부터 8시간을 꼬박 걸어 이곳(294.2봉) 도착했다 생각하니 공연히 힘든 산행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實利를 따지면 백 번 밑지는 미련스런 행위지만 맥의 흐름을 제대로 따라 산행을 한 고단함이 오히려 보람으로 와 닫는다.
294.2봉에서 마지막 휴식을 취하고 완만한 능선을 따라 나가니 4각으로 둘레석을 한 묘가 여러 기(8기) 눈에 띈다. 묘지군을 지나 좀더 진행하니 차 소리도 점점 가까이에서 들리고 나무 사이로 차동 휴게소 건물과 굽이 돌아 오르는 도로도 언뜻언뜻 보인다. 오늘 산행의 목적지 차동고개가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다.
墓地群을 지나 (15 :40분) 좌측 숲속 내림 길을 빠져 나오니 아스팔트 길이 나타나고 고개마루에 여러 개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깃발 옆으로는 주유소(SK)와 차동 휴게소 건물도 삐죽이 보인다.
먼저 도착한 대원들이 도로변에 배낭을 내리고 느긋하게 쉬고 있다.16.2km, 약 8시간 30여분의 산행을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 목적지 차동고개에 내려선 것(15 : 50분경)이 너무 뿌듯하다.
[9] 차동고개
『차동고개(해발 215m) 』서산군 신양면 車洞里(대흥군 거변면의 지역으로서 국사봉(도·산천) 너머가 되므로 수리네 미 또는 차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송정리, 불 목동을 병합 차동리라 하여 예산군 신양면에 편입됨)에서 공주시 유구면으로 넘어가는 큰 고개로 『수레네미고개』라고도 한다.
「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이 곳 불왕골에 차서방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비록 가난하여 늙으신 홀어머니를 편안하게 모시지는 못했지만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님이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해드리는 효자였다.
하루는 건강한 어머님이 갑자기 몸져눕게 되었다. 차서방은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차서방은 돈이 없어서 남들처럼 약을 쓸 수도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던 끝에 별다른 도리가 없어 이튿날부터 차동고개에 가서 나무를 하여 장에서 팔아 어머님 약을 살 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차서방은 매일 자기 몸이 지치는 줄도 모르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나무를 해 팔았다. 그러나 사람의 역량에는 한도가 있는지라, 어느 날 어머님을 낫게 해 드려야겠다는 집념에 지친 몸을 끌고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하다가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져 꿈을 꾸니 하얀 할아버지가 나타나 `지금 네가 있는 곳에서 동쪽으로 열 발자국을 가면 산삼이 있을 것이니, 그것을 캐다 어머님께 달여 드리면 나을 것이다`라고 노인이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나 꿈속에서 본 할아버지가 말한 대로 발자국을 세어 동쪽으로 가 보니 정말 커다란 산삼이 있는 것이었다. 산삼을 캐 가지고 집에 돌아와 정성껏 달여 어머님께 드리니 언제 아팠느냐는 듯이 병환이 나았다.
이 일이 있은 뒤 사람들은 이 고개를 차서방이 산삼을 얻은 고개라 하여『차동 고개』라 불렀다고 한다. <출처:차동리 지명유래>
[10] 봉곡사
배낭을 내리고 잠시 쉬노라니 미리 불러 둔 택시가 도착했다. 휴게소에 들려 파전에 막걸리 한 잔 나누는 여유를 갖는 것도 좋을 듯 싶은데 갈 길이 급해 도착한 택시에 급히 올랐다.
유구읍을 거쳐 각흘고개 도착, 차를 갈아타고 봉수산 아래에 있는『봉곡사』로 향했다.
「『봉곡사(鳳谷寺)』는 아산시 송악면 유곡리에 있는 사찰로 봉수산 북쪽에 있는 동향사면의 기슭에 조영(造營)되었는데 울창한 송림으로 에워싸인 진입로와 배(背)산이 청정도장(淸淨道場)의 면모를 돋보이게 하는 곳으로 현재 대웅전과 향각전, 그리고 30여 개의 료사(寮舍:작은집, 기거하는 곳)가 있다. 봉곡사<연혁誌>에 따르면 이 사찰은 본시 신라51대 진성여왕 원년(887)에 도선 국사(道詵國師)가 창건했는데 고려 의종 4년(1170)에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이를 중건하고 절 이름을 [석암사]라 개정한 후에 계속 이어졌고, 마침내 조선 정조 18년(1794)에 절 이름을 다시 봉곡사로 개정한 것이라 한다. 옛 돌기와, 청기와 등을 소장하고 있으며, 대웅전 및 그 옆에 고방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 323 호로 지정되었다.」라고 아산시 홈페이지 문화관공에 소개를 해 놓고 있다.
『봉수산』을 오르면서『봉곡사』를 지나쳐 가는 것이 아쉬웠는데 산악 대장의 배려가 너무 고맙다.
마을을 지나 봉곡사 입구로 들어서니 鬱鬱蒼蒼한 松林이 새로운 감흥을 불러낸다. 절까지 오르는 길이 夾路라 차로 이동하는 것이 보행자들에게 눈총이 되었지만 원거리 산행과 시간이 바쁘다는 핑계로 사찰 건물이 있는 곳 까지 이동(16 : 20분경)했다.
봉곡사의 이모저모를 살펴보고 떠나야 하는데 낙낙장송의 면모만 살피고 사찰을 둘러보는 것은 후일로 미루었다. 송림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하고 되돌아 나왔지만 송림을 본 것 만으로 큰 소득을 얻었다는 생각이 든다.
[11] 외암리 민속마을과 산행 뒤풀이
鳳谷寺를 走馬看山으로 둘러보고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에 위치한『외암리 민속마을』로 이동했다.
민속자료 제 236호로 지정되어 있는 충남 아산의『외암 민속마을』은 약 500년 전부터 부락이 형성되어 충청 고유격식인 반가의 고택과 초가돌담(총 5.3km), 정원이 보존되어 있으며 다량의 民具와 民俗品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다.
일요일이라 관광객도 꾀 많이 왔다. 산행 후 몸도 지쳐 있고 봉곡사까지 들려 온 관계로 시간이 빠듯하여 이곳 역시 走馬看山으로 외곽만 둘러보고 할머니가 경영하는 주막에 들려 도토리 묵에 민속주 한 사발로 컬컬한 목을 축이고 산행 뒤풀이겸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외암마을 위쪽에 위치한『시골밥상』집으로 이동을 했다.
10여 가지 찬에 소주 한 잔으로 건배를 하다 보니 목소리도 높아지고 이야기도 끝날 줄을 모른다.
♣ 산행에 참여 하마고 했던 명자부장,곰취며 골뱅이 무침도 못 먹어보고 시골밥상도 받아보지 못했으니 오늘 산행 불참으로 손해를 많이 보는 날이다.
♣ 윤사장님 지금쯤이면 목안이 칼칼할 텐데, 가족들 대동하고 금방이라도 달려오지 않을라나---등 등.
6월의 긴긴 해지만 서산으로 넘어 갈 시간을 다투고 있어 빈 잔을 보고 또 보며자리를 털고(18 : 07분) 일어섰다.
※※※※※※※※※※※※※※※※※ ◆ [참고자료] ◆※※※※※※※※※※※※※※※
<참고자료 1> 사기장골(沙器장골)〔마을〕
사기장골은 마낭골 서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 선조 때부터 이곳에서 백자를 구웠다는 사기소가 있었던 곳인데 口傳에 의하면 깊은 골짜기 중앙으로 물줄기가 흐르는 냇물이 있었다. 도공은 가마에 불을 넣을 때마다 이 냇물에서 목욕을 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불을 가마에 지폈으며 소음이 없는 곳에서 조용히 기도를 하며 그릇을 구웠다고 전해 내려온다.
<참고자료 2> 천방산의 설림사(雪淋祠)
백제 의자왕 20년(660년) 여름에 나당연합군의 백제공격이 시작되었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13만 대군을 거느리고 서해를 건너 진격해 왔다. 이때에 신라는 태자 법민의 인솔하에 병선 100척이 덕물도(德物島, 현 덕적도)에서 당나라군사를 맞이 하기로 약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김유신 장군은 정병(精兵) 5만을 거느리고 탄현을 넘어 황산벌로 달려왔다. 이때 백제의 명장 계백이 거느린 5천의 결사대와 김유신은 싸움을 벌였다. 또한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이끈 나당연합군이 기벌포(伎伐浦,군산 앞바다)에 이르렀으니 동서에서 협공을 받았던 백제는 위급한 상황에 처하였다.
그런데 기벌포에 당도한 나당 연합군은 짙은 안개와 풍랑을 만나 전진할 수가 없었다. 이에 김유신 장군은 천방산 아래에 있는 언덕에 올라 산신령에게 기도하기를 「만일 자욱한 안개와 풍랑을 개이게 해 주시면 마땅히 절 1천개를 세워 부처님을 받들겠습니다.」하니 바로 천지가 맑고 풍랑이 그치어 백제를 공격해 전진할 수 있었다.
이에 김유신 장군은 산신령에게 약속한 대로 산위에 올라가 두루 지형을 살펴 보았으나 절 천개는 커녕 백개의 절도 세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돌 천개를 배치하여 절을 세웠으니 여기에 천방사의 연기설화가 유래한 것이다.
설림사는 이곳 김유신 장군의 기도처인 천방산의 북방 기슭에 세워진 것이다. 그리고 매년 음력 9월 20일에는 이 고장의 김해김씨 문중이 주축이 되어 향사하고 장군의 위업을 추모하고 있다 한다.
<출처> 사이버 백제 역사 문화관
<참고자료 3> 유구읍-명곡리
(1) 극정봉
◎ 지 명 : 극정봉〔산〕
◎ 위 치 : 사기장골 정상.
◎ 유 래 : 측량을 했던 터가 남아 있다.
(2) 사기장골(沙器장골)
◎ 지 명 : 사기장골(沙器장골)〔마을〕
◎ 위 치 : 마낭골 서쪽.
◎ 유 래 : 조선시대 선조 때부터 이곳에서 백자를 구웠다는 사기소가 있었던 곳인데 구전에 의하면 깊은 골짜기 중앙으로 물줄기가 흐르는 냇물이 있었다. 도 공은 가마에 불을 넣을 때마다 이 냇물에서 목욕을 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불을 가마에 지폈으며 소음이 없는 곳에서 조용히 기도를 하며 그릇을 구 었다고 전해 내려온다.
(3) 구당골, 당골〔명곡리 마을〕
◎ 지 명 : 구당골, 당골〔명곡리 마을〕
◎ 위 치 : 양지뜸의 남서쪽 마을.
◎ 유 래1 : 당골의 마을이 처음에 여기에 있었다 하는데 고려 말엽에는 李太祖의 등극을 싫어하여 선비들이 초막을 짓고 草根木皮(초근목피)하며 절개를 지킨 몇몇 선비가 있었다 한다.
◎ 유 래2 : 산제당이 있는 골짜기와 접해 있다 하여 유래된 지명이다.
◎ 유 래3 : 구당골에 산제당이 있어서 산제당이 있는 마을은 구당골이라 부르고 이
마을은 당골이라 부른다. 堂谷(당곡)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4) 장자골〔마을〕
◎ 지 명 : 장자골〔마을〕
◎ 위 치 : 구당골의 서쪽 골짜기.
◎ 유 래 : 장자골에 큰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마을 일도 자기 마음대로 하였다. 돈이나 재물
을 베푸는 데는 인색해서 걸인이나 중들을 도와주지 않았다. 그래서 돈푼이나 있어서 큰 소리를 치지만 마을에서는 인심을 잃고 있었다. 하루는 허름한 중이 집에 찾아와서 목탁을 치며 시주를 원했는데 사랑방에서 담뱃대를 탁탁 털던 장자는 미다지 문을 확 열고는 버선발로 뛰어 나와선 중의 바랑을 번쩍 벗기더니 마당에 팽개치는 것이었다. 마당에는 바랑 속에 들었던 곡식이 와르르 쏟아졌다. 그리고선 돌아서는데 중이 우두커니 서 있다가 말하기를
"조금만 노력하면 만석꾼이 될텐데… 그걸 가르쳐 드리려고 왔는데…"
하고 입맛을 쯧쯧 다시는 것이었다.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이 말을 들은 장자는 그 말이 솔깃해서
"그래요. 허… 참 내가 큰 실수를 했구만, 어디 어떻게 하면 내가 만석꾼이 되겠소."
하고 웃으면서 다가오는 것이었다. 중도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덕곡리 장승터에 있는 바위를 깨서 두 조각으로 만들면 당장 만석꾼이 되겠소이다."
하고선 앉아 곡식을 쓸어서 바랑에 담더니 총총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중이 돌아가자 장자는 당장에 석수쟁이를 불렀고 그리고선 그들에게 이 밤이 새도록 바위를 두 조각으로 깨면 보수를 배로 주겠다고 하므로 석수쟁이 몇 사람은 열심히 돌을 깨기 시작하여 새벽까지 두 조각을 만들어 놓았다. 장자는 이제 만석꾼이 되었다고 기뻐서 석수쟁이에게 돈을 듬뿍 줘서 보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날부터 집안에 우환이 생기고, 다음 해는 곡식에 병이 생겨서 모두 이삭을 맺지 못했 다. 그런 일이 연거푸 일어나 3년내에 그 장자는 완전히 거지가 되었다. 마을에서 재물이 나가지 못하게 바위가 막고 있어서 그나마 장자로 살았는데, 그 바위를 깨버리자 재물이 새나가는 바람에 인색한 장자는 거지가 된 것이다.
<참고자료 4> 외암리 민속마을
◎ 위 치 :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 홈페이지 : 외암리 민속마을 www.oeammaul.co.kr
◎ 연 락 처 : 041-544-8290
◎ 개 요 : 마을 중요 민속자료 제 236호로 지정되어 있는 충남 아산 외암 민속마을은 약 500년전부터 부락이 형성되어 충청 고유격식인 반가의 고택과 초가돌담(총 5.3km), 정원이 보존되어 있으며 다량의 민구와 민속품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가옥 주인의 관직명이나 출신지명을 따서 참판댁, 병사댁, 감찰댁, 참봉댁, 종손댁, 송화댁, 영암댁, 신창댁 등의 택호가 정해져 있으며, 마을 뒷산 설화산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시냇물을 끌어들여 연못의 정원수나 방화수로 이용하고 있다.
돌담장 길이가 500m나 되는 이끼 낀 돌담을 돌면 이 마을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는데, 돌담 너머로 집집마다 뜰안에 심어놓은 감나무, 살구나무, 밤나무, 은행나무 등이 들여다 보인다.
전체 가구수가 60여호인 외암리 민속마을에는 마을 입구의 장승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디딜방아, 초가지붕 등이 보존되어 있으며 주민들이 살고있는 집들은대부분 초가집이고 그외 기와집은 10여채가 되는데 대개 100년~200년씩 되는 집들이다.
그 때문에 1988년 정부에서 전통 건조물 보존지구로 전국에서 두번째로 지정되었다가 2000년 1월 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자료 제326호로 지정 보존중이다.
외암리 민속마을 내 고택은 사유지로 본래 출입이 불가하지만 집 주인의 양의를 얻어 관람할 수도 있다.
최근 이곳에는 사극이나 영화 촬영이 많아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다. 특히 드라마 [덕이], [야인시대] 영화 [취화선], [태극기 휘날리며] 등이 촬영되었다.
[문화유산]
◎ 건재고택(영암군수댁)
영암군수를 지낸 이상익(李相翼,1848~1897)이 살던 집이어서 '영암군수댁'이라고도 불리 운다. 이상익은 예안이씨의 18세손으로, 외암 이간은 이상익의 직계 5대조이다. 현재 집주인은 이상익의 고손 이준경 씨이며, 그의 말에 의하면, 외암 이간이 태어난 곳도 바로 이 집터였다고 한다. 건재고택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건재(建齎)는 이상익의 아들인 이욱렬(李郁烈)의 호이다. 현재의 가옥이 완성된 것을 건재당 때라고 한다.
◎ 참판댁(큰댁)
이조참판을 지낸 퇴호 이정렬(1865~1950)이 살던 집이라 '참판댁'이라는 택호를 갖게 되었다. 이사종의 11세손인 이정렬은 할머니가 고종비인 명성황후의 이모이기 때문에 명성황후로부터 각별한 은총을 받았다. 참판댁은 이정렬이 고종황제로부터 하사받아 지은 집이라. 고종황제가 이정렬에게 하사해 '퇴호거사(退湖居士)'라는 사호를 영왕이 9세때 쓴 현판이 아직 남아 있다.
◎ 송화댁
송화군수를 지낸 이장현(1779~1841)으로 인해 '송화댁' 이라는 택호가 붙여졌다. 이장현은 이사종의 9세손으로 호사 초은(樵殷)이며 순조 10년 식년시에 진사가 되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동편에 중문간을 두어 전체적으로는 건물과 건물사이가 조금씩 떨어진 튼 'ㅁ'자 집을 하고 있다.
◎ 교수댁
이 집은 이사종의 13세손인 이용구(1854~?)가 경학으로 성균관 교수를 지냈다고 하여 붙은 택호이다. 원래 사랑채, 안채, 행랑채, 별채가 있었으나 다 없어지고 안채와 행랑채, 사당만 남아있다. 사랑채가 없어지기는 했지만 이 집도 마을의 다른 집처럼 앞에 'ㅡ'자 모양의 사랑채를 두고 뒤쪽에는 'ㄱ'자 모양의 안채를 둔 튼 'ㅁ'자 집이다.
◎ 병사댁, 신창댁
이 집은 홍경래난을 진압한 이용현(1783~1865)으로부터 유래한다. 이용현은 이사종의 9 세손으로 무과로 급제하여 총관, 경연특진관 등을 지냈다. 이용현은 6세손인 이창선까지 현재의 신창댁에 살았으므로 전에는 이 집을 병사댁이라 불렀다. 그러나 현재는 그 후손이 서울로 이전하여 외암리에서 병사댁 택호는 없어졌다.
◎ 참봉댁
이사종의 12세손인 이중렬(1859~1891)과 그의 아들 이용후(1886~1955)부자가 참봉벼슬을 지낸 연유로 얻은 택호이다. 특히 이중렬은 1891년의 증광시에서 진사에 급제했다.
◎ '외암 이간'의 묘소와 신도비
외암 이간의 묘소는 외암마을의 서쪽 100여m떨어진 구릉에 서향으로 자리잡고있다. 외암 이간은 1727년 윤 3월 14일에 별세하였고, 그 해 5월에 온양군 유곡에 장례를 치렀다가, 1961년 3월에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였다. 묘소주위는 소나무가 울창하게 잘 가꾸어져 있다.
◎ 반석과 석각
반석은 외암마을의 입구에 있는 바위이다. 반석이 개천 바닥에 깔려있고 마을쪽으로 '외암동천(巍岩洞天)'과 '동화수석(東華水石)'이라는 글을 새겨두었다. 동화수석 석각은 높이 50cm, 너비 2m의 크기인데, 두께 50cm정도 되는 자연석에다 우측에서 좌측으로 큰 글씨로 새겼으며, 그 우측에 기미(己未), 그리고 그 좌측에 이백선서(李伯善書)라고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 '열녀 안동권씨' 정려
마을의 입구 다리를 건너기 전 좌측에 열녀 안동권씨 정려가 있다. 정려는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으로 작은 규모이다.
◎ '외암 정사'(관선재,외암서원)와 강당사
강당사는 원래 외암 이간이 강학을 하던 외암정사(巍巖精舍)였다.조선숙종 33년(1707)에 세운 외암 정사는 추사 김정희가 쓴 (혹은 수암 권상하의 글씨라고도 함) '관선재(觀善栽)'라는 편액 때문에 관선재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 용추와 석각
용추(龍湫)는 송악면 강당리의 안쪽, 멱시 아래 냇가에 있는 못이다. 이곳은 오늘날에도 인근에 널리 알려진 피서지인데 예전에도 외암리의 선비들이 자주 찾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출처 : 한국 관광 공사>
첫댓글 '참여 대원이 적어서인지 차가 가볍고 빠르게 달리는 것 같다.' 민들레꽃님 그날 갑작스런 불참에 섭섭해진 회원님들이 모든 원인 제공자를 민들레꽃님에게 덮어 씌웠습니다. 회장님 간식 남은 것도, 점심때 반찬이랑, 곰취 많이 남은 것도. 민들레꽃님이 그동안 얼마나 많이 먹었으면 갑자기 안오니 이리 많이 남느냐며. 그리고 차가 빨리 달린것도 아마도 민들레꽃님이 갑자기 오지 않은것 때문이라는 말씀 차마 하지 못하고??ㅋㅋㅋ. 앞으로 아프지 말고 꼭 와야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산행내내, 그리고 이렇게 후기에까지 이름이 길이 빛나게 됩니다. 회장님, 산행글과 함께 새소리 들리던 그숲터널을 다시 걷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