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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질긴 명줄을 잡고
박래녀
창으로 햇볕이 쏟아진다. 눈이 부시다. 저 창 좀 막아주세요. 창가의 연서는 말을 한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들은 척도 않는다. 적막하다. 말이 있어도 말을 듣는 사람 없고, 말이 없어도 말을 하는 사람 없다. 옆 침대의 강노인도 한 노인도 장 노인도 미동 없이 조용하다. 평온한 것 같은데. 찬찬히 보면 일그러진 얼굴이다. 표정 없는 얼굴이 일그러져 보이다니. 연서는 거울이 보고 싶다. 표정이란 것이 있을까.
연서는 장 노인을 본다. 장 노인의 입가에 마른버짐이 피었다. 끊임없이 흐르는 침이 말라붙었다. 말라붙어 허연 침 위에 다시 침이 흐른다. 턱받이가 축축하다. 너무 비대해서 침대가 꽉 찼다. 환자복 윗도리의 단추 두 개가 풀렸다. 고창 증 걸린 소처럼 빵빵한 허연 배가 쑥 나왔다. 장 노인도 물끄러미 연서를 본다. 생각이 있는 것일까. 눈동자는 힘이 없다. 그녀의 모든 것은 먹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끼니때가 된 것만은 정확하게 아는 시계다. 장 노인의 입에서 밥, 바압, 두 마디가 나오면 틀림없이 밥 때가 된 것이다. 장 노인이 입을 벌린다. 밥, 바압.
장 노인 옆 침대에 누운 한 노인은 뼈에 거죽만 붙어 있는 미라다. 표백제를 바른 것처럼 얼굴과 목에 하얀 반점이 얼룩덜룩 하다. 세계지도를 그린 것 같다. 가끔 왔다가는 노동자 풍의 아들과 간병인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젊어서 어루러기라는 피부병에 걸렸었기 때문이란다. 어려서 엄마는 들에 나가면 옷을 아무 곳에나 벗어놓지 못하게 했다. 목이나 손목 등 드러난 피부에 얼룩덜룩하게 무늬가 생긴다고 질색을 했다. 엄마는 뱀이 지나간 옷을 입거나 쥐가 오줌 싼 옷을 입었을 때 그런 피부병에 걸린다고 했다. 연서는 벌렁 드러눕고 싶을 만큼 탐스러운 잔디밭이나 가랑잎 위에 앉아보지도 못했다. 어루러기는 피부병 일종이라는 것을 학교에 가서 배웠다.
한 노인은 입을 쩍 벌리고 있다가 장 노인이 밥, 바압 하자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듯 몸을 부르르 떤다. 한 노인은 매달 딸이 다녀간다. 큰 딸이라고 했다. 반찬도 만들어 오고, 과일도 사 온다. 한 노인의 손을 꼭 잡고 있다가 울면서 돌아간다. 간병인들이 숙덕거리는 것을 간추려 보면 한 노인은 돈이 많은 할머니였단다. 그 돈을 아들에게 빼앗겼다. 사업한다고 집까지 사채에 잡혔다가 길바닥에 나앉게 된 노인이란다. 그 충격으로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단다. 한 노인의 입 안에서 파리 한 마리가 날아 나온다. 파리는 한 노인의 입술을 타고 놀다가 포르릉 날아 강 노인의 감은 눈 위에 앉는다.
강 노인은 온종일 잠을 잔다. 잠을 자는지 안 자는지 모르겠지만 눈을 꼭 감고 있다. 눈 위에 앉은 파리의 움직임에도 미동이 없다. 감각이 다 죽어서 산송장이라 그럴까. 산송장 아니다. 하루 세끼의 밥은 꼬박꼬박 받아먹는다. 여기 누워있는 세 노인은 먹고 배설하는 것으로 살아있다는 증표를 드러낸다. 연서는 다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을 바라본다. 눈부시다. 빛이 날카롭게 연서를 파고든다. 예리한 칼날로 찌르는 것처럼 온몸에 통증이 온다. ‘누구 없어요? 저 창문 가리개 좀 내려 주세요.’ 연서는 있는 힘을 다해 말을 하지만 옹알이에 그친다.
문이 벌컥 열린다.
“할머니, 밥 왔어요. 밥, 정신들 차리세요.”
하얀 모자를 쓰고 앞치마를 두른 여자가 수다스럽게 소리치며 딸랑딸랑 종을 흔든다. 미동도 않던 노인들이 여기저기서 꿈지럭거린다. ‘밥, 밥, 바압’ 침을 질질 흘리며 누웠던 장 노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며 어눌하게 중얼거린다. 간병인 A와 B가 쪼르르 달려와 각자 침대를 비스듬히 세워 환자를 앉히고 침대에 붙은 접이식 식탁을 편다. 각자의 식탁에 죽이나 밥이 놓인다. 송장 같던 환자들이 식판에 코를 박는다. 수저질을 못하는 한 노인과 강 노인에게 간병인 두 사람이 각자 붙어 밥을 떠먹인다. 장 노인은 수저가 필요 없다. 손으로 허겁지겁 음식을 입으로 가져간다.
“할매, 숟가락으로 퍼 먹으라니까. 또 손이야? 말 안 들으면 밥그릇 가져간다.”
한 노인에게 밥을 먹이던 간병인 A가 앙칼지게 소리친다. 장 노인의 손이 입에서 미끄러진다. 간병인은 장 노인의 서랍을 열어 숟가락을 꺼내 장 노인 손에 잡혀 준다. 장 노인을 떨떨 떨면서 숟가락질을 힘겹게 시작하지만 간병인의 눈길이 돌아가자마자 원위치다. 금세 밥이고 국이고 반찬이고 싹쓸이다. 손가락을 쪽쪽 빨면서 입맛을 다신다. 밥이 적다는 뜻이다. 연서의 식탁에 놓인 밥을 자꾸 훔쳐본다. 연서는 자신의 밥을 주고 싶다. 손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오른쪽 팔을 식탁에 올려보려고 용을 쓴다. 손가락만 꼼지락거린다. 연서는 자신의 차례가 오길 기다린다. 한 노인과 강 노인에게 밥을 먹인 후에야 연서 차례가 올 듯하다. 엄마는 어딜 가셨을까.
연서는 물끄러미 앞 침대의 환자를 본다. 두 사람이 다시 들어왔다. 치매노인이라 했다. 모 요양원에서 단체로 온 환자라 했다. 병원과 합작품이라는 요양원은 환자를 수시로 돌려막기를 한다. 치매환자는 여러 종류다. 어떤 환자는 밤새도록 잠을 안자고 침대에서 내려와 왔가 갔다 하고, 어떤 환자는 중얼 중얼 중얼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쉬지도 않고 한다. 어떤 환자는 간병인을 엄마라고 부른다. 손가락을 빨며 엄마 찌찌, 찌지 한다. 환자 여섯 명의 얼굴이 밀가루 푼 것처럼 하얗기도 하고, 노르스름하기도 하다. 오랫동안 햇빛을 못 받은 얼굴이라 그렇기도 하지만 백발의 머릿결 탓인지도 모르겠다. 병실에 있는 사람은 모두 닮은꼴이다. 연서만 곱슬머리다. 연서는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수족을 전혀 못 쓴다. 식물인간에서 겨우 의식은 돌아왔지만 간병인이 없으면 대소변도 해결 못한다. 연서랑 같이 병실에 있는 환자는 모두 기저귀를 찼고, 간병인 두 사람이 번갈아가며 24시간 시중을 든다.
엄마는 오지 않는다. 아픈 것일까. 감기 기운이 있다더니 많이 아픈 것일까. 불쌍한 엄마, 24시간 요양병원으로 옮기기 전 겨우 의식이 돌아와 중환자병실에 있을 때였다. 연서의 간병을 하던 엄마는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찍어내 연서를 불편하게 했다. 먹는 것을 거부하는 딸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 밥숟가락을 밀어 넣던 엄마는 혀끝으로 밥알을 밀어내 떨어뜨리는 딸을 보며 금세 대성통곡을 했다. 눈물 뚝뚝 흘리며 읊조리는 말은 연서 가슴을 터지게 했다.
“이것아, 사람은 밥 심으로 산다는데. 밥이라도 먹어야 살지. 아직 창창한 나이에 이게 무슨 일이고. 너 대신 내가 아팠으면 좋것다.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말년에 딸 년 병수발까지 하는 신세가 됐을꼬. 창대 같은 젊은 것이 이라고 있으니 내가 먼저 죽었어야 했는데. 오래 살아 못 볼 꼴 보는 것보다 하리라도 빨리 갔으면 좋것다.”
연서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는 수건으로 연서를 눈물을 닦아주며 넋두리는 계속되었다.
“불쌍한 내 새끼, 울지 말거라. 운다고 현재가 달라지겠니. 스스로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이 어디 너 뿐이겠니. 그래도 고맙다. 이렇게 살아줘서. 차츰 좋아질 기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정신 강하게 무라. 강서방과 애들 생각해서 일어나야지. 강 서방 보기 참 미안타. 너 때문에 반쪽이 됐다. 가끔 혼자 우두커니 서서 눈물 흘리더라. 안 됐다.”
‘이 몸으로 어떻게 살라고요. 애들에게 짐만 되는 몸뚱인데.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요. 날 좀 죽게 해 주세요. 제발요. 강 서방? 엄마는 뭘 모르면 가만히 좀 있어요.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차라리 내가 죽어야 해요. 산 사람은 살아야지요. 이런 꼴 진짜 안 보이고 싶어요. 차라리 내 머리가 터져 죽어버렸으면 이런 꼴 저런 꼴 안 봐도 되는데. 왜 살아났는지 모르겠어요. 엄마, 날 좀 죽게 해 줘요. 제발.’
연서는 피를 토하듯 외치지만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연서는 있는 힘을 다해 움직여 보려 해도 몸은 산송장이다. 연서의 눈에는 쉴 새 없이 눈물이 흐른다. 눈물샘이라도 말라버리면 좋겠다. 어쩌자고 눈물은 겉으로 드러나 흐르는지. 연서는 소리친다.
‘신이여, 제발 이대로 저승사자가 데려가든가. 벌떡 일어나게 하든가. 양단간에 결정 좀 내려주세요. 저 이렇게는 못 살겠어요.’
엄마는 매끼 밥상을 치우고 보조침대에 앉아 연서의 팔다리를 꾹꾹 주무른다. 거친 손마디지만 힘이 없다. 평생을 딸 하나 바라보고 사신 엄마, 40대 초반에 혼자되어 오직 연서만 바라보고 살아온 엄마, 연서는 결혼하고 친정에 들어와 살았다. 엄마를 떨어지기 싫다는 것은 핑계였는지 모른다. 연서는 직장을 놓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연년생 손자 둘을 키웠다. 딸과 사위를 위해 살림을 책임져 주었다. 두 아들이 고등학생이 되자 연서는 직장에 사표를 냈다. 엄마는 전업주부로 돌아온 딸이 해 주는 따뜻한 밥을 몇 그릇이나 드셨던가. 연서가 직장에 사표를 내자 엄마는 자신의 집을 연서에게 물러주고 방을 얻어 나가셨다. 남은 노후를 혼자 재미지게 살겠다고. 엄마는 날마다 행복이라고 했다. 복지회관에 다니며 벨리댄스도 배우고, 요가도 하시던 엄마, 어느 날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진 딸의 간병을 맡게 된 엄마. 연서는 엄마께 평생 불효만 하다가 한만 남기고 죽을 것 같아 가슴이 무너진다.
“강 서방이 참 속이 깊다는 걸 이번에 알았다. 네가 의식도 없을 때는 하루도 안 빠지고 병원에 왔다 갔다. 네 손을 잡고, 네 이마를 짚어주며 앉아 있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파 못 보겠더라. 내가 있으니 오지마라 했다. 환자 꼴 보는 것이 안 보느니 보다 못하다.”
‘잘했어요. 엄마, 나 그 사람 싫어. 진짜 보기 싫단 말입니다. 얼마나 냉정하고 이기적인 사람인데. 엄마도 알잖아요. 그 사람 성격을 나보다 더 잘 알면서. 나 이렇게 됐으니 속으로 죽기만 바랄 걸요. 차라리 목석하고 사는 게 낫지. 겉으로 흠 잡을 데 없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나를 쥐어짠다고요. 숨이 막혀서 숨통 좀 틔우고 사는 방법을 알고 싶었다고요.’
“현이랑 열이도 당분간 못 올 게다. 기말고사란다. 이런 어미 보면 저거도 마음 아플 것이고. 공부 열심히 하는 게 어미 돕는 거라고 오지마라 했다. 저거가 알아서 학교 다니는 거 보면 철이 들었다. 당분간 강서방도 아이들도 기다리지 마라.”
현이와 열이, 아이들 생각하자 연서는 가슴이 또 터질 것 같다. 고등학교 1학년과 2학년이다. 어미가 옆에서 온갖 시중 다 들어주며 아이 뒷바라지를 해도 시원찮을 시긴데 전신마비 환자로 누워 있으니 기가 막힐 일이다. 의사는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척추 신경에 손상이 갔지만 척추신경이 살아날 가능성이 5%정도는 있다면서 환자 본인의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연서는 고함을 지른다. 날 좀 죽여 달라고. 아무리 고함을 쳐도 입 밖에 나오지 않는 말, 아무리 인상을 쓰도 구겨지지 않는 얼굴, 아무리 허우적거려도 천근 무게로 꼼짝도 않는 사지, 죽음조차도 맘대로 할 수 없는 몸뚱이에 갇혀 있다는 것이 바로 천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연서는 자신이 왜 이런 천형을 받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알고 싶다. 알 수만 있다면 어떤 방법이든지 좋다.
연서는 기적적으로 의식이 돌아왔다. 뇌졸중으로 쓰러진지 석 달 만이었다. 의식은 돌아왔지만 몸은 여전히 움직이지 못했다. 연서는 눈 깜박임으로 의사 표시를 한다. 띄엄띄엄 외계 어를 웅얼거리기도 한다. 신기하게도 엄마는 연서의 말을 알아듣는다. 연서가 무엇을 원하는지. 대번에 안다. 연서는 요양병원으로 옮겨 달라고 엄마에게 부탁했다. 엄청나게 나오는 병원비도 문제지만 노구를 이끌고 딸 옆에서 새우잠을 자는 엄마를 물리치고 싶었다. 연서는 24시간 간병인이 보살필 수 있는 요양병원으로 옮겼다. 처음 엄마는 온종일 연서 곁을 지켰다. 간병인이 눈치를 했다. 집에 가서 쉬어도 된다고, 자기네가 다 알아서 하니 어머님이 할 일은 없다고. 엄마는 자신의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래도 엄마는 하루에 한 번씩은 꼭 다녀간다. 남편과 아이들은 정해진 규칙이 없다. 각자 멋대로 불쑥불쑥 나타났다 사라진다. 차라리 안 오면 좋겠다. 연서는 그들을 보기 괴롭지만 안 오게 할 방법이 없다. 연서는 엄마의 말을 생각한다. ‘시간이 다 해결해 줄 거다. 가만히 있어도 가는 것이 시간이다. 너 자신만 생각해라.’ 그래, 시간이 다 해결해 줄 것이다. 각자 자신의 삶에 익숙해지면 환자에 대한 연민도 그리움도 희석되리라. 아니, 떼어내 버리고 싶은 불편한 혹 덩어리로 전략할지 모른다. 그것이 인생이다.
엄마가 며칠 째 결석이다. 남편과 두 아이도 발길을 뚝 끊었다. 연서는 날짜를 헤아려보다 포기한다. 지칠 때도 되었지. 남편과 두 아이는 그렇다 쳐도 엄마는 아니다. 엄마에게 연서가 어떤 존잰데. 왜 안 오실까. 연서는 엄마를 기다린다. 간병인 외에 아무도 들락거리지 않는 병실, 하얀 벽, 하얀 노인들, 연서는 숨이 막힌다. 나는 저 노인들과 달라. 나는 살아야 할 의무가 있어. 엄마 때문에, 아니야. 남편 때문에, 아니야. 아이들 때문에, 아니야. 오직 나 때문에 나는 살아야 해. 연서는 겨우 결론에 다 달았다. 죽고 싶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살고 싶다. 잊어진 여자이고 싶지 않다. 살아 있는데. 이렇게 살아 있는데. 연서는 남편과 자식보다 엄마에게 잊어진 딸이 되기 싫다. 엄마 미안해. 엄마 어디 계세요.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연서는 울컥 서럽다.
“아주머니, 오늘은 생기가 돌아요. 배고프죠? 근데 할머니가 요즘 통 안 오시네요. 아주머니도 할머니 기다리죠? 따님 밥은 손수 먹여야 딸에게 약이 된다하시더니. 이상하네.”
간병인이 호감을 가지고 대한다. 연서는 간병인이 먹여주는 밥을 꼭꼭 씹는다. 다행스럽게도 씹는 기능은 살아났다. 53살, 한창 나이다. 연서는 갱년기 증상으로 힘들긴 해도 사는 것을 포기할 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아들과 돈 잘 벌어다주는 완벽주의 고위 공무원 남편과 부러울 것 없는 중류층 삶을 살던 그녀였다. 겉보기만 그랬다. 연서는 남편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다. 어떤 문제든 남편 말에 토를 달수도 의견을 내 놓을 수도 없다. 폭력이란 육체적인 것만이 아니다. 언어의 폭력은 인간의 정신을 말살시킬 수 있다. 부드러움 속에 들어있는 바늘의 예리함은 그 바늘에 찔려 본 사람만이 안다.
처음에는 쌀 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 않는다는 말처럼 장모님을 모시고 사니까 힘들어서 그렇겠지. 살다보니 아니었다. 남편은 겉은 부드러운 척 속은 얼음 같은 남자였다. 직장생활 할 때는 그나마 견딜 수 있었지만 전업주부로 돌아오고 엄마가 떠나자 본색을 드러냈다. 연서에게 한 치의 틈도 주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면 온종일 무엇을 했는지 일과를 적어 보여야 했고, 가계부 검열을 받았다. 작은 티라도 발견하면 냉랭한 그 시선, 차가운 비웃음. 연서는 투명인간이고 싶었다.
어떤 남자가 사랑을 나눈 후에 아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난 네가 싫어. 나가서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뜨겁게 사랑을 나누고 녹초가 된 아내의 귀에 가만가만 속삭였다. 난 네가 싫어. 나가서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여자는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다. 너무 좋으니까 그렇게 반어법을 쓰는 것으로 착각했다. 평소 여자는 남자에게 묻는다. 자기, 나 사랑해? 남자는 웃으며 그럼 사랑하고말고. 그런데 왜 사랑을 나눈 후에는 꼭 그런 말을 하냐고 따진다. 내가 그런 말 했든가? 남자는 동문서답을 한다. 당신이 잘못 들었겠지. 똑 같은 대화가 반복되자 여자는 남자의 말을 믿게 된다. 내가 잘못 들었나봐. 내 귀가 이상해진 거야.
3년이 흘렀다. 여전히 남자는 사랑을 나눈 후에 여자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난 네가 싫어. 나가서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어느 날 밤 여자는 잠옷을 입은 채 옥상에 올라가 15층에서 뛰어내렸다. 남자는 아내가 몽유병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엄마가 왔다. 얼굴이 반쪽이다. 엄마의 몸에는 무수히 많은 가시가 있다. 가시는 수시로 엄마를 찌른다. 연서가 아프기 전에는 그 가시 때문에 툭하면 병원 신세를 졌다. 엄마 몸에 있는 가시는 밖으로 드러나 타인을 찌르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자신을 찌른다. 스스로 상처를 내고 피를 흘린다. 이번에도 분명 엄마의 마음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 연서는 엄마를 본다. 엄마는 수건을 따뜻한 물에 적셔 와서 연서의 얼굴을 닦는다. 연서는 엄마에게 묻는다. ‘왜 그래요? 집에 무슨 일 생겼어요?’ 엄마는 연서의 눈을 본다.
“괜찮다. 너 때문에 내가 먼저 죽을 수도 없고.”
엄마는 한숨을 쉰다. 엄마의 십팔번은 늘 딸 때문에 죽을 수 없단다. 그 말을 뒤집으면 딸 때문에 살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연서는 집요하게 엄마의 눈을 본다. 엄마는 자꾸 연서와 마주치는 눈길을 피한다. 말해요. 말해 봐요. 다 들을 수 있어요. 무슨 일인지 안다고요. 말해요. 나 아직 안 죽었으니까. 말하란 말이에요. 엄마는 연서의 팔을 주무른다. 다리를 주무른다. 고개를 숙이고 연서의 몸을 구석구석 정성스럽게 주무른다. 엄마의 손끝에 희미하게 떨림이 온다. 엄마도 느끼는 것 같다. 물끄러미 연서를 본다.
“엊그제, 그 사람 떠났다. 먼 길을, 다시는 올 수 없는 그 길을 갔다. 나보다 오래 살겠다더니. 너 병상에서 일어나면 노후를 같이 보내자고 하더니 갑자기 갔단다. 늙은이 혼자 살기가 팍팍했던 모양이다.”
연서가 대학 1학년 때였다. 농협에 근무하던 엄마가 연서에게 바다 구경을 가자고 했다. 연서는 아르바이트 해야 한다고 잘랐다. 엄마를 돕는 일은 돈 버는 일이고 공부 잘해 장학금 타는 일이었다. 엄마는 하루만 시간을 내 달라고 사정했다. 엄마의 얼굴이 환하게 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좋은 일이 있나봐. 엄마, 연애 해?’ 연서는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 엄마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런 것 같니?’ 엄마는 연서의 눈길을 피했다. ‘진짜 연애 해? 어떤 남잔데? 우리 아버지보다 멋쟁이야?’ 연서는 짓궂게 꼬치꼬치 캐물었다.
“너도 만나보면 알 거야.”
“같이 바다 보러 가기로 했어?”
그 사람 이름이 김광수라 했다. 엄마의 초등학교 친구, 동창회에서 만났다고 했다. 사별한 지 일 년 됐다는 남자. 어쩐지. 엄마가 멋을 부리는 것 같다고 느꼈었다. 얼굴이 달덩이처럼 환해졌던 엄마, 연서는 배신감을 느꼈다. 엄마의 행복이 바로 자신의 불행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도 여잔데. 행복해질 권리가 있는데. 스무 살의 고아가 되어버린 기묘한 느낌, 만나보지도 않은 그 남자에 대한 미움, 엄마에 대한 불결함.
“재혼이라도 할 거야?”
“그 사람이 그러자고 해. 너만 좋다면.”
“거긴 애들 없어?”
“모두 외국에서 산다나 봐. 기러기 아버지였어. 남매가 초등학생일 때 아내가 두 아이 데리고 친정식구들과 이민을 갔다더라. 그 사람은 직장 때문에 남았고. 애들 학비를 벌어 보내줘야 했으니까. 떨어져 살면 정도 식는지. 지난해 이혼서류를 보냈더란다. 좋은 사람이 생겼다고. 애들도 원한다고 해서 깨끗하게 정리했는데 갑자기 교통사고로 아내가 떠났단다. 그 사람이 자기가 아내를 저주해서 그렇다고 많이 힘들어 했지.”
“그러다 엄마랑 정분났다는 말이네.”
“그 사람이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나를 좋아했단다.”
“남자들이 쓰는 수법이야. 거기 넘어간 우리 엄마, 많이 외로우셨네.”
“비꼬지 마라. 나도 좋아했으니까.”
엄마는 시골의 작은 읍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나지막한 뒷산 아래 기와지붕으로 지어진 학교건물은 남향집 일자형으로 자리를 잡고, 학교 정문을 들어서면 넓은 운동장 양 옆으로 수십 년 된 플라타너스 나무가 숲을 이룬 학교, 학교 건물을 감싸듯 둘러 서 있는 플라타너스 나무 뒤쪽으로 탱자나무가 심어진 학교, 탱자나무가 학교 담장이었다. 탱자나무 사이로 개구멍을 내 놓고 말썽꾼 서너 명은 개구멍으로 땡땡이를 쳤다. 엄마가 그 남자를 알게 된 것도 개구멍을 통해서였다. 모범생이었던 엄마에게 선생님이 숙제를 냈다. 개구멍으로 드나드는 아이들 명단을 적어 내라고. 엄마는 광수의 이름자를 쏙 빼고 선생님께 넘겼다. 학교 뒷간 벽에 ‘김광수와 이성숙이 꼼지꼼지 했대요.’ 또는 두 사람의 그림을 그려놓고 중간에 ‘빠구리’라고 적혔다. 엄마는 울었다. 다시는 광수를 안 보기로 했다. 광수는 먼발치에서 단발머리를 나풀대며 걸어가는 엄마를 지켜봤다. 엄마를 놀리는 아이들은 광수에게 입술이 터지고, 턱에 멍이 들었다. 엄마는 작은 읍에서 벗어나 중소도시의 여자중학교에 입학을 했다. 광수는 작은 읍에서 남녀공학 중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멀어졌다가 오십이 넘어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만났다.
연서가 대학생이 되면서 엄마는 외로움을 많이 탔다. 자신의 품에서 떠나 자유를 찾은 것처럼 활기차게 제 인생을 살겠다고 설치는 딸을 보면서 엄마는 자꾸 외로워했다. 집에 일찍 들어와 같이 저녁 먹자. 요번 일요일에 영화 보러 가자. 우리 단풍 구경 가자. 바다 보러 가자. 허기가 진다. 맛있는 거 사 먹으러 가자. 엄마의 요구가 늘어날수록 연서는 엄마가 귀찮았다.
“귀찮아. 바쁘단 말이야. 엄마는 친구도 없어? 친구들이랑 즐기란 말이야. 왜 나만 잡고 그래. 돈도 벌어야 하고, 과제도 해야 하고, 책도 봐야 하고, 진짜 미치겠는데. 잠잘 시간도 없어 죽을 것 같은데. 엄마가 나 때문에 인생 종쳤다는 말 듣기 싫으니까. 엄마 인생을 즐겨.”
연서는 매몰찼다. 연서는 자신의 일거수일거수를 타박하고 옭아매려는 엄마가 싫었다. 연서도 엄마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다. 남자도 사귀고 싶고, 청춘답게 밤 새워 술도 마셔 보고, 토하기도 해 보고, 나이트클럽에 가서 춤도 추고 싶고, 일탈도 하고 싶었다. 엄마의 간섭만 없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는 밤 9시면 어김없이 귀가를 해야 한다는 방침을 바꾸지 않았고, 엄마 역시 칼 퇴근이었다. 주말이면 엄마랑 같이 보내야 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오냐, 이것아. 어쩜 그리 너의 아버지 판박이니. 인정머리도 없는 것, 이젠 어미 필요 없다는 말이지? 좋은 시절 다 보낸 어미에게 말 하는 것 좀 보소.”
그러던 엄만데, 막상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다니까 연서는 싫었다. 버림받은 것 같아서 서러웠다. 엄마가 재혼을 하면 영원히 혼자 살아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숨이 가빴다. 언제까지 엄마는 엄마로 곁에 남아있어야 했다. 엄마를 빼앗기기 싫었다. 아버지도 아닌 낯선 남자에게.
“재혼은 안 돼 엄마.”
연서는 문을 박차고 나왔다. 며칠간 친구 집을 전전했다. 엄마는 연서를 찾아 학교에 왔다. 재혼 안 할 테니 집에 들어오라고 했다. 재혼 같은 거 절대로 안 할 테니 제발 집에 들어오라고. 못 이기는 척 집으로 왔다. 역시 엄마 곁이 좋았다. 그 후로는 엄마로부터 그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엄마는 여전히 칼 퇴근이었고, 농협에서 정년퇴임을 할 때까지 연서를 위해 혼신을 다했다. 연서가 남자 때문에 울고불고 할 때도 엄마는 연서를 끌어안고 조용히 등을 다독였다. 사랑은 아픈 만큼 성숙하는 거라고, 시간이 다 해결해 줄 거라고.
그런데 엄마의 사랑은 계속되었던 것일까. 연서가 눈치 챌 수 없을 만큼 엄마의 사랑은 미세한 공기 같은 것이었을까. 연서는 쓸쓸하게 젖어드는 엄마의 눈을 본다. 그동안 엄마를 지탱 해 준 기둥이 연선 줄 알았는데. 그럼 그 남자? 연서는 엄마의 기둥이 그 남자였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엄마의 기둥이 무너져버렸다. 연서조차 엄마의 기둥이 되어줄 수 없다. 그럼 엄마는 어떻게 될까. 아니, 연서는 어떻게 될까. 연서는 갑자기 부르르 진저리를 친다. 엄마는 연서의 손을 꼭 쥔다. 연서도 손가락에 힘을 준다.
“연서야, 그 사람이 내게 기둥이었듯이 너에겐 내가 기둥이잖니. 걱정마라. 난 괜찮다.”
그때 엄마가 53살이었어. 그 남자랑 재혼을 꿈꾸던 그때가.
갑자기 옆 침대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 ‘꾸룩꾸룩 꾸르르 컥컥’ 엄마가 옆 침대를 돌아본다. 엄마의 얼굴이 당황스럽게 변한다. 연서를 돌아본다. 연서의 손을 꼭 잡아주고는 급하게 일어나 옆 침대로 간다. 장 노인 침대다. 연서가 온 힘을 다 해 고개를 약간 옆 침대로 돌려 장 노인을 바라본다. 장 노인 얼굴이 하얗다. 입에서 거품이 비누풍선처럼 비죽비죽 나온다. 엄마는 휴지를 뽑아 장 노인의 거품을 닦아주며 묻는다.
“이봐요. 할머니, 할머니”
장 노인의 눈이 하얗게 뒤집어진다. 표정 없이 누웠던 한 노인도, 강 노인도 관심을 보인다. 엄마는 노인들의 얼굴이 장 노인에게 쏠리자 사태를 짐작한 듯 잰걸음으로 병실을 나간다. 간호사가 달려오고, 간병인도 달려온다. 간호사는 침착하게 간병인에게 말한다.
“선생님을 오시라고 하세요.”
간병인이 달려간다. 청진기를 목에 건 의사가 왔다. 덥수룩하게 수염이 자라있는 것이 피곤한 기색이다. 의사는 침착하게 환자의 상태를 살핀다. 눈을 뒤집어 보고, 배를 눌러보고, 귀밑의 목 부분에 손가락 두 개를 대 보고, 가슴에 청진기를 대 본다. 간호사에게 손짓으로 지시한다. 간호사 한 명이 어디론가 달려간다. 잠시 후 이동식 침대가 달려오고, 장 노인이 이동식 침대로 옮겨 탄다. 짐짝처럼 침대보로 싸서 네 사람이 힘을 합쳐 이동식 침대로 밀쳤다. 이동식 침대가 휘청한다. 이동식 침대는 장 노인을 싣고 복도로 사라졌다.
병실 안은 다시 정적이 감돈다. 누구 한 사람 입을 여는 사람이 없다. 엄마는 연서 옆의 간이 의자에 철버덕 주저앉는다. 맥이 다 풀린 얼굴이다. 갑자기 엄마가 늙어 보인다. 흰 머리카락이 더 많아졌다. 엄마는 머리카락이 검다. 염색을 하지 않는데도 염색한 머리칼 같다. 늘 염색은 연서가 했다. 엄마랑 손잡고 밖에 나가면 자매사이로 아는 것이 자존심 상해서 열심히 염색을 하곤 했다. 엄마는 연서가 아버지 닮아서 머리카락이 빨리 센다고 했다. 돌아가실 즈음 아버지는 반백이었다. 엄마보다 열 살이 많았다. 아버지는 농협에 다녔다. 아버지는 무뚝뚝했고 잔정이 없었다. 연서가 여남 살 무렵이었다. 무심히 들었던 그 말, 아버지가 엄마에게 했던 그 말 ‘저것이 아들이었으면 내가 왜 이러겠어.’ 엄마가 아버지에게 했던 그 말, ‘아들 얻겠다고 헤어져요?’ 연서의 뇌 속에 각인된 그 말, 연서는 엄마의 자궁을 찢고 나왔다. 지독한 난산이었다. 엄마는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그 무덥던 여름, 아버지는 직장에서 갑자기 복통을 호소했고, 병원에 모시고 갔을 때는 이미 숨이 멎었다. 급체라고 했다. 연서는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아버지는 하얀 보자기를 쓰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엄마는 말없이 연서를 껴안았다. 연서는 울지 않았다. 아버지는 장 노인처럼 이동식 침대에 실려 나갔다. 연서는 상복을 입었다. 선생님과 친구들이 왔다. 아버지의 영정 앞에 절을 하는 선생님과 친구를 보면서도 연서는 울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애틋함 같은 것은 없었다. 그냥 격식과 허울뿐인 절차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를 선산에 묻던 날, 하관을 할 때 연서는 조금 울었다. 다시는 아버지를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하자 눈물이 조금 더 났다. 땀으로 범벅이 되고, 모기와 파리가 달려드는 숲이 싫어서 대성통곡을 했다. 사람들은 같이 울었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 아버지보다 젊은 나이에 딸 하나 데리고 혼자 된 엄마를 위해 우는 것 같았다.
엄마는 아버지 대신 미망인으로 농협에 특채 되었다. 아버지의 빈자리는 금세 엄마의 사랑으로 채워졌다. 엄마만 있으면 돼. 엄마만. 연서는 엄마의 아들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저승에 간 아버지 보란 듯이. 하필이면 결혼한 남자가 아버지랑 닮았다. 다른 점은 겉보기에 무뚝뚝하지 않고 잔정 많고 부드러워 보인다는 거다. 아버지는 무뚝뚝한 이면에 따뜻함이 있었을까. 남편은 부드러운 이면에 차가움이 있었다. 연서는 딸이 아니라 아들 둘을 낳았다는 것이 엄마랑 달랐다. 양파처럼 인간은 껍질을 벗기면 벗길수록 더 벗길 것이 있다. 끝내 아무 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벗겨도 끝내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양면성이다.
장 노인의 자리가 깨끗하게 치워졌다. 내일이면 다른 노인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늘 그래왔다. 요양원이니까. 건강을 찾아 퇴원하는 노인은 없었다. 죽어야 나가는 곳이다. 현대판 고려장. 거기는 죽지 않고 나갈 수 있는 문은 어디에도 없다. 중증 환자만 눕히는 병실은 그렇다. 제 발로 들어왔다가 죽어나가는 노인도 봤다. 병실에 새 식구가 들어오면 한동안 먹을 것도 많고, 활기를 띤다. 새 식구가 된 노인의 가족이 자주 면회를 오기 때문이다. 몇 달 지나지 않아 아들도 며느리도 딸도 사위도 친인척도 시나브로 볼 기회가 적어진다.
연서가 장 노인, 한 노인, 강 노인과 같이 한 병실에 있은 지도 일 년이다. 말을 잃어버린 환자들끼리도 의사소통은 가능하다. 눈빛으로나마 서로를 위로하고 위로 받던 사이다. 강 노인과 한 노인이 연서를 물끄러미 보며 눈빛으로 말한다. ‘저 할멈 잘 갔어. 이제는 나나 저 할멈 차례겠지.’ 연서는 아니라고 해 본다. 맞다. 연서는 일 년 사이 외계 어 같지만 엄마랑 의사소통도 하게 되었다. 의사는 기적이라고 했다. 노인은 새로 교체될 것이다. 죽었거나 다른 병동으로 옮겼거나 그것이 그것이다. 환자의 가족이 침대 곁에 빙 둘러 서거나 누구 한 사람 남아 환자를 지킬 때는 끝이란 것을 안다. 임종이 가까워진 환자의 보호자는 24시간 대기한다. 보호자는 형제자매에게 연락을 한다. 소식을 받으면 환자 가족이 어중이떠중이 모여든다. 노인의 숨이 끊어지지도 않았는데 자식들끼리 재산 싸움을 대판으로 할 때도 있다. 가랑가랑 가래 끓는 노인은 사람도 아니다. 노인도 명이 붙어 있으면 의사소통은 못해도 들을 수는 있다. 시체 취급 마라. 아직 살아있다.
연서는 엄마를 본다. ‘엄마, 나 여기서 나가고 싶어.’ 연서의 눈이 애절하다. 엄마는 연서의 손을 잡는다. 연서는 외계어로 말한다. ‘나랑 비슷한 환자가 있는 병동으로 옮겨 줘.’ 엄마의 손을 꼭 잡는다. 미세한 세포들이 일어선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도록 끈질기게 손가락을 엄마의 손바닥을 긁는다. 엄마의 입이 쫙 벌어진다.
“손가락 끝이 살아났어. 연서야 맞니?”
엄마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 연서는 손가락에 힘을 푼다. 연서의 얼굴은 다시 평온해진다.
남편과 두 아들이 왔다. 엄마는 열심히 연서의 외계 어를 통역한다. 연서가 통증클리닉이나 뇌졸중치료 전문 병원으로 옮겨 달라 한다고. 의사의 말이 환자 본인의 마음먹기에 따라 증세가 달라질 수 있다는데. 환자가 살 의지가 생겼으니 희망적이지 않느냐고. 남편은 물끄러미 연서를 본다. 그 눈에 애절함이 있다. 한 달 만에 본 얼굴은 살이 쏙 빠져 딴 사람 같지만 차갑던 눈빛이 간절함으로 바뀌었다. 두 아들은 연신 연서의 팔다리를 주무른다. 감각도 없는 팔과 다리를 꾹꾹 누른다.
“어미 손가락 끝에 감각이 살아났어. 강 서방, 손 한 번 잡아 봐. 내 말이 거짓말인가.”
남편이 연서의 축 늘어진 팔을 잡더니 손가락을 만진다. 손가락 끝을 손톱으로 꾹 누른다. 아프다. 연서는 인상을 찌푸린다.
“할머니, 엄마 손가락이 움직였어요.”
두 아이가 소리친다.
“엄마, 여긴 어때?”
두 아이가 발가락 끝을 꼬집고 발바닥을 간질인다. 연서의 발이 움찔한다.
“살았어. 살았어. 엄마, 신경이 살아나고 있어요.”
두 아들이 생물시간에 열심히 신경계통을 공부했나보다. 아니면 생물 선생님을 붙잡고 뇌졸중에 대해 배웠는지. 한 달 만에 본 남편과 아들이 달라 보인다. 아, 사랑이구나. 연서는 처음으로 느낀 것 같다. 사랑을 잡으면 부와 명예는 저절로 따라 온다고 누가 그랬을까.
연서는 뇌졸중 전문 병원으로 옮겼다. 죽어가는 노인만 모아놓은 요양병원 중환자실이 죽음이라면 여기는 삶이다. 연서처럼 뇌졸중으로 전신마비가 되었거나, 몸 반쪽이 불구가 되었거나, 하반신 마비가 온 환자들, 휠체어를 타고 재활치료를 다니는 환자들이 모인 병원이다. 비슷한 연배의 환자 병동이라 늘 시끄럽다. 시끄럽다는 것은 생동감을 준다. 연서는 그냥 고맙다. 바라보는 것, 듣는 것, 느끼는 것 전부다 고맙다.
산비탈을 깎아 널찍하게 세워진 병원은 앞이 확 터였다. 연서는 3층 병동에 있다. 연서의 자리는 여전히 창가다. 엄마는 창문 가리개를 활짝 끌어 올려놓고 병실을 나간다. 창밖에 은행나무가 보인다. 새 순이 파릇하게 돋고 있다. 봄이구나. 연서는 다시 반대쪽 창밖으로 눈길을 준다. 산 능선이 보인다. 오묘하다. 녹색이면서 녹색이 아닌 산, 살아 꼼지락거리는 느낌이 강하게 스며든다. 창틈으로. 산다는 것은 오묘하다. 살아있구나. 연서는 휠체어를 밀고 병실로 들어서는 엄마를 본다. 재활운동 갈 시간이다.
2015. 겨울 <경남작가 2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