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란 교수의 견해에 응하여 1 - 교회쟁이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자
오늘이다. 산길을 내려와 면으로 가다가 자동차 안에서 라디오를 들었다. 기독교방송이었는데, 아마도 사연과 함께 찬송가를 신청하는 프로그램이었던 모양이다. 때마침 신청곡을 넣은 여인은 결혼 20주년을 맞이하여 남편에게 노래를 선사한다고 했다.
전화 인터뷰에서 그녀는 “직장과 교회와 가정밖에 모르고 살아 온 남편에게 감사드린다”고 했다.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그녀의 남편이 ‘생계를 위한 직장과 영혼을 위한 교회와 처자식만을 위해 존재해왔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신앙은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짐작컨대 그녀의 남편은 직장을 다니되 노동조합에 개입하지 않았을 것이고, 교회를 다니되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에게 인색하거나 무관심했을 것이고,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도 오직 가정의 안전과 평안함만을 바랬을 것이다. 짐작컨대 가정의 안위가 세상의 안녕보다 소중했을 것이고, 우주는 가정과 저가 다니는 교회를 중심으로 회전했을 것이다.
이를 두고 ‘나쁘다’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부족하다’라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서에 이르지 않았는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다고, 그리스도인은 자못 원수마저 사랑해야 한다고. 어려운 말이지만 이 말을 두고 적어도 고민할 수 있는 사람은 복되다,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진행자가 물었다.
“집사님은 어느 교회를 섬기고 계십니까?”
“DD교회를 섬깁니다.” …
그제야 나는 알았다. 그 사람들이 바로 ‘교회쟁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들은 예수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아마도 원수처럼 여기고 예수와 전혀 다르게 용서하지 않을 불교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가는 길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고. 이 식대로 한다면 교회는 마땅히 교회를 죽여야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선 교회 그 이상이며, 교회 그 너머에 있으며, 교회란 딱지가 앉지 않은 자리에도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를 섬기고, 교회는 세상을 섬기고, 세상은 이미 그 권세를 맘몬(재물신)이라는 악마에게 넘겨주었다.
김정란 교수는 라는 글에서 분명한 개념으로 양과 염소를 갈라놓았다. 교회쟁이와 예수쟁이다. 조직을 섬기는 자는 교회쟁이요, 인격을 섬기는 이는 예수쟁이라고 풀이된다. 교회쟁이는 만인을 교회로 끌어 모으려고 광분한다. 그야말로 인해전술(人海戰術)을 맹신하는 것이다. 과거에 대통령 선거 때마다 정치인들이 추종자들을 동원하여 여의도로 집결시키듯이, 종교 역시 세(勢)를 과시함으로써 ‘진리의 소유권’을 주장한다. 그들에게 조직은 힘이고, 힘이 곧 진리다. 로마제국과 아메리카제국이 즐기는 스타일이다. 이는 힘의 종교이며, 예수와 무관하다. 이쯤에서 가톨릭교회 역시 그네들과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해 두고 지나가야겠다. 특히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전 세계를 순방하면서 광장으로 온 나라의 가톨릭신자들을 동원하여 그 세력을 과시하는 데 게으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전에 히틀러도 광장을 좋아했고, 마오쩌뚱도 광장을 좋아했다. 마오쩌뚱의 시신은 아예 천안문 광장에 비치되어 관광객들과 추종자들에게 전시되고 있다. 다행히도 요즘 가톨릭교회가 개신교처럼 정기적으로 때마다 여의도 광장을 빌려쓰지 않는 게 고마울 지경이다. 종교는 기실 상품이 아니고, 대단한 선전탑과 광고물을 통하여 복음이 증거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는 무력한 자들을 위해서 무력한 채로 죽음을 당했다. 예수는 진리를 보증하기 위해 ‘힘’을 요구하지 않았고, 제 몫으로 막강한 세력을 키우지도 않았다. 그의 제자들은 열 두어 명이라고 했고, 그의 추종자들은 대개 가난한 이들과 여성들이었다. 권세 있다는 자들의 생리에 도무지 이해가 맞아떨어지지 않는 존재가 예수라는 인격이었다.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다고 말한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천사들이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받쳐 줄 것이다. 수없이 기적을 요구했던 바리사이파들과 군중들에게 도리질을 하셨던 예수처럼, 예수는 자신의 권능을 보임으로써 자신의 진리를 증거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철저히 ‘인간’ 안에 머물렀다. 그리고 어쩜 고스란히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는 재판정에서 호들갑을 떨지 않았고, 고난 속에서 하느님을 증거하였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라고 믿고, 그의 운명을 따라 걷는 사람들이 곧 ‘예수쟁이’다. 과연, 우리는 교회쟁이인가? 예수쟁이인가? 아니 무엇이 되려고 하는가?
김정란 교수의 견해에 응하여-2: 예수쟁이를 위해 찬가
시몬 베이유는 그리스도교를 ‘노예들의 종교’라 했다. 그리스도교는 불행의 낙인이 찍힌 자들, 피압박자들의 종교이며, 이들의 갈망으로 세워졌다고 말한다.“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했던 프리드리히 니체마저도 그리스도교를‘바닥에서 기는 자들이 높은 자들에게 저항하는 종교’라고 했다. 실상 그리스도교의 모태가 되었던 이스라엘의 신앙선조들은 이집트의 노예 출신이었고, 예수조차도 노예와 다름없는 노동계급 출신이었다. 그래서 노예들의 종교는‘십자가’를 상징으로 삼는다. 사랑은 십자가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사랑은 급기야 십자가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나자렛 예수처럼 스팔타쿠스의 지휘아래 봉기를 일으켰던 노예들도 로마의 거리를 십자가로 더럽혔던 것이다. 그렇게 십자가는 노예들의 종교 안에서 기억되고 부활에 대한 희망 안에서 경축된다.
예수와 스팔타쿠스는 모두 로마의 국가 안위에 위협을 가하는 반란자로 지목되어 죽었다. 로마에도 국가보안법이 있었다면, 당연히 그들은 100% 국가보안법의 희생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쟁이들의 삶은 국가보안법과 양립할 수 없다.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물을 주고, 감옥에 갇힌 자를 찾아가 주고, 세상의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대신 목소리를 높이고, 노동자들과 빈민들을 위해 살았던 사람들을 국가보안법은 자유시장경제-자본주의를 위태롭게 만든다고 범죄자로 낙인찍는다.
마리아의 노래에선 하느님께서“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 없는 이를 높이셨으며, 배고픈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다”고 읊고 있지만, 한겨레 21 기사를 보니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란 분은 “전교조 5대 강령 중 하나가 50대 기업을 까부수고 50대 교회도 파괴하라는 겁니다. 왜? 저 잘 사는 놈들, 대기업가들 다 까부수고 나눠 갖자. 좌경사상에 물든 노동자들은 사장을 노동자 피 빨아먹는 흡혈귀라고 생각해요. … 우리 정부는 온갖 세금을 잘 사는 사람들에게 붙여(내게 해서) 특별히 강남 사람들을 못살게 하려고 해요. 좌경사상은 있는 사람들 때려잡아서 다 평등하게 살자는 겁니다. … 사학법까지 만들어서 학교 세운 사람이 이사장 못하게 하고 교육이념도 다 없애버리면 장래가 없어요. 기독교 때려잡자는 얘기고 공산화하겠다는 얘깁니다”라고 원색적인 언어로 세상이 뒤집어질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는 현상은 정말 국가보안법이 그들 기득권층에겐 맥가이버칼 같은 만능열쇠였다는 생각을 확신하게 만든다.
교회이든, 부유층이든, 친일파이든 국가보안법은 그들만을 위한 법이었고, 국가보안법 폐지는 그들에게 천부당만부당한 것이라고 우길만한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아예 노무현 정권 자체를 좌파정권으로 규정하고 있으니, 이참에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다음 선거에서 우익적 성향을 가진 정당(한나라당 같은)이 집권한다면 어쩜 노무현 대통령도 다른 역대 대통령처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에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집단적 광기는 이성도 양심도 ‘초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러한 왜곡된 신념이 종교적 열정과 결합되어 있다면 경험상 말릴 재간이 없는 까닭이다.
고등학교 때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늘 넘어오던 언덕이 있었다. 그 언덕 위엔 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부흥회가 있다기에 구경삼아 들어가 본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내가 귀로 들은 내용은 이러했다. 초청부흥사가 말한다. “성도 여러분 이 교회에 대형 버스가 필요하다고 믿습니까?” “아멘.” “성도 여러분, 육신보다 영혼이 구원되어야 하지요? 그러면 교회에 돈을 많이 내야겠지요?” “아멘.”
여의도 순복음 교회 조용기 목사가 한번 움직이면 5만 명의 신도가 따라붙는다고 한다. 그래서 여당이고 야당이고 그분을 제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안달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종교는 이미 권력의 힘을 맛보았다. 돈이 권력을 낳고, 동원능력이 권력을 가름한다. 종교를 이용하여, 예수를 빙자하여 돈을 모으고, 부동산을 매입하고, 빌딩 같은 교회를 세우며, 종교-정치적 세력을 키우는 이들은 진짜배기 교회쟁이다. 이들에게 예수가 노동계급 출신이라는 사실은 숨기고 싶은 일이며, 베델교회이든 뭐든 교회이름으로 즐겨 지명을 빌려쓰는 이스라엘이란 나라의 조상이 노예들이었다는 것은 수치스런 과거사일 뿐이다. 지금은 찬송과 영광의 하느님, 황제보다 더 권능한 예수만이 그들의 주님이다. 아동용부터 성인용까지 예수란 이름을 파는 기업이 곧 교회쟁이들이 말하는 은혜의 전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