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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는 5월 15일의 서울역 집회의 연속타였다. 만일 5월 15일의 서울역 집회가 없었다면 광주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5월 15일 대학생들이 비겁한 수단으로 전경들을 죽이면서까지 서울역 집회를 가져야 했을 이유가 있었을까? 아니다. 없었다. 1979년 10월 16일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 이후 과도기 정부의 대통령이었던 최규하 대통령이 취임 10개월 이내에 선거법 제정과 대선 선거관리를 마치고 정권을 새 정부에 이양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양김씨는 그 약속을 믿어주어야 했다.
그런데 1980년 5월 초에 당시 서울대 학생회장이었으며, 현 국회의원 심재철에게 걸려온 (우리가 그 발신자는 간첩이었을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하는) 괴전화가 한국 근세사의 흐름을 바꾸어놓았다. 그것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괴전화였다. 당시 심재철은 그 유언비어를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는 괴전화에 속아서 이용당하였을 뿐 아니라, 그 유언비어에 한마디 덧붙여 전두환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순식간에 서울 대학가에 쫙 퍼진 이 유언비어는 5월 15일의 서울역 집회에서 사상 초유의 십만 명이 넘는 학생 시위대를 형성한다.
그리고, 심재철에게서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에게로, 그리고 다시 박관현에게서 광주의 혁명가 윤상원에게 전해진 이 유언비어는 점점 증폭되어 윤상원은 광주시민들에게 전두환이 경상도 군인들에게 광주 시민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졸업자이면서도 노동자로 위장 취업하여 좌익 노동 운동을 하고 있던 윤상원은 공산주의에 물든 혁명가였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박관현이 심재철로부터 전해 주었던 전두환 쿠데타 유언비어를 사실로 여겼던 듯하다.
그리고, 윤상원이 5월 18일 10시부터 계엄군 학살 유언비어를 광주 일대에 퍼나르게 된데는 심재철-박관현, 박관현-윤상원의 연락 고리 외에 또 하나의 출처가 있었다. 5.18일 오전 10시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누군가가 연합통신 기자를 사칭하면서 외치던 함성은 "400만도민 학살지령이 떨어졌다"였다. 이렇게 유언비어를 조작하여 광주사태를 일으킨 자가 지금 5.18기념사업회 간부로 지방에서 책임을 맡고 있다는 데에 5.18 단체들의 위선이 있다.
사실, 당시 윤상원이 "전두환 쿠데타" 유언비어와 "400만도민 학살지령" 유언비어에 속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그는 김대중이 5월 22일 쿠데타를 일으키려 하였다는 사실을, 그리고 김대중의 쿠데타 거사 계획이 5월 16일 이화여대 강당에서 김대중 홍위병 몇명이 검거될 때 탄로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윤상원의 시각에서는 5.17 긴급조치는 두개의 쿠데타의 충돌이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5.18광주사태를 "민주항쟁" 혹은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자고 하는데, 이 두 용어 모두 잘못된 용어들이다. 우리는 정치적 이익 집단이 일으킨 쿠데타를 "민주항쟁" 혹은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당시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담당했던. 중앙정보부 수사관 이기동씨는 전남 광양 출신인데, 김대중 일가에서 동향 사람으로 여기는 막역한 관계이다.
이기동은 그가 1999년 7월호 신동아에 기고하였던 특집기사 "남산 지하실에서 만난 김대중·김홍일·한화갑"에서 김대중의 내란음모는 사실이었으며, 그럼에도 자기가 김대중을 어떻게 보호하여 주었는지를 증언하였다:
<<나는 “이 여사님, 제가 직접 보았으니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여기 군인들을 시켜 강제로 회수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으니 저에게 건네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이씨는 체념한 듯 A4용지 두 장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두 장 중 한 장에는 소위 ‘예비내각’ 명단(당시 일간지에 발표)이 적혀 있었고 또 한 장에는 5월22일 정오에 서울 장충단공원을 비롯한 각 지방 시청 앞에서 ‘민주화 촉진 국민대회’를 개최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
‘예비내각’ 명단이란 무엇인가? 요즘 아이티에서는 반군과 정부군간에 시가전이 한창이다. 왜 반군인가? ‘예비내각’ 명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왜 6.25때 북괴군의 남침이 침략이었는가? '예비 시장"명단을 가지고 쳐들어왔기 때문이다. 4월에는 김영삼씨 지지자들과 각목 들고 싸우던 김대중씨 일행이 선거를 거치지 않고 민중봉기로 집권하는 혁명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그리고, 물리적인 방법으로 최규하 대통령을 강제로 하야시키고 내각을 개각하여 하였던 이런 시도는 법치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므로 "민주항쟁"도 "민주화운동"도 아니다.
왜 광주사태가 일어났는가? 과잉 진압 때문에 일어났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광주사태가 유혈 충돌을 피할 수 없었던 이유는 폭도들이 도청을 점령하려 하였으며, 계엄군은 결사적으로 도청을 지키려 하였기 때문이다. 도대체 총검과 수류탄과 장갑차로 무장한 폭도들이(혹은 칼과 낫으로 무장한 시민군까지 합친 이십 만 명이) 200명 미만의 군인들이 지키는 도청으로 쳐들어가며 장갑차로 군인들을 깔아죽일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무엇 때문에 광주 방송국들과 세무소를 불태우며 교도소를 습격하였는가? 이것은 혁명이었기 때문이다. 혁명군은 제일 먼저 도청 소재지를 정복한다. 여기에 군인들은 도청과 공공시설을 보호하여야 할 이유가 있었으며, 시민군의 기관총 공격에 밀린 계엄군에게 처음으로 공포탄이 지급되면서 5월 21일 자정에 도청에서 철수하여 광주외곽으로 도망하자마자 시민군은 광주에 해방구(공산주의 자치 행정구)를 설치하였다. 이것이 광주사태이다.
5.17 긴급조치는 김대중의 5월 22일로 예정된 내란 거사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목적으로 취하여졌겠지만, 그럼에도 이미 5월 22일 민중봉기를 준비하고 있었던 그의 추종 세력들이 강행한 것이 5.18광주사태이다. 그래서 그들은 파출서를 모두 파괴하였으며, 그래서 그들은 도청을 경비하는 군인들을 공격하였으며, 예정대로 5월 22일 도청을 정복하고 궐기대회를 열었으며, 전국적으로 민중봉기를 확대시키는 작전을 시도하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폭도라는 말에 가려진 사람들 하나 하나는 착하고 선량한 소시민들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광주사태의 특징은 조선대 김종배(당시 31세) 등 몇명을 제외하고는 학생이 없다는 사실이다. 누가 시위대였는가? 대부분 고아, 구두딱이, 떼밀이, 무직자, 노동자들이었다. 약속이나 한 듯이 그들의 증언은 그들의 가난한 삶 서술로 시작된다. 그들은 평소에는 착한 사람, 그러나 세상이 뒤집힐 기회가 있으면 언제든 혁명 투사로 돌변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결코 빨갱이들은 아니었다. 우리는 그들의 입장을 사회학적인 시각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광주사태의 불가사의 그 배후에 분명 북한 세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한 예가 시민군이 도청을 점령하자마자 정체 불명의 사람들이 도청 지하창고에 순식간에 광주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다이너마이트와 TNT를 설치하였다. 만일 간첩이나 폭도가 폭파시키기 전에 한 군인이 목숨을 걸고 5월 25일~26일 양일간에 폭약 뇌관을 일일이 분리시키지 않았다면 광주시는 언제 사라져버릴지 모르는 운명이었다. 광주시민이 혹은 민주화운동가가 전남도청에 다이너마이트 폭발 장치를 설치하였는가. 아니다. 광주 사태 배후에 북한 세력이 있었다.
광주에서 시민군이 조직된 때는 5월 21일(음력 사월 초파일:부처님의 탄생일)이었다. 그런데, 5월 19일 또 다른 시민군이 이미 나주에 침투하여 오후 1~3시 사이에 예비군 무기고에서 2000 여정의 총기류와 중화기 수류탄등이 탈취되었다. 그 시간대이면 아직 광주 사태 희생자가 없었던 때였는데 무엇을 위하여 수천 정의 총기류가 필요하였단 말인가? 우리는 그 시민군이 광주 시민이었는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간첩단이었을 가능성이 많음은 그들은 나주 경찰서 병력이 김상윤서장의 인솔로 광주의 도청 경비 작전에 동원되었다는 정보를 미리 알고 경찰 병력이 (서장직무대행을하던 김계수 경무과장과 잔여 병력이 20여명을 제외하면) 텅빈 틈을 타 무기 약탈을 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나주 채석장에 여러 리어카 분량의 다이너마이트가 보관되어있었다는 사실은 현지 주민들도 모르던 비밀이었는데 폭도들이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도청에 내려놓자마자 재빠르게 폭파 장치를 했다는 사실은 그 폭도들이 평범한 광주 시민군이 아니라, 특수훈련을 받았을 북한군이었을 의심을 더해 준다.
그러면 북한군이 왜 도청에 다이너마이트와 TNT 폭파 장치를 해 두었을까? 민주화운동을 위해서? 아니다. 당시 북한군 병력을 휴전선 일대에 총집결시키고 광주사태가 전국적으로 확대되기를 기다리던 김일성은 도청 폭발과 더불어 남침하려는 작전을 세워두었을 것이다. 만일 그 이유가 아니었다면 누가 무엇때문에 몇톤 분량의 다이너마이트 폭발 장치를 도청 지하창고에 해놓았는지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리고, 광주사태 배후에 북한군이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 시민군의 증언에서도 드러난다.
당시 시민군 상황실장이었던 朴南宣(당시 35세)은 그것을 이렇게 증언한다. 당시 공수부대원들은 정말로 겁에 질려 있던 쪽은 시민들이 아니라, 시민군 인파에 비해 숫적으로 훨씬 열세였던 공수부대원들이었다고 말한다. 시민군의 증언도 그것을 뒷받침한다:
<<두 공수대원에게 수갑을 채워 무릎을 끊게 한 다음 자리에 앉히려는데, 이들을 잡아왔다는 소식이 퍼졌는지 사람들이 몰려들어 상황실 안팎이 소란스러워졌다. 『트럭 뒤에 매달고 다니면서 돌로 쳐 죽여야 해!』『분수대 앞으로 끌어내 공개적으로 총살시킵시다!』무릎이 꿇려진 공수대원들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5월 22일)>>
<<『잡아온 계엄군은 어디 있소?』『저기 있습니다』조사반장이 손을 들어 사무실 한쪽을 가리켰다. 구석에는 양손에 수갑을 차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는 얼룩무늬 군복차림의 공수대원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는 다가올 죽음을 생각하는 듯 입술까지 창백하게 변한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순간 증오심이 타올랐다.『어이! 조사반장, 저 자를 이리 데려오시오. 수갑도 풀어주고』손목이 자유로워지자 약간 긴장이 풀리는가 싶더니 다시 굳어지기 시작했다.『소속부대는?』『상무대 급양대 소속입니다』『이름은?』『병장 김기범입니다』『언제 어쩌다 잡혔나?』『조금 전 외곽병력에 보급임무를 수행하고 돌아가는 길에 잡혔습니다』꼬박꼬박 대답을 하고 있었지만 다리는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5월 26일)>>
당시 광주 시민 대다수는 무기 반납을 원했는데, 폭도들은 총기로 위협하며 무기 반납을 막았다. 심지어 그들은 부지사까지 총기로 위협하였다. 신동아 1988년 5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朴南宣은 그것을 이렇게 증언한다.
<<무장병력 20여명을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가 2층 복도와 부지사실 문앞에 M16으로 무장한 병력을 배치시키고 내 지시가 있으면 무조건 전부 사살해버리라고 명령한 뒤 부지사실 문을 군화발로 차고 들어갔다.부지사실에는 독립투사인 최한영수습위원장과 부지사 정시채, 장휴동 등 광주의 저명인사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빼어들고 하늘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가 천천히 내려 그들을 겨눈 채『어느 놈이 마음대로 무기반납을 결의했느냐?』고 악을 버럭 쓴 뒤『앞으로 이제까지의 죽어간 사람들의 피를 배반하고 그따위 소리를 지껄이면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경고했다. 그러자 수습위 일행중 노수남이 일어나면서『지금 무슨 짓거린가? 이제 더 이상의 피를 흘리지 말고 이대로 끝내버리세. 그렇지 않으면 어찌하자는 것인가?』고 말했다. 나는 그를 향해 쏘아버리겠다는 듯이 권총을 겨누었다가 차마 쏘지 못하고 권총의 손잡이로 노수남의 등을 찍어내렸다. 그는 픽 쓰러졌다. 맞아 떨어진 노수남, 노기와 살기가 등등한 나의 행동으로 부지사실은 완전히 얼어붙어버렸다.『시민의 전체의사를 무시하고 계엄당국과 내통하여 무조건 무기를 반환하자거나 하는 놈이 있으면 모두 죽여버릴테니 모두 도청을 떠나시오! 알았소?』.(5월 25일)>>
당시 대다수의 광주 시민들은 폭도들이 아니라, 선량한 시민들이었으며 수습을 원하는 온건파였다. 단지 수습하자는 말을 하다가는 강경파로부터 생명에 위협을 당하였을 뿐이다. 그것을 宋基淑 전남대교수(당시 수습위원)는 그가 1985년 7월에 월간조선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전남대 학생들이 『전남대 교수로 유신정권때 해직됐다 복직된 송기숙 교수』라고 내소개를 하자, 다시 『뮛 때문에 왔느냐?』고 다그쳤다. 나는 『더이상 사태가 악화되어서는 안된다. 모두 한 발짝씩 물러서서 수습의 길을 찾자』고 사람들을 설득했다. 그러자 그중 한명이 나서서 『사람이 이렇게 많이 죽었는데 수습은 무슨 수습이냐』며 내 목에 총을 들이댔다. 두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
이 증언문에서 송기숙 교수 목에 총을 들이댄 자가 학생인지 광주 시민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법치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화 중 교수 목에 총을 들이대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아니다. 전혀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그렇게 혁명을 위해 인륜마저 저버리는 일은 북한군이나 하는 일이지, 법치 민주주의를 존중하는 시민 사회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북한군 장교처럼 행세하는 일이 총과 무력으로 여론을 지배하는 일이 어떻게 일어났을까? 그들이 대학생이거나 광주 시민이었을까?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에 우리가 광주사태 배후에는 분명 불순분자가 있었다고 판단하는 이유가 있다. 설사 그들이 북한군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무언가 불순한 동기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사람은 정의를 위해서 부지사와 교수와 광주시 각계 지도자들의 목에 총을 들이대며 위협하지 않는다.
이 경우 김대중 홍위병들은 전라도 부지사와 송기숙 교수 등 수습위원들의 목에 총을 들이댄 자는 민주화운동 유공자라는 논리를 제시한다. 지금도 그들은 그 논리에 승복하지 않는 자들을 위협한다. 그러나, 광주사태를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이 가능하다. 당시 북한군은 광주사태가 조금만 더 확산되면 총공격할 태세였다. 그런데, 누가 김일성의 꼼수를 깨부스었는가? 바로 용감한 광주 시민들이다. 나라를 지키는 국군에게 총을 쏠만큼 용감한 폭도들이 아니라, 강경파의 갖은 위협과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강경파와 싸우며 광주사태 확산을 저지하였던 용감한 시민들이 광주시를 지켰던 것이며, 그들이 광주시를 지켰을 때 그들은 대한민국을 북괴군의 남침으로부터 지켜냈던 것이다. 그렇다, 광주의 진정한 명예는 북한군 냄새나는 행동을 하였던 강경파가 아니라, 진정한 용기로 강경파와 싸웠던 온건파 시민들에 의해 기념되어야 할 것이다.
아마 광주 시민들 중 그 누구도 총을 든 폭도들이 지배하는 무법천지로 광주가 잠시나마 되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그 무엇이 그들로 그토록 대담한 행동을 하게 하였을까? 한 시민은 그 단서를 이렇게 밝힌다. <<당시 유언비어 가운데 서남부지역 에서만 나도는 내용중 하나가 광주 민중봉기가 성공하면 김대중 씨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이미 시장 군수를 할수있다는 해괴한 유언비어가 광주 이외 지역에서 번졌다는 사실을 주시해야 합니다.>> 이 유언비어를 뒷받침하는 것이 김대중의 예비내각 명단이 기록된 문서이다. 당시 광주에서 혁명을 공연하는 극단이 있었으며, 혁명 분위기에 들뜬 사람들이 있었다. 평소에는 소외 계층이었던 사람들이 투쟁 지도부를 구성하였다는 사실은 우리가 광주사태를 사회학적 시각에서 조명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소외된 계층의 군중 심리를 이용하여 무기를 약탈하고, 군경에게 총을 쏘도록 선동하며 배후에서 조종하는 세력이 있었다. 그들이 누구인가?
당시 김대중의 장남 김홍일씨의 주도로 결성된 ‘민주연합청년동지회( 연청)’은 5월 22일에 김대중이 전국적 민중봉기(혹은 김대중 문서의 표현대로 '민주화촉진 국민대회’ )를 일으킬 때 전국적인 청년 봉기를 일으키도록 되어있었는데, 광주사태와 연청은 어떻게 관계가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누가 무엇때문에 광주를 순식간에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다이너마이트 폭파 장치를 도청 지하창고에 했을까? 어쩌면 그 의문의 열쇠 중 하나를 당시 김대중 지지 시위 중심에 있었으며, 518유공자 포상법을 입안한 동교동계 인사들 중 하나이며, 518유공자 포상을 받은 이해찬 의원이 가지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최규하 대통령을 강제적으로 하야시키고 새 내각을 구성하려던 김대중의 쿠데타 계획과 더불어, 소외 계층의 사람들에게 순식간에 불붙은 혁명 분위기의 불길, 그리고 남한에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고 그 틈을 타 남침하려던 김일성의 꼼수 이렇게 세 가닥의 실이 한데 엉켜 있던 것이 광주사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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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0년 5월에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담당했던. 중앙정보부 수사관 이기동씨가 1999년 7월호 신동아에 기고하였던 특집기사 "남산 지하실에서 만난 김대중·김홍일·한화갑"은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907/nd99070020.html 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2) 시민군 상황실장이었던 朴南宣(당시 35세)이 1985년 7월에 월간조선에 기고한 증언록은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3006.html 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지금 박정희 대통령 일상 모습과 새마을 운동 을 클릭하시면 영화 동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첫댓글 광주 사테는 순수한 민주화 운동이 아니고 전두환의 흠집을 잡아서 척결하고 대중이를 통치자로 만들기의 작전이라고 봅니다 순수한 운동이였다면 그것을 증명하는 방법은 김대중이가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지를 않았으면 그것이 진실에서 비롯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즉 전두환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좋은자료에 감사드림니다 쥔장에허락업시 가저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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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자료 감사드립니다.
이곳에와서 새로운사실을 알았네요.... 좋은자료 감사합니다.
베컴님은 박남선 시민군 대장의 증언을 무시하시는 것인지요? 그 이유는?
어떻게 사건의 발단이 80년 5월 15일 서울 시위에서 부터이냐...웃긴다. 제대로 말하세요 박정희님 돌아가신후 12.12사태 이후 왜 전국에 데모가 일러났는데..전두환씨 정권장악하려 하니까 학생들이 일어난것 아니감요 그리고 자진 해산 그런데 말일세 전도환씨 정권잡으려고 5월 17일날 계엄령확대로 대학교휴교. 언로통제, 정치활동 금지(3김씨 대동령해볼라고 야단이었거든) 이것 때문에 머리좋은 전남대학생들 데모했제 -왜 그런데 학교를 못나가게함. 왜 언론을 통제함. 왜 정치활동을 못하게 함 전두환씨 군부독제 할려고 계엄 확대한것이 아니면 다른 타당한 이유 대보삼 좀 제대로 보세요.
웃기네요~12.12사건때부터라고? 차라리 6,25남침때부터라고하세요~
History-Maker 님, 거짓말 열심히 하셨는데, 님의 거짓말에 속아 드리지 못해 미안해서 어떡하죠? 광주사태 당시에는 국민은 12.12사태라는 말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12.12사태가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한 것은 1988년 이후의 일입니다.
님이 거짓말하고있네요..이미 밝혀진 사건을 ..그리 억지 쓰십니까?
닥터전/ 님도 광주사태 당시에는 국민은 12.12사태라는 말조차 들어보신 적이 없으셨을텐데요.
내용중에 하나씩 봅시다. *1980년 5월 초에 당시 서울대 학생회장이었으며, 현 국회의원 심재철에게 걸려온 (우리가 그 발신자는 간첩이었을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하는) 괴전화가 한국 근세사의 흐름을 바꾸어놓았다.* 그것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괴전화였다. -어떻게 이것을 괴 전화인가요 진실을 알리는 전화아닌가요 전두환씨가 이미 하극상이라는 12.12 구테타를 일르켜 정권을 잡고 있는데 정직하고 진실한 전화지..... 구테타일으키는 입장에서 그리고 전두환씨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괴전화일찌 몰라도.. 민주시민 입장에서는 독재정권을 막고자 하는 정의롭고 올바른 전화지...(말로 진실을 외곡하지 마세요) 간첩일 가능성요
왜 그렇게 간첩으로 몰고가세요 전두환씨도 간접으로 몰고가더니. 역사학자라며..역사는 바르게 보고 바르게 말해야지요. 구테타를 일르켜던 자료 보셨나요.. 군대는 위게 질서가 생명인데. 완전 하극장이지...이것 하나만으로도 사형감이지...그리고 어떻게 그말이 유언비어인가요 어떤 말이든 사실이 아닐때 유언비어라고 하는데 이것 사실이니 유언비어가 아니지...그리고 이글 앞에있는 내용은 왜 빼먹어 버렸나요 (이글 제일 앞부분 빼먹은 내용) -현 국회의원인 심재철과 유시민이 주동하였던 1980년 5월 15일의 서울역 집회 때 대학생들이 탈취한 버스로 전경들을 뒤에서 받아 여러 명을 죽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사태라고 부르
지 않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5월 18일 광주사태 때는 학살 유언비어와는 달리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없었다. 그렇다면, 1980년 5월 15일의 서울역 집회나 5월 18일 광주사태나 과격시위의 성격은 흡사한데, 왜 유독 한쪽만 사태라고 부르는가? 그것은 5월 15일의 서울역 집회에 비해 518광주사태는 혁명의 성격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기록하려면 다 기록하지.왜 앞부분은 빼먹으셨나요. ) 광주민주화운동때 한명도 안죽었다고... 웃기십니다 존경스럽습니다 거짓말 그만하세요 순진한 얘들이 속는다니까요..2004년 03월05일 오전 6:44:53 에 남북교류에 역사학자님이 기록한 글 인용
History-Maker 님, 그것이 괴전화였다는 것은 제 말이 아니라, 심재철, 유시민, 한홍구의 말입니다. 그리고 그때는 정승화가 김재규의 쿠데타를 완성시키려 하는 음모를 애국군인들이 다행히 막아내었던 12.12 사태에 대해서는 아직 국민이 듣지 못하였던 때입니다. 12.12사태에 대해서는 1988년부터서야 보도되기 시작했어요.
이사람 완전히 어용 역사 학도 아냐?
정승화 총장이 구테타를 하려고 했다구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그것은 전두환씨와 하나회 일당이 자신들의 12.12정권 테러를 장당화 하기 위해 조작한 말이지 지금 이시대에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나요. 정말로 님의 말대로라면 그들이 애국 군인었다면 군인 자리에 그대로 있어야 하지 않나요 세계역사에도 없는 체육관 선거에 대통령 당선이 무엇입니까?(12.12 그리고 518은 처음부터 정권을 잡으려고 했던거지- 왜 계엄 상태에서 언제 북에서 내려올지 모르는데 왜 군인들은 군사훈련을 안시키고 대모막는 훈련을 시킵니까 이해가 됩니까?. 전체적인 흐름을 따라 여러 정황들을 살펴서 보라니까요...
History-Maker님, 정승화 총장이 12월 13일자로 김재규의 쿠테타를 완성시키기 위해 합수부를 해체시키고, 보안사령관을 해임하라는 인사명령을 발부하였지요?
말도 안되는 이유 되지마세요...정승화 참모총장이 무슨 큰 죄지었다고 상급자를 체포한단 말이요? 대톨령이 체포 명령이 내렷나요?
닥터전/ 글을 제대로 읽으신 반박인지요? 정승화가 김재규의 쿠데타를 완성시키려 했었다는 것은 행정기록으로도 입증되는 사실입니다.
아시나요 12.12때 정승화 총장이 쿠테타 죄가 아니라 대통령 시해 방관죄로 붙잡인것을(이것도 12.12쿠테타 합리화 하기위한 명목상이지만) 그리고 그날 전두환씨와 노태우를 중심으로한 하나회 일당이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씨를 강제 연행하고 최규하 대통령께 죄가 있으니 그의 연행하도록 허락해 줄것을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단 사실을 아시나요, 그러자 다음날 국방부 장관을 통해 최규화 대통령위협해 다음날 새벽에 승인을 받은 사실을..
역사학도님이 말하는 말은 12.12 쿠테타를 정당화 하기위한 전두환씨와 그를 따르는 일당들이 한 주장일뿐이지요 그걸 믿으시나요 그 말 믿는 사람 거의 없어요. 말이 됩니까 정승화 총장이 계엄사령관인데 아래 직위에 있는 사람들이 위에 상급자를 연행해가요 그럴러면 최소한 최고의 권력자인 최규하대통령의 허락은 받아야죠 허락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무력을 동원해 상급자를 강제 연행하는 것이 합당합니까 이것은 총살당해야할 하극상이요 분명 구테타입니다.
History-Maker님, 정승화는 김재규의 쿠데타를 완성시킬 속셈으로 합수부를 해체 및 보안사령관 해임 인사명령을 발부했던 것이고, 합수부장은 아직 자신의 임기가 살아있었던 12월 12일에 "대통령 시해사건 수사" 임무를 매듭지어야 할 책무가 있었던 것입니다.
정승화가 무슨 배짱으로 김재규 쿠테타를 완성시킵니까? 완전히 날조를 하고있네요...
님 역사는 말해줍니다... 전두환씨가 대통령이 ?지요 이어 그 일에 적극 협력했던 노태우씨도 대통령이 ?구요. 더이상 말할 것이 있나요. 그들에 대해 무엇이라 말해도 역사는 말합니다. 그들이 자신의 본문에 충실하여 군으로 남아있었다면 모를까 님이 말한 말은 생각해 볼 여지가 없지요...
노태우 다음에 정호용 순서 아녔습니까? 그놈의 6.10 항쟁때문에 .. ..그만 대통령 못했죠...
History-Maker 님, 전두환 장군은 그 시대에 가장 대통령 될 자질이 있으셨던 분이셨습니다. 김대중이 직선제 개헌 못하게 하니깐 최규하 대통령께서 새 대통령 선출하실 방법의 폭이 좁아지셨던 거예요.
폭이 좁아진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상황으로 봐 보이지 않는 협박에 의해 그런 거지요.. 왜 계엄을 확대해 정치인들의 정치 활동을 금합니까? 그리고 한 나라에 대통령을 세우는 것이 최규하대통령혼자의 목입니까 반장 선거도 그렇게 하지 않는데.. 국민투표를 해 국민이 세워야지요.
History-Maker 님, 거꾸로 알고 계시군요. 최규하 대통령의 명령으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양김씨 사면 복권시킨 때가 바로 3월이었지요?
님 말대로라면 신군부에서 이런행동을 한 것도 최규하대통령 명령인가요? 계엄확대-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및 옥내외 집회 시위의 금지,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의 사전 검열, 각 대학의 휴교령, 직장이탈 및 태업파업의 금지 " 등 "5.18일에는 김대중, 김종필 등 26명의 정치인을 학원, 노사분규 선동과 권력형 부정축재혐의로 연행하고 김영삼대통령을 연금.계엄군을 동원 국회무력 봉쇠 "
그시대 헌법에 따르면 이러한 일을 할때는 국회에 통보후 승인을 걸친후 이행되야함.
History-Maker 님아, 김대중 연행은 계엄령이나 군부와 아무 관련이 없었습니다. 당시 김대중이 신현확 총리 내각이 19일까지 총퇴진하라고 최후 통첩을 보냈었고, 학생들을 시켜 최규하 대통령도 19일까지 하야하라고 최후 통첩보냈었지요? 그런데, 5월 16일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전국대학교총학생회장 연석회의"란 이름으로 5월 22일로 예정되었던 김대중의 내란(전국적 민중봉기)을 준비하던 대학생들 중 몇 명이 주동자 명단을 치안본부에 전달하였기 때문에 연행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김대중의 심복이었던 중정 총무국장 이종찬이 치안본부보다 한발 앞서 김대중을 연행하여 보호했던 거예요.
그렇다면 김대중씨만 잡아넣으면 되지 김종필씨를 비론한 다른 정치인들은 왜 잡아 넣고..김형삼씨는 강금하고 정치활통은 왜못하게 했죠 ..국회의사당은 왜 봉쇠했조 ..좀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518진상 조사때 왜 김대중씨가 내란을 일으키려 하기때문이었다는 말은 왜 안나왔죠. .그리고 군인이 계엄선포하고 집권하고 있는 마당에 그것이가능한가요.말이되는 소리를 하세요.지나가는 강아지들이 웃어요..이것은 상식인데 그 시대를 바로보세요. 역사의 진실은 멀리서도 볼 필요가 있지만 어떤때는 그곳으로 들어가서 볼 필요도 있어요..
History-Maker 님, "군인이 계엄선포하고 집권하고 있는 마당에"는 무슨 말인가요? 최규하 대통령이 계엄 선포하셨습니다. "다른 정치인들은" 하셨는데 누가 정치인이었다는 말인지요? 당시 양김씨를 정치인이라고 말할 수 없엇어요.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는 의회정치입니다. 따라서 선거법 직선제 개정에 반대하고 싶으면 국회에서 반대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양김씨는 길거리에서 반대했어요. 더군다나 학생들 선동해 돌 던지에 하면서 말입니다. 3월에 사면복권시켜 주었더니 정치는 안하고 데모 선동만 했어요. 그들이 정치인이었나요? 사면 복권되었다는 의미에서는 정치인이었겠지만 말입니다.
게엄선포한다고 게엄 군인이 정치하는줄 압니까?무슨 말같은 소리를 해야지..
김형삼 김대중 김종필씨가 정치인이 아닌지 지나가는 강아지에게 물어보세요 상식을 모르는 사람이군요. 전두환씨 눈으로 보니까 자기 집권을 도왔던 군바리나 정치인으로 보이지
History-Maker 님, 양김씨가 정치인이라면 그 근거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최규하 대통령 지시로 사면 복권하여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김대중의 경우 1970년대에 김일성에게 정치자금받아 간첩질한 경력 가지고 정치인이라 부르기에 좀 뭣하지요. 그러나, 사면 복권되었기에 정치인 신분으로 이해되었던 것입니다. 김대중에게 사면복권은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면 복권 후 의회정치를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김대중에게 정당이 있었습니까? 정당 소속이 있었습니까? 조총련으로부터 북한 사상서적받아 전국 운동권에 보급하는 세력들이 그 추종자들이었을 뿐 정치적 기반이 없었어요.
박정희때 간첩질한 김대중을 왜 살려주냐요?유신정권에서는 간첩 물증 확실하면 사형 아녔나요?
닥터전님, 김대중은 간첩질만 한 것이 아니라 군사쿠데타로 일으키려 했었습니다. ://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38&article_id=0000281183§ion_id=100&menu_id=100
좀 미친소리 그만 하세요 그러면 김대중씨가 대통령일때 공산화 ?겠네..박정희 대통령 김대중씨 빨갱이로 몰라설때부터 기회가 되면 빨갱이라 고했는데.. 지금도 님은 빨갱이라고하네.. 미친 소리 그만 하세요. 어쩌면 전두환씨하고 똑같은 소리하냐..참 답답하다. 5공때 납치해 내란 음몹죄로 사형시키려고 했다가 외신에 밀려 못했던것 지금이라도 하지. 참 답답한 사람.
내용적인 서술은 아니고, 무조건 '미친소리'라고만 하면 보는사람도 답답하고 님이 '미친듯'보입니다. 잘못된부분을 조목조목 짚으며 반박해야지, 무조건 김대중은 빨갱이 아니다, 위에 적은것들은 다 미친소리다.. 이런소리만 하니 님만 미친사람으로 보입니다만... 위에 게시물의 이런저런 논리주장을 논리로 반박하십시요. 혼자서 열폭해서 '미친소리'라는 말만 반복하지 마시구...
김대중씨는 성이 윤씬가요. 제갈씬가요. 확실히 간첩질 한 것은 맞는데 박정희 그 바보가 김대중 살려둔게 역사에 실수였지요. 황장엽씨가 김일성에게 돈받아 정치 했다고 할까봐 미국 못가게 하던 김대중 결국 황장엽씨가 김일성 돈 받았다고 하였지요.
김대중의 본래 성은 제갈윤입니다.
김대중의 母가 윤씨와 살고는 있었습니다만 제갈씨로 밝혔졌습니다. < 김대중 출생의 비밀>로 검색해 보시면 알수 있습니다.
아 그래서 김해문중에서 김대중을 윤대중이라고 부르지만, 본래의 성은 제갈이군요.
역사학도님 정말로 많이 파악하셨읍니다, 광주사태의 큰줄거리들 잘알수있겠읍니다, 그때 상황이 잘 파악되어있읍니다. 정말 군인이 아니면 대한민국은 벌써 공산화가 되었을것라고 생각합니다. 가짜(사기꾼들)정치인들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