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의소개
▷차의 역사................................................ 차의 기원 중국 당나라의 육우가 지은[다경(茶經)]에 보면, 인류 최초로 차를 마신사람이 화덕의 왕인 신농씨염제(神農氏炎帝) 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산야를 거닐면서 하루 칠십여 가지씩 풀잎,나뭇잎을 씹어 그 효용을 알아보다가 독이 심한 것을 맛보고 중독이 되었는데 찻잎을 씹었더니 그 독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신농씨는 찻잎에 해독의 효능이 있음을 알고 이를 세상에 널리 알렸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신라 선덕왕(A.D. 632~647)때 부터 차가 있었다고 하나, 차 재배가 시작된 것은 신라 흥덕왕 3년(A.D. 828년) 대렴(大廉)이 당나라에서 차종자를 가져와 왕명으로 지리산에 심게한 이후부 터로, 그 곳 사찰을 중심으로 전파되었습니다. 신라 시대는 신라 화랑들을 중심으로 차문화가 발달하였습니다. 그들은 차를 매우 좋아 하였는데 고려 시대의 학자인 이곡(1298~1351)의 기행문 <동유기>에는 화랑들이 사용하던 차도구가 동해 바닷가 여러 곳에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화랑들은 차를 나누어 마심으로써 서로 강하게 결속할 수 있었고,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에 예(禮)로써 화합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화랑들의 수행을 돕는 데 차 생활이 한몫을 차지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라의 차 생활은 통일 신라로 이어지면서 더욱 화려한 꽃을 피우는데, 문무왕 때 김수로왕의 시제(時祭)에 차를 올린 것을 비롯해 각종의 의례에 차를 흔히 썼다는 기록이 많이 발견됩니다. 신라의 차 생활이 고려 시대로 이어지면서 불교문화의 발전과 함께 더욱 융성해 왕실은 물론이거니와 모든 국가 의식, 불교 의식에 차를 올리는 것이 당연시 되었습니다. 차는 귀중한 예물로 여겨져 왕이 신하와 백성들에게 흔히 하사하는 하사품으로 이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고려에 와서 차의 사용이 늘어나자, 궁정에는 다방(茶房)이라고 하는 차를 공급하는 관청이 생겼고 큰 사원 주위에는 다소라고 하여 차를 생산하여 사원에 바치는 부락까지 생기게 되었습니다. 고려 전반에 걸쳐 왕, 귀족, 관리, 선비와 일반 백성들 모두 일상적으로 차를 즐겼으나 초엽에는 귀족 중심의 차문화였고, 무신난 이후 중엽부터는 주로 선비들이 차문화를 꽃피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차 문화는 삼국시대~고려시대에 중흥기를 맞이하다가 조선시대에 쇠퇴의 길로 접어 들었지만, 초의 선사, 다산, 추사등의 훌륭한 다인들의 등장으로 다시 우리차의 재중흥기를 마련하던 중, 근대적인 재배차가 1941년 일본인들에 의해서 우리나라에서 시작되었고, 1969년 농특사업의 일환으로 차 재배가 확대되었지만 외래차인 커피문화의 범람으로 차 산업은 쇠퇴기를 맞았습니다. 최근 우리 전통차가 우리몸에 좋은 기능성들이 알려지면서 그 소비가 매년 늘어나 현재 연 재배 및 소비가 계속 증가되고 있습니다. ▷차의효능 차는 기원전 3400년 경 중국의 황제 신농씨가 최초로 해독제로 썼다는 전설이 '식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랜 옛날부터 우리 인간들이 약초로 이용해 온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성이라고 불리우는 육우는 그의 저서 '다경'에서 '차는 덕을 갖춘 사람들이 마시기에 가장 알맞은 음료수'라고 했는데 이는 차에 훌륭한 성분과 훌륭한 효능이 있음을 뜻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나라의 '동의보감'에도 '차는 기를 내리고 숙식을 소화하며 머리를 맑게하고 소변을 편하게 하며 소갈을 그치고 잠을 적게 하여 독을 푼다'라고 적혀있습니다. 또한 일본의 에이사이선사는 '끽다양생기'에서 '인체의 오장 중에서는 심장이 가장 중요하다. 심장을 건강하게 하는 방법으로 차 마시기가 좋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여러가지 기록들로 미루어 볼 때 차에는 분명히 인체에 유익한 성분이 들어 있어 온갖 질병을 예방 치료하고 심신을 즐겁고 깨끗하고 건강하게 하는 효능이 있음을 알수가 있습니다. 현대에 와서는 식품 영양학 등이 발달함으로서 차의 성분도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명확한 수치로까지 나타내 기호 음료로서의 차의 우수함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1. 녹차는 차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항암 효과를 갖고 있습니다. 중국의 예방의학과학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녹차, 홍차, 우롱차 등 모든 찻잎에 N-니트로소화합물의 합성을 억제하는 항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 중에서도 녹차의 항암 효과는 강력해 홍차의 억제율이 43%인데 비해 녹차는 무려 85%에 이르렀습니다. 일본에서도 시즈오카의 어느 대학의 연구 결과를 보면, 일본의 주요 녹차 생산지인 시즈오카 현 내에서 차 산지로 유명한 오이키와 지역 주민들의 암 사망률은 차를 생산하지 않는 지역에 비해 매우 낮고, 위암 사망률은 전국 평균의 1/3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2. 노화 억제 차의 성분 중에는 항산화 작용을 하는 성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노화를 억제 시킵니다. 찻잎에는 아연, 구리, 철, 망간, 불소 등의 미량의 원소, 카페인, 폴리페놀, 비타민 P 등 일반 음식물에서는 결핍되기 쉬운 광물질과 약효 성분인 유기물이 풍부하게 들어 있습니다. 또한 레몬의 5배나 되는 비타민 C를 함유하고 있어서 피부가 거칠어지는 것을 막고 피하 조직에 탄력성을 주며 보습성을 유지하도록 하기 때문에 피부를 곱게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3. 성인병 예방 나이가 중년에 접어 들수록 성인병을 조심해야 합니다. 차에는 이러한 성인병을 예방하는 성분이 들어 있어 자주 마시면 건강을 지킬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고혈압의 주요 원인은 소금인데, 소금 속의 나트륨 성분이 혈액의 삼투압을 상승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차에는 칼륨 성분이 있어서 나트륨을 체외로 배출하도록 하며, 고혈압을 막아 주는 역할을 합니다. 콜레스테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우리 몸에 콜레스테롤이 많아지면 콜레스테롤이 혈관에 붙어서 혈관벽을 딱딱하게 만들거나 혈관 통로를 좁게 만들어 동맥경화 등을 유발시킵니다. 차에는 EGDg라는 독특한 성분이 있어서 콜레스테롤을 줄여주고 몸 밖으로 배출될 수 있도록 도와 줍니다. 특히 찻잎에는 비타민 C가 풍부해서 지방의 산화를 촉진하고 콜레스테롤의 배출을 더욱 왕성하게 해줍니다. 차에는 인슐린의 합성을 촉진시키는 다당류 성분이 들어 있어서 당뇨병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4. 비만 방지와 다이어트 현대인의 비만은 유전적인 요인도 있지만 주로 고칼로리 음식 섭취와 운동 부족에 원인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생활 속에서 자주 마시게 되는 각종 음료수도 비만을 가져오는 한 요인이 됩니다. 그러나 차는 열량이 거의 없는 저칼로리 음료이기 때문에 체중조절에 더 없이 좋은 음료입니다. 중국 사람들이 고지방 육류를 많이 먹고 기름진 음식을 먹지만 다른 나라에 비해 뚱뚱한 사람이 적은 것은 차가 비만을 억제해 주기 때문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물 대용으로 항상 차를 마시기 때문에 기름진 음식을 먹고도 많은 양의 지방질이 몸 속에 쌓이지 않고 배출되는 것입니다.
5. 중금속과 니코틴 해독 작용 산업화가 되어 갈수록 우리가 먹는 과일이나 채소류, 어패류에 이르기 까지 중금속에 오염되어 건강을 위협합니다. 일반적으로 중금속은 호흡기나 소화기를 통해 체내에 들어가면 배설되지 않고 축적되어 중금속 중독을 일으킵니다. 차에는 이러한 중금속을 해독하는 효능이 있습니다. 차에 들어있는 카테킨이라는 성분은 방사성 동위원소가 뼈골수에 도달하기 전에 인체로부터 제거시켜줍니다. 담배에 들어 있는 니코틴도 마찬가지입니다. 니코틴은 체내에 흡수되면 교감신경을 흥분시켜 혈관을 수축시키므로 혈압을 상승시키고 호흡도 가빠지게 하며, 폐암까지도 발생시킬 수 있습니다. 차의 폴리페놀 성분은 담배의 니코틴과 쉽게 결합하여 체외로 배출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6. 피로회복과 숙취제거 만성 피로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차 한 잔의 여유는 정신 건강은 물론 신체 건강에도 큰 도움을 줍니다. 차에 들어 있는 카페인은 대뇌 활동을 활발하게 하여 체내의 여러 기능을 원활하게 해줍니다. 커피에도 카페인이 들어있지만, 커피 한 잔에는 차보다 훨씬 많은 카페인이 함유되어 있어 중독성이 있습니다. 또한 찻잎에는 커피에는 없는 데오피린과 카테킨, 데아닌이라는 성분이 들어 있어 카페인과 결합하여 카페인을 불용성 성분으로 만들거나 그 활성을 억제하기 때문에 커피에서 보이는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차는 숙취제거에도 놀라운 효능을 발휘합니다. 알콜이 체내에 들어가면 간장에서 분해되어 최종적으로 물과 이산화탄소로 되지만 간장에서 분해할 수 없을 정도의 알콜을 마시면 분해 중간 단계 물질인 아세트알데히드 성분이 쌓여서 숙취가 나타납니다. 찻잎 속의 카페인은 혈액 중의 포도당을 증가시키고 간장의 알데히드 분해 효소의 활동을 왕성하게 하여 혈액 중의 아세트알데히드가 빨리 분해되도록 합니다. 더구나 찻잎 속의 비타민 C가 이러한 활동을 촉진하여 숙취 해소 효과를 더욱 높이게 됩니다.
7. 변비 치료 현대인들은 많은 스트레스와 잘못된 식습관으로 인해 변비에 걸리기 쉽습니다. 변비는 장기의 긴장이 약해져서 수축이완 운동이 잘 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데 찻잎 속의 폴리페놀 성분은 위의 긴장도를 높여 위 운동을 활발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장관의 긴장도를 풀어주어 변비를 치료해 줍니다. 특히 차는 소장운동을 활발하게 하므로 신경성 변비뿐만 아니라 이완성 변비에도 효과가 있습니다.
8. 충치예방 충치는 입속에 번식하는 세균이 치아를 파먹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찻잎 속에는 불소성분과 함께 세균을 살균하는 폴피페놀 성분이 있어 충치를 예방해 줍니다. 입냄새 역시 차 속에 있는 플라보놀 성분이 없애 주는데, 차의 이러한 효능은 냉장고의 냄새 제거나 각종 육류 음식을 만들 때 냄새 제거를 위해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9. 체질의 산성화 예방 현대인들이 많이 먹게 되는 산성식품은 칼로리가 높고 체내의 신진 대사 과정을 통해 체액을 산성화 시킵니다. 산성을 과다 섭취하여 몸이 산성화가 되면 몸의 피로감이 증가하고 동맥경화나 고혈압, 뇌일혈, 위궤양 등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차에는 카페인, 테오필린, 네오브로민, 크산틴 등 알랄로이드 물질이 많이 들어 있어 대표적인 알카리성 음료입니다. 차는 몸에 빠르게 흡수되고 산화되어 농도가 비교적 높은 알카리성 물질을 만들기 때문에 혈액 속의 산성 물질을 중화시킵니다. 차에는 산성을 예방하는 칼륨과 아연, 마그네슘, 망간 등 미네랄이 함유되어 있어 장기 복용하면 몸을 알카리성 체질로 개선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10. 염증과 세균 감염 억제 찻잎의 성분이 염증을 억제한다는 것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차의 폴리페놀 성분과 사포닌 성분에 의한 것으로 위궤양이나 위 점막 출혈을 비롯 각종 부종을 억제하고 치료하는 데 큰 효과가 있습니다. 또한 차는 장티푸스, 이질 등의 전염성 세균이나 장 속의 세균들의 생육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살인석 식즁독균인 O-157균에 녹차를 투여한 결과 1시간만에 완전 사멸된 것이 확이되기도 하였습니다. [토종의 세계]차나무 차(茶)나무는 처음 중국에서 약용 등으로 이용됐고 음차(飮茶)문화는 당(唐)나라부터 주변 국가로 전파됐다고 한다. 차나무는 식물학상 산차아목(山茶亞木) 산차과(山茶科) 차속(茶屬) 차종(茶種)의 상록수며 학명은 카멜리아 시넨시스(Camellia sinensis)이다. 원산지는 중국 동남부와 인도 아샘지방으로 중국종은 잎과 나무가 작고 녹차용으로 적합하고 인도종은 잎과 나무가 크고 홍차용으로 적합하다. 우리나라 지리산 야생녹차는 중국종에 속한다. 그러나 중국·인도종은 염색체수가 같아 세포유전학적인 차이는 없다고 한다. 차나무 생육에는 연평균기온 13도 이상, 강우량은 연 1천400㎜가 적합하다. 차나무는 꽃과 열매를 함께 맺혀 실화상봉수라 불리고 뿌리가 직근성으로 옮겨 심으면 대부분 죽기 때문에 옛날 정절의 상징으로 시집갈때 혼수로 차씨를 담아가기도 했다. 우리나라 차의 기원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찾을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흥덕왕 3년(서기 828)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대렴이 차씨를 가져오자 왕이 지리산에 심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차는 선덕왕(서기 632~647년)때부터 있었지만 이때부터 성행했다』고 적혀있다. 또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가락국 시조대왕 김수로의 왕비 허황옥이 인도에서 시집올때(서기 48년) 혼수로 차씨를 가져왔다』는 기록과 『가락국2대 거등왕이 선왕의 제사에 차를 제물로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전래설 외에도 고대부터 차가 우리나라에 있었다는 자생설도 제기되고 있지만입증은 되지않고 있다. 이런 기록들을 바탕으로 한다면 우리나라 차 역사는 가야시대부터로 거의 2천년에 이른다. 차 전문가들은 『전래설을 따르더라도 차나무가 1천년이 훨씬 넘는 세월동안 이땅의 토질과 기후에 토착화돼 고유한 특성을 가지게 됐다』고 말한다. 그후 신라시대 승려나 화랑들 사이에 성행했던 차는 고려시대에도 그 전통이 이어져 차만을 재배, 제조하는 다소(茶所)와, 차에 관한 일만 전담하는 관청인 다방(茶房)이 있었을 정도로 번성했다. 특히 신라와 고려시대 불교와 함께 성행했던 차 마시는 풍습은 민간에도 널리 퍼졌다 그러나 조선시대 억불숭유정책으로 불교가 쇠퇴하며 차문화도 점차 일반대중과 멀어졌고 이때부터 각종 의식에 차대신 술이 쓰이게 됐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다성(茶聖)이라 불리는 초의선사,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 다인(茶人)들이 전통차 문화를 부흥시켰다. 특히 하동 등 경남지역은 전라도와 함께 우리차의 본고장으로 명성을 이어오고 있는데 초의선사는 「동다송(東茶頌)」에서 『지리산 화개동에는 차나무가 사오십리에 뻗쳐 자라는데 우리나라 차밭으로 이보다 더 넓은 곳은없다』고 적고 있다. 조선시대 차는 지방특산물로 토공 대상이었다. 단종2년(1454년)에 완성된 세종실록지리지에 작설차의 산지는 전라도 지역 재배지는 화순, 보성, 고부, 옥구, 부안, 나주, 강진, 고창, 담양, 순천 등 이었다. 그러나 이후 지나친 토공과세금 강요로 백성들이 차밭을 불태우기까지 해 생산지역은 갈수록 줄었다. 특히 경상도의 하동 야생차밭은 일제시대 남벌과 6.25, 그리고 근대화 과정에서 유실수 식재 등으로 큰 수난을 겪었다. 여기다 차하면 으례 커피를 떠올릴 정도로 일반인들의 전통차에 대한 인식도 급격하게 사라져 차는 일부 계층의 전유물로 남는 듯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도 근대적 형태의 차밭인 광주-무등다원(1912년)과 보성다원(1940년)이 일본인들에 의해 조성됐다. 이후 지난 70년대부터 농촌소득사업으로 곳곳에 대규모 차밭이 만들어졌다. 이때 제주 등 일부지역엔 일본 개량종인 「야부끼다」가 도입돼 심어졌다. 이후 80년대 후반부터는 다도 등 우리 것에 대한 소중함을 찾는 이들과 각종 질병 예방 등 차가 지닌 효능들이 알려지며 녹차 수요가 늘어 재배면적과 생산량도 증가하고 있다. 현재 전국적으로 차는 1천979농가, 1천399ha에서 연간 1천502t이 생산되고 있다. 재배면적으로 볼때 지난 85년 449ha에 비해 15년만에 3배이상 증가한 것이다. 도내는 99년말 기준으로 하동, 산청, 사천, 고성, 양산지역 1천78농가(재배면적 394ha)에서 연간 471t의 녹차를 생산하고 있다. 이중 하동지역이985농가(재배면적 354ha) 460t이다. 차 생산에 있어 주목되는 점은 전남지역이 경남에 비해 농가수가 적은데 반해 재배면적과 생산량은 월등히 많은 것이다. 재배농가에 있어 전남은 902농가로 경남보다 176농가가 적지만 차 재배면적은 840ha, 생산량은 730t으로 경남보다 많다. 한편 우리나라 차에 대한 연구는 이웃 중국과 일본, 대만 등에 비하면 초보수준에 그치고 있다. 일본의 경우 차 연구 역사가 100여년에 이르고 있고, 중국과 대만도 지역별로 차 전문연구기관이 많이 있다. 이들 나라에서는 농업에 있어 차의 비중이 주식인 벼와 비슷할 정도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지난 93년 전남농업기술연구원에 차시험장(연구원 9명)이 만들어진 것과 지난해 7월 경남농업기술원 야생차연구팀(1명)이 발족한 외에는 행정차원의 전문연구기관은 없는 상태다. 또 일본의 경우 기관마다 100명 이상의 연구원들이 있어 인력면에서도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유전자원의 확보와 활용 차원에서 우리차에 대한집중·체계적인 연구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차에 대한 상식 차는 잎을 채취하는 시기에 따라 우전, 세작, 중작, 대작 등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우전 은 곡우절(4월20일) 이전에 만든것으로 최상품으로 친다. 세작은 4월말이나 5월초에 어 린잎을 따 만든 것이다. 중작은 5월 중순, 하순에 따는 여린 잎인데 크기는 2㎝쯤 되 며, 대작은 6월부터 8월까지 다 자란 잎을 수확한 것으로 엽차용으로 쓴다. 녹차는 만드 는 방법에 따라 덖음차와 증제차가 있다. ▲덖음차=덖음차는 재래식 제다법으로 가마솥을 달구어 차잎을 덖은 다음 손으로 비비고, 덖고, 비비고 하기를 세번에서 다섯번 쯤 반복 건조시킨 것이다. ▲증제차는 현대식 제다법으로 고압의 증기를 통과시켜 차잎을 익힌다. ▲덖음차와 증제차의 차이= 덖음차는 수분이 전혀없는 상태에서 고열로처리하기 때문에 차 의 모양은 곡형으로 약간 구부러진 형태며, 색상은 증제차에 조금 떨어지지만 고소한 맛 과 독특한 향이 있다. 증제차는 처음부터고압 수증기를 가해 순식간에 쪄서 만들기 때문 에 차의 모양은 거의 침상(針狀)이며 자극성이 없고 담백한 편이다.
[茶人기행| 허응당 보우] ---한 줄기 차 향기 석양을 물들이네. 다도 즐기며 佛法 계승 자주 논해 … 숭유배불 정책 탓 귀양 가서 억울한 죽음 서울 강남에 봉은사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직접 가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법정스님에게서 당신이 봉은사 다래헌에 계셨을 때는 강북에서 절을 가려면 뚝섬에서 나룻배를 타야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지금의 변화는 가히 상전벽해(桑田碧海)라 할 만하다. 봉은사는 조선 중기에 허응당 보우가 주지로 있으면서 유명해진 절이다. 보우는 문정대비의 신임에 힘입어 꺼져가던 전등(傳燈)의 불길을 되살려낸 인물로 그가 문정대비를 설득, 조선에 들어서 없어진 승과제도를 부활시킨 덕에 서산대사로 더 알려진 청허 휴정선사나 사명당 유정선사 같은 걸출한 고승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경내에는 갖가지 소담스런 연등이 걸려 있다. 나그네도 마음속에 연등을 하나 켜고 보우스님의 진영이 봉안된 영각(影閣)으로 오른다. 영각 안으로 드니 주불(主佛)인 지장보살 왼편에 보우, 청허, 사명스님 순으로 진영이 모셔져 있다. 나그네는 참배를 하면서 상념에 잠긴다. 그 누가 나처럼 이 우주를 소요하리/ 마음따라 발길 마음대로 노니는데/ 돌 평상에 앉고 누우니 옷깃 차갑고/ 꽃 핀 언덕 돌아오면 지팡이 향기롭네/ 바둑판 위 한가한 세월은 알고 있지만/ 인간사 흥망성쇠 내 어찌 알리/ 조촐하게 공양을 마친 뒤에/ 한 줄기 차 달이는 향기 석양을 물들이네.
도첩제·승과제도 부활에 큰 구실 산승의 면모를 물씬 풍기는 보우의 다시(茶詩)다. 사극에 나오는 권승(權僧)이나 요승(妖僧)의 모습이 아니다. 왜곡된 역사는 사람들의 눈을 가리니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는 우리 역사를 하나하나 바로잡고 편견 없이 볼 일이다. 가난하고 지체가 변변하지 못한 집에서 태어난 보우는 15세에 금강산 마하연사로 출가해 6년의 정진 끝에 깨달음을 얻고 ‘화엄경’ 등 모든 대장경을 섭렵한다. 이후 ‘주역’까지 통달하여 저잣거리의 유학자들과 널리 교유하다 그들의 천거로 중종의 어머니인 문정대비를 만난다. 문정대비의 신임을 얻은 보우가 첫 번째로 한 일은 횡포가 심한 유생을 본보기로 처벌하게 하고 전국의 사찰에 방을 붙여 잡된 유생의 난입을 금지한다. 이에 유생들은 보우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올리지만, 보우는 그들에게 맞서 불교의 기틀을 하나하나 다져나간다. 선교 양종을 부활시키고, 도첩제도와 승과제도를 다시 시행하여 승려의 위의(威儀)를 지키고 자질을 향상시킨다. 이때 400건이 넘는 유생들의 상소는 조정을 들끓게 한다. 결국 보우는 일선에서 물러나 있다 문정대비가 죽고 난 뒤 바로 체포되어 제주도로 귀양 간다. 그리고 귀양 간 지 며칠 만에 제주목사 변협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수많은 유생과 맞서 불법(佛法)을 다시 일으키려고 몸부림치다가 마침내 순교한 것이다. 보우를 죽이라는 유생들의 상소가 극에 달하자, 보우는 차 한잔을 마시며 “지금 내가 없으면 후세에 불법이 영원히 끊길 것이다”고 말했다 한다. 숭유배불(崇儒排佛)의 분위기 속에서도 유생들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불같이 밀어붙여 전등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한 보우의 삶이 오늘 따라 더욱 크게 느껴진다. 영각을 내려오니 판전(板殿)이라고 쓰인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한눈에 들어온다. 초의선사의 스승이던 추사 역시 다인이 아니던가. 고졸미(古拙美) 넘치는 판전이란 편액을 쓰고 사흘 뒤 죽었다고 하니 추사가 남긴 마지막 글씨인 셈이다. 나그네가 찾는 다인의 흔적이란 점에서 반갑고 정겹다. [茶人기행ㅣ보조국사 지눌] ---차 달이는 향기 바람결에 전해온다네 길상사 석간수로 차 달여 … 1000여 보 떨어진 곳에서도 茶香 맡았을 정도 수행자의 발우. 상백운암(上白雲庵)은 광양의 백운산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암자(해발 1040m)로, 현대의 고승인 구산 스님이 9년 동안 수행한 곳이다. 암자 주위에 병풍처럼 둘러처진 바위는 힘찬 기운을 뿜어내고, 차 맛을 내는 조건 중 최고인 석간수(石間水)의 맛은 깊고 달다. 길상사(현 송광사) 1세 사주(師主) 지눌도 바로 저 돌샘 물로 차를 달여 마셨을 것이다. 좌선을 오래 하다 보면 망상이 고개를 들고 졸음이 오는데, 이때 맑고 향기로운 한 잔의 차는 온몸에 활기를 주고 느슨해진 정신을 깨어나게 한다. 그래서 선가에 다선일여(茶禪一如)란 말이 생긴 것이다. 지눌이 남긴 다시(茶詩)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이규보가 지은 진각국사 비명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을축년(1205) 가을, 보조국사가 억보산(현 백운산)에 있을 때 진각국사가 선승 몇 사람과 보조국사를 뵈러 가는 길에 산 밑에서 쉬는데, 암자와의 거리가 1000여 보나 되는데도 보조국사가 암자 안에서 시자 부르는 소리가 멀리 들려왔다. 보조국사의 게(偈)는 이러하다. 아이 부르는 소리 송라의 안개에 울려퍼지고/ 차 달이는 향기 돌길 바람에 전해온다네(呼兒響落松蘿霧 煮茗香傳石經風).’ 지눌이 달이는 차 향기가 1000여 보나 떨어진 곳까지 바람결에 풍겨왔다는 내용은 그가 차를 즐겨 마셨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지눌의 자호는 목우자(牧牛子)이고, 시호는 불일보조(佛日普照). 8세 때 사굴산파의 종휘 스님에게 나아가 승려가 된 뒤 밤낮으로 공부하여 명종 12년(1182) 25세 때 승과에 급제한다. 그리고 보제사의 담선법회에 참석하여 대중과 정혜결사를 맺고 수행정진을 맹세했으나 호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결사를 뒷날로 미룬다. 교계의 부질없는 쟁론 질타하기도 이때 고려불교는 선종과 교종이 서로 대립했는데, 지눌은 선교일치의 태도를 고수했다. 따라서 지눌은 불(佛)에 의지하여 정진하기도 했던 바, ‘육조단경’의 ‘진여 자성(眞如自性)이 생각을 일으키매 육근(六根)이 보고 듣고 깨달아 알지만, 그 진여 자성은 바깥 경계들 때문에 물들어 더렵혀지는 것이 아니며 항상 자유롭고 자재하다’라는 구절에 첫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다. 이후 지눌은 마음을 닦으며 정진하는 동안 대장경을 읽다가 ‘부처의 말씀이 교가 되고, 조사께서 마음으로 전한 것이 선이 되었으니, 부처나 조사의 마음과 말씀이 서로 어긋나지 않거늘 어찌 근원을 추구하지 않고 각기 익힌 것에 집착하여 부질없이 쟁론을 일으키며 헛되이 세월만 소비하는가’ 하고 교계를 질타한 뒤, 팔공산 거조사로 옮겨 동지들을 모아 ‘정혜결사문’을 선포한다. 마음을 바로 닦음으로써 미혹한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선언으로 그 방법은 정혜쌍수, 즉 정과 혜를 함께 닦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눌은 8년 만에 결사한 대중 중에 일부가 초심을 잃자, 거조사를 떠나 36세 때 지리산 상무주암에 머물며 ‘대혜어록’을 보다가 ‘선은 고요한 곳에도 있지 않고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다’는 구절에서 홀연히 크게 깨닫는다. 이어 지눌은 희종의 명을 받아 길상사에서 오랫동안 머물며 선풍을 크게 일으킨다. 길상사를 중심으로 백운암, 규봉암, 조월암 등을 오가며 안거한 지 10여년, 지눌은 대중을 불러 모아놓고 주장자를 세 번 치면서 ‘천 가지 만 가지가 모두 이 속에 있다’는 화두 같은 법문을 남기고 열반에 들었다. ● 가는 길 남해고속도로에서 광양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우회전해 2분여 가다 다시 옥룡면 쪽으로 우회전해 곧바로 가면 백운암 이정표가 나온다. 상백운암은 백운암에서 다시 20여분 걸어 올라가야 한다.
[茶人기행ㅣ교산 허균] ---우통수 샘물로 차를 달여 마시리 자유인 기질로 일탈 반복 파란만장한 삶 … ‘홍길동전’ 통해 자신의 꿈 대리 실현 오대산 염불암. 전남 장성군을 지나다 보면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장성군에서 내건 광고판에 ‘홍길동의 고장’이라고 쓰여 있기 때문이다. 홍길동이 실존인물인가 싶어 ‘조선왕조실록’을 열람해보았더니 연산군에서 선조 때까지 ‘도적의 괴수’라는 내용으로 여섯 번이나 기록돼 있다. 장성군은 홍길동이 세종 22년(1440)에 장성군 황룡면 아치실에서 태어났다고 소개하고 있다. 허균이 실존했던 홍길동을 참고하여 ‘홍길동전’을 썼는지도 모른다. 소설가는 역사가들이 단죄한 인물을 변호하고 누명을 벗겨주기도 하니까. 역사는 홍길동을 도적으로 몰지만, 허균은 ‘홍길동전’에서 의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지금 나그네는 오대산 우통수(于筒水)의 물로 차를 달이고 싶다고 노래한 허균의 다시(茶詩)를 떠올리며 산길을 오르고 있다. (전략) 봄 지난 들꽃은 병든 눈을 닦아주고/ 비 갠 뒤 산새들은 조용한 잠을 청하는 듯/ 찻사발에 달인 차로 소갈증이나 낫게 하고 싶지만/ 어찌 우통(于筒)의 으뜸가는 샘물을 얻으랴. 우통수는 남한강의 발원지인데, 다천(茶泉)의 성지로서 다인들의 발길이 잦은 샘이다. 우통수에 대한 기록은 조선 초 문신 권근의 ‘오대산 서대 수정암 중창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도 볼 수 있다. 여기서 수정암이란 상원사 1인 선방인 염불암을 말한다. 나그네가 지금 찾아가고 있는 우통수는 염불암 입구에 있다. 허균은 조선 선조 2년(1569)에 명문가에서 태어난다. 아버지는 서경덕의 제자로서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엽(曄)이고, 임진왜란 직전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성(筬)이 이복형제며, 봉()과 난설헌(蘭雪軒)은 동복형제다. 남한강 발원지 다천의 성지 허균은 9세 때 시를 지을 줄 알았으며, 유성룡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이달에게서 시를 익혔다. 그는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해 이듬해 황해도 도사(都事)가 되지만 기생을 가까이하여 탄핵을 받아 파직되고 만다. 곧 복관하지만 수안군수 때 불상을 봉안하고 아침저녁으로 예불한다는 이유로 탄핵받아 또다시 관직에서 물러난다. 그러나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글재주와 막힘없는 학식으로 이름을 떨쳐 삼척부사가 되기도 하지만, 또다시 불교를 믿는다는 감찰을 받아 파직되어 부안으로 내려가 기생 계생(桂生)과 천민 출신 시인 유희경(柳希慶)과 교분을 나눈다. 이때 호남지방의 의적 홍길동의 얘기를 전해 듣지 않았을까 싶지만 정확한 고증은 사학자에게 기대할 수밖에 없다. 이후에도 그는 몇 번의 복관과 파직을 거듭하다 결국 역적모의했다는 죄명으로 동료들과 함께 저잣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한다. 그의 생애를 통해 볼 때 그는 정해진 규범 같은 것을 따르기보다는 그것을 거부하는 자유인의 기질이 강했던 인물임이 틀림없다. 그의 학문과 재주를 인정하여 조정에서는 번번이 복관을 시키지만, 그는 제도권에 적응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일탈해 살았던 것이다. 자신의 꿈을 펼치고자 이이첨 같은 권세가에게 붙어 아부도 하고, 유교국가에서 감히 불교를 신봉하는가 하면 양반들이 멸시하는 서류(庶流) 출신이나 천민, 기생과 어울렸던 것이 그 예다. 우통수에 이르러 물 한 모금으로 산길을 오르느라 거칠어진 숨을 고른다. 우통수는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안개처럼 모호했던 허균이 차를 달이고 싶어했던 샘물이다. 이 샘물이 한 방울 흘러 한강이 된다. 나그네는 지난해 이 샘물로 너와집 암자 염불암의 선승과 함께 차 한잔 대신 점심 공양 때가 되어 국수를 끓여 먹은 적이 있다. 우통수의 물로 차를 달여 마시고 싶다는 허균을 생각하며. 가는 길 / 영동고속도로에서 진부인터체인지로 나와 전나무 가로수길로 곧장 가면 월정사, 상원사에 이른다. 거기에서 2.8km 떨어진 곳에 우통수와 염불암이 있다. [茶人기행ㅣ효당 최범술] ---茶 대중화 이끈 ‘일등공신--- 다솔사 조실로 있으면서 엄격한 다도·차 맛 짜기(?)로 유명 차를 대중화하는 데 효당 최범술만큼 공헌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 다도계의 정설이다. ‘한국의 차문화’ 저자 운학 스님도 “효당의 다통(茶統·차살림)을 일본식이라고 평하는 경향이 있지만, 설사 그의 다통에 그런 요소가 있다 하더라도 오늘 우리가 차를 이만큼 인식할 수 있게 된 데에는 그의 공로가 절대적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연기조사, 의상대사, 도선국사 등 다승들이 머물렀던 경남 사천의 다솔사. 차가 아니더라도 정겨운 절 이름이 주는 매력 때문에 꼭 가고 싶었는데, 막상 절에 당도하고 보니 듣던 대로 다사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법당 뒤로 부챗살처럼 펼쳐진 차 밭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차 밭에 그늘을 드리우는 편백나무 숲도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효당만큼 이력이 다양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승려이자, 3·1운동 때는 영남지방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했고 훗날 비밀결사인 만당을 조직한 독립운동가, 제헌국회의원으로 활동한 정치가, 국민대학을 창설한 교육자, 다도인 등등이다. 1904년에 다솔사 앞마을에서 태어난 효당은 곤양보통학교를 졸업한 다음 해인 16년에 다솔사로 출가한다. 그는 승려 신분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다이쇼대학에서 불교학을 공부하고, 국내로 돌아와서는 박렬의 일본천황 암살 계획을 돕고자 상하이로 건너가 폭탄을 운반한다. 이 때문에 8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는데, 단재 신채호의 유고를 간행해 또 한 차례 고초를 겪는다. 그 뒤 만해 한용운의 제자가 되었으며 해방 뒤에는 해인사 주지를 지내는 등 다양한 경력과 일화를 남기면서 60년 그의 나이 56세를 분기점으로 하여 79년 입적 때까지 다솔사 조실로 주석하면서 자신의 여생을 차로 회향한다. 독립운동하다 8개월간 옥고 치르기도 그의 다도는 엄격했으며 차 맛은 짜기로 유명했다. ‘짜다’는 말은 다인들의 은어로 차의 맛이 진하다는 뜻. 나그네가 극락암 선원장 명정스님에게서 들은 얘기다. “탕관에서 물을 푸기 전에 선방에서 입정(入定)하듯 차 도구로 탁탁탁 치더군요. 무릎을 꿇고 찻잔을 돌리는데 찻잔에서 손을 뗄 때는 손으로 원상(圓相)을 그렸습니다. 그래서 내가 ‘바쁜데 뭐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했더니 ‘이 사람아, 바쁘기는 뭐가 바빠. 공연히 바쁠 것이 없는데 자기가 만들어서 바쁜 것이지’ 하고 핀잔을 주더군요. 또 효당의 차는 매우 짠데 마치 소태 같았습니다.” 효당은 다솔사 작설차의 맛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던 것 같다. 말년에 그를 찾아온 다인들에게 어린 사미승 시절 노승에게서 들은 구전을 들려주며 회상하곤 했다. 다솔사 작설차 맛은 하동 화개 차나 구례 화엄사 차보다 나았다는데, 실제로 산지를 구별하여 차와 쇠고기를 넣고 같은 물에 끓여본 결과 화엄사 차를 넣은 쇠고기는 단단하고, 화개 차가 들어간 쇠고기는 부드러우며, 다솔사 차가 들어간 쇠고기는 흐물흐물 물러지더라는 것이다. 효당은 스스로 다솔사의 상품차를 ‘반야로’, 다음 등급을 ‘반야차’라고 이름 지어 보급했다는데 나그네는 지금 그 맛을 볼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최근에 어느 시민단체에서 효당이 친일 변절자가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는데, 동국대 김상현 교수는 이에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김 교수의 주장은 한마디로 효당의 북지황군위문사 활동이나 다솔사의 내선불교학술대회 개최는 항일 세력을 돕기 위한 협력 또는 위장이었다는 것이다. 인물에 대한 섣부른 평가는 일제 청산이라는 본질 자체를 흐리게 할 수도 있으므로 재삼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茶人기행ㅣ학포 양팽손] 차를 닮은 성품 … 향기로운 선비 기묘사화 뒤 고향 능주로 낙향 … 벼슬 마다하고 문장·서화·차로 여생 보내 학포당(學圃堂)은 기묘명현(己卯名賢·조선 중종 때 일어난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사류) 중 한 사람인 양팽손의 독서당이고, 쌍봉사는 천년 고찰이다. 나그네가 학포당과 지척에 있는 쌍봉사를 하나로 묶어 얘기하는 까닭은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이다. 차(茶)가 바로 그것이다. 쌍봉사 일대의 양지바른 산에는 야생차가 제법 넓은 지역에서 자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예부터 이 지방 선비나 승려들이 차 살림을 했다는 증거다. 쌍봉사는 신라 구산선문의 사자산파 개산조 도윤이 입적한 곳이다. 도윤은 당나라 유학승으로 ‘평상심이 도(道)’라고 외친 중국의 남전선사 회상(會上)에서 차의 부처로 불리는 조주와 법 형제가 되어 공부했던 스님이다. 따라서 도윤의 차 살림은 그때부터 시작됐을 터이고, 그가 들여온 차씨로 인해 오늘날 쌍봉사 일대의 야생 차밭이 생겨난 것이 아닐까 추정해본다. 학포 양팽손은 성종 19년(1488)에 능주에서 태어나 중종 5년 20세에 조광조와 함께 생원시에 합격한 뒤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고 29세 때 문과에 급제한다. 현량과에 발탁되어 공조 좌랑, 형조 좌랑, 사관원 정원, 이조 정랑 등을 역임하다 홍문관 교리에 재직하던 중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 김정 등을 위해 분연히 소두(疏頭·연명하여 올린 상소문에서 맨 처음 이름을 적은 사람)한 뒤 삭직된다. 이후 양팽손은 고향인 능주로 낙향하여 쌍봉마을에 독서당을 짓고 여생을 보낸다. 능주에 유배 온 조광조와 매일 만나 경론을 논하다가 그가 사약을 받고 죽자,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시신을 손수 염해 쌍봉사 부근의 깊은 산골에 가매장해준다. 이후 기묘명현들이 복관되면서 그도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매번 사양하다가 1544년 용담현령에 잠시 나아갔다 병환으로 곧 사임하고 다음해 58세로 눈을 감는다. 조광조도 생전에 학포 인격에 대해 극찬 이와 같은 그의 일생을 볼 때 조광조가 살아 생전에 그를 일컬어 “더불어 이야기하면 마치 지초(芝草·영지)나 난초의 향기가 풍기는 것 같고, 기상은 비 개인 뒤의 가을 하늘이요, 얕은 구름이 막 걷힌 뒤의 밝은 달과 같아 인욕(人慾)을 초월한 사람”이라고 평했던 것이 결코 과장의 덕담만은 아닌 듯하다. 한편 학포는 문장과 서화로도 크게 명성을 얻은 선비다. 안견의 산수화풍을 이었다고 평가받는 학포는 후기의 윤두서, 말기 허련과 함께 호남의 3대 문인화가로 불리며 호남 화단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산수도’를 비롯해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는 ‘사군자’ 같은 그림에도 능했는데, 나그네가 주목하는 그림은 현재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연지도(蓮芝圖)’다. 학포의 후손이 1916년 추사의 본가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하며, 다기(多器)와 함께 연꽃, 영지가 그려진 두 폭으로 그가 차 살림을 했다는 것을 추정케 한다. 선비의 사랑방이나 독서당에 걸어놓는 책가도(冊架圖·18~19세기에 우리나라에서 유행했던 정물화로 책, 벼루, 먹 따위의 문방구류를 기본으로 꽃병, 주전자 등을 배합해 그렸다) 계열의 그림에는 다기가 그려진 작품이 흔치 않아 학포당에서 여생을 보낸 그가 차를 마시는 쌍봉사 선객들과 자연스럽게 교유하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다. 조광조의 시신을 가매장한 터가 능주에서 수십 리 떨어진 쌍봉사와 가깝다는 점도 당시 수행자들하고의 교분과 어떤 관련이 있지 않을까 짐작된다. 차의 성품(茶性)은 두말할 나위 없이 맑고 향기로운 것이다. 조광조가 학포를 가리켜 “맑고 향기로운 사람”이라고 평한 것을 보면 학포야말로 차 향기를 닮은 선비였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진정한 다인이란 차를 잘 마시는 사람이 아니라 차의 성품을 닮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 가는 길 전남 화순에서 장흥과 보성 가는 길로 바로 가다 보면 이양면소재지가 나오고 다시 보성 방향으로 5분 정도 가면 쌍봉마을 어귀에 학포당 표지판이 나온다. [茶人기행ㅣ소치 허련] 차 한잔에 말년의 고독을 달래고 초의선사에게 다도 익히고 추사에게 서화 배워 … 고향 진도에서 차·그림 벗삼아 삶 마무리 전남 진도는 삼별초의 한이 서린 섬이다. 지금 나그네가 넘고 있는 고개 이름도 왕고개다. 왕 무덤이 있는 고개인데, 삼별초가 주군으로 섬긴 왕온은 소수의 삼별초 군사로 1만여명의 여몽연합군에 맞서 10여일 동안 격렬하게 항전하다 이곳에서 죽음을 맞았다. 나그네는 왕고개에서 발길을 돌려 상록수림이 울창한 첨찰산으로 달린다. 전남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첨찰산에는 고찰 쌍계사와 운림산방(雲林山房)이 돌담을 사이에 두고 있다. 운림산방은 소치 허련이 말년에 은거한 작업실이다. 소치 가문은 이곳에서 아들 미산 허영, 손자 남농 허건으로 대를 이어 남종화의 진경을 보여준다. 소치는 조선 순조 9년(1809)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초년부터 해남의 윤선도 고택에 초동(樵童)으로 들어가 살면서 그림과 인연을 맺는다. 윤선도 고택에는 문인화가 윤두서의 그림과 화첩이 있어 전통 화풍을 익힐 수 있었다. 어린 소치가 차를 알게 된 것은 윤선도 고택에서 가까운 대흥사 일지암의 초의선사를 찾아가 살면서부터였다. 초의는 시서화에다 차까지 능한 선사였는데, 암자의 자잘한 일을 돕는 동자가 필요했던 터라 소치를 맞아들였다. 어린 소치는 그림을 배우기 위해 초의가 시키는 대로 다 했다. 봄이 되면 하루 종일 산에서 야생 찻잎을 따야 했고, 초의가 찻잎을 가마솥에서 덖어 내놓으면 그것을 비비고 말렸다. 지방 관리나 추사 김정희 같은 손님이 오면 마당 한쪽에서 주전자 밑에 솔방울을 모아 찻물을 끓이는 일도 소치가 도맡아했다. 궁중화가 되고 벼슬도 지중추부사 올라 따라서 소치는 20대에도 다도 공부만 했을 뿐, 그림 수업은 깊게 하지 못했다. 그에게 전기가 온 것은 초의가 소치의 재주를 알아보고 한양의 추사에게 소개한 뒤부터였다. 소치는 31세 때인 1839년부터 추사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서화를 배웠는데, 추사에게서 중국 대가들의 구도와 필법을 익혔다. 그는 원나라 말기 산수화의 대가인 대치 황공망의 화풍을 익힌 뒤 자신의 호를 소치라고 했는데, 이때 추사는 “압록강 동쪽으로 소치를 따를 만한 화가가 없다”거나 “소치 그림이 내 것보다 낫다”고 평했다. 1846년에는 권돈인의 집에 머무르면서 그린 그림을 헌종에게 바쳐 여러 차례 왕을 알현한 뒤 궁중화가가 되었고, 벼슬도 지중추부사에까지 올랐다. 시서화에 뛰어나 삼절(三絶)로 칭송받았으며, 당시 교유한 인물로는 해남 우수사 신관호, 다산의 아들 학연, 민승호, 김흥근, 흥선대원군 이하응, 민영익 등이 있다. 그는 스승인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 가 있는 동안 초의가 제다한 차를 가지고 위험을 무릅쓰고 세 번씩이나 바다를 건너가 스승을 위로하기도 했다. 추사가 1856년에 죽자, 소치는 다음해 한양을 떠나 고향 진도로 돌아와 운림산방을 짓고 은거한다. 자신의 이름도 남종화와 산수수묵화의 효시인 중국의 왕유를 본떠 허유라고 개명한다. 서울대박물관에 소장된 그의 대표작 선면산수도(扇面山水圖) 등이 삼절로 칭송받던 한양생활의 작품이 아니라 말년의 서화인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작가에게는 사교의 시간보다 사색과 고독의 시간이 더 적실한 것이다. 소치에게 차 한잔은 말년의 고독을 달래주는 도반(道伴)이었을 터다. 곤궁해진 그에게 차는 1892년 84세로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한 감로수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가 아들에게 남긴 유서의 한 대목이 더욱 그런 생각을 들게 한다. ‘자고로 이름난 사람들을 보아라. 죽을 때까지 불우하여 곤궁하게 지냈다. 내가 일세에 삼절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나 내 분수에 넘치는 일, 어찌 그 위에 부귀를 구했겠느냐.’ 가는 길 진도대교를 건넌 다음 진도읍으로 가서 의신면 쪽으로 직진하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상록수림의 첨찰산과 소치가 은거했던 운림산방이 나온다.
[茶人기행ㅣ아암 혜장] 다산도 홀딱 반한 茶만드는 솜씨 열 살 터울이었지만 말 통하는 ‘茶友’ … 자존심 강한 천재 승려 40세에 술로 요절 동백꽃이 굵은 눈물처럼 뚝 떨어진다. 작은 부도 앞에도 낙화한 동백꽃들이 흩어져 있다. 나그네는 전남 강진군 백련사 왼쪽 동백나무 숲에서 강진만을 눈에 담는다. 산자락 사이로 보이는 바다가 찻잔처럼 아담하다. 술병이 나 일찍 요절한 아암(兒菴) 혜장(惠藏)은 저 바다를 술잔이라 했을지도 모른다. 혜장은 다산에게 차의 맛을 처음으로 깊이 알게 한 승려다. 다산이 혜장을 만난 사연은 해남 대흥사에 있는 혜장선사 탑 비문에 나와 있다. 아암장공탑명(兒菴藏公塔銘)이라 하는데 다산이 지은 글이다. ‘신유년(1801) 겨울에 나는 강진으로 귀양을 왔다. 이후 5년이 지난 봄에 아암이 백련사에 와서 살면서 나를 만나려고 하였다. 하루는 시골 노인의 안내를 받아 신분을 감춘 채 그를 찾아보았다. 한나절을 이야기하였지만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작별하고 북암에 이르렀는데 해질 무렵 아암이 헐레벌떡 뒤쫓아와서 머리를 숙이고 합장하여 말하기를 “공께서 어찌하여 사람을 속이십니까? 공이 바로 정대부(丁大夫) 선생이 아니십니까? 빈도는 밤낮으로 공을 사모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돌아와 아암의 방에서 함께 자게 되었다.’ 밤새 차를 마시며 ‘주역’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혜장은 입에서 구슬이 구르듯, 물이 도도하게 흐르듯 막힘이 없었다. 과연 혜장은 일찍이 전남 해남의 대둔사(현 대흥사)로 출가하여 나이 30세에 두륜회(학승들의 학술대회)의 주맹(主盟)이 될 만큼 불교와 유교에 밝은 승려가 틀림없었다. 그러나 혜장은 유학에서는 다산의 깊이를 넘어설 수 없었다. 밤이 늦어서야 혜장이 처량하게 탄식했다. “산승(山僧)이 20년 동안 주역을 배웠지만 모두가 헛된 거품이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요, 술 단지 안의 초파리 격이니 스스로 지혜롭다 할 수 없습니다.” “차 보내달라” 다산, 걸명시 지어 이때 혜장은 34세, 다산은 44세였는데 이후 두 사람은 다우(茶友)가 되어 자주 만난다. 혜장은 다산이 강진 동문 밖 시끄러운 노파의 밥집에서 조용한 고성암 요사(寮舍)로 옮겨 독서도 하고 차도 마실 수 있게 해줌으로써 혹독한 국문으로 생긴 지병이 낫도록 도움을 준다. 그래서 다산은 고성암 요사를 보은산방(寶恩山房)이라고 불렀다. 혜장은 백련사 부근에서 자라는 어린 찻잎으로 차를 만들어 보은산방에 있는 다산에게 보내주곤 했다. 다산은 차가 오지 않으면 혜장에게 차를 간절하게 요청하는 걸명(乞茗)의 시를 지어 보내기도 하고 ‘혜장이 날 위해 차를 만들었는데, 때마침 그의 제자 색성(湟性)이 내게 차를 주었다며 보내주지 않으므로 그를 원망하는 말을 하여 (차를) 주도록 끝까지 요구하였다’라는 긴 제목의 시를 남긴 것을 보면 혜장의 제다(製茶) 솜씨가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혜장의 호가 아암이 된 연유는 이렇다. 타협할 줄 모르고 자존심이 강한 혜장에게 다산이 “자네도 어린아이처럼 유순할 수 없겠나?” 하고 충고하자, 혜장이 그때부터 호를 아암(兒菴)이라고 지어 부른 것이다. 혜장은 술병이 나 죽기 전 자신의 회한을 읊조린 시 한 편을 다산에게 보낸다. 백수(참선) 공부로 누가 깨달았나/ 연화세계는 이름만 들었네/ 외로운 노래는 늘 근심 속에서 나오고/ 맑은 눈물 으레 취한 뒤에 흐르네. 그는 죽을 무렵에 혼잣말로 ‘무단히(부질없이) 무단히’ 하고 중얼거렸고 한다. 교학에는 일가를 이루었으나 부처에는 이르지 못한 자신의 삶이 부질없다는 회한이었으리라. 다산이 인정한 천재였음에도 술병이 나 40세에 요절한 혜장의 삶이 아쉽기만 하다.
[茶人기행ㅣ경봉 선사] 茶 한 잔 詩 한 수에 번뇌를 잊고 극락암에 머물며 중생교화 진력 … 茶詩 많이 남기고 한없는 자비심 ‘소문’ 자장 율사가 창건한 경남 양산 통도사 산자락에서 최고의 명당은 극락암이라고 한다. 그래서 극락암을 제2의 통도사로 가꾸겠다는 소문까지 들린다. 불과 20여년 전만 해도 전국의 수행자들이 극락암 선방에서 한 철 공부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전해진다. 욱이 그때 극락암에는 고승 경봉 선사가 있었다. 성철 스님이 흐트러진 선풍(禪風)을 진작하신 분이라면, 경봉 선사는 중생교화에 진력하신 분이다. 성철 스님은 제자들이 한가롭게 차를 마시고 있으면 다구(茶具)를 발로 뒤엎을 정도로 불벼락을 내렸지만, 경봉 선사는 누구든 불법(佛法)을 물어오면 시자(侍者)더러 차를 달여오게 하여 일완청다(一椀淸茶)를 권했다. 경봉 선사는 다시(茶詩)도 많이 남겼다. 다음의 시는 선사가 설법을 마치면서 읊조리곤 했던 다시다. 하늘에 가득한 비바람 허공에 흩어지니/ 달은 천강의 물 위에 어려 있고/ 산은 높고 낮아 허공에 꽂혔는데/ 차 달이고 향 사르는 곳에 옛길이 통했네. 滿天風雨散虛空 月在千江水面中 山岳高低揷空連 茶煎香古途通 옛길이란 모든 수행자들이 이르고자 하는 ‘자유의 길’, 즉 번뇌로부터의 해탈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경봉 선사는 1892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13세에 한학을 공부하고 15세에 어머니가 별세하자 1년 뒤 통도사로 출가한다. 통도사에서 경(經)을 공부하던 중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도 반 푼어치의 이익이 없다(終日數他寶 自無半錢分)’는 구절에 충격을 받고는 바로 참선 수행의 길에 든다. 경남 합천 해인사 퇴설당으로 가서 제산(霽山) 선사의 지도를 받아 용맹 정진하는데, 졸음과 들끓는 망상을 이기려고 기둥에다 머리를 박고 허벅지를 멍이 들도록 꼬집고 얼음을 입속에 머금어 생니가 모두 흔들린다. 그래도 시원찮아 장경각 뒷산으로 올라가 울고 고함을 친다. 스님은 다시 10여년을 정진한 끝에 36세 때, 극락암 삼소굴에서 이른 새벽 무렵 촛불이 춤추는 것을 보고 홀연히 크게 깨닫는다. 이후 62세에는 극락암 선원 조실로 추대되고, 91세에 입적할 때까지 극락암에서 유유자적한다. 떠돌이 폐병 환자 정성껏 돌보기도 입적 때 시자가 “스님, 가시면 보고 싶습니다. 어떤 것이 스님의 참모습입니까” 하고 묻자 “야반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보거라”라고 대답했는데, 그 임종의 말씀은 불자들 가슴에 오랫동안 감동을 주었다.‘한밤중에 대문 빗장을 만져보라’는 뜻은 밤낮으로 부지런히 정진하고 늘 깨어 있으라는 말씀일 터이다. 나그네가 경봉 선사를 흠모하는 이유는 스님의 한없는 자비심 때문이다. 다음의 얘기는 나그네가 통도사 밖에 사셨던 한 노파에게서 들은 사연이다. 60년대 초만 해도 피를 토하는 떠돌이 폐병 환자가 많았다. 그런 환자 중 한 사람이 거지가 다된 꼴로 통도사를 찾았다가 그곳에서 받아주지 않자 극락암을 찾았다. 경봉 선사가 혼자서 독경을 하고 있는데, 환자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스님, 하룻밤 묵어갈 수 있습니까” 하고 묻자 스님이 허락했다. 환자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스님 얼굴과 옷에 피를 쏟고 난 뒤 쓰러져버렸다. 스님은 아무 말 없이 환자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주고 자신의 새 가사를 꺼내 환자에게 입혔다. 한 시간쯤 후 눈을 뜬 환자는 면목없어하며 방을 나서려 했다. 그러나 스님은 따뜻한 차로 기운을 내게 한 다음 오히려 환자를 정성껏 돌봐 병을 낫게 하고 제자로 삼았다. 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에게도 자비로운 차 한 잔을 권했던 경봉 선사의 자비심을 떠올릴 때마다 진정한 수행자상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훈훈해진다. 가는 길 / 경부고속도로에서 양산에 들어서 통도사 나들목을 빠져나오면 바로 통도사 산문이 나오고, 다시 포장된 산길을 타고 직진해 10여분 달리면 극락암에 이른다. [茶人기행 l 진각국사] 북두로 은하수 길어 밤차 달이리 낭만 상상력 자극 수많은 茶詩 남긴 대시인 … 수행자 필독서 ‘선문염송’ 30권도 완성 숲 길을 걷다보면 솔 향기와 바람에 온몸이 씻기는 느낌이다. 게다가 솔바람에는 자기 자신을 근원으로 돌아가게 하는 산중의 고독이 묻어 있다. 나그네는 진각국사가 머물렀던 광원암(廣遠庵) 가는 어귀에서 솔바람의 관욕(灌浴)을 누린다. 광원암은 송광사의 1번지 같은 암자다. 송광사를 짓기 전, 백제 무령왕 14년(514)에 가규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 고려 때 진각국사 혜심 스님이 거처하면서 수행자의 필독서인 ‘선문염송’ 30권의 편찬을 완성한 뒤 암자 이름을 광원암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선문염송’이 넓게(廣) 멀리(遠) 퍼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나그네는 다시(茶詩)로서 최고의 명시임이 틀림없는 진각국사의 ‘인월대(隣月臺)’를 누구보다 애송하고 있다. 중국의 시선(詩仙) 이백의 시처럼 무한대의 낭만과 상상력이 느껴진다. 우뚝 솟은 바위산은 몇 길인지 알 수 없고/ 그 위 높다란 누대는 하늘 끝에 닿아 있네/ 북두로 길은 은하수로 밤차를 달이니/ 차 연기는 싸늘하게 달 속 계수나무를 감싸네. 은하수로 달인 차 맛과 차 연기가 계수나무에 드리운 풍경은 어떨까. 이미 우주와 한몸이 된 깨달은 자만이 체험하는 선경(禪境)일 터이다. 진각국사는 고려 명종 8년(1178)에 화순에서 태어나 일찍이 진사인 아버지를 여의고 어렵게 공부하여 신종 4년(1201) 24살에 사마시(司馬試)를 마치고 태학관(太學館)에 들어갔으나 홀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귀향한다. 극진한 병간호에도 귀향 이듬해에 어머니가 별세하자, 길상사(현재의 송광사)에 어머니의 사십구일재를 지내러 갔다가 보조국사와 인연이 되어 출가한다. 송광사 광원암에 머물며 집필 입산 후 스님은 어느 절에 머물건 간에 낮에는 ‘선문염송’을 집필하고 밤에는 참선하다가 새벽에는 염송에 나오는 게송을 목청 높여 낭랑하게 외우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특히 사성암은 구례읍에서 10리 거리에 있는데, 스님이 축시마다 읊조리는 게송을 듣고는 읍민들이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스님은 광양 백운암으로 보조국사를 찾아가 그동안 공부한 것을 인정받고, 다시 조주(趙州)의 무(無)자 화두를 가지고 보조국사와 선문답을 나눈 끝에 “내 이미 너를 얻었으니 너는 마땅히 불법으로써 자임(自任)하여 본원(修禪社)을 폐하지 말라”는 은밀한 유지를 받는다. 스님의 나이 33살이 되는 해에 보조국사가 입적하자, 스님은 스승에 이어 수선사의 제2세 법주(法主)가 된다. 이후 스님은 고종 때 대선사(大禪師)가 되어 나라의 명에 의해 여러 절을 전전하며 수많은 제자를 가르친다. 56살 때에야 수선사로 다시 돌아와 지친 몸을 추스르다가 이듬해(1234년) 화산 월등사로 가 제자 마곡에게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한다. 뭇 고통이 이르지 않는 곳에/ 따로 한 세계가 있나니/ 그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아주 고요한 열반문이라 하리라. 이처럼 쉽게 쓴 고승의 임종게도 없을 것이다. 진각국사의 모든 시는 난해하지 않고 생생하게 다가온다. 탁월한 대시인이라 아니할 수 없다. 스님은 많은 다시를 남겼는데, 직접 다천(茶泉)을 파기도 했다. 소나무 뿌리에서 이끼를 털어내니/ 샘물이 영천에서 솟구친다/ 상쾌함은 쉽게 얻기 어렵나니/ 몸소 조주선(趙州禪)에 든다. 나그네는 광원암에 이르러 차와 시를 선으로 승화시킨 진각국사의 흔적에서도 솔 향기를 맡는다. 암자에는 몇 줌의 석양 햇살이 구르는 낙엽을 어루만지고 있다. 가는길: 남해고속도로에서 송광사 나들목(인터체인지)을 빠져나와 송광사에 이르러 계곡 왼쪽으로 난 산길을 타고 10분쯤 오르면 광원암이 나온다
[茶人기행ㅣ고봉 기대승] 사단칠정 논변 긴장 녹인 차 한잔 퇴계 상대 편지로 8년간 성리학 논쟁 … “옳은 것은 하나” 대신들과 타협 거부 낙향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에 반해 너브실(廣谷)에 정착해 산다는 강선생 부부가 반갑게 맞이해준다. 월봉서원(月峯書院)과 애일당(愛日堂) 고택 뒤로 펼쳐진 대숲에서 청랭한 바람이 불어온다. 대숲 속의 반광반음(半光半陰)에서 자란 부드러운 찻잎은 떫은맛이 옅고 단맛이 나므로 쌈을 해도 맛있다고 한다. 강선생의 안내를 받아 고봉의 독서당이던 귀전암(歸全庵) 터에 오른다. 고봉의 아들이 시묘를 하면서 머문 칠송정(七松亭)을 지나 10여분 동안 대숲을 지나치자 고봉의 묘가 나타난다. 고봉의 선대는 서울에서 거주하였는데, 숙부 기준(奇遵)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화를 당하자, 부친이 세속의 일을 단념하고 전라도로 내려와 터를 잡았기 때문에 고봉은 중종 22년(1527)에 광주 송현동에서 태어난다. 그는 명종 13년에 대과 1등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다. 32살의 젊은 고봉은 처음으로 서소문 안에 살던 성균관 대사성이자 원로학자인 58살의 퇴계를 찾아간다. 이후 두 사람은 장장 8년 동안 편지로 논쟁을 벌인다. 그 내용은 이른바 우리나라 사상사(思想史) 최고의 논쟁이라고 일컫는 사단칠정(四端七情) 논변이다. 사단이란 사람의 본성에서 우러나온 이성적 마음씨인 인(仁)·의(義)·예(禮)·지(智)이고, 칠정은 일곱 가지 감정인 희(喜)·노(怒)·애(哀)·낙(樂)·애(愛)·오(惡)·욕(欲)이다. 귀전암 터 약수 아직도 졸졸 퇴계는 사단이 이(理)에서, 칠정은 기(氣)에서 발생한다고 분리해서 보았는데, 고봉은 이와 기를 서로 떼어놓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 결국 퇴계는 고봉의 주장을 일부 수용하기에 이르는데, 여기서 나그네는 아들뻘인 고봉의 주장을 받아들인 퇴계의 너그러운 인품과 권위에 짓눌리지 않는 고봉의 패기가 그들의 학문적 성과보다도 더 부럽기만 하다. 그런데 고봉은 퇴계 사후 2년 만인 선조 5년(1572) 성균관 대사성으로 제수되던 해에 병이 나 46살의 나이로 운명하고 만다. 그래서일까. 고봉의 사상은 9살 아래인 율곡으로 이어져 더욱 빛을 발하지만 성리학 논쟁에 불을 당긴 그의 짧은 생애가 아쉽기만 하다. 명종 앞에서 거침없이 제왕학을 펼쳤던 기대승. 정즉일(正卽一), 즉 ‘옳은 것은 하나’라고 외치며 대신들과의 타협을 뿌리치고 낙향한 그였기에 퇴계는, 선조가 나라 안에서 으뜸가는 학자를 천거하라 했을 때 이렇게 아뢰었던 것이다. “기대승은 학식이 깊어 그와 견줄 자가 드뭅니다. 내성(內省)하는 공부가 좀 부족하긴 하지만.” 내성이란 대의(大義)에 어긋나더라도 후일을 기약하며 물러서는 차선(次善)의 수용을 말한다. 나그네는 고봉의 다시(茶詩)를 읊조리며 귀전암 터에 이른다. ‘유거잡영(幽居雜詠)’ 15수 중에서 여섯 번째 나오는 시다. ‘해 가린 소나무는 장막 같고/ 마루에 이른 대나무는 발과 같네/ 벽에는 서자(徐子)의 자리를 달았고/ 꽃은 적선(謫仙, 이백)의 처마에 춤추네/ 학을 길들이는 사이 세월이 흐르고/ 차 달이며 시냇물을 더하네/ 사립문 온종일 닫고 앉아/ 홀로 봉의 부리 뾰쪽함을 감상하네.’ 낙향한 고봉은 자신의 천재성을 남도의 풍류와 차로 삭였을 것 같다. 귀전암 터에 올라 이끼 낀 대롱을 타고 졸졸 흐르는 약수를 한 모금 마셔본다. 이곳에서 고봉은 스승처럼 존경한 퇴계에게 밤을 새우며 편지를 썼으리라. 눈이 침침해지면 약수를 떠다가 차를 달였을 터이고. 고봉은 사단칠정 논변의 팽팽한 긴장을 차 한 잔으로 숨고르기 했을지 모른다. 가는 길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할 경우 장성인터체인지에서 816번 지방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10여분 달리면 월봉서원이 있는 너브실에 다다른다. [茶人기행/진감선사] 참됨 지키고 속됨 거스른 ‘차 살림’ 쌍계사 전신인 옥천사 창건 … 삼베 옷 입고 겨와 싸라기도 감사히 여긴 ‘청빈의 삶’ 구례 화엄사에서 차의 본향인 하동 화개(花開)로 내려오면 차 시배지 논란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화개는 차 산지로서 지방 관아에 차를 만들어 바치는 차소(茶所)였다. 초의선사도 ‘동다송’에서 “지리산 화개동에는 차나무가 사오십 리나 잇따라 자라고 있는데, 우리나라 차밭의 넓이로는 이보다 지나친 것을 헤아릴 수가 없다”고 말했다. ‘선동(仙洞) 골 밝기 전에 금당 복수(金堂 福水) 길어와서/ 오가리에 작설 넣고 참숯불로 지피어서/ 꾸신 내가 한창 날 때 지리산 삼신할매/ 허고대에 허씨할매 옥고대의 장유화상/ 칠불암에 칠왕자님 영지 못에 연화국사/ …/ 화개동천 차객들아 쌍계사에 대중들아/ 이 차 한잔 들으소서.’ 차 민요에 나오는 다인들 가운데서 오늘 나그네가 만나고자 하는 다인은 진감선사다. 선사의 법호는 혜소(慧昭)인데, 스님은 774년에 금마(金馬, 익산)에서 태어나 생선장사하며 빈한한 가정을 돌보다가 부모가 돌아가신 후 “어찌 매달려 있는 박처럼 나이 들도록 지나온 자취에만 머물러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도(道)를 구하러 나선다. 애장왕 5년(804)에 세공사(歲貢使) 선단의 뱃사공이 되어 당나라로 건너가 마조의 선맥을 이은 신감(神鑑)선사의 제자가 된다. 스님은 헌덕왕 2년(810)에 숭산 소림사로 나아가 구족계를 받고 도의(道義)를 만나 함께 수행하다가 도의가 먼저 귀국하자 종남산으로 들어가 3년간 선정(禪定)을 닦는다. 이후 자각(紫閣, 중국 허난성 함곡관 밖의 지명) 네거리로 나와 짚신을 삼아 오가는 사람들에게 3년 동안 보시한 후 귀국한다. 이때가 흥덕왕 5년(830)인데, 스님은 장백사(長柏寺, 상주 남장사)에 머물다가 화개곡으로 들어가 쌍계사의 전신인 옥천사를 창건한다. 스님은 번번이 왕의 부름에 하산하지 않고 불법을 펴다가 문성왕 12년(850) 77살로 입적한다. 탑이나 기록을 남기지 말라고 유언했으나 헌강왕은 스님의 시호를 진감(眞鑒), 탑호를 대공영탑(大空靈塔)이라 하고 최치원에게 비문을 짓도록 했다. 비문에는 노래(범패)도 잘했던 선사의 가풍이 잘 나타나 있다. ‘성품은 꾸밈이 없고 말 또한 꾸며 하지 않았으며, 옷은 삼베라도 따뜻하게 여겼고 음식은 겨와 싸라기라도 달게 여겼다. 도토리와 콩을 섞은 밥에 채소 반찬은 항상 두 가지가 없었다.’ 절 초입에 있는 가장 오래된 차나무 왕의 부름 번번이 거절 … “탑 기록 남기지 말라” 유언 다인으로서 닮아야 할 청빈한 삶이 아닐 수 없다. 비문의 다음과 같은 구절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중국차를 공양하는 사람이 있으면 돌솥에 섶으로 불을 지펴 가루로 만들지 않고 끓이면서, 나는 이것이 무슨 맛인지 알지 못하겠다. 배를 적실 뿐이다, 라고 했다. 진(眞)을 지키고 속(俗)을 거스르는 것이 모두 이러했다.’ 최치원의 비문이 음각된 진감선사비 그 옛날 중국차는 구하기 어려워 아주 진귀했을 터이다. 찻잎을 가루로 만들어 마시는 말차(末茶)였던 것 같은데, 진감선사는 말차의 번거로운 과정뿐만 아니라 “배를 적실 뿐이다”라고 말하며 맛에 탐닉하는 속(俗)을 경계하고 있다. 나그네는 국보 제47호인 진감선사탑비를 보고 나서 진감선사가 찻물로 이용했던 금당 앞의 옥천(玉泉)으로 가본다. 사미승들이 마지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돈오문(頓悟門)을 열고 있다. 문틈으로 그 옛날 진감선사의 차 살림이 엿보인다. 참됨을 지키고 속됨을 거스르는 것이 선사의 차 살림이 아니었을까 싶다. 가는길/화개천 좌우 골짜기마다 펼쳐진 차밭이 칠불사까지 이어져 있다.‘차 시배지‘기념 석물은 쌍계사 옆에 있다.
[茶人기행] 효심 담아 올린 최고의 차 한 잔 화엄사 창건주로 중국서 차 씨 들여온 듯 … 어머니께 차 올리는 모습 석물 조각돼 보존 국보 제35호 사사삼층석탑. 화엄사 매표소를 막 지나니 오른편 다리 입구에 조그만 안내판이 보인다. 안내문에는 우리나라에서 화엄사 장죽전(長竹田)에 최초로 차를 심었다는 글이 실려 있다. 그런데 하동 쌍계사 옆에도 차 시배지(始培地)라는 기념 석물이 있어 도대체 어느 곳이 최초의 차 재배지인지 헷갈린다. 오늘은 화엄사 측의 주장을 들어본다. 화엄사의 창건주는 연기조사다. 1979년에 ‘신라백지묵서대광불화엄경(新羅白紙墨書大廣佛華嚴經)’이라는 사경이 발견되면서 화엄사의 창건연대와 창건주가 분명하게 밝혀진 바 있다. 이전까지만 해도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 때 창건됐으며 연기조사는 인도의 승려라는 설이 전해져왔는데, 사경의 발문 덕분에 연기는 황룡사 출신 승려이며 경덕왕(742~765) 때의 인물이라는 사실이 고증된 것이다. 한동안 인도 승려로 잘못 알려져 1936년에 편찬한 ‘대화엄사사적’을 보면 인도의 고승 연기조사가 화엄사를 창건하고 장죽전에 차를 심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인도의 고승’이란 기록은 틀린 부분이고, ‘장죽전에 차를 심었다’는 구절이 눈길을 끈다. 연기는 의상의 제자로서 중국에 들어가 화엄학을 공부하고 돌아오면서 차 씨를 가져와 절 주위에 심었을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는 흥덕왕 3년(828)에 사신 대렴(大廉)이 중국에서 차 씨를 가져와 지리산에 최초로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막연하게 지리산으로 기록되어 시배지 논란이 일고 있는 것 같다. 장죽전에 차 씨를 심었다는 근거는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通道寺舍利袈裟事跡略錄)’에 나와 있는 ‘대렴이 중국에서 가져온 차 종자를 장죽전에 심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유일하다. 연기조사가 무릎 꿇고 어머니에게 차를 올리고 있는 모습의 석물 나그네는 다리를 건너 장죽전을 둘러본다. 정자가 두 채 있고, 대렴이 차를 심었다는 기념물이 세워져 있다. 화엄사에는 야생 차밭이 장죽전말고도 효대(孝臺) 서남쪽과 구층암 천불전 뒷산에 넓게 퍼져 있다고 한다. 효대란 연기조사가 어머니에게 차를 올리는 효성스러운 모습의 석물이 조각돼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연기조사가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에게 차를 공양하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감동을 준다. 나그네는 효대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긴다. 나그네도 경험하곤 하지만, 어머니는 자식이 우려준 차를 이 세상 최고의 차로 알고 마신다. 어머니는 차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자식의 정성을 마시는 것이리라. 이윽고 나그네는 장엄한 각황전을 지나 국보 제35호로 지정된 사사삼층석탑(四獅三層石塔)이 선 효대에 이른다. 국보 제35호는 네 마리의 사자가 사방에 앉아서 비구니 스님이 된 연기조사의 어머니를 지키고 있으며, 머리로는 삼층 석탑을 떠받들고 있는 조형물이다. 이 석탑 정면에 연기조사가 어머니를 향해 찻잔을 들고 있는 석물이 있다. 이 석탑을 지키는 탑전(塔殿) 아래에 야생 차밭이 있을 텐데 탑전의 문은 굳게 잠겨져 있다. 할 수 없이 화엄사 법당 뒤편에 있는 구층암으로 가는 산길에 오른다. 구층암에 들러 암주(庵主) 스님을 찾는다. 암주는 명완(明完) 스님인데, 동행한 다우(茶友)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다승(茶僧)이라고 귀띔을 한다. 아니나 다를까 차를 다루는 손동작이 물 흐르듯 꽃 피듯 자연스럽다. 차를 기다리는 동안 미소 짓게 하는 스님의 얘기에 문득 앉은 자리가 편안해진다. “이곳 천불전 뒤에도 야생 차밭이 있는데, 400년 넘은 차나무도 있다고 다인들이 이야기합니다.” 스님에게 어떤 차가 좋은 차냐고 묻자, 웃기만 하면서 벽에 걸린 탁본한 그림을 가리킨다. 석굴암에 조각된, 문수보살이 부처에게 한 잔의 차를 올리고 있는 그림이다. 부처에게 차를 올리듯 우려낸 차가 최고라는 뜻이다. 그렇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올리는 차가 최고의 차일 것이다. 천년 전, 연기조사가 어머니에게 올린 바로 그 효심의 차가 최고일 터이다.
[多人기행| 윤선도] 자연 벗 삼아 ‘茶와 詩’ 한평생 집권세력 견제로 번번이 정치적 좌절 … 해남·보길도 등지서 은거의 삶 땅끝마을 선착장에서 오랜만에 뱃고동 소리를 듣는다. 배 한 척이 심호흡을 하고 있다. 서둘러 배에 오른 나그네는 바닷바람을 쐬며, 남인 가문에서 태어나 20여년의 유배와 19년의 은거생활을 한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일생을 떠올려본다. 윤선도의 시련은 나이 30살에 성균관 유생의 신분으로 조야(朝野)를 깜짝 놀라게 하는 상소를 올림으로써 시작된다. 그는 서인 이이첨 등의 죄상을 격렬하게 규탄하는 ‘병진소(丙辰疏)’를 올렸다가 오히려 반격을 받아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된다. 이후에도 집권세력인 서인의 난정(亂政)에 맞서 왕권강화를 주장하다 번번이 좌절하곤 한다. 이를 보면 그의 기질은 차를 즐긴 조용한 품성에다 타고난 반골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나그네는 윤선도의 삶이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끊임없는 좌절 속에서도 그는 끝내 타협하지 않았고, ‘어부사시사’ ‘오우가’ 등 많은 단가와 시조를 남겨 정철(鄭徹) 박인로(朴仁老)와 더불어 조선시대 삼대 가인(歌人)으로 불리고 있다. 많은 단가·시조 남긴 ‘조선의 歌人’ 윤선도는 권력 지향적인 인간들에게 실망한 나머지 자연 귀의를 갈망했다. 그의 귀의처는 관향(貫鄕)인 해남 금쇄동과 보길도 부용동이었는데, 그에게 시(詩)와 차(茶)는 자연과의 합일을 위한 매개체였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보길도를 처음 찾은 것은 51살 때였다. 병자호란으로 강화도에 피난 중인 원손대군과 빈궁을 구출하고자 가복(家僕) 수백명을 배에 태우고 갔으나 왕자 등은 이미 붙잡혀가고 없었다. 뱃머리를 돌려 제주도로 내려갈 작정으로 항해하던 중 태풍을 만나 보길도에 닻을 내리고 격자봉 계곡을 찾아 들어가 그곳 일대를 부용동이라 이름 붙이고, 집을 지어 낙서재(樂書齋)라 하였던 것이다. 부용동 계곡의 세연정. 이후 해남 금쇄동을 오가며 은거하던 윤선도는 66살에 효종의 친서를 받고 실로 18년 만에 상경했지만, 그를 배척하는 서인의 모함에 맞서 칭병(稱病)하며 남양주 고산촌(孤山村)에 머물다 곧 해남으로 돌아가고 만다. 고산촌에 머문 인연으로 호가 고산이 되었고, 이때의 심정을 읊조린 다시(茶詩) 한 편이 전해지고 있다. ‘가파른 산이 인가에 가까우니 풍속도 경박하구나/
착하고 아름다운 그대 말씀 일찍이 자랑했네/
좌우 둘레는 첩첩 높은 산봉우리 솟았고/
앞뒤로는 긴 모래밭 펼쳐 있네/
거친 차와 궂은 밥도 더 먹지 못하겠네/
끝내 뜻 맞지 않아 기대한 희망 멀어졌으니/
오래도록 부용동 옛집이나 추억하려네.’ 서인들의 횡포로 조정이 잘못돼가도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차라리 부용동으로 돌아가 동천석실(洞天石室)에 앉아 차 마시며 정조를 지키고 싶다는 희원의 시다. 보길도 선착장에서 내려 곧장 부용동에 올라가 계곡 물이 휘돌아 흐르는 세연정(洗然亭)에 들렀다가 보길도의 주봉인 격자봉 아래 자리잡은 낙서재 터를 둘러본다. 낙서재에서 유서를 읽다가 눈이 침침해지면 맞은편 산중턱에 있는 동천석실에 올라가 차를 마셨을 법하다. 부용동 8경 가운데 ‘동천석실의 저녁연기(洞天石室暮煙)’가 있으니 말이다. 실제로 땀을 흘리며 동천석실에 올라보니 숙박 취사를 할 수 없는 작은 정자로, 저녁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면 차 달이는 연기가 틀림없었을 듯하다. 석실 앞에는 차 부뚜막이었던 바위가 있고, 찻물을 기른 석천(石泉)이 있기 때문이다. 윤선도는 오우(五友), 즉 물 바위 솔 대나무 달이라는 자연을 벗 삼아 선비로서 수신(修身)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자연은 그런 그에게 이슬과 바람과 햇볕, 그리고 하늘과 땅의 기운을 품은 차를 선사했던 것 같다. 보길도 가는 길 해남 땅끝마을 선착장에서 보통 2시간 간격으로 보길도 가는 배가 있다. 보길도까지는 1시간 정도 걸리고 승용차도 함께 승선할 수 있다. [茶人기행| 정약용] 차사랑 ‘茶山’ 절망 딛고 실학 완성 강진 유배생활 정신 추스른 영약 … 혜장 스님과 茶談 나누며 목민심서 집필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어귀에 이르자 차의 그윽한 향이 걸음을 멈추게 한다. 바로 옆 전통찻집에서 차를 덖고 있음이 분명하다. 다인들은 차의 그윽한 향과 맛을 일컬어 차의 신, 즉 다신(茶神)이라고 한다. 그래서 차를 품다(品茶)하면서 ‘다신이 있다 없다’ 하는 것이다. 나그네는 뜻밖의 다신을 만난 셈이다. 정약용의 영혼인 양 차의 혼백과 마주치다니 황홀하다. 정약용의 호가 다산(茶山)이 된 것은 지금 나그네가 서 있는 산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정약용이 40살에 강진으로 유배 온 까닭은 스무 살 때 이복 맏형 약현(若鉉)의 처남 이벽(李壁)에게서 천주교에 대한 얘기를 듣고 천주교 서적을 본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정조 15년 자신의 나이 30살 때 노론의 주도로 천주교가 사교(邪敎)라 하여 박해가 시작되자 동복 형 약전과 함께 배교한다. 이후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온 정약용은 노론의 공격에도 벼슬을 거듭하다 정조가 승하한 후 40살이 되던 순조 1년에 체포돼 국문을 받는다. 이때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형 약종과 이가환 이승훈 권철신 등은 사형당하고, 형 약전은 신지도로,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로 가야 하는 유배형을 받는다. 그러나 그해 10월 잠적해 있던 황사영이 체포되면서 다시 국문을 받고 형은 흑산도로, 그는 강진으로 유배를 간다. 정약용 영정. 정약용은 동문 밖 밥집 노파의 호의로 골방 하나를 얻어 기거한다. 처음 2, 3년 동안은 국문받은 몸의 후유증과 고향 생각에 빠져 술로 세월을 보낸다. 친인척과 선후배를 한꺼번에 잃은 비극과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절망감으로 괴로워했던 것이다. 그러나 밥집 노파의 한마디에 정신을 차린다. 노파가 어느 날 정약용에게 던진 말의 요지는 ‘부모의 은혜는 같은데 왜 아버지만 소중히 여기고 어머니는 그렇지 아니한가?’였다. 생의 뿌리를 묻는 노파의 말에 세상을 기피하려던 정약용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지극히 정밀하고 미묘한 뜻이 밥을 팔면서 세상을 살아온 밥집 주인 노파에 의해서 겉으로 드러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하면서 크게 깨닫고는 흐트러져 있는 자신을 경계한다. 정약용이 재기하는 또 하나의 사건은 혜장(惠藏)과의 우연한 만남이다. 백련사 주지 혜장과 밤새도록 마음을 주고받는 다담(茶談)을 나누며 차츰 다인이 되었고, 반면에 유서(儒書)에 밝았던 혜장은 정약용을 만나 그가 애독하던 논어와 주역의 세계에 더 깊이 들어갔던 것이다. 직접 판 약천 등 ‘다산초당’ 경치 옛날 그대로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정약용에게는 한 잔의 차야말로 정신을 추스르는 영약(靈藥)이었고, 훗날에는 목민심서를 비롯한 500여권의 서책을 마무리 짓게 한 저술삼매의 감로수였던 셈이다. 차를 좋아하게 된 정약용은 혜장에게 ‘병을 낫게 해주기만 바랄 뿐 쌓아두고 먹을 욕심은 없다오’라는, 차를 보내달라고 조르는 걸명(乞茗)의 시를 보내기도 한다. 추사 김정희의 친필로 쓰여진, 정약용을 보배롭게 모시는 뜻이 담긴 보정산방 현판. 다산초당은 이제 기와로 덮여 있다. 그러나 정약용이 직접 판 샘 약천(藥泉)과 차 부뚜막인 다조, 초당 왼편 위에 직접 정석(丁石)이라고 새긴 바위, 제자들과 함께 만든 연지(蓮池) 등 초당의 네 가지 경치는 옛날 그대로다. 약천 물로 목을 축이고 나서 정약용이 흑산도에 있는 형 약전을 그리워하며 앉곤 했던 자리, 강진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천일각(天一閣)으로 가 정약용의 귤림(橘林)이란 다시(茶詩)를 읊조려본다. ‘책뿐인 다산초정/ 봄꽃 피어나고 물이 흐른다네/ 비 갠 귤나무 숲의 아름다움이여/ 나는 바위샘물 길어 차병을 씻네.’ 다산은 제자에게 말했다. ‘동트기 전에 일어나라. 기록하기를 좋아하라.’ 그러나 나그네는 다산이 자기 질서를 지키고자 날마다 다짐했던 맹세의 말이라는 것을 안다. 다산이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가 된 것은 바로 자신과의 약속을 몸부림치며 지켜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茶人기행∥☞草衣禪師편] 한평생 茶禪 … 무소유의 ‘茶聖’ 16살에 출가해 차와 인연 … ‘다신전’’ ‘동다송’ 등 저술 통해 우리 차 중흥의 기틀 다져 요즘 차 맛에 푹 빠진 소설가 정찬주씨가 전국의 다인을 찾아 길을 떠난다. 차를 사랑하고 차를 노래했던 선인들의 삶을 더듬어보고 그들에게서 삶의 지혜를 발견하고자 함이다. 두륜산의 햇살도 나그네처럼 발길을 재촉하고 있다. 햇살이 물러난 골짜기에는 벌써 산그늘이 머루 알 빛깔로 접히고 있다. 나그네는 서둘러 초의선사(草衣禪師)가 열반할 때까지 머물렀던 일지암(一枝庵) 가는 산길로 오른다. 초의가 차를 마시며 선열에 잠겼던 다정(茶亭)이자, 수행공간이던 일지암이라는 단어가 오늘은 예전과 다르게 다가온다. 한산(寒山)의 시에 일지(一枝)라는 말이 나온다. ‘내 항상 생각하나니 저 뱁새도 한 몸 편히 쉬기 위해 한 가지에 있구나(常念焦瞭鳥 安身在一枝).’ 작은 뱁새도 두 가지를 욕심내지 않고 한 가지에 만족할 줄 안다는 지족(知足)을 말하고 있다. 초의도 한산이 오른 무소유의 경지에 이르고 싶었으리라. 그러나 미망을 좇는 사람들은 하나 이상을 욕심낸다. 집도 한 채가 아니라 두 채, 필요치 않은 군더더기에 집착한다. 나그네는 군더더기를 버리고 사는 게 무소유의 삶이라는 사실을 다시 깨닫는다. 정약용에게 가르침 받고 김정희와는 차로 우정 나눠 다서(茶書)의 고전인 ‘다신전’과 ‘동다송’을 저술한 우리 차의 중흥조 초의는 정조 10년(1786) 나주목 삼향에서 태어나 고종 3년(1866)에 열반한 선승으로 성은 장(張)씨이고, 자는 중부(中孚)였다. 15살 때 강변에서 탁류에 휩쓸려 죽을 뻔한 순간 부근을 지나던 승려가 건져주어 살아났는데, 그 승려의 권유로 16살에 남평 운흥사로 출가했다. 초의는 불경과 차(茶)와 탱화와 범패를 배우고, 이후 대흥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뒤 20대 초반에 이미 불법을 통달하고 크게 깨닫는다. 24살 때는 강진으로 정약용을 찾아가 유서(儒書)를 받고 시부(詩賦)를 익힌다. 다산은 초의에게 “시를 배우는 데 뜻을 헤아리지 않는 것은 썩은 땅에서 맑은 샘물을 기르려는 것과 같고, 냄새나는 가죽나무에서 향기를 구하는 것과 같다”고 시심의 근본을 당부한다. 그런데 다산은 훗날 유배에서 벗어나 한강변의 고향에 살면서 초의가 제자 된 지 두 달 만에 자신의 대의(大意)를 깨달았다(見明星悟 是弟二月)는 시를 남긴다. 16살의 명민한 초의가 운흥사로 출가한 것은 훗날 다성(茶聖)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인연이 됐다. 야생 차밭이 흩어져 있는 운흥사와 부근의 불회사는 그곳 수행승들에 의해서 다선불이(茶禪不二)의 선풍이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곳의 행정구역 지명이 다도면(茶道面)인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초의에게 진정한 다우(茶友)는 추사 김정희였다. 두 사람은 차를 법희선열식(法喜禪悅食)으로 마신 말띠 동갑 지기였다. 추사가 초의에게 차를 보내주지 않는다고 윽박지르는 편지는 웃음을 자아낸다. “어느 겨를에 햇차를 천리마의 꼬리에 달아서 다다르게 할 텐가. (중략) 만약 그대의 게으름 탓이라면 마조의 할(喝)과 덕산의 방(棒)으로 버릇을 응징하여 징계할 터이니 깊이깊이 삼가게나. 오월에 거듭 애석하게 여기노라.” 이윽고 일지암에 올라 마루에 앉아본다. 암자도 볏짚의 풀옷(草衣)을 입고 있다. 나그네는 문득 초의스님의 옷자락 속으로 들어간 느낌이다. 암자 옆의 누각에 있던 젊은 스님이 초의 가풍을 잇고 있는 여연스님의 ‘반야차’ 한잔을 권한다. 차를 마시자 산길을 오르며 헐떡이던 마음도 저잣거리의 헛된 꿈도 쉬어진다. 초의스님은 말했다. 차의 티끌 없는 정기를 다 마시거늘 어찌 대도를 이룰 날이 멀다고 하는가(塵穢除盡精氣入 大道得成何遠哉)! 그렇다. 차 한잔 속의 향과 깊은 맛에 자신을 놓아버리자. 만 가지 천 가지의 말도 차 한잔 마시는 것 밖에 있지 않다(萬語與千言 不外喫茶去)고 하지 않았던가. 석양의 햇살이 물러가는 두륜산의 먼 산자락이 선경(禪境)에 드는 관문처럼 그윽하기만 하다. ※일지암 가는 길 / 해남 대흥사 성보박물관 옆에 있는 초의선사 동상을 먼저 들른 다음 곧장 산길을 따라 20여분 정도 오르면 초의선사가 40년 동안 머물렀던 일지암이 있다.
정말 자료가 많이 없어요......이 정도면 유래정도는..........글쓴이 @ |
첫댓글 ㅎㅎ.. 이젠 녹차 마셔야 되겠군....
아! 이 좋은 녹이 어디에있당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