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말씀 본문
석 달만에 나는 무죄로 석방이 되어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에 빚진 자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그 빚을 갚기 위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교회 터를 찾아 나섰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우리 교회를 지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교회를 불편해하거나 부끄러워한 적도 없습니다. 기도할 자리가 있으면 그걸로 감사할 뿐 넓고 편안한 자리는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훗날 미국에 머무는 동안 교회 식구들이 청파동 교회를 번듯하게 뜯어고친다는 소식을 듣고 당장 공사를 중지하라는 전보를 쳤습니다. 청파동 교회는 나 개인의 역사가 담긴 곳이기도 하지만, 우리 교회의 역사를그대로 증언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제아무리 멋있게 뜯어고친들 역사가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번듯한 꼴이 아니라 그 속에 깃든 뜻입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거기에 전통이 있고 빛이 있으며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전통을 존중할 줄 모르는 민족은 망하고 맙니다.
청파동 교회의 기둥에는 ‘언제 무슨 일 때문에 그 기둥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는가”의 역사가 그대로 새겨져 있습니다. 붙잡고 눈물 흘리던 기둥을 보면 통곡이 나오고 비뚤어진 문짝을 봐도 옛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지금은 옛날 마룻바닥이 다 없어졌습니다. 밤새 엎드려 기도하며 피눈물을 흘리던 마룻바닥이 없어졌으니 그 눈물자국 역시 사라졌습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그런 아픔의 추억입니다. 모양이나 외관은 낡아도 상관없습니다. 세월이 지나 우리에게도 잘 지어진 교회들이 많이 생겼지만 나는 그런 곳보다는 청파동 언덕 위의 비좁고 낡은 집을 찾아가 기도하는 것이 더 편안합니다.
잎사귀야 조금 벌레를 먹었더라도 뿌리가 깊으면 괜찮습니다. 말이야 어눌하더라도 진실된 마음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말씀제목: 홀로서기(独り立ち)와어울리기
어울리기로 나아가기 위한 홀로서기
열심히 수행 정진하여 독립(獨立) 독행(獨行)하는 불교 스님들의 수행자의 의연한 자세는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또한 그런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동경(憧憬)과 감탄을 자아냅니다. 그래서 수행의 목표는 홀로서기라고 생각합니다. 수행자는 홀로서기를 위해 나름대로의 방법을 찾습니다. 대중처소에서 어울려 정진하기도 하고 토굴에서 홀로 지내기도 하며 무문관(無門關)에 틀어박히기도 합니다. 이런 방법들은 수행자 스스로 선택하여 행합니다.
홀로서기는 어울리기를 동반해야 합니다. 홀로서기가 그것만으로 그칠 때는 독선과 아집을 낳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홀로서기가 제대로의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울리기가 전제돼야 합니다. 어울리기로 나아가기 위한 홀로서기가 아니라면 그런 홀로서기는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어울리기는 화합과 나 아닌 남과의 동고동락(同苦同樂)이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신앙의 목적을 이룬다는 것은 저 혼자만의 이룸(성취)에 머물지 않고 그 성취를 어울리기를 통해 표출함으로써 성취의 의미를 이루게 된다는 말이다. 내가 신앙을 통해 얻은바 지혜와 축복이 있다면 그 지혜와 축복을 널리 나 아닌 모든 사람과 함께 한다는 가르침이 바로 진정한 신앙자의 모습일것입니다.
어울리기를 전제로 한 홀로서기라야 홀로서기의 진정한 뜻이라 하겠습니다. 홀로서기와 어울림이 맞물려 조화를 이룰 때 신앙의 목적을 이룬 진정한 성취라 하겠습니다. 종과 북이 어울려 한 목소리를 전해줄 때(鐘鼓和鳴) 배움과 실천은 폭과 깊이를 더 하듯, 홀로서기와 어울리기도 그러해야 합니다.
홀로서기와 왕따는 완전히 다르다
홀로서기란 종적기준 세운 것을 말합니다. 종적기준이라는 뜻은 원인적 것을 찾아 분명한 목적의식을 알게 되어 왜 해야 하는지 분명한 동기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은 신앙자들이 기도와 수행 그리고 금식등을 하면서 경전을 읽고 공부하는 것은 인생의 문제를 원인적인 것을 찾아가기 위함입니다. 원인적인 종적 기준을 찾아갈 때 진정으로 홀로서기를 할 수 있습니다. 원인적인 종적 기준을 찾지 못한 세상의 사람들은 홀로서기를 두려워합니다. 세상사람들에게 왕따 당하는것을 두려워해서 남을 무조건적으로 의식을 하게 되어 세상 기준을 따라 나의 판단기준은 없고 맹목적으로 남을 의식하며 어울리기를 합니다. 그래서 홀로서기와 왕따는 완전히 다르다고 말합니다.
참아버님의 생애를 보게 되면 홀로서기의 생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것을 원래의 것으로 찾기 위한 그 누구도 홀로서기를 하신 분입니다. 사탄세상이 주관하는 사탄문화 속에서도 남아있는 참사랑의 문화를 봅니다. 그래서 세상의 세속적이라고 해서 전통기독교에서는 부르지 않는 세속적인 유행가를 부릅니다. 백금에 보석 놓은 왕관을 준다 해도 라고 시작하는 유행가를 부르면서 그 속에 흐르는 참사랑의 원리를 찾아 부르십니다. 사탄주관권에 있으면서 눈치 보지 않고 홀로서기를 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의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따라가지 않고 손해 볼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합니다. “공자와 석가모니는 나의 제자야” 북한 정권의 핵심자 앞에 “주체사상으론 남북통일 할 수 없고, 북한이 남한을 침공했어” 라고 당당하게 말을 합니다. 세상의 잘못된 이목이나 판단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에 따른 결과로 왕따를 두려워하지 않고 홀로서기를 합니다. 그래서 그분은 뚜렷한 개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홀로서기의 종적기준을 세상의 사탄문화 속에 찾기 힘든 것을 찾아 횡적으로 한사람 한사람 찾아 넓혀나가는 어울리기를 하십니다. 타협하지 않고….
세상속에서 홀로서기한 참부모님의 생애를 추종해야 합니다. 그 추종하는 모습은 어떠한 모습되어야 종적기준을 찾은 홀로서기가 될수 있을까요?
‘풀로우어십의 힘’이라는 책에서 켈리 교수는 추종자를 다섯가지로 나누었습니다. 그 기준은 두 가지 차원인데 하나는 얼마나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하는가(독립성)입니다. 다른 차원은 얼마나 적극적인가(적극성)입니다. 독립성과 적극성을 모두 낮은 사람을 양떼형 이라고 했고, 독립성은 높지만 적극성이 낮은 사람을 ‘소외형이라고 했습니다. 또 적극성은 높지만 독립성이 낮은 사람을 ‘아부형’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독립성과 적극성이 모두 중간쯤 되는 사람을 ‘생존형’이라 하고 독립성과 적극성이 둘 다 높은 사람을 ‘효과적인 추종자’라고 했습니다.
히딩크의 리더쉽을 배우기 위한 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그 히딩크의 우산에 들어가서 나름대로 성공적 삶을 살아가고 있는 박자성과 이영표, 이 천수, 송종국, 김남일의 풀로우어쉽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더 중요한 건 그들이 히딩크의 리더쉽 우산에서 어떻게 올바른 풀로우어십을 갖는 것입니다. 앞의 추종자의 분류처럼 독립성과 적극성이 높은 ‘효과적인 추종자’가 돼야 합니다. 현재까지 효과적인 추종자인 독립성과 적극성이 높은 박지성은 히딩크 리더십에 운명 지어 지지 않는 효과적인 추종자의 성공 공식이 되었습니다. 그는 히딩크 리더쉽 우산 속에서 맹목적이지 않고 그 본질을 닮은 독립성의 홀로서기를 했고, 그 기초 위에 횡적으로 적극적으로 누구눈치보지 않고 무서우리 만치 노력을 하면서 어울리기를 하였기에 나날이 발전해나갔습니다. 히딩크 리더쉽 우산 속에서 추종했던 다른 선수들 보다 ,,,,
박쥐
2001년 현진님께서 박쥐라는 말을 해주었습니다. 새도 아니고 동물도 아닌 것이 박쥐입니다. 새와 함께 있을 때는 새에게 독립성이 없이 어울리기는 적극성인 아부하면서 생존을 하고 동물과 있을 때는 동물의 가치기준으로 아부하면서 생존을 하다가 새와 동물이 싸움이 벌어지는 독립성을 요구하는 때 중간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리지도 못하는 관망을 하다가 박쥐는 새와 동물들에게 돌로 맞아 비참하게 죽습니다.
진실된 마음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괴산산수원 애국회 회원들이 노인이 많습니다. 비록 세상에서 낮게 평가하는 농촌촌부면 어떴습니까? 참부모님 행사에 자리를 채워주고 우리들과 함께 하고 싶은 그 마음만 있으면 되지 않습니까? 그 마음을 볼 수 있는 자는 부모님을 닮은 홀로서기에 성공한 자이며 종적기준으로 살아가는 진정한 축복가정입니다.
이번 안보교육의 특성은 외국부인들이 인원동원을 하고 또 사회를 맡고 참부모님 자서전 판매를 합니다. 한국식구와 비슷하게 인원동원을 합니다. 사회를 볼 때 말이 어눌합니다. 매끄럽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눌하면 어떴습니까? 매끄럽지 못하면 어떴습니까? 대한민국의 남북통일을 대한민국 사람들도 외면하고 있는 이때 자기 나라보다 신앙의 조국을 사랑하고 있다는 외국인들의 절규하는 마음만 있으면 되지 않습니까? 그 마음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귀하게 여기며 횡적으로 넓혀나가며 살아가는 것이 부모님을 닮아 홀로서기에 성공한 축복가정들의 모습들이며 삶입니다.
홀로서기 시를 쓰신 서정윤 작가는 홀로서기를 이렇게 말합니다. 둘이 만나 서는 게 아니라, 홀로 선 둘이가 만나는 것이다.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10월14일 축복가정의 본래모습을 뒤찾기 위해 거울을 보게 하셨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홀로서기에 성공해야 합니다. 참부모님을 께서 찾으신 종적기준인 진실한 마음을 올바로 추종하며 판단하는 가운데 횡적으로 어울리기를 할 줄 아는 각각의 부부가 되어 참부모님을 중심에 모시고 만나 축복 받아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