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최씨 백불암 최흥원 종가
둥글게 썬 태양떡국 부부 맞절로 새해맞이
|
1 경주최씨 최흥원 종가에서는 설날 아침에 부부가 맞절을 한다. 새해에도 종가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서로가 도와달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대구 시내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둔산동 옻골마을, 경주최씨 백불암 최흥원(百佛庵 崔興遠·1705~1786) 종가의 설 풍경은 이색적이다. 조상의 차례상에 올리는 떡국을 둥글게 썰어 태양떡국이라 하고, 설날 이른 아침에 부부가 맞절로써 설맞이를 했다.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조선시대 고옥으로서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종가에는 14대 종손 최진돈(崔晉惇·63) 씨와 종부 이동희(李東姬·61) 씨, 노모 김윤현(金尹鉉·86) 씨가 살고 있었다.
400여 년간 한 번도 양자를 들이지 않고 기적적으로 종손의 큰아들만으로 이어온 종가에는 ‘나’를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가문만 생각하는 종부들의 삶이 있었다. 환갑의 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탄력 있는 피부를 가진 종부 이씨는 종가의 적통을 잇기 위해 마흔에 아들을 보았다. 딸만 내리 다섯을 낳은 뒤였다. 이제 네 딸은 모두 시집갔고 아들 기척(基拓·21) 씨는 군에 갔다.
400년간 양자 들이지 않은 기적
1년에 15여 차례의 제사를 모실 때마다 100명 넘는 손님이 찾아오고, 하루에도 수없이 접빈상을 차려내며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과를 보내는 종부들의 삶은 ‘나’라는 존재를 잊어야 가능하다. 그럼에도 어떤 힘이 저토록 고운 모습을 지닐 수 있게 했을까? 종부는 생각만 바꾸면 된다고 했다. 피할 수 없는 삶이라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자부심을 가지면 어렵지 않다고 했다.
설에는 문중 어른들이 도포와 갓을 쓰고 종부에게 세배를 드려 수고했음을 고마워하고 항렬이 높은 집안 어른도 종부에게는 함부로 말을 낮추지 않아 인격적으로 예우를 하고 있었다.
종가 사람들은 설날 아침 6시쯤에 일어난다. 종손은 몸을 청결히 하고 도포와 갓을 쓰고 사당 참배를 한다. 이 사당 참배는 설날뿐 아니라 매일 종손이 하는 일이다. 참배 후 가족이 모여 안채에서 준비한 떡국을 먹고 나면 노모에게 먼저 세배를 올린다. 그 다음 부부가 맞절을 한다. 새해에도 종가의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서로 도와달라는 의미가 담겼다. 다음은 자녀들의 절을 받는다. 차례상 차림은 불천지위 양위분 두 쌍과 4대조 제례를 합치면 모두 여섯 상으로 재취 부인까지 합해 떡국 13그릇을 준비하고 술안주로 세 가지 적과 마른안주인 포를 올린다. 밤, 대추, 곶감, 사과 네 가지 과일과 강정, 약과, 식혜를 올린다. 이렇게 음식을 차려두면 작은댁에서 먼저 차례를 모신 뒤 종가에 오기 때문에 낮 12시가 넘어야 차례를 모실 수 있다고 했다.
태양떡국 만들기
아랫사람들을 거느리던 예전과 달리 요즘 종부들은 일손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지만 이 댁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무슨 때가 되면 문중 부인들이 자기 일처럼 거들기 때문이다. 우애 있는 문중으로 주위의 부러움을 살 만큼 친척들은 종가의 일이라면 자기 일처럼 생각한다. 설에는 참석 인원만 100명이 넘는다. 떡국 준비도 만만찮겠구나 싶지만 종부는 걱정하는 기색이 없다. 불천지위 제사 때 찾아오는 200여 명의 손님도 예사롭게 치러내기 때문이다.
이 댁에선 조상에게 올릴 떡국거리만은 시대가 바뀌어도 방앗간에서 썰어오지 않는다. 가래떡을 둥근 태양 모양으로 썰어야 하는 종가의 풍습 때문이기도 하지만, 종부의 손끝으로 빚은 정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떡국을 먹으면 나이 한 살 더 먹는다는 이야기가 바로 이 해를 닮은 가래떡 모양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설명도 설득력이 있다. 종부는 특히 가래떡을 둥글게 썰 수밖에 없었던 옛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에 따르면 몇십 년 전만 해도 설이 다가오면 집에서 가래떡을 만들었다. 그러려면 쌀을 불렸다가 디딜방아에서 가루를 빻아 체로 쳐야 했는데 강추위에 체가 얼어붙어 화롯불에 녹여야 했고, 바람에 떡가루가 날리지 않도록 병풍을 둘러쳐야 했다. 또 가래떡은 떡을 잘 쪄야 하므로 떡을 찔 동안 안방 아랫목에는 여자들이 앉지도 못했다. 조왕신이 노하지 않아야 떡이 잘 쪄진다 믿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성 들여 찐 떡을 떡판에 놓고 기운 센 장정들이 떡메로 치면, 아낙들은 바가지에 물을 떠놓고 떡메에 발라줘 떡밥이 튀거나 눌어붙지 않게 했다. 그리고 다 친 떡은 조금씩 떼어 손으로 비벼서 둥글고 길게 만든 다음 하룻밤 정도 굳기를 기다렸다가 썰었다. 이렇게 손끝으로 만들다 보니 가래떡을 가늘게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굵은 가래떡을 돈짝처럼 썰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떡국 떡은 이렇게 최소한 사흘이 걸리는 손작업 끝에 만들어진다. 종부는 후손들의 정성이 담긴 귀한 음식으로 설 차례상에는 반드시 떡국을 올린다고 했다. 떡국 맛은 육수가 맛있어야 한다는 기본 원칙이 종부의 손맛에 무색해졌다. 이날 떡국을 맹물에 끓였는데도 국물이 매우 고소하고 담백했다. 떡국 떡도 쫄깃쫄깃해서 그 비결을 물었다.
|
2 노종부 김윤헌 할머니와 종부, 문중 부인들이 칼로 하나하나 정성을 다해 가래떡을 썰고 있다. 3 최흥원 종가에서는 차례상에 올리는 떡이 둥근 해를 닮았다고 해서 ‘태양떡국’이라 부른다. 4 영남지방 양반가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주는 경주최씨 최흥원 종가의 모습.
맹물에 끓여낸 떡국 고소하고 담백
“어려웠던 시절에 무슨 고깃국물을 만들겠어요. 맹물에 끓인 떡국을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들 했지요. 수백 명의 떡국을 끓이는데 언제 사골이나 멸치국물을 따로 만들겠어요.”
무쇠솥에 장작불을 지펴 펄펄 끓는 물에 불렸던 떡을 넣은 다음 불을 높여 빨리 끓여내야 떡국 떡이 쫄깃쫄깃하다고 했다. 여기다 국간장으로 간을 하는 게 전부. 손님상에는 다진 고기를 볶아 올리고 골패 모양으로 썰어둔 달걀지단과 부순 김도 올린다. 차례상에 올린 떡국은 다시 먹으려면 퍼져서 맛이 없는데 종가에서는 이 떡국을 여러 사람이 먹을 떡국에 함께 넣어 끓인다. 조상이 흠향했던 것을 음복하는 의미도 있고 불은 떡국을 처리하기에도 좋다는 지혜를 일러주었다.
파평윤씨 노종파 윤증 종가
제사에 떡 올리지 않고 양력으로 차례 지내다
|
1 윤증 종가의 단출한 설 차례상. 밤 대신 감자를 깎아 올린 것이 이색적이다.
파평윤씨 윤증 종가에서는 제사상에 떡을 올리지 않는다. 기제사와 설 차례도 양력으로 지낸다. 이곳은 조선시대 왕비를 가장 많이 배출한 파평윤씨 노종파(魯宗派) 명재 윤증(明齋 尹拯·1629~1714)의 옛집이다.
윤증은 조선 숙종 때 학자로 소론의 영수(領袖)였다. 노론과의 치열한 당쟁으로 권력에 혐오를 느낀 그는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에서 후학 양성에만 힘쓴 선비였다. 이 댁의 제상이 이처럼 단출한 것은 후손에 대한 사랑과 선생의 가르침을 올바로 지켜나가는 후손들이 만들어낸 가풍 덕이다. 생활이 어려워 조상의 제상을 제대로 차리지 못할 후손을 위해 “제상에 떡을 올려 낭비하지 말 것이며, 일거리가 많은 화려한 유밀과며 기름이 들어가는 전도 올리지 말라”고 일러두었다. 또 제물을 장만할 때는 종이로 입을 봉하고 침이 튀지 않게 정성을 다하라는 유언도 남겼다. 천문학에 밝았던 그의 9대 후손은 제삿날을 양력으로 정했다. 그래서 설 차례도 양력으로 지낸다. 제사 모시는 시간도 한밤중이 아니라 저녁에 지낸다. 유서 깊은 대종가에서 이런 혁신은 쉽지 않은 일이다.
밤 대신 감자 올린 설 차례 상차림
종가에는 75년간 종가를 지킨 11대 종부 양창호(梁昌鎬·92) 씨를 모시고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종손 대신 둘째아들 윤완식(尹完植·55) 씨가 산다. 노종부는 추운 날씨임에도 설 차례상 차림을 보여주었다. 대청에 놓인 가로 99cm, 세로 68cm의 제사상치고는 작아 보이는 상에 오른 차례 음식은 놀랍도록 단출했다. 부부를 함께 모시는 합설이다.
신주 앞 가운데에 수저를 담은 시접 그릇을 놓았고 떡국 두 그릇을 놓았다. 그 앞으로 술잔 두 개를 놓았다. 식혜도 건더기만 담고 그 위에 북어를 잘게 썰어 고명으로 올렸다. 그 옆으로 간장 한 종지, 간장 옆으로 나박김치 한 보시기를 놓았다. 마지막 줄에는 오른편에 머리와 꼬리를 자른 북어 두 마리를 엇갈리게 놓았고 그 위에 오징어 두 마리도 거두절미(去頭截尾)해 엇갈리게 올려 담았다. 그리고 과일은 대추, 밤, 곶감이 전부였다. 이날 밤이 준비되지 않아 대신 감자를 올렸는데 이 댁의 가풍에서는 꼭 무엇을 올려야 한다는 기준을 두지 않는다고 했다. 감자도 종자이고 밤도 종자이므로 종가에서 직접 농사지은 것이면 된다고 했다. 얼마나 편리한 생각인지 모르겠다. 제물 때문에 제사를 기피하는 지금 시대에 참으로 따르고 싶은 상차림이다. 이 정도 음식으로 차례상을 차린다면 누가 제사를 피할까 싶다.
노종부는 이렇게 간단한 제상 차림을 할 수 있게 해주신 조상에게 감사한다고 했다.
“우리 조상님들은 참으로 훌륭하셨어요. 앞을 내다보는 혜안이 있으셨지요. 차례상뿐 아니라 조상이 돌아가신 날 지내는 기제사도 상차림이 정말 간단해요. 제사 당일 준비해도 늦지 않아요.”
밥에 고기와 무를 넣어 끓인 국과 어적(魚炙), 계적(鷄炙), 육적(肉炙)을 올리는데 세 가지 적이 없으면 두 가지라도 형편껏 차리면 된다. 그리고 뿌리나물 도라지, 줄기나물 고사리, 잎나물 미나리의 세 가지 나물을 한 그릇에 담아 올리는데 모두 가문의 뿌리를 상징하는 뜻이 담겨 있다.
어탕, 육탕, 소탕도 의미가 있다. 바닷고기로 만든 어탕(魚湯), 네발짐승 고기로 끓인 육탕(肉湯), 무와 두부를 넣은 소탕(蔬湯)을 올리는 것은 자연이 내린 음식을 조상이 골고루 맛보시라는 뜻이다. 어포, 육포, 문어포를 한 그릇에 담고 나박김치, 간장, 새우젓, 식혜를 올리는데 식혜는 건더기만 그릇에 담고 그 위에 육포를 잘라 고명으로 올린다. 과일은 밤, 대추, 감, 배, 사과 다섯 가지를 홀수로 올린다.
과일은 대추, 밤, 배, 곶감 순서로 놓는데 소론 집의 상징으로 조율이시(棗栗梨)라 했다. 그러나 음식 준비에는 한 치의 소홀함도 용납되지 않았다. 제삿날 사흘 전부터 고기를 먹지 않고 나쁜 말도 삼가고, 크게 떠들고 웃지도 않는다. 경건한 마음으로 조상을 모셔야 하기 때문.
조상의 위패는 절대로 제상에 올리면 안 되고 제사상 뒤쪽 교의(交椅)에 모셔야 한다. 종가에는 신주를 모시는 교의가 있다. 젓가락을 가지런히 하기 위해 똑똑 소리를 내는 것도 안 되고, 술잔을 향 위에서 빙빙 돌리는 것도 경망스러운 행동이라 안 된다.
명절 차례는 물색 옷을 입어도 되나 기제사에는 반드시 담담한 옥색을 입어야 한다. 남자는 옥색 도포를, 여자들은 옥색 치마저고리에 검은 족두리를 쓴다. 차례에는 여자들도 참석하는데 술은 올리지 않고 절만 네 번 한다. 남자가 두 번이니 음수인 여자는 네 번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살아생전 볼 수 있었던 어른의 제사는 반드시 곡(哭)을 해야 사람의 도리를 하는 것이다. 평생 제사를 준비해온 노종부는 가히 제례 박사라는 칭호를 붙일 만했다.
설날 손님 상차림에 어울릴 ‘떡선’
|
2 아름다운 고가로 선정된 윤증 종가. 사랑채 앞에 있는 네모난 연못과 그 안에 작은 동산은 만들었다. 3 장독대에 옹기종기 앉아 있는 배부른 항아리들. 4 파평윤씨 윤증 종가의 노종부 양창호 씨가 설 차례상을 올리고 있다. 5 설 차례상에 반드시 오르는 윤증 종가의 장김치. 6 윤증 종가에서 새해 손님상에 자주 내는 요리 떡선.
전국 종가 음식 맛자랑에 출전해 1등을 한 떡선은 종가의 자랑이다. 1등의 비결은 간장 맛에 있단다. 만드는 법은 설날 가래떡을 뽑아 굳기를 기다렸다가 5cm 정도의 길이로 썬 다음 반으로 잘라 어슷하게 칼집을 넣어둔다. 그리고 곱게 간 쇠고기를 간을 해 볶고 석이버섯도 볶는다. 달걀 황백지단은 곱게 채 썰고 양념장을 준비한다. 이제 가래떡 칼집 사이사이에 쇠고기와 석이버섯, 달걀지단으로 소를 넣은 뒤 찜통에 살짝 쪄서 식기 전 양념장에 찍어 먹으면 되는데 그 맛이 일품이다. 설날 손님상을 화려하게 할 만한 요리다.
설 차례상에 반드시 오르는 장김치도 종가의 꿀간장 때문에 칼칼하고 시원하다. 이를 만들려면 무는 나박 썰기를 하고 배추 속대는 무 크기로 썬다. 배도 무 크기로 썰고 갓, 미나리는 씻어 다른 재료 크기로 썬다. 석이버섯은 불려서 가늘게 채 썰고 실고추, 마늘, 생강, 간장을 준비한다. 이렇게 재료 준비가 끝나면 미나리와 실파만 빼고 모든 재료는 항아리에 담고 간을 맞춰놓은 장국을 붓는다. 30분쯤 지나 미나리와 파를 넣고 하루 정도 익혀 먹는다. |
광산김씨 사계 김장생 종가
400년 전 세배 예절, 양반가 기품과 극진한 정성
설날 아침 조상에게 올리는 제사와 새해 아침에 어른들께 드리는 세배는 구별해야 한다. 절하는 대상에 따라 평절을 올릴지 큰절을 올릴지 혼란스럽다. 여자의 경우 절할 때 무릎을 세워야 하는지, 옆으로 놓아야 하는지, 두 무릎을 꿇어야 하는지 망설이게 된다.
400년 전에 이미 절하는 예법을 그림으로 정리해둔 예학자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1548~1631) 종가를 찾아 세배 예절을 배웠다. 성균관 대성전에 모신 우리나라 18현 중 유일하게 예학자로 배향된 사계 선생의 종가는 충남 논산시 고정리에 있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홍살문은 열녀와 충신이 배출된 집안임을 상징했고 산 아래 사계의 묘소와 닿을 듯 지어진 종가는 재실 염수재와 사당, 살림집으로 구성돼 있다. 언뜻 보아서는 명성이 자자했던 예학자의 종택이라 하기에 의외로 소박하다 싶었지만, 솟을대문에 붙은 붉은 편액의 효자문이 예학을 지켜가는 가문임을 한눈에 보여줬다.
종가에는 13대 종부인 홍용기(洪容基·86) 씨가 막내아들과 함께 큰 집안을 덩그러니 지키고 있었다. 14대 종손인 김선원(金善元·64) 씨는 직장 때문에 논산에 살지만 일주일이 멀다 하고 찾아와 노모와 종가를 돌본다고 했다.
“아이구, 먼 길 오셨구먼” 하며 덥석 손을 잡고 방으로 들이는 할머니의 따스한 손길이 어머니 마음 같아 가슴이 찡했다. 절로써 인사를 드리니 손을 바닥에 놓고 고개를 숙여 답배를 하셨다. 오랜 세월 힘든 종가 일을 도맡아 꾸리느라 골 깊은 주름이 잡혔지만 은비녀로 단아하게 쪽을 진 모습에 양반가 마님다운 기품이 서려 있었다. 무엇보다 연세가 높음에도 수백 년 집안 내력을 어제 일인 듯 거침없이 떠올리는 총기가 놀라웠다.
설 차례 준비는 언제부터 시작하는지를 묻자 그렇지 않아도 설 준비 때문에 걱정이 많다고 했다. 해마다 며느리와 함께 13그릇의 떡국을 올리는 다섯 상의 차례상을 차려냈는데 올해는 며느리가 몸이 아파 입원을 해 차례 준비가 막막하다고 했다. 돈을 주고서라도 사람을 구하려 했지만 명절이라 오는 사람이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설은 예전이 훨씬 좋았어요. 한 달 전부터 술을 담그고 조청과 엿을 고아 강정을 만들어 함지에 담아 서늘한 장방에 보관했지요. 감주와 수정과는 달여서 장독에 갈무리하고. 떡국 쌀은 한 가마를 담근다오. 명절날 떡국을 끓이지 못하는 이웃이 많았는데 우리 집에 일을 도와주고 가족 모두가 와서 떡국을 먹고 갔거든요. 80~90명분 떡국을 끓였지요. 설을 앞두고 가마솥에 장작불을 지펴 사골을 푹 고아 구수한 냄새가 마당 가득 했지요.”
노종부의 시름이 아니더라도 종가는 이제 서서히 석양으로 저물고 있다. 조상 모시는 일을 평생의 사명으로 여겼던 노종부들이 세상을 떠나면 제례는 ‘조상의 날’을 정해 하루에 몰아서 모시거나 도시의 아들집으로 옮겨가고, 고택은 대부분 빈집인 채 문을 닫으니 종가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곳도 사라져가고 있다.
백지 병풍, 좌면지 간직한 ‘염수재’
예학자 가문의 상징인 재실 염수재(念修齋)를 들여다봤다. 제상 뒤를 가리는 백지 병풍과 제상에 깔아둔 좌면지(座面紙)가 눈길을 끈다. “제병(祭屛)은 백병(白屛)을 사용한다”는 옛글 그대로의 병풍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이는 훗날 글을 모르는 후손을 위해 백병을 사용하게끔 한 선조들의 배려였다. 좋은 붓글씨를 구할 수 없어 병풍을 만들 수 없다는 주변 사람들에게 제병은 백지 병풍이 가장 좋다고 말해줄 자료로서도 훌륭했다.
제상 위에는 유기 제기들이 구릿빛을 발하고 있었다. 들기조차 무거운 사계 선생의 수저와 조금 가벼운 부인의 수저가 있고, 메 그릇도 사계 선생의 것은 키가 낮고 넓이가 넓은 대신 부인의 것은 봉분처럼 높으면서 둘레가 작아 남녀의 다른 모습을 상징했다. 술을 데워 올리도록 손잡이가 옆으로 달린 냄비 같은 주전자도 특별했다.
재실 한편에 세워둔 사람 키를 가릴 만한 종이 문짝은, 남녀의 구별이 엄격했던 예전에 여인들이 제실을 드나들면서 외간남자와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게 가리는 데 썼던 ‘내외문’이라는 노종부의 설명이 재미있었다. 염수재 앞마당은 돌을 열십자로 놓아 가운데 길은 제사를 지낼 때 제관이 다니도록 표시해뒀다. 제관이 아닌 사람이 지날 때는 머리와 허리를 약간 숙여 예를 표해야 한다. 제실 앞마당에는 마루 높이의 불돌이 있는데 전기가 없던 시절 제례 때 불돌 위에 화톳불을 피워 집 안을 밝혔다.
|
1 백지 병풍과 제상. 2 ‘사계전서’에 그려진 절하는 모습과 종부의 절하는 모습. ①공수법 ②큰절 ③평절 ④답배.
큰절과 평절 그리고 답배
노종부는 예학자의 종부답게 범절에 대해서는 소신이 뚜렷했다. 특히 현대의 인사법에 불만이 많았다.
“요즘 사람들은 친인척과 스쳐 지나는 남남의 구별이 없어요. 지나는 걸음으로 ‘안녕하세요’ 하며 꾸벅거리는 인사법은 어느 나라에서 온 것인지 민망할 때가 많아요.”
친지를 만날 때는 절로 인사를 드려야 위아래의 분별이 있고 사람의 도리가 있어 보인다고 했다. 수천 년을 지켜온 우리의 정중하고 아름다운 인사법은 어디로 가고 꾸벅 인사가 등장했는지 모르겠다며 대감님(할머니는 사계 선생을 꼭 대감님이라 불렀다)이 쓰신 예법 책에도 절하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놓고 이를 설명해놓은 것이 있다는 말을 들었으나 아직 보지는 못했다고 했다. 사계의 예서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종부의 절하는 모습이 무척 궁금했다. 어렵게 청을 드렸더니 흔쾌히 시연해주었다.
종부는 극진한 정성과 예를 다한 큰절과 부드럽고 단아한 평절, 자애로운 자태의 답배 등을 보여주었다. 노인의 절이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부드럽고 고왔다. 마치 무용수가 춤을 추는 듯했다. ‘절도 많이 하면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구나’ 감탄이 절로 나왔다. 1년에 13번이나 제례를 지내면서 다져진 절이다.
“예전에는 시집와서 시어른께 아침저녁 문안도 절로 드렸지 입인사는 하지 않았어요. 어른이 외출해 들어오시면 ‘안녕히 다녀오셨어요’라는 뜻을 담은 절을 하고, 남편의 생일이나 부인의 생일, 새해를 맞았을 때 또는 먼 길을 떠날 때도 부부가 맞절로 무사히 다녀오기를 빌었지요. 동기간에도 오랜만에 만나면 절로써 반가움을 표했고.”
사돈 간에는 부인들이 하녀를 잘 차려 입혀 보내 서로 새해 문안을 드렸는데 이를 ‘문안비(門安婢)’라고 했다. 세배는 보름 안에 드리면 되는데 절은 하는 법만 있는 게 아니라 받는 법도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슬플 때나 기쁠 때 먼저 절을 하고 말을 건네는 예의로운 나라라고 했다. 인품의 척도는 첫인사에서 느낄 수 있는 법이라며 노종부는 절하지 않는 지금의 세태에 일침을 놓았다.
덧붙여 세배를 할 때 남자는 두루마기를 입어야 하며, 여자는 겉옷을 벗고 목도리도 벗어야 한다고 했다. 또 예전에는 부모님께 문외배라 하여 문 밖에서 절을 하기 때문에 평절을 했지만 지금은 거실이나 안방에서 부모님 앞에서 절하기 때문에 큰절을 해야 하며, 평교 간에는 평절을 해야 옳다고 했다. 자식 외의 사람에게 절을 받으면 반드시 허리를 굽혀 답배를 한다는 것도 일러주었다.
손은 공손하게 맞잡아야 하며 손끝이 상대를 향하게 하지 않고, 누워 있는 어른에게는 절대 절하지 않는다고 했다. 흔히 어른에게 “앉으세요” “절 받으세요”라고 입인사를 하나 이는 명령조이기 때문에 좋지 않고 대신 “인사드리겠습니다”라고 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세배를 하면서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등의 말을 건네는 것은 예절에 어긋나고, 세배를 받은 이가 먼저 덕담을 들려주면 이에 화답하는 자세로 “건강하십시오”라고 대답하는 것은 무방하다고 했다. 또 덕담은 희망적인 이야기가 좋으며 나쁜 일이나 부담스러워할 말은 굳이 꺼내지 않는 게 미덕이라 덧붙였다.
이날 명문 종가의 종손과 종부가 어렵게 시연해주는 절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두 분께 대단히 죄송한 생각이 들어 몸 둘 바를 몰랐다.
소소 이연자 씨는 한배달우리차문화원 원장으로 ‘이연자의 우리 차 우리 꽃’ ‘자연을 마시는 우리 차’ 등을 펴내 차 문화 보급에 앞장섰고, 한국의 명문 종가 120곳을 직접 취재해 쓴 ‘명문 종가 사람들’ 등이 있다.
조선 중기 사상가 사계 김장생의 ‘가례집람’ 꿇어앉아 절하는 400년 전 여자절
|
사계 김장생이 지은 ‘가례집람’은 가례에 관한 설을 모은 책으로 1685년 조선조 숙종 11년에 간행했다. ‘가례집람도설’은 통과의례 때 입는 옷, 상차림, 규범 등을 그림으로 그려 알아보기 쉽게 정리했다. 이 그림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여자들의 절하는 방법이다. 400년 전에 이미 여자들도 무릎을 꿇고 절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꿇어앉아 절하는 건 일본 절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이 배례 그림을 보면 근거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림에서 보듯 꿇어앉아 절하면 현대의 양장 차림에도 불편함이 없다. 한복을 입어야 절할 수 있고 온돌방이어야 절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도 여기서는 통하지 않는다. 변해가는 세월을 예측하고 그려놓은 듯 사계 선생의 배례도는 여자들의 절하는 자세에 대한 논란을 평정할 수 있는 대단한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절은 동작별로 나눠 절하기 전에 두 손을 맞잡아 공손한 자세를 취하는 차수도, 서서 간략하게 인사하는 읍례도, 절하는 동작을 그린 배례도로 설명했다. 여기서 큰절과 평절의 쓰임새도 자세하게 설명해뒀다.
절하기 전에 손을 맞잡는 차수도(叉修圖) 남자는 왼손을 오른손 위에 올려 깍지를 끼고, 여자는 오른손이 왼손 위로 올려 맞잡는다. 맞잡은 두 손은 남녀 모두 배꼽 부위에 올린다. 간단하게 공경을 표하는 방법을 알려준 지읍도(祗揖圖)에 따르면 인사할 상대의 나이에 따라 부모 연배가 되면 맞잡은 손을 눈높이로 올렸다 내리고 형님 정도면 공수한 손을 입 높이로 올렸다 내린다. 답례는 가슴 높이로 손을 올렸다 내리면 된다. 이것을 상·중·하례라 했다. 사계는 출입이 잦지 않았던 그 시대 여자들의 행동예절은 설명하지 않았지만 현대 예절에서는 여자의 경우 두 손을 맞잡은 자세에서 허리를 약간 굽혔다 바로 하는 동작을 굴신례라 한다.
절하는 기본 동작 전배도(展拜圖) 남자의 큰절은 허리를 굽혀 맞잡은 손을 바닥에 놓는다. 왼발을 먼저 꿇고, 오른발을 꿇어 왼쪽과 나란히 하고 머리를 천천히 구부려 이마가 손등에 닿게 한다. 일어날 때는 오른발을 먼저 일으키고 맞잡은 손을 바닥에서 떼어 오른쪽 무릎 위에 올려놓으면서 오른발을 세우고 일어난다. 일어나는 동작에서 손을 무릎 위에 얹고 일어서는 것은 사계 선생의 독창적인 방법이다. 절의 동작을 설명한 배례도(拜禮圖)에서는 계수, 돈수, 고두, 숙배, 흉례, 공수 등 여섯 가지 절을 소개하고 절의 쓰임새를 자세히 설명했다.
계수배(稽首拜) 남자의 큰절로 허리를 굽히고 이마가 손등에 닿게 하여 엎드려 한참 있다가 서서히 일어나는 절이다.
돈수배(頓首拜) 남자들의 평절로 허리를 굽혀 이마가 바닥에 놓인 손등에 닿자마자 일어나는 절이다.
고두배(叩頭拜) 손을 나눠 땅을 짚고 머리로 네 번 땅을 치듯 한다.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절이다.
숙배(肅拜) 맞잡은 손을 이마에 대고 양 무릎을 꿇고 허리를 곧게 굽히며 머리가 땅에 닿지 않게 한다. 배례 중 가장 가벼운 것으로 군대에서 이런 숙배를 했다. 부인의 절에서도 이 숙배를 바른 절이라고 설명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