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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신기숙사동문 원문보기 글쓴이: 오창석
배구는 1895년 미국 메사추세츠(massachusetts)주 홀리욕시에 있는 Y. M. C. A의 체육부장 Williams G.Morgan에 의하여 고안되었다. 당시 모어간은 과격한 농구보다 좀 유연한 Ball Game의 필요성을 느껴, 흥미 있고 남녀노소가 적당한 운동으로서 함께 즐길 수 있는 대중적 운동을 모색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배구 규칙이 통합 제정되고 국제 경기가 개최됨으로써 배구 경기의 열기를 자극시키게 되었다. 배구가 올림픽 종목으로서 채택된 것은 1961년 남자 배구가 아테네에서 열린 I . O. C 총회의 결정에 의하여 채택되었으며, 여자배구는 그 다음해 196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I. O. C 총회에서 채택, 1964년 日本 도오쿄 올림픽대회부터 정식 종목으로 인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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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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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영향은 현재까지 계속되어 아직도 경기 명이나 용어에 일본의 잔재가 남아있는데 하물며 일제시대의 체육활동이란 건 일본인 중심이거나 간혹 뛰어난 재질을 갖춘 우리 선수가 있었다해도 제대로 성장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3.1운동을 기점으로 민족자존을 부르짖는 소리가 높아가고 당시민족의 대변지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등에서 '민족의 강건함'을 부르짖으면서 건강한 체력만이 아니라 나라를 살릴 수 있는 길임을 강조할 우리 체육활동도 비로소 조직화되기에 이르렀고 현 대한체육회의 전신이랄 수 있는 조선 체육회의 발족을 보게 되었다. 결국 일제시대의 체육은 곧 애국운동으로 대변되는 바 일제의 억압과 장비하나 제대로 구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오로지 일본을 이겨보겠다는 의지 하나로 피땀 흘리며 연습에 몰두한 당시 체육인들의 높은 기상은 오늘날의 혼탁해진 스포츠 정신과 비교해볼 때 많은 각성을 불러일으킨다 하겠다. 특히 초창기 배구는 육상이나, 축구, 농구, 야구와 비교해볼 때 20여 년이나 뒤늦게 도입되어 일반인들의 인식부족과 선수의 결여, 이렇다 할 지도자 하나 없는 상황에서 선수 한 사람이 1인 3역, 4역을 감당해야 했던 형극의 길을 헤쳐왔다. 그러던 것이 오늘에 있어서는 세계를 점하는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으니 배구 70년 사를 더듬어 보는 일이야말로 배구 인들의 긍지와 자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물론 한국 배구의 미래를 점쳐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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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대 : 배구의 탄생과 국내상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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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처음 배구를 보급한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하나는 Y.M.C.A의 운동부와 유년부 고문으로 내한한 반하트씨가 청년회원들 에게 배구경기를 소개, 지도함으로써 이루어졌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당시 제일교보 체육교사인 스기하라(당시 배구협회이사로 단순한 체육교사가 아닌 고등관임)가 학생들에게 가르쳤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두 가지 견해 모두 타당함을 가지고 있는데 초창기 배구는 일정한 규칙이나 경기내용 없이 양편으로 나뉘어 공을 주고받는 정도였다는 걸로 미루어 배구가 반하트씨에 의해 도입은 되었으나 그것은 다분히 선교를 위한 '레크리에이션'적인 성격이 강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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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 30년 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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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8월 25일부터 4일간에 걸쳐서 조선신문사 주최로 일본배구 계의 권위자인「나라」「고조」중학교의 「미끼류우료」씨를 초청하여 배구경기에 대한 강습회가 열렸다. 이어 1927년 3월16일부터 4일간 일본인의 경성기독 청년회에서도 배구, 농구의 권위자인 일본 Y.M.C.A체육부간사이며 극동 「올림픽」대회 위원인 브라운씨를 초청하여 농·배구 강습회를 개최하여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우리 배구계에 지대한 공헌을 하면서 기술향상과 보급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일시적인 배구시합을 넘어 최초의 공식적인 배구대회가 1925년 10월4일에 개최되었는데 일본인이 경영하는 전조선 신문사 주최의 제1회 전조선 배구 농구대회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중앙기독교청년회 주최로 1928년 열린 전 조선중등학교 배구선수권대회는 일본인 손에 의하여 열린 다른 대회와 달리 최초로 우리 손에 의하여 이루어진 행사였다. 1930년대 접어들면서 한국배구는 경기의 내용 면에서도 상당한 진전이 있었고 공식적인 여러 대회들이 열림으로써 본격적인 배구 경기가 치러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활약했던 선수들은 모두 해방 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배구사에 길이 빛날 선각자들로서 배구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 선수들 중에 철도국의 박계조와 안종호는 우리 배구사에 있어 신화적인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박계조의 배구에 대한 열정을 지금까지도 개최되어지는 박계조배로 이어오고 있으며, 같은 시대의 안종호는 우리나라의 처음인 한국인 심판으로서, 배구인 들에게 많은 모범을 보여왔다. 이들을 바탕으로 점점 더해지는 배구열기에 힘입어 각종 대회에 배구팀이 참가하게 되었는바, 내용을 보면 오늘날의 전국체육대회와 같은 것이나 다만 일본인 체육단체인 조선체육협회에서 주최한 일본인 위주의 체육행사인 조선신궁 경기대회가 1925년 처음 열리었고 이 대회와 마찬가지로 일본인에 의한 또 다른 종합경기로 명치신궁 경기대회가 1924년부터 개최되었다. 또한 체육을 애국의 길로 강조되던 이 당시에 여자 체육진흥을 위해 육상만으로 시작했던 조선여자 올림픽대회에 배구를 신설하여 1924년 제1회 대회를 시작하였고, 여성체육진흥과 더불어 지방체육행사도 활성화를 위해 1929년부터는 관서종합경기대회 등도 개최하여 배구는 나날이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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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 50년 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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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국내 각종 경기단체들도 나름대로 조직을 완료하거나 결성을 준비하였는데 대략 내용을 살펴보면 조선체육회를 위시하여 조선 빙상경기협회, 조선육상경기연맹, 조선체조연맹, 조선 송구연맹, 조선 아마츄어 권투연맹, 조선 배구협회등 30여 개에 달했다. 특히 육상, 농구, 축구, 권투와 같은 종목들이 일제 하에서도 비교적 자율적인 활동이 가능했던 반면 별반 인기도 없었고 대부분 일본인의 독점과 횡포에 시달려온 배구는 그 어떤 운동보다도 감격의 해방을 맞이함과 동시에 우리 손으로 이끌고 나갈 협회 결성에 남다른 열정과 성의를 다하였다 그리하여 해방 전에는 몇 개에 불과했던 배구 팀들이 해방과 함께 일약 인기종목으로 급변하면서 거의 모든 학교에 배구부가 신설되게 된다. 이때 생겨난 배구부 팀들을 대략 살펴보면 여자고등부의 경우 경기, 이화, 숙명, 진명, 덕성, 풍문, 중앙, 배화, 숭의, 창덕, 상명, 동덕, 한양, 한성, 무학, 서울여상 등이고, 남고부는 경기, 경동, 선린, 용산, 중경, 인창, 대신, 철도, 배제, 명지, 한성, 덕수, 숭문, 남산공전등이 있었으나, 1960년 배구가 9인제에서 6인제로 바뀌면서 하나 둘씩 해체되었으며,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는 학교는 중앙여고와 인창고 만이 있을 뿐이다. 해방 후 불어닥친 배구의 열풍은 실업팀에도 변화를 가져오는데 일본인들이 물러감에 따라 일본인 위주의 체신팀은 자연 해체되고 철도팀만은 김종억, 김명수등이 남은 선수와 각 사업소대표들을 규합하여 팀을 새롭게 재건한다. 그러나 배구협회를 창설하고 각종 공식경기들이 속속 생겨나면서 배구의 보급과 기술이 향상되어갈 즈음 발발한 6.25전쟁은 배구는 물론 모든 분야의 발돋움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 불행중 다행이라 한다면 전쟁으로 맥이 끊길 뻔했던 배구역사가 그나마 군에 입대한 배구 인들의 노력으로 군 팀을 중심으로 부단히 그 활동을 유지해간 결과 많은 성과를 이루어 냈고 막강한 군 배구팀의 전력은 종전 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후 우리 배구는 새로운 도약을 위한 준비에 몸부림치게 되는데 해외로 눈을 돌려 국제경기에 참가함은 물론 그를 계기로 극동식인 9인제를 벗어나 국제식배구 6인제 도입을 준비한 때이기도 하다. 또한 경제적 여건이 좋지 못한 우리나라 상황에서는 배구가 실내경기로 창안되었음에도 시설의 미비로 자연스레 실외경기 화되었으나 60년대를 넘어가고 70년대 이르러 체육관건립이 속속 진행되고 체육이 국가적 차원의 지원을 받기에 이르자 배구 역시 실내경기로 자리잡아가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변화의 전초전으로 해방 후 10여년 간의 격동기는 배구사에 무한한 고난과 땀을 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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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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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32개 산하단체를 옹호하고 있는 대한 체육회가 모두 비 체육인들에 의해 운영되는 바람에 순수성을 잃고 정치에 기생하여 그 여파에 주체적이고 일관적인 체육진흥을 가져오지 못한 점이다. 그 뿐인가, 비대해진 체육회를 이끌어 갈 행정부 하나 없이 무기력한 교육부의 무관심한 태도 속에 방치되다 보니 모든 책임이 경제력도 실질적 권한도 없는 대한체육회로 돌아가 국내 각 체육의 발전이라던가 해외진출의 기회에도 든든한 뒷받침을 하지 못하였다. 이는 곧 모든 체육계 전반에 걸친 제반시설의 낙후와 인재발굴의 난점을 몰고 왔고 결국 무한정 성장할 수 있었을 우리 체육계의 잠재력을 사장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1964년 올림픽 참가를 계기로 체육진흥이 국가적 과제이자 국민적 관심이 대상이 되면서 1965년에는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던 국민체육진흥법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되어 체육계에 일대 서광을 비추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시작만 했을 뿐 끝을 보지 못하던 체육회관 준공이 국가적 보조에 힘입어 1965년 말에 그 완공을 보기에 이르렀다. 또한 5회 아시아대회와 제 19회 멕시코올림픽 및 1970년도의 아시아대회에 이르기까지 6개년 [장기선수 강화훈련계획]을 작성, 지도자의 자질향상, 신인발굴, 스포츠의 과학화, 시설확충 및 기구정비, 경기수준의 향상 등을 목적으로 체육계 전반에 걸친 대대적인 진흥정책을 펼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체육계 전반의 분위기는 배구 계에도 영향을 미쳐 이 시기 배구는 9인제에서 6인제로 넘어가는 전환기적 진통 속에 초등학교부터 실업에 이르기까지 배구인구의 급속한 확산은 물론 기술과 체력 그리고 신장의 두드러진 성장을 보인 때이기도 하다. 배구의 붐은 남녀 실업팀을 비롯한 중·고교 팀들이 우후죽순 탄생, 초등학교배구가 창설되고 아시아 청소년 배구대회가 우리 손으로 창설되는 등 학교 배구가 유례 없는 호황을 누린 시기이며 6인제 도입 초기와는 달리 날이 갈수록 서울과 지방간의 실력 차가 줄면서 평준화의 시대를 예고한 때이기도 하다. 이 시기는 국내 각종 경기만이 아니라 국제 경기에도 부단히 참여함은 물론 친선 경기차 해외로 원정을 나가거나 외국팀을 초청하기도 했다. 국제경기 참여를 보면 배구가 최초로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어 벌어진 1964년 동경올림픽에 남녀팀 모두 참가했으며 아시아 경기대회의 경우 1962년 제4회 자카르타대회에 한국은 처음으로 여자팀을 보냈음은 물론 6인제에도 참여하여 상당한 전적을 올리기도 하였다. 국내의 상황을 살펴보면 1962년 故 박계조를 추모하는 '박계조배 배구대회"가 창설되었고 1963년엔 대한배구협회 산하 단체로 '한국실업 배구연맹' 창립되어 한국 실업 배구연맹전이 시작됨은 물론 1963년 각종 대회가 잇달아 신설됨으로써 전국에 걸친 배구의 보급과 배구인구의 저변확대에 일조를 가하게 되었다. 또 청소년배구를 육성, 권장하는 의미로 1962년 한일고교 교환경기에 대한 사업이 대한배구협회와 일본배구협회간에 착실히 진행되었으며, 3회 대회로 막을 내리긴 하였으나 각국 청소년 배구의 실력을 저울질하는 동시에 기술향상과 발전에 도움을 주자는 의미에서 우리의 제의로 개최된 '아시아 청소년 배구대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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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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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배구는 세계정 상을 차지할 수 있는 유일한 종목으로 각광받으면서 배구강국으로 도약, 배구 70년 사상 가장 화려하게 꽃을 피운 황금기이기도 하다. 여자배구가 구기 종목사상 최초로 올림픽 동메달을 차지하고, 남자는 서구의 장신 벽을 허물고 세계 4위로 올라서는 쾌거를 맛보는 등 온 국민의 환호와 기대 속에 전국을 배구열기로 들끓게 만들었다. 아직까지도 배구 팬들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전설 같은 스타플레이어들이 탄생한 것도 이때이다. 국내적으로도 국민하교 배구부터 시작하여 어머니 배구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배구의 저변학대가 이루어졌고 속속 착공되는 체육관의 건립으로 완전한 실내경기로 자리잡게 되었고, 직장인 체육으로의 보급과 정착을 위해 쉽고도 재미있는 9인제 배구를 부활, 직장배구의 붐을 일으키며 이제까지 축구, 농구에 밀려왔던 관심을 배구에 머물게 만들었다. 이렇듯 배구전반에 걸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던 70년대는 한국 배구 70년 사상 가장 화려한 시기였으며, 여자 배구가 구기종목사상 최초로 올림픽 동메달을 획득한데 이어 남자 배구 역시 서구 장신 벽을 뛰어넘어 세계 4위에 올라서는 등 국민의 환호와 기대 속에 전국을 배구열기로 들끓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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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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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아시안 게임과 88서울 올림픽 유치를 기점으로 급속히 변화된 국내의 스포츠 환경에 배구계 또한 민감한 영향을 받고 있었다. 1979년 이낙선 회장이 퇴진한 이후 박경원, 이상용씨가 잠깐씩 회장직을 이어받다가 80년 10월 효성그룹 조석래 회장을 필두로 경제인이 한국배구를 이끌기 시작한데 이어 83년 8월 한일그룹의 김중원 회장이 제 24대 배구협회장으로 취임해 89년 2월 퇴임하기까지 80년대 한국배구를 주도했다. 특히 84년, 80년대 초반의 스포츠 열기와 스포츠 외부적 영향이 반영된 [백구의대제전]대통령배 배구대회가 출범되면서 이전까지와 다른 새로운 차원의 한국배구를 견인하는 전기를 마련했다. 이때에는 김중원 회장의 취임과 더불어 배구 인들의 사기진작과 경기력 향상을 위해 신설팀의 지원을 강화하고 협회 통솔의 효율성과 단합을 위해 산하 4개 단체로 나뉘어있던 실업, 대학, 중·고, 초등학교 연맹을 통·패 합함으로서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되며 점차 동절기에 적합한 실내 스포츠로 정착해 가는 배구의 발전과 붐 조성을 목적으로 농구와 마찬가지로 겨울의 추위를 잊게 할 '대통령배 배구대회'가 84년 창설됨으로서 그동안 계속되온 실업연맹전이 없어지고 성인배구도 반은 프로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대통령배 배구대회'가 출범되면서 신인 선수들은 대거 등장하고 실업배구의 판도는 많은 변화가 주어졌다. 70년대를 주름잡던 미도파는 현대와 선경의 출현으로 184연승을 마지막으로 연승가도를 끝내고 이것이 청량제가 되어 불꽃튀는 경쟁을 펼쳐냄으로서 사상 유례 없는 관중동원까지 부르게 되었다. 이는 여자배구가 춘추전국시대로 들어섰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남자 배구 또한 83년 현대자동차 써비스와 고려증권이 팀을 창단하면서 6개팀으로 증가, 활성화를 띠기 시작했고, 대학배구도 경기대와 인하대를 위주로 우수 고교 선수들을 진학시켜 탄탄한 실력과 함께 실업 배구를 능가하는 전력을 가지게 되었다. 예를 들면 이때의 대학 선수들로는 경기대의 장윤창, 정의탁, 이종경, 인하대의 문용관, 유중탁, 한장석 등이 있다. 이러한 우수한 선수들의 힘입어 81년 제2회 세계 청소년 배구 선수권 대회에서 중국과 브라질, 페루를 연달아 격파하며 2연패라는 구기사상 최고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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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배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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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세력판도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그동안 파워와 조직력을 위주로 했던 플레이가 세계적 기류에 맞춘 힘과 높이의 배구로 전환됨으로써 이에 편승한 신생팀들은 승승장구하는 반면 과거에만 머물러 있던 기존의 강호들은 개인기량이나 팀 관록이 뛰어남에도 힘과 높이의 열세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 세미프로 출범 외에도 전 세계적으로 급속히 확산, 인기를 끄는 추세에 따라 창설된 것이 바로 [한국비치발리볼연맹]이다. 90년 7월 창립기념식에서 초대회장 인 김현우씨는 '비치발리볼은 배구의 기본을 익힐 수 있는 좋은 운동으로 미국, 이탈리아 등 선진국의 예를 봐서 한국에서도 꼭 붐을 이룰 것이다'라며 의욕에 찬 첫발을 내딛었다. 미국이 세계배구의 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해변에 줄지어 늘어선 배구코트와 프로화 된 비치발리볼이 근간이 되었음을 지적하면서 창립 첫 사업으로 7월 31일부터 부산 광안리 해변에서의 첫 대회를 표명하였다. 제 1회를 시작으로 매년 행해지고 있는 비치발리볼대회는 겨울스포츠라고 여겨왔던 배구의 이미지와는 또 달리 젊음과 낭만을 상징하는 '환상의 여름스포츠'로 새로운 묘미를 보여주는데 국내에선 남자 2인제, 여자 3인제를 실시하며 규격 및 룰은 6인제 실내배구와 거의 동일하다. 다만 어택라인 및 서비스 에어리어가 따로 없고 극심한 체력소모를 감안해 세트당 12점 또는 10점제로 실시하는데 강렬한 태양아래 검게 탄 근육을 드러낸 남자, 또 늘씬한 비키니 차림의 여자 선수들이 짝을 이뤄 볼의 매력은 큰 눈요기 거리도 되지만 선수와 관중과의 거리가 없다는 점에서도 단시일에 인기스포츠 종목으로 부상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다만 문제라면 천혜의 조건을 갖춘 미국이나 남미의 해변과 달리 대회장소가 한정돼 있다는 점이다 국제대회에서는 17세 이하로 구성된 여자쥬니어 배구팀이 세계12강이 겨루는 세계유스 배구선수권대회에서 정상에 오르고 91년에는 남자가 악전고투 끝에 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다. 89년 FIVB총회에서 세계배구 붐을 확신시킨다는 취지 아래 거액의 상금을 내걸고 창설된 월드리그는 90년 4월에 시작돼 이탈리아가 초대 챔피언이 되었으며 우리나라는 91년 월드리그부터 참가하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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