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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서야 글을 올립니다.
지난 주 서산답사갔을 때도 11월 답사기를 올리지 못한 죄송스러움에 마음 한켠이 찜찜했었는데
시간이 없으면 사진만이라도 올리는 것이 좋겠다는,
그것이 우리들의 발자취요, 안문답의 역사기록이 될 수 있다는 슈렉님의 말씀에
짬을 내어 봅니다.
사실, 그날은 카메라 배터리가 나가는 바람에 사진도 얼마 찍지 못했고
찍은 사진마저 제 형편없는 실력에 건질만한 것도 별로 없었습니다.
사진핑계, 시간핑계 대며 여차저차 미뤘지만
‘정말로 내가 답사기를 써야 하나’ 하는 안일함에 기록을 제대로 해 놓지 않았던 것도 이유예요. 몇 분이 참여했는지, 어떤 순서로 어떻게 답사를 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더더욱 그렇구요.
오늘, 서산답사 사진이나 퍼갈까 카페에 들렀다가
파랑하늘 님의 답사기를 보고 간단하게나마 숙제를 해서 짐을 내려놓아야겠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 몇 자 적습니다.
- 구비구비 와룡, 도산, 예안 고개를 넘다들다.-
일시 : 2009. 11. 7(토) 오후 2시
집결 : 안동시청
참석자 : 회장님, 정원수교장선생님, 류시대선생님, 김정일선생님, 예쁜 정일씨 후배님, 김금희선생님, 도산인가 예안에 사신다는 성함모르는 여사님, 그리고, 강신화
(혹시, 빠진분 있나요? 단체사진을 안찍어서 기억이 안나요. 이것도 사진보고 끼워 맞췄음)
※ 지킴이 실무진들도 다음주 지킴이 답사장소가 송소종택이라면서 사전답사 차 그쪽길로 간다기에 시청에서 만나 송소고택까지는 함께 했습니다.
답사지 : 송소종택, 이계서당, 긍구당고택, 성성재고택, 번남댁, 부라원루...
1. 송소종택
첨으로 들른 곳이 송소종택이었어요.
와룡으로 들어가는 굴다리 부근에서 이하쪽으로 들어가는 길로 갔던 것 같은데 철도건널목을 지나서 꼬불꼬불 한참 갔는데 길이 진짜 파이데요. 혼자는 못찾을 것 같아요.
옛집에 관해 아는 게 워낙 없는 터라 명색이 문화답사모임인데 막상 문화재에 대해선 쓸 말이 별로 없습니다. 답사자료를 참고하시고, 사진에 보이는 고택 뒤편 언덕위에 사당 비슷한 것도 있었던 것 같은데....앞쪽으로 난 문을 막고 새로 옆으로 문을 냈던 모습이 떠오르네요.
송소종댁전경
류선생님, 문구멍으로 뭘 봐요? 고택뒷편 언덕위에 자리잡은 사당(?)이에요. 류시대선생님은 저렇게 궁금해하는 게 많으니까 아는 것도 많은가 봐요. 뭐가 있었어요? 감서리하는 류시대선생님 감서리하는 류시대 선생님, 부추킨 자 김금희, 목격자 강신화! 송소고택 바로 아래에는 보기드문 고얌나무가 있었구요. 까치밥으로 남겨논 감도 있었어요. 요상하게 생긴 네쌍동이 감을 발견하곤 정일씨가 어린아이처럼 무척 좋아하더군요. 근데 그 감 우쨌는고? 이계서당전경 송소고택에서 한 100m 쯤 아래로 내려오다가 고추밭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는데 새문을 달아서인지 어째 불협화음이 느껴집니다. 누더기 입고, 새구두 신은 모습이랄까? 방안에는 농부가 일하다가 쉬었는지 냉장고도 있고, 가스도 뒹굴고, 냄비도 있고...지금도 요긴하게(?) 쓰고 있더군요.
2. 긍구당 고택
다음으로 들른 곳이 긍구당 고택이에요. 원래 아흔아홉칸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컸다는데 지금은 안채를 제외하고 거의 없어졌다네요. 마침 마당에선 도리깨로 콩타작이 한참이었는데 우리 회장님이 잠시 거들었어요. 옛날 실력이 보이지요?
고택 동쪽편에는 사당이 있었는데 안내하시는 어르신의 말씀을 빌자면 신주를 모셔 논 감실마다 각기 다른 모양의 조각이 되어있다시며 자랑이 대단하였어요. 정말 문틈으로 보니까 조각조각이 범상치 않데요.
긍구당고택전경
도리깨질하는 회장님
정교장선생님과 김금희선생님- 민들레 홀씨되어
날씨가 따뜻해서인지 옆으로 보이는 사당앞 텃밭에 철모르는 민들레가 홀씨를 머금고 있데요. 우리 정교장 선생님과 김금희 선생님의 즐거운 한때! 유치원선생님 답죠?
3. 성성재종택
다음으로 간 곳은 와룡에서 정산쪽으로 들어가는 길에 있는 성성재 종택이에요. 주진교를 지나서 있었는지 지나기 전에 있었는지는 가물가물 하구요. 어쨌든 한참 갔던 것 같은데...
누가 살고 있는지 살림흔적이 여기저기 보였어요. 제법 깨끗하게 잘 보존된 듯 했는데 역시 집은 사람냄새를 맡아야 관리가 되나 봅니다. 죄송스럽게도 정일씨랑 류선생님이 뭐라뭐라 많이도 가르쳐 주셨는데 워낙 쌓인 바탕이 없어서 기억나는 것이 없습니다. 죄송!
사진을 한 장 밖에 찍지 못한 관계로 답사자료를 드래그하여 올립니다.
이 집은 조선 중기 학자인 성성재 금난수 선생의 종택이다. 선생의 본관은 봉화, 자는 문원으로 퇴계 선생의 제자이며 월천 조목 선생과는 처남매부지간이기도 하다. 명종 16년 생원시에 합격한 뒤 봉화현감 등 직을 지냈으며, 정유재란 때는 예안 수성장으로 활약하였다. 몰한 뒤 선무원종공신에 녹선되고 승정원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1700년대에 건립된 안동지방의 주택에서 더러 발견되는 특이한 유형이다. 안방의 상부에는 다락을 두었는데 다락은 안방과 부엌, 그리고 고방의
상부까지를 통칸으로 하여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이나 되는 주택에서는 드물게 보는 매우 큰 규모이며, 다락에는 4면에 모두 창을 달아 채광과 환기를 좋게 하였다.
상부가 통다락으로 구성된 까닭에 안채의 층고(層高)가 매우 높아져 안채는 1고주 5량가를 형성하였으며 사랑채는 5량가이다. 가구수법은 건물의 규모에 비해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은 매우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다. 18세기에 지어진 안동지방의 상류주택으로, 시대성과 지역성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4. 번남댁
다음은 번남댁입니다. 제 개인적으로 지난 2기 해설사 과정 때 유일하게 빼먹은 곳이라 큰 기대를 갖고 갔던 터였습니다. 미리 다녀온 분들로부터 창덕궁을 모방해서 끝내주게 지어놨더라는 소문을 들었으니까요.
꼬불꼬불 주진교를 지나서 진짜 오래 달린 것 같습니다.
번남댁!
기대와는 달리 전설의 고향을 한편 찍었으면 안성맞춤이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완전 폐가요, 흉가 그 자체였다는 기억입니다.
삐거덕거리는 마룻바닥, 구멍이 뿡뿡 뚫린 창호지, 떨어진 문짝!
그 좋은 집을 이렇게 방치하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 한켠 슬픔이 몰려 왔습니다.
집이 불쌍하고, 그렇게 방치한 주인이 야속하고, 그걸 이용할 줄 모르는 우리 안동이 무능하게 느껴졌습니다. 각자 나름대로의 사정이야 있겠지만.....
강을 사이에 두고 도산서원 시사단과 마주하고 있었는데 그 흔한 대교를 여기도 하나 놓는다면 요새 주가를 높이는 고택체험 장소로 안성맞춤이겠다는 개인적인 생각을 잠시 해 보았었습니다. 그렇다면 도산서원과 연계한 좋은 여행코스가 되지 않을까요?
이 건물은 고종연간의 대원군 집정시 지어진 주택으로 서울의 창덕궁을 모방하여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집안의 모든 아궁이에서 나오는 연기를 본채 후면에 전석(塼石)으로 쌓아 만든 하나의 굴뚝으로 빠져나가게 한 독특한 구조이다.
- 형태/방법/업적 : ㅁ자형 구조를 이룬 본채 좌측에 역시 ㅁ자형의 사랑채가 이어지고, 본채와 사랑채 사이에 행랑(行廊)채가 들어서 있다. 원래는 좌측으로 안사랑채가 달려 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문화재 지정여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7호(1973년 8월 31일)
- 관련 인물 및 유적 :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던 고종 연간에 좌산 이만윤이 지었다고 한다. 그는 서울의 창덕궁과 같은 모양의 집을 짓기 위하여 자신이 직접 공사를 감독하였다고 한다. 처음 지었을 때는 99칸 집이었으나, 6·25전쟁 때 일부가 파괴되고 지금은 50칸 정도만 남아 있다.
- 역사적 유래 : 이 집에서는 류기목(柳祈睦)의 맏아들 석호(石湖) 류도성(柳道性)이 태어났다. 석호는 그 뒤 백부인 류희목(柳希睦)에게로 입후했다.
번남댁 전경
번남댁을 둘러싸고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릅니다. 이집에 얼마나 공을 들였으면 행여 집이 그을릴까 연기가 나가는 통로를 한군데로 모아 굴뚝을 하나밖에 안 만들었다고 하던데...맞나요?
정말로 끝내줬던 것은 회랑이었습니다. 신발 한 번 벗으면 회랑을 통해 전 집을 다 돌 수 있도록 지어졌더군요. 무슨 먹을 것이 많았는지 아님 감출 것이 많았는지 크고 작은 창고같은 공간이 참 많았습니다. 진짜 숨바꼭질이라도 한다면 못찾겠다 꾀꼬리 꾀꼬리!!
문하나, 창살하나, 참으로 아기자기하게 알뜰하게 만들었던데. 그랬던 이 집이....
폐허가 된 번남댁
보이지요? 전설의 고향에서나 나올법한 폐가!!
제 말대로 집이 불쌍하지 않습니까?
번남댁에서- 저여인은 누군고?
퇴근길에 일이 있어 미처 집에 들르지 못한 터라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지 못하고 출근차림 그대로 답사에 응한 제 모습입니다. 안타까워하는 표정이 느껴지나요?
번남댁에서-김도령 납시오.
이건 김금희 선생님의 설정입니다. 별당으로 들어오는 정일씨의 모습을 한 컷!
툇마루가 꽤 정겹지요?
숭은그림 찾기 - 벌리보이는 청량산, 하늘다리가 어딨나요?
마을 앞으로 시사단이 보이고 멀리 청량산이 보입니다. 배터리부족이라고 깜빡깜빡 벌써부터 신호가 왔었는데 마지막으로 아껴찍은 사진입니다. 찍을 때는 분명 멀리 하늘다리가 보였었는데 전봇대뒤로 숨었나 눈 닦고 봐도 안보이네요. 이거 찍지 말고 단체사진이나 찍을 걸....
5. 부라원루
이 건물은 고려(高麗) 중기부터 조선(朝鮮) 말기까지 시행해 온 역원공영제도(驛院公營制度)에 의하여 예안현(禮安縣)에 속했던 부라원(浮羅院)의 누(樓)로서 원사(院舍)는 없어지고 누각만 남아 있다. {영가지(永嘉誌)}에 의하면 안동지방에는 30여개 가까운 원(院)이 있었다고 하나 당시의 누(樓)가 현존하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 중층누각(重層樓閣)으로 누상주(樓上柱)는 다듬지 않은 다각형주(多角形柱)이고 상층기둥은 원주(圓柱)로 되어있으며,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정면 3간 측면 2간이며 난간이 있다. 현판은 명필(名筆) 한석봉(韓石峯)의 글씨이다.
- 규모 : 정면 3간 측면 2간 홑처마 팔작지붕
- 형태/방법/업적 : 건립년대는 알 수 없으나 현판이 한석봉의 글씨인 것으로 보아 1600년을 전후해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부포동 마을 앞 들판에 위치하여 찾아들기 편한 건물이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1976년에 현위치로 이건했다.
- 참고 자료 : 안동문화원,1994,안동군지정문화재편람,영남사(안동),p.186-187
돌아오는 길에 부라원루를 들렀습니다.
이미 배터리가 바닥이 난 터라 사진은 찍지 못했지만.
이 부라원루는 수몰로 다른 곳으로 옮기려던 것을 마을사람들이 그래도 향수를 느끼려면 이것 하나라도 남겨둬야 한다며
언덕위로 옮겨 놓았다네요.
누마루 아래에 둘둘말린 매트가 있길래 저게 왜 저기있냐고 물었더니
일행중 한분이 대답하여 주셨습니다.
수몰로 이곳저곳으로 흩어진 주민들이 해마다 여름이면 이 부라원루에서 모임을 갖는데 그 때 그분들이 앉는 자리라네요.
뵙지는 못했어도 고향을 잊지않고 찾아주는 주민들이 참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마치면서.....
처음으로 써보는 답사후기입니다.
이것도 자의가 아닌 연두님의 숙제로...
안동이 넓다는 걸 새삼 느낀 답사였습니다. 구비구비 얼마나 돌았던지....정말로 전부 첨가보는 곳이라 나름 좋은 기회였습니다.
아쉬움도 많았고, 느낀점도 많았습니다.
우리것을 부지런히 배우고, 다듬고, 개선해나가야겠다는 과제도 얻었습니다.
섭섭했던 건, 어스름에 저녁식사도 함께 나누지 못한채 그냥 타고온차로 뿔뿔이 흩어졌다는 것!
정말 연두님의 부재가 크게 느껴졌었지요.
그래도 후회없는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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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답사기를 보니 정말 함께 했으면 하는 느낌이 드는 멋진 곳들입니다. 늘 소녀 같은 감성,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이제 솜씨 보이셨이니 매번 써야해요. 하하. 이번 서산답사기도 올려주셔요!!!
서산 답사기 기대 만땅~~!!!
OK!!! 처음이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쉬운 법.
카메라도 좋찮고, 기술도 없는데다, 혹여 메모리가 커서 안올라갈까봐 해상도까지 낮췄더니 사진이 선명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새삼~~~ 11월 답사가 생각나게 하네요..번남댁, 송소고택...등등 송소고택에서 네쌍둥이 감은 제가 가져갔어요...며칠동안 차에 갖고 다니다가 ...버렸는가????
연두님, 슈렉님, 이렇게 올리면 되나요? 한참 헤맸어요..... 그동안 슈렉님의 노고를 새삼 느껴봅니다. 그리고 아이조아님, 니도 한 번 써 보세요.
매우 좋습니다. 앞으로 계속 써 주세요.
정말멋집니다. 자세히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번남 고택 너무나 허술한 관리 누가 해야 하나 다시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