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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4일, 티토는 마침내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고 연방은 실로 티토라는 위대한 지도자의 존재 때문에 국제 무대에서 실제적인 국력을 훨씬 능가하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었다. 티토의 장례식에 참가한 33명의 각국 국가 원수와 16명의 총리는 그의 위상을 새삼 분명하게 해주었다. 티토는 베오그라드 시가지가 내려보이는 ‘가든 오브 플라워즈’에 영원히 잠들었다. 그리고 그가 일으켜 세운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도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티토 사후 10년은 바로 유고 연방의 장례식을 준비하는 기나긴 기간이었다. 티토의 관이 안치된 가든 오브 플라워즈
1980년대의 전반기는 그나마 연방의 골격이 유지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티토와 함께 게릴라 투쟁을 했던 지도자들이 상당수 생존해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각 공화국 지도자들은 연방 지속이 결코 순탄하지 않고 위기도 많이 불러일으켰지만 연방을 유지하겠다는 점에는 아무도 의심을 품지 않았다. 1971년을 장식했던 크로아티아의 독립 요구 시위 사태는 연방의 개입으로 무산되었으나 근본적인 민족주의의 불길을 끌 수는 없었다. 특히 이듬해까지 시위 주도자들에 대한 구금, 체포, 재판이 계속되었으며 언론에 대한 집중 탄압도 단행되었다. 이러한 연방 정부의 강경 대책에 대해 크로아티아 인이 공개적으로 항의는 못 했지만 내부적으로 그 불만이 차츰차츰 누적되어 갔으며 티토의 죽음과 함께 밖으로 분출되기 시작했다. 티토의 죽음은 세르비아 패권주의의 불길을 다시 지피는 계기도 되었지만, 크로아티아 인의 가슴에 내재되어 있던 불만을 밖으로 폭발시키는 역할도 했다. 특히 1980년대부터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 1990년대 크로아티아를 이끌어 가던 거의 모든 지도자들은 1971년 사태 때 체포돼 수감 생활을 경험한 인물들이었다. 드라젠 부디사(Drazen Budisa), 블라다 코트바치(Vlada Gotvac), 마르코 베셀리카(Marko Veselica), 그리고 나중에 크로아티아 대통령이 된 프라뇨 투지만(Franjo Tudjman)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드라젠 부디사
마르코 베셀리카
프라뇨 투지만
다른 공화국의 분위기와 마찬가지로 크로아티아에서도 1980년대 초반까지는 티토와 같이 일했고 유고슬라비아를 유지시키려는 티토주의자들이 그나마 건재했었다. 스티페 수바르(Stipe Suvar) 같은 인물이 티토주의자를 대표하는 지도자였다. 그러나 크로아티아 티토주의자들은 세르비아측이 노골적인 패권 정책을 추구하고 이를 견제하려는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주의가 다시 세력을 얻으면서 설자리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특히 세르비아측은 크로아티아 정치 지도자들을 ‘붉은 우스타샤’로 몰아붙였다. 세르비아와 어느 정도 협조하기를 원했던 티토주의자들까지도 도매금으로 우스타샤로 몰아붙였던 것이다. 이런 세르비아 지도부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고민에 싸여 있던 크로아티아 정치 지도자들의 노선 결정을 확고히 하도록 도와 주었다. 사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크로아티아 지도부는 같은 크로아티아 인인 티토가 세르비아 패권주의를 막으면서 지켜 온 유고 연방을 존속시키는 데에도 미련을 가지고 있었지만, 밑에서 강력히 불어닥친 민족주의의 물결 속에서 그 방향을 정확히 잡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크로아티아 인을 무조건 우스타샤의 살인자로 몰아붙인 세르비아 공산당의 대세르비아주의 천명은 바로 크로아티아 지도부를 완전히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에 합류케 하는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스티페 수바르
그나마 안전핀 구실을 했던 티토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며 민족주의의 발흥을 지연시켰던 이데올로기는 점점 더 쇠퇴해 갔다. 세르비아는 티토 아래에서 약회된 세력을 회복하려고 했고, 북방의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는 국가 연합 형태의 느슨한 연방 체제를 만들어 각 공화국의 자율성을 높이려 했다. 총성은 없었지만 유고 연방 내 각 민족의 감정의 골은 더욱더 깊어만 갔다. 티토가 이끄는 연방 체제 하에서 상당히 위축되었던 세르비아의 민족주의는 티토의 죽음을 계기로 서서히 공세로 돌아섰다. 그 첫 시험대는 1981년 코소보에서 발생한 대규모 반세르비아 시위였다. 세르비아측은 초강경자세로 일관해 이를 진압했다. 이와 함께 내부적으로는 알바니아의 위협을 의도적으로 과장 선전해 강경 조치를 합리화 했다. 세르비아측의 이런 대응은 기본적으로 반알바니아 분위기를 유도하는 동시에 반티토이즘, 반유고슬라비즘을 실제화하는 것이었다. 1981년부터는 세르비아 지식인들이 주동이 되어 티토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시인 고이코 됴고(Gojko Djogo)는 <부네다 브레메다(Vuneda vremeda)>라는 잡지에서 티토를 ‘디메녜에서 온 늙은 쥐’라고 직접적으로 공격하고 나섰다. 디메녜는 티토가 태어난 곳이다. 역사학자 블라디미르 데디예르(Vladimir Dedijer)는 티토의 무오류성을 역사적 사실을 들어가며 공격했다. 이후 세르비아 지식인들은 지식인 고유의 비판 정신을 완전히 상실한 채 대세르비아주의를 다시 점화하는 선봉장이 되었다. 그 대표적 기관이 바로 세르비아 과학 예술 아카데미(SANU)였다. 1985년 5월 SANU는 연례 총회를 열어 현재의 유고슬라비아 현실을 파악하기 위한 특별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위원회가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고이코 됴고
블라디미르 데디예르
1. 티토 전대통령은 기본적으로 반세르비아 정책을 펴왔다. 따라서 그는 유고 연방의 현실을 ‘억압하는’ 세르비아 인과 억압받는 다른 민족 간의 대결로 왜곡했다. 2. 이런 정책의 결과로 세르비아의 경제는 북방의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에 종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같은 결과를 초래하였다. 3. 1974년에 제정된 신헌법은 세르비아 인을 분할시키는 조치였으며 세르비아 인에게 불평등을 초래했다. 4. 코소보에서 발생한 유혈 사태는 기본적으로 코소보에 거주하는 세르비아 인에 대한 육체적, 정치적, 법적 그리고 문화적인 학살 행위이다. 이는 1804년 오스만 투르크에 대한 항쟁을 필두로 1941년의 파르티잔 투쟁에 이르는 세르비아 인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말살시키는 행위이다. 5. 크로아티아 공화국 내에서 거주하는 세르비아 인의 자치권과 문화가 크게 위협받고 있다. 6. 보이보디나 자치주의 정치 지도자들은 점점 더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부터 독립과 분리를 추구하고 있다. 7. 다른 공화국에서는 교육을 통해 세르비아 혐오 사상을 전파하는 동시에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8. 결론적으로 세르비아는 반세르비아 연합의 희생자가 되었다. 베오그라드에 위치한 SANU의 건물
SANU는 세르비아의 과거에서 드러나는 불합리한 점은 호도하고 상대편의 약점은 터무니엇이 과장하는 비지성적 태도를 보였다. 세르비아 현대사에서 가장 큰 약점은 2차 세계대전 중 게릴라전을 하면서도 추축국에 협력하며 반공산주의를 표방하고 구체제인 세르비아 왕가를 지지한 체트니크의 존재였다. SANU의 회의록에는 이 부분이 다음과 같이 축소 해석되어 있다. “집권당(공산당, 즉 티토와 유고슬라비즘 주창자들을 의미)의 이념과 정치 체제에 의해 강제되는 역사적 오류의 기준을 받아들일 수 없다.” SANU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추축국이 세운 크로아티아 자치국의 우스타샤가 저지른 세르비아 인 학살 사건을 대단히 과장하여 민족 감정을 자극했다. 사망자 수를 늘려 보도하고, 우스타샤 체제가 가지는 반세르비아 감정이 일시적인 파시즘의 영향 때문만이 아니라 크로아티아의 민족주의에 녹아 있는 기본적인 체질이라고 주장했다. 예컨대 ‘학살은 크로아티아 인의 천성’ 혹은 ‘모든 크로아티아 인은 바로 우스타샤’라는 악의적인 가설까지 등장했다. 이런 가설을 유포한 대표적인 인물이 역사학자 바실리예 크레스티치(Vasilije Krestic)였다. 그의 주장을 정리하면 이렇다. “크로아티아 인(우스타샤)의 세르비아 인 학살은 우리 시대에서만 일어난 특정한 사안은 아니다. 오히려 크로아티아 사람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가지고 있던 의식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바실리예 크레스티치
세르비아 인은 또 우스타샤 수용소 중에서 가장 컸던 야세노바치(Jasenovac)에서 모두 7만 명의 세르비아 인이 처형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수용소에 있었던 미르코 페르센(Mirko Persen)의 증언에 따르면 처형된 인원은 유태 인 등을 포함해도 이보다 훨씬 적다는 것이다.
야세노바치에서 수감자를 처형하는 우스타샤 경비병
티토 사후 세르비아 민족주의는 비굴한 지식인들의 ‘뻥튀기’에 힘입어 더욱더 극단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세르비아의 전체 분위기는 블랙 핸드의 새로운 부활을 예고할 정도로 무르익었다. 그 중심 인물이 바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였다. 그는 1987년 대망의 세르비아 대권을 낚았다. 공산당 서기장이 되기 전까지 베오그라드 은행장을 역임했던 그는 전형적인 야심의 사나이였고 블랙 핸드가 추구해 왔던 극단적인 대세르비아주의 건설에 남달리 집념을 보이고 있던 인물이었다. 블랙 핸드의 드미드트리예비치 대령, 체트니크의 미하일로비치 대령, 그리고 알렉산더 란코비치 유고 연방 부통령의 시도가 모두 실패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블랙 핸드의 정신이 다시금 밀로셰비치를 통해 부활하고 있었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세는 밀로셰비치의 편이었다. 블랙 핸드의 정신에 한 번도 진정한 지지를 보내지 않았던 지식인들이 이제 본격적으로 대세르비아주의를 정당화하였고, 연방 최대의 무력 보유 기관인 연방군도 서서히 그의 수하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운동이 본격화되는 것과 동시에 우스타샤에 의한 세르비아 인 대학살 사건을 규명하려는 의욕이 세르비아 인의 가슴에 불을 붙였다. 그래서 밀로셰비치는 이전의 어떤 다른 인물보다도 유리한 조건 속에서 대세르비아주의의 이상인 대세르비아 국가 건설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세르비아 인을 대세르비아주의 이데올로기로 움직이기 위해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많은 일들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가 취임했던 당시 몬테네그로 공화국 정부와 보이보디나 주 자치 정부는 인적 구성원 자체가 반세르비아적 인물로 가득 차 있었다. 밀로셰비치 입장에서는 본격적인 공세를 취하기 전에 수많은 심복들을 각 공화국에 심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손을 댄 곳이 세르비아에게 만만한 몬테네그로와 보이보디나였다. 경제적으로 상당한 재력을 가지고 있던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진영으로는 직접 자극하기보다는 정치 공작부터 진행했다. 우선 비밀 경찰 조직을 최대한 가동해 지방 정부를 상대로 대규모 시위를 조작해 내었다. 실제로 정부 정책에 어느 정도 불만을 가졌던 몬테네그로와 보이보디나에서는 1987년과 1988년 대규모 시위 사태가 계속되었다. 그는 연방 정부의 추인을 받는 형식을 통해 몬테네그로와 보이보디나 정부 인사들을 자신의 충복으로 교체했다. 일단 첫 작전은 성공한 셈이었다. 1988년에 들어서자 밀로셰비치의 노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우선 티토가 1974년 제정해 놓은 헌법을 개정하였다. 대세르비아주의를 실현하는 데 있어서 1974년 헌법은 두고두고 세르비아의 발을 묶는 족쇄였기 때문이다. 정치 공작 끝에 마련된 개정 헌법의 가장 큰 특징은 세르비아 직할주인 보이보디나와 코소보 주에 대한 통제를 더욱 철저히 해 사실상 식민지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티토는 1974년 헌법을 개정하면서 세르비아의 독주를 막기 위해 세르비아의 두 직할 자치주에게도 공화국에 버금가는 재량권을 부여해 놓았기 때문이다. 사실상 1988년의 세르비아 헌법은 공화국 헌법에 우선하는 연방 헌법에 위배되는 법으로 사실상 밀로셰비치는 위헌을 감행한 셈이다. 물론 밀로셰비치는 새 헌법이 연방 헌법에 대한 위헌은 아니라는 점을 극도로 강조했지만, 이때부터 연방 헌법 체계마저 무너지기 시작했다. 1989년부터 세르비아와 기타 다른 민족들과의 충돌은 유혈에 유혈을 불러오기 시작했다. 이듬해 2월 발생한 코소보 주에서의 알바니아 인과 세르비아 인의 충돌은 30여 명의 사망이라는 충격의 차원을 넘어 내전을 몰고오는 계기가 되었다. 또 같은 해 7월에는 코소보의 독립을 추구하는 알바니아 민주 포럼이 조직되었는데 그 주동자들은 회원이 70만 명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미 코소보는 공화국과 동등한 위치에 있다는 논리를 폈는데, 이 때문에 세르비아가 전면적으로 개입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코소보
이때 세르비아 정부는 바로 블랙 핸드를 부활시키려 했다가 좌절한 알렉산더 란코비치의 국가 안전부(UDBA)를 능가하는 인물들을 동원해 소요를 진압해 나갔다. 게다가 밀로셰비치의 충견들로 가득 찬 국회는 알바니아 인의 요구 조건을 완전히 무시했으며, 아예 한 걸음 더 나아가 코소보 주의 자치 정부와 국회를 폐지시켜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또한 연방군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창설된 코소보 주의 세르비아 민병대는 코소보의 언론 기관들이 알바니아 민족주의를 부추기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언론을 무력으로 장악했다. 세르비아 인이 아니면 무조건 잔인하게 다루어야 하는 블랙 핸드의 정신은 마침내 밀로셰비치에 의해 완전히 부활한 것이다. 이제 밀로셰비치의 새로운 네트워크를 견제할 세력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세르비아의 맞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에서의 반세르비아 감정도 점점 더 극을 향해 줄달음쳤다. 1990년 5월, 자그레브에서 열린 크로아티아-세르비아 간 축구 경기는 조만간 다가올 내전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 축구 경기는 경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관중들 사이에 패싸움이 붙어 100여 명이 부상하고 200여 명이 체포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양민족 간의 격앙된 감정이 표출된 것이다. 저 멀리서 전쟁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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