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12월 30일(음력 11월 17일)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 사이의 4남매중 장남으로 출생, 본명은 윤동주, 아호는 해환(海煥), 후애 <카톨릭 소년>지에 동요를 발표했는데, 그때 동주(童舟)라는 필명을 쓰기도 했다. 그의 형제로는 누이 윤혜원과 동생 윤일주, 윤광주가 있으나 윤광주는 월남하지 못해 생사 여부를 알지 못한다.
1925년
4월, 명동소학교에 입학.
명동소학교는 원래 이전의 규암서숙(圭巖書塾)이 신문학 도입 이후 명동소학교와 명동중학교로 발전하여 민족주의 교육을 시행해 오던 중 중학교는 폐교되고 당시 소학교만 유지되었다. 윤동주는 이곳에서 조선 역사를 배우고 민족주의 사상 및 독립 사상을 교육 받았다. 당시 그의 급우로는 후에 후쿠오카에서 같이 옥사한 고종사촌 송몽규와 외사촌 김정우, 그리고 문익환 등이 있다.
1929년
송몽규 등과 함께 <새명동>이라는 등사판 문예지를 간행하여 동요, 동시 등을 발표. 김약연 선생에게 한학을 배웠다.
1931년
3월 25일, 명동소학교 졸업. 송몽규.김정우 등과 함께 중국인 도시 대랍자(大拉子)에 있는 중국인 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수학하였다.
1932년
4월, 당시 용정에서 캐나다 선교부가 경영하던 미션학교 은진중학교에 읍학. 그의 부친은 통학관계로 인해 명동촌에 있는 농토와 집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용정으로 이주하였다.
급우들과 교내 문예지를 발간하여 문예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축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하고, 교내 웅변대회에 참가해 <땀 한 방울>이라는 제목으로 열변을 토해 1등 상을 수상하기도 하는 등 활동이 다채로웠다.
1934년
12월 24일, <삶과 죽음>, <초 한 대>, <내일은 없다> 등의 시작품을 썼다. 이후부터 자작시에 시작(詩作)날짜 기입.
1935년
3월, 용정 중앙교회의 주일학교에서 유년부 지도. 9월, 은진중학교에서 평양숭실중학교 3학년에 편입. 이 당시 창작활동에 몰두하면서 <남쪽 하늘>(10월), <창공>(10월 20일), <거리에서>(11월 18일), <조개 껍질>(12월) 등의 시작품을 썼다.
1936년
신사참배 거부 문제로 인해 숭실학교기 폐교되자 용정으로 돌아와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전입. 당시 간도지방의 연길에서 발행하던 <카톨릭 소년>지에 동시(童詩) <병아리>, <빗자루> 등의 시작품을 발표하였다.
동시(童詩) <오줌싸개 지도>, <기왓장 내외>, <햇비>, <9월 9일>, <비행기>(10월 초), <봄>(10월), <참새>(12월), <버선본>(12월)과 <이별>, <식권>(3월 20일), <비들기>, <모란봉에서>(3월 24일), <황혼>, <가슴1>(3월 25일), <종달새>(3월), <산상(山上)>(5월), <오후의 구장(球場)>(5월), <이런 날>(6월 10일), <산림>(6월 26일), <닭>, <가슴2>(7월 24일), <꿈은 깨어지고>(7월 27일), <가을밤>(10월 23일), <무얼 먹구 사나> 등의 시작품을 썼다.
1937년
<카톨릭 소년>지에 동시 <오줌싸개 지도>, <무얼 먹구 사나>, <거짓부리> 등을 발표. 상급학교 진학문제로 의학을 지망하라는 부친과 대립하였으나 결국 문과반 진학을 확정하였다. 동시 <둘 다>, <빈딧불>, <할아버지>(3월 10일), <만돌이>, <나무>와 <황혼의 바다가 되어>(1월), <밤>(3월), <달밤>(4월 15일), <풍경>(5월 29일), <한란계>(7월 1일), <그 여자>(7월 26일), <소낙비>(8월 9일), <비애>(8월 18일), <명상>(8월 20일), <산협(山峽)의 오후>, <비로봉>(9월), <유언>(10월 24일), <창>(10월) 등의 시작품을 썼다.
1938년
2월 17일, 광명중학교 5학년을 졸업. 4월 9일,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여 기숙사 생활을 하였다. 이 당시 최현배 선생으로부터 조선어와 민족의식을 배우고 이양하 선생으로부터 영시(英詩)를 배웠다. 동시 <산울림>(5월), <바람>, <해바라기 얼굴>, <애기의 새벽>, (귀뚜라미와 나와> 등과 <새로운 길>(5월 10일), <비 오는 밤>(6월 11일), <사랑의 전당>, <이적(異蹟)(6월), <아우의 인상화>(9월 15일), <코스모스>(9월), <고추밭>(9월 26일), <슬픈 족속>(9월), (햇빛> 등의 시작품을 썼다.
1939년
산문 <달을 쏘다>를 '조선일보' 학생란에, 동요 <산울림>을 '소년'지에 발표하였다.
시 <자화상>, <달같이>, <소년>, <장미 병들어>(9월), <산골몰> 등과 산문 <트루게네프의 언덕>을 썼다.
1940년
시 <병원>(12월), <위로>(12월 3일)를 썼고, 이 해 8월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일제에 의해 폐간당하였다.
1941년
연희전문 문과에서 발행한 <문우(文友)>지에 <자화상>, <새로운 길>을 발표. 누상동의 김송집에서 하숙하였으나 일본 형사의 눈을 피하기 위해 북아현동으로 옮김.
12월 27일, 연희전문 문과 졸업. 졸업 기념으로 자선시집(自選詩集)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편으로 이루어짐)를 출간하려 했으나 실패. 도일 수속과 일제 탄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히라누마(平沼)로 창씨 개명하였다.
<무서운 시간>(2월 7일), <눈 오는 지도>(3월 12일), <새벽이 올 때까지>(5월), <태초의 아침>, <또 태초의 아침>(5월 31일), <십자가>, <눈감고 간다>(5월 31일), <바람이 불어>(6월 2일), <못 자는 밤>(6월), <간판 없는 거리>, < 또 다른 고향>(9월), <길)(9월 31일), <별 헤는 밤>(11월 5일), <서시>(11월 20일), <간>(11월 29일) 등의 시작품을 썼다.
1942년
도일하여 동경 입교(立敎)대학 영문과에 입학. 하기방학 때 간도 용정의 고향집을 마지막으로 다녀갔다. 10월 1일, 경도 동지사대학 영문과에 편입.
이 당시 <참회록>(1월 24일), <흰 그림자>(4월 14일), <흐르는 거리>(5월 12일), <사랑스런 추억>(5월 13일), <싑게 씌여진 시>(6월 3일), <봄> 등의 시를 썼다.
1943년
7월 14일, 첫 학기를 마치고 귀향길에 오르기 전 송몽규와 함께 사상범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경도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동경 유학 기간중 섰던 상당량의 작품과 일기가 압수되었으며 취조형사의 요구에 의해 일어로 번역되었다.
1944년
6월 경도지방 재판소에서 '독립운동'의 제목으로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옥중에서 <신약성서> 탐독.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함.(송몽규도 이어 3월 10일에 옥사함). 3월 초, 간도 영정에 유해가 묻혔다. 단오절 무렵에 '시인 윤동주의 묘'라는 비석 세워졌다.
1946년
7월, '경향신문'에 유작 <쉽게 씌여진 시>가 발표되었다.
1947년
2월 16일, 정지용, 안병욱, 이양하, 김삼불, 정병욱 등 30여 명의 시인들이 서울 소공동 플로워 회관에 모여 '윤동주 2기 추도식'을 개최하였다.
1948년
1월,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간행하였다.
이 시집은 유고 31편과 정지용의 서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1955년
2월, 윤동주 10주기 기념으로 흩어진 유고를 모아 88편의 시와 5편의 산문을 엮어 다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간행하였다. 2월 16일, 연희대 문과 주최로 박영준, 김용호, 정병욱 등이 모여 '윤동주 10주기 추도회' 개최하였다.
1968년
11월 2일, 연세대학교 학생회와 문단 친지 등이 모금한 성금으로 연세대 기숙사 앞에 '윤동주 시비(詩碑)' 건립. 이 시비는 윤동주의 친동생 윤일주가 설계한 것으로 윤동주의 욱필로 쓴 <서시>가 확대되어 새겨져 있다.
1970년
10월 15일, 윤동주 25주기를 맞아 고인의 친필 유고와 유품 전시회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