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조직의 두목을 아버지로 둔 준석(유오성), 가난한 장의사의 아들 동수(장동건), 밀수업자를 부모님으로 둔 귀여운 감초 중호(정운택), 화목한 가정에서 티없이 자란 상택(서태화). 넷은 어딜 가든 함께 했다. 훔친 플레이보이 잡지를 보며 함께 낄낄거렸고, 이소룡의 브로마이드를 보며 경쟁하듯 흉내냈다. 바다에 튜브를 하나 띄워 놓고 네 사람이 매달려 조오련과 거북이 중에서 누가 빠를까하며 입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세월은 흘러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준석은 큰형같았고, 준석에게 늘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동수, 전교 1, 2등을 다투던 모범생 상택, 촐싹대면서 분위를 맞추는 중호. 어느 날, 근처 여고의 그룹사운드 레인보우의 공연을 보러가고 상택과 준석은 싱어 진숙에게 반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중호와 상택은 대학에 진학했다. 둘은 연락이 끊어졌던 준석과 동수를 찾아간다. 동수는 감옥에 수감돼 있었고, 준석은 어머니를 여읜 충격으로 마약에 깊이 빠져있었다. 그리고 상택이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했던 여자 진숙이가 준석의 곁에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들의 20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버지를 여의고 부친의 조직내에 행동대장이 된 준석, 준석을 배신하고 새로운 조직의 행동대장이 된 동수, 미국 유학을 앞둔 상택, 중호는 결혼하여 횟집 주인이 되어 있었다. 상택은 유학길에 오르기전, 친구들이 보고싶어졌다. 그러나 유학을 떠나는 날 끝내 준석과 동수는 공항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후 준석은 법정에서 동수를 자신이 죽였다고 선언하고 교도소에 수감된다. 상택은 유학을 마치고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준석이를 면회한다. 이때 왜 동수를 죽였다고 시인했느냐고 물었을 때 준석의 대답은 이러했다. "쪽팔린다 아이가!" 자기 스스로 부끄러운 삶을 택하지 않은 자존심이었다. 비록 건달로 살았지만 자기 나름대로 멋있게 살고자 했던 몸부림이 그 말 한마디에 다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친구라는 영화는 한 마디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는 한국적 상황 하에서 향수에 젖어들게 하는 영화였다. 스토리 전개에 있어서나 네 친구들의 상황 설정 등이 무리가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고 앞만 보고 달려온 30-40대가 자신의 학창시절을 되새기고 향수에 빠져들게 하기에는 충분한 영화였기에 대박의 조짐이 보이는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누구다 다 자기 나름대로 멋있게 살고자 한다. 그 삶은 자신의 목표, 삶의 방식 혹은 삶의 철학에 따라 움직여지지만 그 기준은 어디까지나 자기 중심이다. 그러기에 동수는 준석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게 되었던 것이다. 장의사라는 아버지의 직업에 환멸을 느끼고 늘 2인자의 자리에서 허덕이는 자신의 비참함에 견딜수 없었기에 준석을 향해 "내가 니 시다바리가?"라는 말로 같은 건달이면서도 다른 노선을 걷고자 하는 것이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경쟁 상대로 보기 때문에 늘 좁은 시야 속에서 1인자를 꿈꾸는 것이 인간의 욕심이다.
융화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자들이 친구라는 명목 하나로 계속 만남이 이어지고 사귐이 계속된다. 가능한 것일까? 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가? 어쩌면 사회화에 성공한 상택의 이미지가 가장 힘없고 멋이 없는 모습으로 비쳐지기에 이 영화를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자기 기준에서 멋있게 살고자 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적어도 상택과 같이 공부만 하는 것이 사회에서 성공하는 것이고 힘있는 모습이라고 하는 자기 합리화를 시켜가면서 말이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다. 속된 말로 풀이하자면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말이다. 세상의 인심이 그렇게 사고방식이 그러하다. 그런데 유학을 하며 공부만 한 친구와 건달의 세계에서 행동 대장을 하고 있는 친구가 우정을 계속 유지한다는 것은 분명 현실적인 면에서 도전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음에는 세상의 가치 기준과 세상의 사고 방식을 넘는 것이기에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그분에 의해 하나가 되는 비밀이 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3). 그것을 가지고 주님의 몸된 교회라고 한다.
십자가의 주님은 이 땅의 존재가 아니라 하늘에서 오신 분이셨다. 하늘에서 오신 분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당하신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그러셨는가? 자기 백성의 대속을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자기 몸으로 재창조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셨다. 그러기에 여기에는 학력의 차별이 있을 수 없고, 지방색으로 인한 구분이 있을 수 없으며, 흔히 이혼의 사유가 되는 성격의 차이라는 불만이 있을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가 된 관계는 세상의 혈통적 관계를 부정하고, 세상의 어떤 친목 모임의 관계를 뛰어 넘는 새로운 관계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관계를 친구가 아니라 형제 자매라고 칭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좇아 서로를 위해 희생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 희생은 건달들이 의리를 내세우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당연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나온 나는 '형제 자매의 관계로서 친구보다 더 진한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들어있는 주성교회인가?' 하는 물음이 머리 속을 떠나질 않았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7,8)(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1.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