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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학>, 2010년 봄호.
<서정시학 집중 조명 대담 원고>
律呂集 1 외 4편
-조선 채송화 한 송이
정진규
소리의 속살들이 보인다 날아가는 화살들만이 아니라 되돌아 다시 오는 화살 떼들이 보인다 한 몸으로 보인다 너와 나의 운동엔 순서가 따로 없다 사랑의 운행엔 시간이 따로 없어서 거기 다 있다 그러나 肥滿이 아니라는 사실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너와 나 사이를 빼곡빼곡 다져 쟁이는 빛의 超速들, 긋고 간 흔적이 없다 빛은 세상에서 가장 날렵하다 <쇠도끼 갈고 갈아 담금질 얼음 담금질 살로 빚은 金剛>*, 제 혼자서도 날아가는 날아오는 빛의 도둑 떼들이여, 햇살들이여, 해 뜨는 이 아침 자옥하구나 鳴滴을 듣는다 살 섞는 소리를 듣는다 마악 피어난 작은 조선 채송화 한 송이가 찰나라고 일러야 하느냐 언제 제 혼자 피어 저리 세상에 빼곡빼곡 쟁여 있느냐
*雪嶽 五鉉 스님 尋牛頌 次韻.
律呂集 2
-밥을 멕이다*
어둠이 밤새 아침에게 밥을 멕이고 이슬들이 새벽 잔디밭에 밥을 멕이고 있다 연일 저 양귀비 꽃밭엔 누가 꽃밥을 저토록 간 맞추어 멕이고 있는 겔까 우리 집 괘종 붕알시계에게 밥을 주는, 멕이는 일이 매일 아침 어릴 적 나의 일과였던 生家에 와서 다시 매일 아침 우리 집 식구들 조반을 챙기는 그러한 일로 하루를 열게 되었다 강아지에게도 밥을 멕이고 마당의 수련들 물항아리에도 물을 채우고 뒤꼍 상추, 고추들 눈에 뜨이게 자라 오르는 고요의 틈서리에도 봄철 내내 밥을 멕였다 물밥을 말아주었다
*멕이다 : ‘먹이다’의 안성 사투리.
*(改稿)
律呂集 3
-마르게 웃는
물 듣는 빨간 고무장갑을 빼면서 겨울 뜨락에서 나를 맞는 제수씨, 제수씨처럼 마르게 웃는 슬픔을 나는 안다 흐르다 멈추고 멈추었다 다시 흐르는 강물 끊긴 자리에 허리 꺾인 마른 갈대를 나는 안다 칼국수를 미는 제수씨의 홍두깨가 어느새 구겨진 슬픔을 밀고 있다 里長 볼 때, 아우가 타고 다녔던 낡은 자전거 한 대가 아직도 헛간에 기대어 서 있다 구르지 않는 슬픔을 나는 안다
律呂集 4
-달빛 방식
보름살이떼*를 만나러, 몸으로 만나러 한 여자의 바다가 곰소만으로 간다 달의 시간을 아는 가장 정밀한 시계를 모든 물고기들과 여자들은 한 개씩 차고 있다 달은 힘이 세다 달빛 밧줄 바다를 끌어당긴다 갯벌에 가면 조개껍데기에 달의 시간이 달의 금줄이 깊게 패어 있다 조금 때는 짧고 사리 때는 길다 사리와 조금의 달빛 당기기, 달빛 방식으로 사랑을 끌고 당기면 실패가 없다 가장 둥근 사랑을 성취할 수 있다 가득 채울 수 있다 7, 8월 보름달이 뜨면 크리스마스섬으로 가라 달의 명령을 따르는 홍게, 대게들의 대이동이 시작된다 직방 전진! 우르르 바다를 향해 암컷들 군단으로 알 뿜어댄다 떼로 몸 푼다 12월의 바다는 여름에 달궈진 온기가 남아 있다 멍게의 번식기, 12월 보름 암수한몸인 물멍게들은 5만개의 알들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땅속의 물들도 보름달이 당겨 올린다 수세미와 고로쇠도 달의 직속들이다 불임의 여자에게 귀띔해 드리러 보여드리러 곰소만으로 간다 달빛 방식으로 해라 실패가 없을 것이다
*‘보름살이떼’ : 未堂.
律呂集 5
-토용 떼와 찔레꽃
다 상관이 있다 천리만리라지만 그게 아닌 것을 오늘 또 본다 중국 섬서성 진시황능 속의 전사 土俑들이, 토용 떼들이 내 꿈길마다 웅기중기 막아서고, 연전 화양동 계곡에 가서 노박이로 젖었던 찔레꽃 향내가 무슨 상관으로 이 봄에 내 몸속에서 한 몸으로 뒹구는 것일까 옆구리로 삐어져나와 세상을 집적거리기도 한다 오염되어 돌아가기도 한다 천리만리 살 속까지 속속들이 당기고 있는 저것들을 규명하려 들지 말자 건너갈 다리는 이쪽에서 가다가 홀연 없어지고 저쪽에서 오다가 홀연 없어지기도 한다 그 홀연을 규명하자 홀연이 가장 강력하며 위대하다 모든 것은 단번에 홀연 交合이다 겨울밤 겨울밭에서 마늘 싹이 돋는 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무리는 위대하다 홀연이다 내가 임신중절한 것들, 싹이 돋기를 포기한 씨앗들 천리만리로 홀연 되돌아갔을까 홀연 몸을 바꾸었을 따름이다 律呂의 子宮 속으로 그저 아득히 着陸하고 있다
*律呂 : 우주 生成의 리듬이라고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12律로 나누고 이를 다시 陽의 소리에 속하는 六律과 陰의 소리에 속하는 六呂로 나누어 말한다. 陰陽이 만나는 生命의 리듬, 그 실체들의 몸짓이 빼곡하게 차 있는 秘儀의 공간으로 나의 시가 運行을 시작했다. 『禮記』에 ‘正律和其聲’이라 한 대목이 보인다.
정진규
1939년 경기도 안성 출생. 고려대 국문과 졸업. 19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마른 수수깡의 평화』(1965), 『유한의 빗장』(1971),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1977), 『매달려 있음의 세상』(1979), 『비어 있음의 충만을 위하여』(1983), 『연필로 쓰기』(1984), 『뼈에 대하여』(1986),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1990), 『몸시』(1994), 『알시』(1997), 『도둑이 다녀가셨다』(2000), 『본색』(2004), 『껍질』(2007), 『공기는 내 사랑』(2009)이 있음. 한국시인협회 회장 역임. 현재 『현대시학』 주간.
<집중 조명 대담>
맹문재 : 새해에 인사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현대시학』을 간행하는 일만 해도 힘드실 텐데, 『껍질』을 내신 지 이태만인 지난해에 『공기는 내 사랑』을 간행한 데서 보듯이 열심히 시를 쓰고 계십니다. 선생님의 시 쓰는 모습은 후학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하시는데 건강은 괜찮은지요? 「모과 썩다」라는 작품을 보니까 “일생 내가 먹은 약만 해도 세 가마니는 될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던데요.
정진규 : 후배들에게 내가 부지런하다는 소문이 나 있는가 봐요. 젊은 시인들 못지않게 긴장감을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는데, 그렇다는 말을 들을 때 제일 기분이 좋아요. 건강은 괜찮아요. 다른 때는 대개 4년 터울로 시집을 냈는데 근래에는 2년 만에 나왔잖아. 이런 것을 보면 건강이 괜찮은 편이지요. 시골 생가로 내려가서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아요.
맹문재 : 선생님께서는 2007년에 그동안의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이사를 하셨습니다. 아무래도 안성에서의 생활을 여쭙지 않을 수 없네요. 어느덧 3년이 되었는데, 생활하시기가 어떤지요. 이번의 『서정시학』에 발표한 「율려집 2」「율려집 3」을 보니까 진한 향토성이 느껴지네요. 시를 쓰는데 영향을 받고 있는지도 궁금하네요.
정진규 : 얼마 전 집사람이 앨범을 하나 정리했는데, 수유리 30년이라는 이름을 붙였더라구. 수유리에서 30년 동안 살아온 과정을 사진으로 정리한 것이지요. 나중에 전집을 낼 때 쓰면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수유리의 세월은 내게 뜻 깊지요. 거기서 애들 학교를 다 다녔고 결혼을 시켰고 겪어야 할 온갖 일들을 겪었지요. 안성으로 내려간 뒤에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운신의 폭이 자유로워졌어요. 특히 시 쓰는데 자연의 내밀함을 만난 것이 의미가 커요. 이전에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던 자연의 생명력을 보게 되고 듣게 됨으로써 시 쓰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맹문재 : 그렇군요. 안성은 박두진, 조병화 선생님의 고향이기도 하듯이 시의 전통이 강한 지역으로 보이네요. 지역 시인들이며 주민들과의 교류활동은 어떤지요? 「석가헌 근방」이라는 작품을 보니 지역 주민들을 “함께 무얼 먹어야 말문이 트이는 사람들”이라고 소개하셨는데, 참 재미있네요.
정진규 : 지역 시인들과의 교류는 억지로 하지 않고 있어요. 그들 나름대로 오랫동안 해온 관습이 있고 질서가 있을 테니 간섭하지 않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들대로 자유롭게 하는 것이 좋겠지요.
지역 주민들과는 아주 친하게 지내고 있어요. 동네에 초등학교 동창이 셋이 있는데, 그들이 내가 월, 수, 금요일에 서울에 올라오고 다른 날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불러내요. 노인정에 무얼 끓여놓았다고 불러내는데 안 갈 수 없잖아요. 그런데 그들은 막걸리도 아니고 꼭 소주를 먹어. 그러니 나는 술을 먹으면 안 되는 형편인데, 그것을 넘어서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집사람한테 혼나지. 그래도 그게 즐거워요. 초등학교 동창들과는 재미있는 일이 아주 많아요. 한 가지 예를 들면 내가 어느 날 집사람의 손을 잡고 장에 갔는데, 그것을 초등학교 친구가 보고 자기 집사람의 손을 잡았대. 그러자 손을 탁 치며 왜 안 하던 짓을 하느냐고 하더래. 그래도 조금 있다가 다시 잡으니 그렇게 좋아하더래. 그래서 지금 동네 노인들은 내외간에 손을 잡고 다니고 있어요.
동네 애들과도 재미있게 지내요. 요즘 동네에 애들이 없잖아. 우리 동네에도 초등학생이 다섯 명밖에 없어요. 그 애들이 나를 아주 좋아해요. 좋아하는 이유는 다른 게 뭐 있나, 먹을 게 있으니 그러지. 애들이 들락거리며 먹으라고 우리 집 큰 광주리에 새우깡 등 과자를 잔뜩 사다 놓았어요. 어느 날 애들이 책을 보다가 할아버지는 왜 시를 쓴다면서 동시집이 없느냐고 해요. 그러면서 할아버지는 가짠가 보다고 그래요. (웃음) 그래서 내가 금방 낼 거라고 했지요. 그런데 마침 나를 도와주려고 그러는지 ‘문학동네’에서 동시집을 내자고 해왔어요. 아직 편수가 좀 모자라는데 내달까지는 채워지겠지요. 동시집이 나오게 되면 애들한테 체면이 설 것 같아요. 실제로 너희들 때문에 이 동시집이 나오게 되었다고 다섯 명 애들의 이름을 넣었어요.
맹문재 : 동네 아이들이 ‘가짠가 보다’라고 한 말이 참 재미있네요. 그런데 「수유리를 떠나며」라는 작품을 보니 “산수유 한 그루”를 데리고 갔다고 하셨는데, 잘 크고 있는지요. 또 「찬우물」이란 작품에서는 우물이 나오는 것으로 소개되어 있네요.
정진규 : 산수유 때문에 고생이 많았어요. 몸살을 어찌나 앓는지. 사람보다 식물이 적응하는데 더 민감한 것 같아요. 사람은 의지적으로 적응하기 때문에 환경이 바뀌어도 넘어갈 수도 있지만 자연은 맞지 않으면 몸으로 나타내잖아. 작년까지 이파리가 아주 작았는데, 올해는 좀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해요. 거름을 많이 했거든. 최창균 시인이 목장에 쟁여두었던 거름을 다섯 가마니나 가져와서 주었어요.
우물이 있지요. 오래되었어요. 내가 어렸을 때부터 보았던 우물인데, 거기에서 쌀도 씻고 하지요. 이러한 것들이 정서적으로 도움을 줘서 시의 통로가 잘 열리는 것 같아요.
맹문재 : 이번 시집의 「비 오는 날」이란 작품에는 “비 젖고 섰는 큰 느티나무를 비가 와서 만든 줄 알았더니 느티나물 만나서 비가 비로소 느티나물 크게 적시게 되었음을 알았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비오는 날의 큰 느티나무 풍경이 선연하네요. 그 상황을 좀 들려주시지요.
정진규 : 우리가 습관화된 시각으로 보면 비가 와서 풀이 자라고 나무를 키우는 것이겠지만, 가만히 보니 느티나무가 있어 비가 보이는 거예요. 과학적으로도 빛의 굴절 현상에 의해 비가 보인다지요. 자연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도 교호적 관계가 실체를 형성한다고 생각해요. 이는 나의 몸 사상과도 통하지요. 몸과 정신이 안과 밖이 서로 만나야 실체가 형성되는 거지요.
그런데 우리 집에 있는 느티나무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내게 절대적이지요. 우리 집을 지키는 나무여서 마치 당산나무와 같아요. 나는 아침에 일어나 나무와 대화를 해요. 아침마다 건강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명상을 하는데, 눈을 감고 하루를 어떻게 살아보겠다는 것은 물론이고 늘그막의 삶을 생각해요. 그때 느티나무와 대화를 하지요. 느티나무는 내게 신격화된 존재인 셈이어서 이름을 ‘초록금강’이라고 붙였어요. 초록의 잎들이 났을 때 생명의 궁극에 이른 것 같아서 금강경에 나오는 세계와 같다고 생각해요. 요즘은 ‘겨울금강’이라고 부르지요. 겨울은 춥고 아프고 얼음이 얼어붙는데, 그것을 거쳐야 새로운 생명을 맞을 수 있겠지요. 우리 집의 느티나무는 이처럼 큰 그늘이고 내 시의 상징물이지요. 사실 느티나무가 있는 터가 좋아요. 그래서 그 아래에 계단도 해놓고 평상도 해놓았어요. 앞으로 아이들 놀이터도 꾸미려고 해요. 그리고 이다음 세상을 떠날 때 거기에 내 비석을 세워달라고 유언으로 남기려고 해요.
맹문재 : 언제 찾아뵙고 느티나무를 보아야겠네요. 「지렁이를 심다」에서도 “부추김치 먹는 소리엔 아작아작 지렁이 씹히는 소리도 섞여 있다”고 표현하고 있어 체험의 구체성이 여실히 전해집니다. 이번 시집에서는 석가헌(夕佳軒)을 제재로 한 연작시도 보이는데, 앞으로 계속 쓰시는 건지요.
정진규 : 앞에서도 말했듯이 자연을 통한 구체적인 생명과의 만남이 소중해요. 또 다른 예를 들면 우리 집에 개를 두 마리 키우는데 아주 명민해요. 저 멀리서 내가 돌아오는 것을 어떻게 아는지 다 알아요. 그런데 내가 오면 안 짖지만 다른 사람이 오면 짖어요. 주인에게 개처럼 충성심을 가진 존재는 없는 것 같아요.
내가 집을 석가헌이라고 이름붙인 것은 늘그막에 아름답게 살아보려고 한 것이지요. 젊은 날 욕심내고 화내고 미워하고 의도적으로 살았던 것들을 지우고 자유롭게 살고자 해요. ‘석가헌’ 연작시를 쓰고 있는데 생활시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니까 힘들어요. 얼마나 쓸 수 있는지는 두고 봐야겠지요.
맹문재 : 선생님의 시세계에서는 아무래도 산문시 형식에 관심이 갑니다. 선생님께서는 제3시집인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의 표제작부터 산문시 형식을 도입한 것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서정적 억양이 있는 시성과 환상의 파도가 있는 산문성을 통합시키려고 했다고 시론 등에서 설명하신 적이 있는데 좀 더 말씀해주실까요.
정진규 :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전반기 무렵의 사회는 아주 혼란스러웠어요. 사회적으로도 문단적으로도 양분적 극점이 심했지요. 참여와 순수, 정치와 비정치, 집단과 개인 등으로 문인으로서의 양심과 정치적인 입장에서의 양심이 얼크러져 있었어요. 그때 나는 누구보다도 그 상황을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어요. 내가 <현대시> 동인활동을 하고 있을 때인데 동인들의 시세계가 개인 지향이어서 내면 탐구와 순수 지향을 나타내었지요. 그래서 어느 시점에서는 이게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쪽으로 기울어서는 삶의 총체성을 담을 수 없다고 생각한 거지요. 그래서 사회성에도 관심을 가졌지요. 집단에 기울면 예술적 미학이 약해지고, 개인에 기울어지면 삶의 양심이 약해지기에 아울러 갖기로 했지요. 그때는 통합 의지보다도 선택 의지가 강하던 시절이었어요. 이쪽이 진실이다, 이쪽이 문학적이다 등의 양분적 극점이 지배했지요. 그래서 통합의식을 모색했는데, 시의 형식이 자연스럽게 산문시로 바뀌었어요. 행과 연을 가르는 것보다 그대로 두는 것이 총체성을 담아내는데 유리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지요. 이처럼 나의 산문시는 삶의 총체성을 담겠다는 의지가 빚어낸 양식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러면서도 내 나름대로 서정적 억양을 지키려고, 리듬감을 잃지 않으려고 경계했고, 또 현대시로서 가져야 할 이미지군(群)이 흐르는 것도 강조했지요. 그리하여 행과 연을 갈라서 나타내는 시적인 리듬을 나타내기보다는 내 나름대로의 산문시 형태로 새로운 시 형식을 추구한 셈이지요.
그렇지만 나의 시도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본 분들도 있었지요. 김춘수 선생님이나 김종길 선생님 같은 분이 그랬지요. 나의 시 형태를 바꿔보지 않겠느냐고 권유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김춘수 선생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나의 산문시 형식에 대해 인정했어요. 나의 산문시 형태가 나름대로 성공했다고 하셨는데, 왜냐하면 내면적인 새로운 리듬이 이미지로 실체화되었다는 것이었어요. 그렇지만 김종길 선생님은 부정적이었어요. 그런데 이번에 나온 시집을 드렸더니 엽서를 보내셨는데, 한 가지 고백을 해야겠다고 쓰셨더라구. 나이가 드니까 시의 행과 연을 꼭 갈라야만 시의 양식이 된다는 것이 객쩍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셨어요. 꼭 그럴 필요는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내 산문시를 긍정한 셈이 아닐까 생각해요. 형태로서만이 아니라 시의 내면적 리듬을 성취해낸 점을 인정한 것이라고 여겨요.
맹문재 : 시의 내면적 리듬이란 개념은 이번의 『서정시학』에 발표한 다섯 편의 연작시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목부터 「율려집」이어서 리듬의 추구를 볼 수 있는데, 선생님의 산문시 형식과 연결해서 좀 더 말씀을 들을까요.
정진규 : 내 시의 내면적인 리듬을 동양사상과 맞춰보니까 그게 바로 율려사상이에요. 김지하 시인이 말한 생명사상이지요. 율려는 6율 6려로 되어 있는데, 율은 양의 리듬이고 려는 음의 리듬이어서 그 6율과 6려가 서로 교직될 때 실체가 빚어지지요. 김지하 시인은 율과 려를 관념적으로 얘기했지만, 나는 시의 리듬도 바로 그런 것이라고 보고 있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율과 려가 만나는 형태가 다 다르다는 점이지요. 음양이 만나는 것이 다 달라요. 어떤 때는 율이 올라가고 려가 아래로 내려가고, 어떤 때는 율이 내려가고 려가 위로 올라가지요. 양이 위로 올라가고 음이 내려가거나 그 반대가 되는 것인데, 사람의 형태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생명의 리듬 현상은 참으로 오묘한 것 같아요. 6개의 율이 있고 6개의 려가 있는데 그것이 만나는 형태가 다 달라요. 4계절의 형태로 만나니 또 다른 거지요. 음양의 오묘한 만남 형태가 다른 그것이 율려의 흐름이고 자연의 흐름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요즘 관련된 책들을 찾아서 읽고 있는데, 율려사상은 공자의 사상과 가까워요. 특히 『예기』에 많이 나와요. 거기에서는 음양에 대해 예로까지 승화시키고 있어요.
맹문재 : 저도 율려사상에 대해서 공부해야겠습니다. 다음으로는 선생님의 문단 활동 중에서 <현대시> 동인에 참가한 면이 관심이 갑니다. 연보에 따르면 1963년 참가해 12권의 동인지를 간행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황운헌, 허만하, 김영태, 이유경, 주문돈, 김규태, 김종해, 이승훈, 이수익, 박의상, 이건청, 오탁번, 마종하 등이 동인의 구성원이었습니다. 그런데 1967년 동인들과의 견해 차이로 말미암아 활동을 그만두셨다고 하는데, 그 상황을 듣고 싶네요.
정진규 : 원래 한국시인협회의 기관지로 『현대시』라는 게 있었지요. 그때 한국시인협회의 멤버는 조지훈, 박목월, 박남수, 유치환, 김광림 등으로부터 전봉건, 김종삼, 김수영 등에까지 이르렀어요. 그런데 시협기관지인 『현대시』가 2권을 내고 동인지 형태로 바뀌고 전봉건 시인이 주간을 맡고 있었어요.
그 당시 시인들은 광화문 근처의 <아리스다방>에 주로 모였지요. 지금은 사라졌지만 조선일보 뒷길에 있었어요. 거기에 저녁 때 나가면 시인들이 다 모여 있었어요. 그때는 시인들이 몇 명 안 되는 시절이어서 원고료를 받는 사람이 술사는 날이었지요. 그 중에서도 지금 김훈 소설가의 아버지인 김광주 선생이 유일하게 수입이 많았어요. 『동아일보』에 장풍소설(무협소설)을 연재하고 있었는데 인기가 대단했지요. 그래서 원고료가 나오는 날은 <아리스다방>이 북적북적했지요. (웃음) 그때 조지훈 선생님이 나를 데리고 나가 인사시켜 주시고 <현대시>에도 넣어주셨지요. 그때부터 전봉건 시인과도 인연이 되었구요. 김종삼, 김수영과도 자주 보았는데 김수영은 술 한번 산 적이 없을 정도로 아주 오만했어요. 그 당시 김수영의 시적 오만과 송욱의 지적 오만은 아주 유명했지요.
내가 동인에 들어간 뒤로 젊은 시인들이 하나둘 들기 시작했지요. 이유경, 주문돈, 이수익 등으로 해서 이건청, 오탁번까지 들어갔지요. 그래서 선배들이 물러나고 젊은 시인들이 주류가 되면서 동인활동이 지속되었어요. 동인들이 무슨 에콜이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고 해서 내면 탐구와 존재 추구를 토의에 의해 마련했지요. 에콜 형성을 위한 세미나도 열고 했는데, 세미나고 뭐고 없던 시절이었으니 문단의 사건인 셈이지요. 그런데 동인지를 10여 집 간행하고 보니까 개인과 집단 간의 문제가 생겨요. 내면 추구가 반쪽의 시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든 거지요. 그래서 그 당시 조태일 시인이 하던 『시인』지에 전환의 시론에 해당하는 글을 썼어요. 동인들이 추구한 시의 애매함과 참여시들이 추구한 정직함에 대해서 썼는데, 쓰다보니까 정직함에 더 관점이 기울었어요.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양쪽을 다 아우르려고 했는데 그렇게 된 거지요. 어쨌든 그 글이 동인들에게 오해를 낳았고, 거부감도 보이고 해서 내가 동인으로부터 나온 거지요.
맹문재 : 그러다가 28년이 지난 1995년 동인들과 재결합을 했는데 그 동기는 무엇이었는지요?
정진규 :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난 거지요. 동인 활동을 했던 시인들의 관점이 확대 되었고, 시대적인 흐름도 많이 바뀌었고, 서로 시점의 일치도 보았고, 그리고 나이가 들다보니 일상적인 삶의 그리움도 있었지요. 자식들 결혼식에 다니는 등 인간적으로도 친해졌구요. 그래서 그 만남을 기념으로 해서 ‘현대시 동인상’을 만든 거지요. 그동안 잘 주어왔는데,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몇 해 중단되고 있어요. 아쉬워하는 사람이 많아 다시 상을 부활시키자는 얘기가 나오고 있어요. 빠르면 금년, 아니면 몇 해 안에 이루어질 것 같네요. 시단의 선배들이 주는 유일한 상이라지요.
맹문재 : 동인의 구성원 중에서 김영태, 마종하, 황운헌 선생님은 타계하셨습니다. 저는 특히 황운헌 선생님께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시작』을 창간해 시집 시리즈를 기획할 때 황운헌 선생님 시집을 출간하기로 결정했는데, 출판사의 경영 등 이유로 출간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출판사를 그만두는 바람에 황 선생님의 시집이 그만 제 손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저의 의사와는 다르게 시집을 출간하지 못하게 되어 죄송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황운헌 선생님을 독자들에게 소개해주시길 부탁드릴까요.
정진규 : 박희진, 성찬경, 허만하, 신경림 등 『문학예술』 출신 또래의 시인들 중 한 분이지요. 중남미적인 감각과 열도 등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어요. 브라질로 이민 가서 타계했는데, 『대한일보』 문학담당 기자로 있다가 연애하는 여자와 도망치는 형식으로 이민 갔으니 시인답지요. 한동안 옷장사를 해서 잘살았고, 브라질에서 문학지도 간행했어요.『현대시학』에 특집도 여러 번 했는데, 일반적으로는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시집도 한두 권 있고, 연세대 출신인데, 이민 가는 바람에 묻히게 되었어요. 평가되어야 할 시인 중 한 분이지요. 그 분의 원고 심부름을 내가 했는데, 지금도 가지고 있어요.
맹문재 : 제가 시작한 일이니까 조만간 마무리를 짓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으로는 황운헌 선생님 외에도 김영태 선생님과 마종하 선생님이 타계하셨는데 역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정진규 : 김영태 시인은 <현대시> 동인 중에서 인접예술에 대한 감각이 높았지요. 홍대 미술과 출신답게 미술에 조예가 깊었고 음악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었어요. 무용에도 조예가 깊어 무용비평의 일인자였지요. 대부분의 시인들은 인접예술에 대해 교양차원의 조예를 갖고 있었다면 김영태 시인은 전문가 수준이었지요. 그런데 옷 하나 음식 하나에도 까다로운 성격이었어요.
마종하 시인도 성격이 까다로웠어요. 타계한 다음에 알아서 『현대시학』에 특집을 마련했는데, 오탁번 시인과 원주고등학교 동기동창이었지요. 마포에서 중학교 선생을 했어요. 폐쇄적인 성격이 김영태 시인과 마찬가지로 병도 불러온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시도 괜찮았고 말년까지 썼는데 아쉬움이 있어요.
맹문재 : 선생님의 삶에서는 붓글씨 활동도 빼놓을 수 없지요. 소위 ‘경산체’라고 알려져 있고 전시회도 가지셨는데 어떤 계기로 작품 활동을 하게 되었는지요? 그리고 시를 쓰는 데 어떤 점에서 영향관계가 있는지요?
정진규 : 우선 시와의 상관관계부터 말하면 나는 시가 안 써질 때 대개 붓글씨를 써요. 붓글씨의 예술성이라는 것은 소위 운필이라고 하는데, 그게 마음과 직결되어있어요. 마음을 잘 비워내서 평상심을 유지했을 때는 붓이 뜻하는 대로 나가지만 그렇지 않은 날은 안 써져요. 쓰면서 극복되는 수도 있지만 그 전에 마음을 다스려야 해요. 시에도 시인만이 초월해서 들어갈 수 있는 특권으로의 어떤 공간이 있듯이 붓글씨에도 그게 있지요. 그것을 비백(飛白)이라고 하는데, 이미지의 공간이지요. 현대시 이론으로 말하면 심상의 공간이라고 할까. 그런데 내가 쓰는 글씨는 어떤 서법에 의한 것이 아니에요. 어느 선생에게 배운 게 아니라 혼자 쓰다보니까 나름대로 개성이 생긴 거지요.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서예가들에게는 개성으로 보이는가 봐. 특히 스님들이 좋아해요. 제멋대로의 글씨니까 재미있다고들 해요. 제멋대로이지만 오래 쓰다보니까 격조가 생기나 봐요. 백담사의 오현 스님이 내 글씨를 좋아해요.
글씨를 쓰게 된 계기는 별다른 것이 없고 김구용 선생님 댁에 다니다가 하게 되었지요. 내가 그 분한테 많은 걸 배웠어요. 특히 노자를 그 분한테 배웠지요. 그 분의 취미가 글씨 쓰시는 것이었는데 그게 멋있었어요. 글씨를 써서 연하장으로도 보내고 시집 받은 답장으로도 보내고 하셨는데, 그 분의 한글이 아주 재미있었지요. 한동안 시집 표지는 그 분에게 받는 거였어요. 옆에서 그걸 보다 보니까 나도 한번 해보자 해서 시작한 거지요. 그러므로 김구용 선생님한테 배웠다고 봐야겠지요. 내가 중학교 선생일 때 서예의 대가인 근원 김양동 선생님께서 같은 동료로 근무했어요. 그 분이 나의 글씨를 보고 제대로 가르쳐주려고 손을 대었는데 안 되더라구. 그래 마음대로 하라고 하셨지요. 그래서 써온 게 꽤 많아요. 붓글씨를 가지고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 보자고 한 것이 먹춤이지요. 긴 종이에다가 춤을 추면서 글씨를 쓰다보면 어떤 초월적인 형체가 나와요. 나도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 나오지요. 먹춤 공연을 한 네 차례 정도 한 것 같은데, 마지막 한 것이 고려대에서 한 것이지요.
맹문재 : 조지훈 선생님의 시비 제막식에서 한 것이었지요. 이왕에 꺼내셨으니 조지훈 선생님의 면모에 대해서 들려주시지요.
정진규 : 구체적인 업적이 있다고 해서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생기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존경심은 저절로 자연스럽게 생기는 거지요. 그 분은 수업을 열심히 한 적도 없고, 나의 시를 구체적으로 첨삭해주신 적도 없고, 그냥 어쩌다 한마디 해주셨을 뿐이지요. 그렇지만 무슨 무슨 책을 읽으라고 해주신 것이 정확했고 큰 도움이 되었어요. 또 내가 한학의 집안에서 태어나서 그런지 그 분이 가지고 계시던 책들이 와 닿았어요. 많은 제자들이 다 그 분을 스승으로 여기겠지만, 나는 특히 내가 수제자라고 강조했지요. 그렇지만 건강치 못하셨어요. 폐가 좋지 않아 젊었을 때부터 쿨럭거렸는데, 나는 그 기침하는 모습까지 닮으려고 했지요. 선생님께서 건강이 좋지 않은 것은 다 술에서 왔겠지요. 일제 때 월장사에 숨어 외전강사 노릇을 했지요. 신식학문을 중들에게 강의하는 일이었는데, 그게 끝나면 그저 술이었어요. 신언서판이라고 그 분은 외모가 좋았어요. 서관에서 점심 드시려고 정문으로 내려가면 잔디밭에 앉아 있던 학생들이 모두 일어날 정도로 풍모가 있으셨어요. 물론 4․19를 전후해서 그 분의 지조론 같은 것이 학생들로부터 존경심을 갖도록 했지요.
맹문재 : 내친김에 박재삼 선생님에 대해서도 한 말씀 부탁드려볼까요. 「지워진 걸 지우지는 못했다」를 보니까 박재삼 선생님의 산소에 대해 안타까워하시고 계시던데요.
정진규 : 참 안타까운 일인데 다행히 문학관이 삼천포에 지어졌어요. 지금 자료 정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삼천포 사람들 중 나서는 사람이 없어 산소는 연고가 전혀 없는데 모셔져 있지요. 그게 늘 죄책감으로 느껴져요. 그곳의 정삼조 시인이 있어 문학관을 세우는 데도 노력했고 산소 문제에도 힘쓸 거야. 박재삼 시인은 서민적인 사람이었지요. 술 잘 마시고 담배 잘 피우고. 가난하게 살았으니 세련된 멋은 없었지만, 서정의 깊이는 놀라웠어요. 서정성은 타고난 감각인 것 같아요. 시단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준 분이셨지요.
맹문재 : 잘 들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선생님의 시세계에서 『몸시』『알시』에 대해서 여쭙겠습니다. 그 작품들이 선생님의 시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크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연작시를 어떤 계기로 쓰시게 되었는지요? 그리고 “시간 속의 우리 존재와 영원 속의 우리 존재를 함께 지니고 있는 실체가 몸”이고, “몸이 추구하는 우주적 완결성을 알”로 개념화하셨는데 좀 더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정진규 : 육신과 정신, 시간 속의 존재와 영원 속의 존재, 그리고 개인과 집단과의 만남의 실체를 나는 몸이라고 봐요. 시가 바로 그 몸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몸시’가 나왔지요. 그리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연시를 썼지요. ‘알시’는 보다 원형적인 세계로 접근해본 것이지요. 알은 그 자체가 완성이고 원형이지요. 봉합된 자리조차 없는 절묘한 신의 솜씨로 하나의 소우주이지요. 그 절대적인 생명의 실체를 사유해본 것이지요.
맹문재 : 선생님의 산문시에는 마침표가 없는데, 어떤 이유가 있는지요?
정진규 : 이제는 일반적으로 시에 마침표를 안 쓰지요. 그것은 내가 산문시를 쓰기 시작한 것과 거의 일치해요. 산문 형태로 시를 쓰면 답답해 보이는데, 거기에 마침표까지 쓰면 더 꽉 막힌 느낌이 들지요. 그래서 리듬의 흐름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마침표를 쓰지 않은 거지요. 그래서 하나의 형식이 되었는데, 우리 시에서 마침표가 없어진 역사가 내가 산문시를 쓰기 시작한 역사와 거의 비슷해요. 1970년대부터이지요.
맹문재 : 그동안 시를 열심히 쓰셨고 문단의 흐름도 중심에서 체험한 선생님으로서 여러 가지 감회가 들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날의 젊은 시인들에게 해주실 말씀을 부탁드려 볼까요.
정진규 : 젊은 시인들의 작품 속에는 부챗살처럼 갈래가 너무 많아요. 소재가 너무 다양해요. 그래서 좀 절제의 미학을 터득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아무리 교항악단이라고 해도 한 지휘자의 지휘봉 끝에 집약되는 순간 뭐가 나오는 것이 아닐까요. 그것이 절제의 정점이겠지요. 젊은 시인들의 시는 화려한 반면 어지러워요. 다양하고 환상성이 있고 입체성도 있지만 집약된 질서가 없어요.
그리고 선배로서 젊은 시인들에게 부끄러운 얘기를 한마디 해야겠네요. 선배 시인들이 문학의 내적인 세계는 나름대로 추구해왔는지는 모르지만 문학 외적인 것, 소위 문단적인 문제들에 있어서는 젊은 시인들에게 온당치 못한 모습을 보였겠지요. 예를 들면 문학상 심사 등에서 정확하지 못하고 편협한 면을 내보이지 않았나 싶어요. 그래서 열심히 하는 시인이 오히려 상처를 받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아요. 앞으로 선배 시인들이 자정적인 모습을 보여 후진들이 자기가 한 만큼 평가를 받고 열고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곧 큰 시를 하는 계기이도 하지요. 그런 것을 선배 시인들이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맹문재 : 앞으로의 활동계획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정진규 :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동시집이 나오게 되겠지요. 내가 고희 때 네 권의 시집을 더 낸다고 큰소리를 쳤잖아요. 사실 그때 과연 낼 수 있을까 하고 겁이 났었는데, 2년 만에 낸 것을 보면 앞으로 4권을 더 낼 것 같아요. 그만큼 더욱 열심히 써야겠지요. 그리고 지금까지 선집은 냈지만 전집을 내지 않았는데, 전집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맹문재 : 여러 가지 말씀 잘 들었습니다. 내내 건강하시고 좋은 시도 많이 보여주세요. 다음 시집을 또 기다리겠습니다.
맹문재
시인, 안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