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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마가시 교육위원회 교육장인 다나카 히로시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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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김철관 |
| 지난 6월 22일 오전 8시 아침 식사를 끝냈다. 스이젠지호텔 정원에 잠깐 나와 오늘의 일정을 확인했다. 한국을 떠난 지 3일째가 됐다.
지난 2001년 6월에도 역사교과서문제로 구마모토현을 방문했던 이예선 선생이 호텔 로비에서 일정을 간략히 설명했다. 8시 30분, 현북팀과 현남팀은 각자 맡은 각 시정촌 교육위원회로 향했다. 현남팀은 동포2세 주영덕씨가 통역을 맡았다. 내가 간 곳은 현북팀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현남팀의 일정을 잘 파악하지 못했다. 현북팀 위주로 글을 전개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날 현북팀이 첫 번째로 방문한 곳은 야마가시였다. 정각 9시 30분이었다. 야마가시 교육위원회 교육장인 다나카 히로시씨와 수석심의원인 야소시나 야스히로씨가 2층 교육위원회 회의실에서 대표단을 맞았다. 홍순승 부단장의 인사말이 이어졌다.
“후소샤 역사교과서가 한일관계를 왜곡해 우리 국민의 감정을 건드리고 있다. 후소샤 역사교과서를 채택해 배우면 일본 청소년들이 한국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각인시킬 수 있다. 한일 양국이 동북아시대 주역으로 함께 가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역사를 청소년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년 전처럼 현명한 선택을 바란다.”
후소샤 역사교과서를 반대하는 요청서 다나카 히로시 교육장에게 전달했다. 이 자리에서 다나카 히로시 교육장은 “한국과 일본이 교류를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서도 역사교과서가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지 않도록 할 것”이라며 “의견을 수렴해 좋은 교과서를 선택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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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마가시를 방문한 대표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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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김철관 |
| 이어 길준용 선생은 “역사는 과거를 가르치는 것이지만 미래의 방향을 설정하는데 더 큰 의미가 있다”며 “후소샤 역사교과서가 검정에 통과하자 우리 국민들이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고 밝혔다.
“한일 양국은 앞으로 아이들을 어떤 방향으로 키울 것인가를 생각해야 된다. 한일 양국의 수호, 일본 정책의 미래, 평화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바로 역사교과서를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이런 문제들이 쉽게 풀릴 수 있다. 후소샤 같은 왜곡 교과서를 선택하지 말아 달라.”
길 선생의 얘기가 끝나자 다나카 히로시 교육장은 “이전에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올바른 교과서를 선택하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과 똑같이 후로사와 지요카츠(84)씨는 한중일 학자가 만든 역사교과서 ‘미래를 여는 역사’ 책을 전달했다. 민단 최상철 사무국장과 일본그리스도교 미아가와 즈네노리 목사도 각각 요청서를 전달했다. 청사 1층 고민관(고민깡)에 교과서가 전시돼 있었다. 다나카 히로시 교육장과 야소시나 야스히로 수석심의원은 교육위원회 청사 정문까지 나와 대표단을 친절히 배웅해 눈길을 끌었다.
야마가시 교육위원회를 나와 타마나시 교육위원회로 출발했다. 이날 미야가와 즈네노리 목사의 승용차에 황석균(논산 대건고등학교) 선생과 함께 동승했다. 어떤 말을 물어봐도 황 선생은 항상 미소에 찬 얼굴로 친절한 통역을 했줬다. 미아가와 즈네노리 목사에게 한국에 와 봤냐고 물었더니 가보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그는 5년 전부터 이곳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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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마가시 시민의 휴식공간인 아이온샌(발온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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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김철관 |
| 야마가시 교육위원회를 바로 나와 야마가시 시내로 접근하려고 하는데 우리 나라 정자 같이 지은 집에 ‘아이온샌’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시민을 위한 ‘발온천’이었다. 이곳에서는 야마가시 시민들이 발을 담가 족욕을 하면서 물을 마시는 곳이었다. 일종의 휴식처였다. 마치 대표단 일행들은 목이 말라 잠시 들려 목을 적셨다.
온수가 부드럽고 맛이 끝내 줬다. 이곳에서는 발을 담그고 걸어다닐 수 있다고 했다. 곧바로 미아가와 목사의 승용차를 타고 타마나시로 출발했다. 가는 길에 유난히 대나무가 많이 보였다. 와리바시(일본 젓가락을 만드는 재료 때문이지) 생각이 났다. 우리 시골의 모습과 비슷한 풍경이 이어졌다. 벼가 자라고 있었고 산에는 녹음이 우거져 있었다. 들에는 풀이 자라고 있었다.
미아가와 목사는 일본 크리스트교단 소속으로 구마모토시에서 약 10km 떨어진 무사시 가오까 마을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신도수는 10명 정도. 그리스도교와 가톨릭을 합쳐 신도가 1%에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일본 크리스트교단이 후소샤 교과서를 검토해 지적한 내용을 요청서로 만들어 전달했다고 전했다. 그는 평화헌법을 지키는 평화헌법을 위한 모임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평화헌법이다. 최근 개정 움직임이 있어 활동하고 있다. 사람을 죽이는 전쟁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죄악이다.”
그는 일본 크리스트교단 역사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많은 종파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정부에서 종파 단일화를 요구했고, 당시 각 종파도 종파가 합해야 된다는 목소리가 있었다. 정부의 명령과 종파의 목소리가 합치돼 크리스트교단이 됐다. 전쟁 끝나고 약간 분파됐지만 가장 큰 교단이 일본 크리스트교단이다. 하지만 교단이라고 해봤자 한국에 가장 큰 교회 신도수 정도 밖에 안 된다.”
교류를 위해 일본 크리스토교단에서 선교사를 파견돼 한국에서도 활동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의 여동생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미아가와 목사는 교토출신으로 5년전 오사카 간사이 효고현에 있는 ‘칸세이 (간사이) 가구임 대학’ 신학부를 졸업했다.
“일본은 한국과 같이 기독교단체가 운영하는 신학대학은 없다. 일반 대학에서 연계해 배우고 있다. 하지만 카톨릭에서 운영하는 신학대학은 있다.”
그는 후소샤 역사왜곡 교과서를 알고 난 뒤, 불교스님들을 찾아가 역사왜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일본 불교 스님들의 활동도 소개 했다.
“불교스님들도 역사교과서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불교계 스님들이 전쟁 방지 평화 지키기 운동도 한 차원 높은 단계에서 앞장서고 있다. 스님들이 교회보다 사회를 바로 잡으려는 의식이 높다. 현재 사회윤리에 교회윤리가 아직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정각 11시 타마나시 2층 교육위원회 회의실에 도착했다. 교육국장 등 관계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리 요시오미 교육장이 없었다. 한참 교육위원회 관계자들과 대화를 하는 도중 “미안하다”며 모리 요미오미 교육장이 나타났다. 홍순승 부단장이 인사말을 했고 요청서도 전달했다. 길준용 선생도 한 마디 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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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마나시 모리 요시오미 교육장이 홍순승 부단장과 환담을 하며 웃고 잇다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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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김철관 |
| 곧바로 모리 교육장은 인사말이 이어졌다.
“늦게 도착해 죄송하다. 역사교과서 공정한 자세로 심사숙고해 선택하겠다.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결정하겠다.”
후소샤 역사교과서 채택을 반대하는 후로사와 지요카츠(84)씨는 한중일 학자가 만든 역사교과서 ‘미래를 여는 역사’ 책을 모리 교육장에게 전달했다. 민단 최상철 사무국장과 일본그리스도교 미아가와 즈네노리 목사도 각각 요청서를 모리 교육장에게 전달했다.
다음 도착지인 아리오시 교육위원회로 출발했다. 미아가와 목사와의 대화는 계속됐다. 그는 같은 크리스트교단 소속 야외즈(55) 목사가 여자신도를 성추행해 그를 보호하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물론 현재 법정까지 비화됐다고. 현재 전국적인 이슈가 돼버렸다. 이 사건은 일본 내에서도 여러 번 매스컴을 탔다고 전했다.
“성 피해를 당한 여성 입장에서 목사의 도덕성을 회복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그런 사람은 목사활동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하는데 교단에서 그만한 힘을 쓰지 못한다. 그는 반성하기는커녕 나를 헐뜯고 있다. 굉장히 많은 여성신도들이 피해를 당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리오시 근처 산기슭에 있는 금강사에 잠시 들렀다. 일제시대 탄광, 군대징용으로 목숨을 잃은 조상들의 위령탑에 참배하기 위해서였다. 금강사와 함께 절 왼편에 두 개의 탑이 우뚝 서 있었다. 하나는 조선인 강제징용 위령탑이요, 또 하나는 중국인 강제징용 위령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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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인 징용위령탑인 불이지탑(좌)과 중국인 징용 위령탑(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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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김철관 |
| 중국인 위령탑은 ‘중국인’이라는 글씨가 선뜻 보였다. 조선인 위령탑은 不二之塔(불이지탑)라고 써 있었다. 이곳은 1년에 두 번, 4월과 추석에 추모제를 올리고 있다. 이 탑은 금강사 주지와 이곳 이라오시 지역민, 재일동포, 한국공관 등이 참여해 세운 징용한국인 위령탑으로 지난 2001년 30주년 행사를 가질 때 아라오 시장과 한국 스님들도 이곳에 많이 왔다고 관계자는 전했다.
위령탑을 세울 때 이름때문에 민단과 조총련에서 ‘한국인’과 ‘조선인’으로 하자고 싸우는 바람에 화해를 시키는 의미에서 당시 금강사 주지가 불이지탑이라고 새겼다고 말했다.
추모가 끝나고 미아가와 목사 승용차에 통역을 한 황석균 선생과 신열호(온양여자중학교) 선생이 함께 탔다. 갑자기 앞차가 없어졌다. 앞차를 운전한 최상철 민단 사무국장이 차를 빨리 몬 바람에 놓쳐버린 것이었다. 오전 12시 정각이었다. 우리는 한참 동안 길을 헤맸다. 다행히 오토바이를 정지해 놓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한 아저씨를 만나 겨우 아라오시로 가는 길을 안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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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인 장용 위령탑인 불이지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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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김철관 |
| 미아가와 목사는 차분한 성격으로 차를 천천히 몰았다. 하지만 일행을 잃었고 아라오시 교육위원회 약속시간이 다가오자 급하게 운전을 했다. 경찰의 교통 단속에 걸린 적이 있느냐고 묻자 “그런 적이 있다”고 그는 말했다.
“구마모토현 경찰들은 정확하기로 소문났다. 교통법규를 위반해 적발됐는데 목사라고 했다. 그리고 약속이 있으니까 경찰서로 나가 조사를 받겠다고 했더니 그냥 보내줬다. 그 이후 연락이 없었다. 목사 덕을 톡톡히 봤다.”
12시 35분 아라오시 교육위원회에 도착했다. 먼저 간 일행들도 도착해 있었다. 마하다 준지 아라오시장과 사키사카 스미아키 교육장, 야마다 데이지 의회의장이 함께 했다. 이 자리에서 홍순승 부단장은 “한일간 올바른 역사인식이 중요하다”며 “존경하는 아라오시장님과 교육장님이 후소샤 교과서를 채택하지 말 것을 협조해 달라”고 강조했다. 시장에게 요청서를 전달했다.
마하다 준지 아라오시장은 “현재 이 문제를 가지고 한국에서 양국 정상회담이 열리고 있다. 일본 한국 중국이 사이좋게 지내기를 희망한다. 의원으로 있을 때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다”며 “교육위원회 소관이지만 개인적으로 그런 중요한 문제가 진지하게 검토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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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오시 마하다 준지 아라오(앞)과 사키사카 스미아키 교육장(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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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김철관 |
| 이어 사키사카 스미아키 교육장은 “4년 전에도 한국 방문단이 왔다”며 “교과서 문제는 개인적으로 입장 밝히기 어렵지만 방문단의 의견이 보탬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야마다 데이지 의회 의장은 “자세한 내용은 시장과 교육장에게 들었을 것”이라며 “아라오시 방문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이날 후르사와 지요카츠씨는 사키사카 교육장에게 한중일 역사학자들이 만든 ‘미래를 여는 역사’ 교과서를 전달했다. 미와가와 목사와 민단을 대표한 최 사무국장은 각각 요청서를 샤키사카 교육장에게 전달했다.
오후 1시 아라오시를 떠나 구마모토시를 향했다. 배고 서서히 고파왔다. 한참 가는 길에 식당이 보였다. 그곳에 들렀다. 1시 30분이었다. 일행은 모두 간단한 식사를 했다. 2시 30분 점심을 끝내고 곧바로 구마모토시로 향했다.
다시 마와가아 즈네노리(43) 목사 차에 탔다. 그는 묻는 말에 시종일관 차분하게 답변하는 등 여유를 보였다. 성폭력 여성피해자의 얘기가 다시 시작됐다.
“여성을 희롱한 야외즈 목사는 나쁜 목사로 유명하다. 교회에서 고용했던 25살 된 자녀를 성희롱했다. 굉장히 많은 숫자가 당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밝혀지지 않는 것이 너무 많다. 그는 국제교류 선전활동을 잘해 봉사활동가를 모집하는 등 수단도 좋다. 기부금도 많이 받았는데 어디에 쓰였는지 아무도 모른다. 목사 성희롱문제를 5개 신문과 4개 방송사에서 보도했다. 지금 저와 재판이 진행 중에 있다.”
그는 10명의 신도로서 어떻게 교회가 유지될 수 있느냐고 묻자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아르바이트를 해 간신히 교회 유지비를 감당하고 있었다.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려주는 아르바이트를 해 교회재정을 보탠다. 신도가 많지 않기 때문에 어려움 점도 많다. 또 아내와 함께 2살, 5살, 6살 자녀를 두고 있기 때문에 생존권을 위해서도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성폭력 피해자 대변을 하기위해 법정출두, 평화운동 등 여러 일을 해야 하는데 교회 내에는 도와줄 사람이 없다. 그래서 혼자서 처리하고 있다.”
정의로운 목회자였다. 3시 45분 구마모토시 교육위원회에 도착했다. 히로시 나카야마 교육장과 조시게 유끼 교육차장을 만났다. 홍순승 부단장은 “후소샤 교과서를 채택하면 일본청소년들에게 악영향 미칠 것”이라며 “후소샤는 5세기경 우리 나라 남부지방을 지배했다고 적시했고 근대에 와서는 일본의 한국 병합을 일본 방위를 위한 필요한 조치였다고 표현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일본제국주의 36년간 이루 말할 수 없는 한민족의 고통을 줬는데도 후소샤 교과서는 식민지 통치가 한국 근대화에 영향을 줬다고 미화했다”며 “후소샤 교과서를 일본 청소년들이 배울 경우, 한국에 대한 나쁜 이미지와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하면서 히로시 교육장에게 요청서를 전달했다.
히로시 나카야마 교육장은 심사숙고해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구마모토에 잘 왔다. 요청문도 잘 이해했다. 제 위치가 위치인 만큼 중립을 견지해야 한다. 나도 평화와 한국과 우호 교류 바라고 있다. 교과서 채택 중립적인 위치에서 심사숙고할 것이다. 교과서 선정위원회가 있어 그곳에서 어떤 교재를 선택하면 학생들에게 이익이 되는지를 잘 고려할 것이다.”
이어 길준용 선생은 “역사는 미래의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 다룬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일선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또 충남역사교사모임 대표를 맡고 있다. 구마모토현은 3번째다. 10년 전 아소산도 구경했다. 지난 1월에는 20명이 구마모토 교원단체를 방문해 역사문제에 대해 진진하게 논의했다. 후소샤 교과서가 검정에 통과한 것을 두고 한국 국민들이 우려하고 있다. 역사는 과거를 대상으로 하지만 미래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 다룬 것이다. 후소샤 역사 교과서 우려한 점은 요청서 등에서 담고 있기 때문에 재차 말하지 않겠다. 한일 우호적 장래, 한일 학생의 미래, 평화를 위해 좋은 책을 선택해 주길 기대한다.”
대표단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주로 통역했던 황석균 선생도 한 마디 했다.
“일본에도 한류열풍이 불고 있다. 나는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는 선생이다. 아이들과 수업시간에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란 일본 영화를 감상했다. 영화 라스트 신에 일본 히라이켄 일본 가수가 부른 ‘눈을 감고서’라는 노래가 나온다. 그 노래를 학생들과 함께 배우고 불렀다. 이렇게 일본 문화를 우리학생들이 접하고 이해하려고 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작지만 붐을 일으키고 있다. 후소샤 교과서를 채택하면 일본문화를 이해하려는 학생들에게 상처로 남을 것이다. 일본에 가면 후소샤 교과서를 채택하지 않도록 약속을 받아가지고 오겠다고 학생들에게 약속했다. 절대 후소샤 교과서를 채택하지 말아 달라.”
이 발언이 끝나자 히로시 교육장과 조시게 교육차장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갑자기 분위기가 화기애애해 졌다.
현북팀은 주로 통역을 최상철 민단 사무국장과 이병례(예산여고, 충남일본어교육연구회원 선생, 황석균(논산대건고, 충남일본어교육연구회 회원 선생이 맡았다.
또 다른 현북팀 대표단 일행 중 김정수(공주고, 충남역사교사모임 회원) 선생과 강동환(천안 오성중, 충남역사교육모임) 선생은 기록으로 사진을 남기기 위해 틈나는 대로 촬영에 열중했다. 이들은 사진 솜씨도 프로급이었다. 신열호(온양 여자중) 선생은 방문단 일행의 일체의 기록들을 영상으로 생생히 담았다. 이상길(천안 월봉고, 충남역사교육연구회 회원) 선생은 로밍폰을 통해 이곳 사항을 한국에서 소식을 기다리는 단체들에게 알리는 역할로 분주했다.
구마모토시 교육위원회를 끝으로 모든 교육위원회 방문 일정이 끝났다. 구마모토시 교육위원회를 나오니 오후 4시 20분이었다. 이후 5시 30분에 스이젠지호텔에서 방문단 기자회견이 계획돼 있었다. 구마모토시 청사 부근에 장소를 정해 5시까지 모이라고 약속을 정하고 40분간 구마모토 시내 중심가를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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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일 오후 구마모토시 시모토리에서 미와자와 목사와 황석균 선생이 아쉬운 작별을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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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김철관 |
| 미아가와 목사와 시모토리에서 작별을 고해야 했다. 황 선생과 함께 너무 아쉬워했다. 옷과 스포츠, 액세사리, 음식점 등이 일직선으로 돼 있는 구마모토 쇼핑거리인 카미토리(상통로)와 시모토리(하통로)를 구경했다. 카미토리와 시모토리는 각각 약 1km 걸쳐 일직선으로 뻗어 있었다. 6시 정각 약속 장소에 나타났는데 일행이 아무도 없었다.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곧바로 서점에 들러 지도를 샀다. 스이젠지호텔 위치를 알기 위해서다. 당초 약속시간을 5시를 6시로 착각하는 우를 범했다.
교복을 입고 옆을 지나고 있는 한 학생에게 지도를 펴고 몸짓 손짓을 다해가면서 이곳 위치를 물어봤다. 일본어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곳 시모토리에서 전차로 다섯 정류장을 가면 스이젠지호텔과 가까운 역인 코쿠브역이라고 지도에 표시했다. 구마모토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아키나리 후나코시라는 학생이었다. 정말 고마웠다.
한참 학생과 바디 렌기지로 대화를 하고 있는데 첫날 기자회견에서 참여 했던 마스씨마 카쿠기 여사와 눈이 마주쳤다. 1시간 전 바로 시모토리에서 황석균 선생과 함께 만나 반가운 인사를 나눈 뒤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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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스씨마 카쿠키 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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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김철관 |
| 길 잃은 사람이 구세주를 만났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스이젠지호텔로 전화를 걸어 일행이 왔는지를 확인했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그와 함께 전차(덴샤)를 탔다. 일본 전차는 난생 처음 타 봤다. 길을 잃지 않았다면 타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길을 잃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다. 잠시라도 일본 아케이트를 쇼핑했고 전차를 타 봤기 때문이다. 코쿠브역에 도착했다. 함께 마스씨마 카쿠키 여사와 대화를 나누면서 걸어서 스이젠지호텔로 향했다. 호텔에 도착하자 2층 연회장에서 기자회견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마스씨마 카쿠키 여사는 영어도 제법 잘했다. 그는 일본의 중국 역사 왜곡과 관련한 봉사활동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 역사왜곡에 대해서도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그는 7월 3일 중국을 간다고 밝혔다. 그는 일본 언론에 대해 심한 불쾌감을 표시했다.
“진실한 활동과 서로를 인정하는 교류를 지향하는 언론이 진정한 저널리스트라고 말했다. 일본의 일부 언론을 두고 잘못된 역사관에 대해 침묵하는가 하면 노골적으로 군국주의를 부추기고 있다면서 이런 언론은 폭력적인 집단과 마찬가지다.”
지난 20일 저녁 첫 기자회견을 했을 때 우리 대표단 한 관계자가 ‘종군위안부’라는 말을 썼다. 그래서 나는 종군위안부라는 말은 ‘스스로 참여해 위안을 해 준 사람’이라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에 전쟁 성폭력피해자라고 정정해 써달라고 취재 온 일본기자들에게 얘기한 적이 있다. 마스씨마 카쿠키 여사가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종군위안부라는 말의 본뜻을 알게 됐다. 성폭력피해자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정말 저널리스트다운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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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월22일 오후5시 30분 스이젠지호텔 2층 연회장에서 열린 대표단 기자회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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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김철관 |
| 5시 30분부터 진행된 기자회견은 지금까지 방문했던 느낌과 후소샤 교과서 불채택을 구마모토현민들에게 알리는 일종의 메시지인 셈이었다. 모처럼 현북팀과 현남팀이 함께 만나 진행했다. 기자회견에는 송인준 단장, 홍순승부단장, 김화자 부단장, 길준용 충남역사연구모임 회장, 동포2세 주영덕씨 등이 단상에 앉아 있었다.
이들은 단상에서 나름대로 소회를 피력했다. 기자회견이 끝나고 호텔1층 식당에서 참석한 일본 시민사회단체 그리고 방문단 일행이 함께 식사를 하면서 담소를 나눴다. 우리 일행과 함께 했던 다나카, 나카야마, 교포2세 주영덕 선생, 최상철 민단 사무국장 등과 한국에서 가져온 소주를 마셨다.
이순(耳順)을 지난 마스씨마 카쿠키 여사도 소주를 좋아했다. 남아 있는 팩 소주를 하나 챙겨줬더니 너무 고마워했다. 저녁식사가 모두 끝나고 마지막 밤을 기리기 위해 방에 마련된 일본 전통의상인 유카타를, 함께 방을 사용한 김기연 <당진시대> 기자와 입고 서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