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생. '이디 콘트라이브'의 창립자로 정보통신계에서는 일본에서 가장 손꼽히는 벤처 사업가다.
일본경제신문이 선정한 '벤처 오브 더 이어(Venture of the year)" 하이테크 부문 수상, 사단법인 뉴비지니스 협의회 '영 안트러프래너(Young Entrepreneur)" 대상 수상 등 각종 하이테크 상을 받았다.
정보통신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정부의 각종 사업단의 위원 으로 활동하고 있다.
당장 그만두고 싶었지만 빚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몸이 바짝바짝 말라 갔다.
그는 어떻게든 남에게 폐를 끼치지는 않기로 했다 .생명보험에 가입했기 때문에 죽기만 하면 보상금이 나온다.
계산해보니 보상금의 액수가 얼추 빛의 규모와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자살을 하기로 했다.
고속도로의 가드레일에 어느 정도 스피드로 부딪치면 죽을 수 있는가를 계산하였다.
시속 160km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결단의 날을 앞두고, 그는 마지막으로 길고 달게 잠을 잤다. 꿈에서 여러 사람을 만났다.
지금까지 사업을 하면서 가와이를 도와준 사람들이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네가 죽는다고 책임이 끝나는 줄 아느냐? 빚만 청산하면 신세를 다 갚는 것인 줄 아느냐?"
잠을 깨고 난 후, 그는 죽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살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살아서 성공을 해야 나를 도와준 사람에게 보답할 수
있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어떻게든 살아서 성공을 해야 한다.
최저학력의 벤처사장님
정보통신 분야에서 한국은 일본과 비교해 전혀 손색이 없는 실력을 가진 인재들이 많다.
지금도 땀흘리는 벤처기업들이 한국에서 속속 태어나고 있다.
그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면에서 일본의 정보통신 벤처기업을 하나 정도는 소개하는 것이 좋을 듯 싶었다.
일본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추천을 부탁하니 상당수가 '이디 콘트라이브(ED-CONTRIVE)'를 꼽았다.
'이디 콘트라이브' 는 회사 자체로도 유명하지만 특히 사장 가와이 아유무가 유명 인물이다.
'일본의 빌 게이츠', '일본의 스티브 잡스'란 찬사를 받을 정도다. 한국으로 따지자면 한글과 컴퓨터의 이찬진 전 사장을 생각나게 하는 인물이다.
특히 가와이 사장은 학력 파괴의 표본으로 일본 언론에 종종 소개되곤 한다.
이디 콘트라이브에는 170명의 사원이 있는데 이 중 대졸은 20명 정도에 불과하다.
경영진으로는 이사가 10명인데 그중 5명만 대졸이다. 회사를 통틀어 고교 중퇴 학력자는 가와이 사장이 유일하다.
그는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이었다.
그러던 그가 중학교 3학년 때 <수레바퀴 아래서>란 책을 읽고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사회가 요구하는 절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답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고등학교를 갈 생각이 없어졌다.
왜 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단지 중학교를 졸업하면 모두들 가는 곳이 고등학교이기 때문에 가야만 한다는 생각에 찬성할 수가 없었다.
당시 그가 가고 싶었던 곳은 개발도상국에 파견되는 해외협력단(JAICA)이었다.
서류를 만들어서 신청하려 했지만 나이가 너무 어리다며 현장에서 퇴짜를 맞았다.
결국 중졸이 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선택의 여지없이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근본적인 고민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도 중학교 때부터 해온 신문배달, 주유소 일 등 아르바이트를 계속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너무 지치면 학교를 빼먹었다.
그렇게 다니다보니 1학년 때 이미 출석 일수가 모자라 유급을 두 번 했다.
2학년 때도 유급을 1번 하는 등 3년 간 재학했으나 출석일 수가 부족해 끝내는 자퇴하게 되었다.
결국 고교 중퇴자란 낙인이 찍힌 채 사회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사회는 그를 낙제생 취급했다. 그를 고용해 주는 곳은 주유소나 신문보급소 외에는 없었다.
가와이는 어떻게든 먹고사는 문제부터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돈에 집착이 생겼다.
어떻게 하면 짧은 시간에 효율적으로 돈을 벌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일본에서 돈을 제일 우습게 버는 사람들이 야쿠자인 것 같았다.
야쿠자 비슷한 것을 하면 괜찮겠다 싶어서 3년 동안 반 야쿠자 생활을 하였다.
오로지 돈, 돈뿐
사실, 밤의 생활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해오던 일이었다.
16세부터 19세까지 밤에 돈을 버는 것으로 이만하면 꽤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두 번 정도는 꽤 큰돈을 벌었다.
하루에 10만 엔씩 서너 달이 계속 들어왔으니 호주머니에 돈이 많아 돈을 뿌리고 다녔다고 한다.
"무엇으로 하루에 10만 엔을 벌었습니까?" 내가 물어보자 가와이 사장은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불법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처음 크게 돈을 벌었던 것은 알던 깡패 아저씨와 함께 일본의 다방이나 음식점 등을 돌아다니며 세븐포커 기계를 설치해 주는 일이었다.
기계는 야쿠자조직에서 싸게 사오고 수입은 점포와 50대 50으로 나눠 가졌다. 한창 때는 가와이 혼자서 점포 10개를 관리했다.
당시는 세븐포커가 유흥가의 붐이었기 때문에 정말 잘 벌렸다.
두 번째 큰돈을 만지게 된 것은 불법도박에 대한 규제가 심해져서 도박기계를 만들지 않을 때였다.
그는 직접 제비뽑기 기계를 만들어 술집에 팔았다.
투자가 적었고 직접 만들고 판매했기 때문에 벌이가 더 좋았다.
하지만 가슴속 무언가가 황량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까지 돈, 돈, 돈만 생각했는데 막상 큰돈을 만지게 되니 기쁘지가 않았다.
돈을 벌어서 주위 사람들을 편하게 하려는 생각은 있었지만 주위사람은 물론 그 자신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옳은 일을 하지 않기 파문인 것이었다.
밤의 생활은 하루살이 일이어서 찰나적인 삶의 축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남들 다 잘 때 일하고, 남들이 깨어 있을 때 잠을 자는 두더지 같은 생활에도 회의가 들었다.
고독도 뼈에 사무쳤다.
가와이는 내일이 있는 일, 미래와 연결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의 세계 사람들은 미래를 모른다.
오늘 돈을 많이 벌고 남에게 이기면 그뿐이라고 생각한다.
내일은 죽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들과는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밤의 세계를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컴퓨터와의 만남
몇 달 동안 취직 자리를 구하러 열심히 뛰어 다녔다.
20개 회사의 면접을 보았는데 죄다 떨어졌다.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가와이를 인정해 줄 회사는 일본 사회에는 없었던 것이다.
실의에 빠져 있는 가와이를 한 컴퓨터 회사가 주웠다.
영업사원 자리로 대우는 9만 엔, 하루 10만 엔씩 벌던 가와이가 월급 9만 엔의 봉급쟁이가 된 것이다.
밤의 세계에서 알던 사람들이 가와이를 찾아와 이렇게 살지 말라며 설득했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돈은 이미 그의 관심 밖이었다.
"나는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 취직한 것이 아니다.
희망이 있는 삶을 살고 싶은 것이다.
" 가와이의 말에 옛친구들은 욕을 하며 떠나갔다.
사실 가와이는 컴퓨터에 전혀 문외한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아마추어 무선에 관심이 있어 국가시험 자격증도 3개나 땄다.
모르스부호로 전 세계 사람들과 교신도 하고 무전기를 만드는 등 기계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는 영업사원으로 일하면서도 기술 쪽에 은근히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회사는 판매에만 신경 쓰라며 가와이를 타일렀다.
그의 직속 상사는 가와이를 자신의 고객을 관리해 주는 하부사원으로만 취급했다.
가와이는 신규고객 유치 등 좀 더 공격적인 영업을 하고 싶었지만 오히려 직속 상사는 화를 냈다.
"지금 있는 거래처에나 신경 써 !"
이 말을 듣고 회사를 때려치울 생각도 했지만 1개월만에 그럴 수는 없었다.
가와이는 시간을 두고 우선 상사와 친해졌다.
그러고 마침내 그의 주장을 관철시켰다
. 그는 팩키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컨셉 메이커를 주고객 대상으로 삼아 열심히 영업했다.
결국 입사 반 년 만에 톱 세일즈맨이 되었다.
세일즈 일은 전혀 뜻밖의 세상으로 눈을 돌리게 했다.
소프트웨어 회사들을 고객으로 하다보니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이 일하는 모습에 반해 버린 것이다.
그때까지 가와이가 만나본 사람들 중에 그들만큼 미래와 꿈에 대해 확신을 가진 사람들은 없었다.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10년 후, 30년 후의 세상에 대해 들떠하며 말했다.
당시의 열악한 소프트웨어 산업 환경에도 불구하고 늘 꿈을 갖고 사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가와이는 감동을 받았다.
회사를 때려치우다
어느새 그는 소프트웨어 개발회사들의 고민을 함께 하기 시작했다.
당시 소프트웨어 업계의 기장 큰 고민은 고생해서 프로그램을 만들어 놓으면 불법복제로 뛰어 보기도 전에 주저앉아야 하는 것이었다.
남의 노력을 훔치는 짓은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가와이는 직접 복제를 방지하는 프로텍션(Protection)을 개발했다.
소프트웨어 회사의 반응은 열렬했다.
주문이 쇄도하여 결과적으로 소속 회사와 거래 회사 양쪽 모두에 공헌을 한 셈이었다.
프로텍션 이후로도 가와이는 상품을 개량하는 기획을 속속 제안하여 히트시켰다.
회사 매상 전체를 가와이 혼자 벌어온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사장도 그를 보고 천재 영업맨이라 추켜세울 정도로 대우가 달라졌다. 봉급도 올랐다.
초봉9만 엔을 받던 가와이의 월급이 연봉 600만 엔이 된 것이다.
샐러리맨으로서는 굉장히 큰돈이지만 그래도 밤의 세계에서 하루 10만 엔씩 벌던 것에 비하면 6분의 1에 불과했다.
그래도 가와이는 좋기만 했다.
창조적인 일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지 그때 처음 알게 된 것이 중요했다.
난생 처음으로 삶의 방향이 생겨 인생에 생기가 돌았다.
프로텍트 기술을 개발하기 전까지는 "이 상품을 사주세요"라고 애원하는 푸시(push)영업을 해왔지만 프로텍트 개발 이후로는 고객이 알아서 찾아오는 풀(pull)영업이 되었다.
가와이는 그때 좋은 물건만 만들면 고객은 따라오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능력도 인정받고 봉급도 오르고‥‥‥. 하지만가와이는 한 가지 섭섭한 것이 있었다.
소프트웨어 업계에서는 가와이를 모두 최고 기술자로 평가해 주었지만 회사 내에서 그는 여전히 영업사원이었다.
아이디어만 낼 뿐 생산이나 기술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게다가 회사는 비양심적이었다.
전국에서 주문이 몰려들었으나 생산 능력에 투자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무조건 양만 많이 만들다보니 품질이 저하되었다.
사장은 불량품을 그대로 소프트웨어 회사에 파는데 거리낌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프로텍션 오류 때문에 시장에 물건을 내놓고 다시 회수 당하는 일도 있었다.
가와이는 사장에게 따졌지만 사장은 판매에나 신경 쓰라는 것이었다. 사장은 매상 지상주의로 계속 팔기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번잡하게 돈 드는 일을 뭐하러 하느냐?"
최소한의 양심도 없는 사장의 말에 가와이는 사표를 냈다.
이디 콘트라이브의 탄생
그는 어떤 일이든지 좋을 때가 그만 둘 때라고 생각한다.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처럼 좋은 때 그만두어야 좋은 평가를 받는다.
가와이가 그만 둔 때는 그래도 회사가 잘 나갈 때였다.
그에 대한 이미지도 좋았다.
대기업에서 스카웃 제의도 들어왔다.
고교중퇴자인 자신이 대기업에 들어간다니 가슴이 설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주변 사람들이 반대했다.
이구동성으로 "대기업에서 일하기에는 너의 재능이 아깝다!"면서 회사를 직접 만들어 보라고 권유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가와이는 자신이 직접 사장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돈도 없고 배운 것도 없는 놈이 어떻게 감히 사장이 되는가.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못하는 이유를 말하다가는 금방 나이가 든다.
문제는 부딪쳐 보는 것이다.
지금이 좋은 타이밍이다.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1986년 이디 콘트라이브를 세웠다.
3명의 친구와 회사놀이를 하는 것 같은 기분으로 시작하였다.
그가 개발했던 프로텍션 기술을 한 단계 더 응용하여 시장에 내 놓으니 다행히도 고객은 금방 붙어 주었다.
그래도 자금 문제는 처음 몇 년 동안 계속 어려웠다.
융자를 받을 수도 없고, 공적 자금도 받지 못했다.
현금 유동성의 분석 능력도 없었으며 주먹구구식으로 매일매일 자금회전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3천만 엔을 빌리기도 하였다.
그렇게 3년이 지나자 사원 수 20명에 매상이 6억 엔으로 올랐다.
가와이는 자신을 얻었다.
기술자를 스카웃하여 개발에 힘썼다.
또한 원격지에서 ISDN으로 전송하는 기술이 인정되어 하이테크 벤처로서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다.
이때가 겨우 그의 나이 스물 네 살이었다.
실패로 돌아간 자살쇼
하지만 고비는 끊이지 않았다.
그가 한창 ISDN(종합디지털통신망)으로 주가를 올리고 있을 때 한 대기업이 기술을 복제하여 저가공세로 밀고 나왔다.
재판을 해야 했지만 비용과 시간이 너무 많이 들어 재판에 이긴다 해도 경제적으로는 지게 되는 것이었다.
가와이는 회사를 포기할 생각까지 하였다.
그때 어느 과학잡지의 기자가 기사를 통해 그 대기업의 횡포를 고발해 주었다.
덕분에 이디 콘트라이브는 기사회생하였다.
조금 숨을 돌리려고 하는데 일이 또 터졌다.
이번에는 윈도3.1의 등장으로 컴퓨터 업계가 지각변동을 일으켜 성장이 멈춘 것이 원인이었다.
물건을 만들어도 팔리지 않는 세월이 6개월이나 지속되었다.
매출은 3분의 1로 뚝 떨어졌다. 사원들 월급도 주지 못하고 자금압박에 시달리다가 가와이는 그만 죽음을 결심하였다.
생명보험을 들어 두었으니 자살을 하여 빛도 갚고 연대보증을 해주신 부모님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일본에서는 자살을 하여 생명보험으로 부채를 청산하는 일이 왕왕 있다고 한다.
한국과는 달리 일본은 자살로도 보험금을 탈수 있다고 한다.
그는 교통사고로 죽기로 하였다.
고속도로의 가드레일에 부딪쳐 즉사하는 것이 편할 것 같았다.
몇 번 현장답사까지 하면서 죽는 방법을 연구하였다.
마지막 날 밤, 그는 꿈을 꾸었다.
부모님과 아내, 자식들, 그리고 회사 직원들이 모두 등장하여 가와이에게 호통을 쳤다.
특히 부모님은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네 이놈! 네가 죽으면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것이냐! 한심한 놈!"
이 꿈을 꾼 후 그는 다시 살고 싶어졌다고 한다.
자신이 세상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다는 반성도 하게 되었다.
사람과 사람이 모두 연결되어 복잡하게 사는 것을, 그는 단지 자신은 혼자이고 죽으면 끝이라는 경솔한 생각을 한 것이었다.
허장성세(虛張聲勢)도 버리기로 하였다.
그는 20대 경영자라면 남들이 깔볼까봐 일부러 늙어 보이려고 별 짓을 다 했었다.
머리 모양부터 양복까지 주로 우중충해 보이는 것을 입어서 위엄을 높이려고 했었다.
가와이는 이런 모든 허세를 버리고 벌거벗은 상태로 세상에 임할 것을 다짐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그는 철저한 조직개혁과 고객서비스 개선에 착수했다.
결국 그는 벤처펀드와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탈출했다.
가와이로서는 두 번째 인생이었다.
PD제와 임원입후보제도
어려웠지만 자살까지 물렸던 경험은 인생관과 경영관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꿈을 꾼 이후로 그는 '하느님'에게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신흥종교를 싫어하는 가와이에게 '하느님'이란 특정한 종교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얼마나 간절히 원하고 마음을 다스리느냐에 달린 문제다.
그가 열심히 기도를 하면 누군가가 '하느님'으로 대신 나타나 도와준 것 같다.
그는 대지도 풀도 사람도,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사람과 사람의 뿌리는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회사란 무엇일까.
회사는 인간에게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
깡패들은 자신의 영역을 유지하기 위해 조직을 만드는데 인사도 마찰가지일까.
고민 끝에 그는 해답을 발견했다. 아니, 그보다는 지금까지 막연하게 떠돌았던 생각을 정리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다.
회사란 본래 미래의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목적이 사라진다면 회사는 당연히 소멸해야한다.
따라서 회사를 존속시키기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은 본말전도(本末顚倒)다.
회사는 사회 전체에 대해 일개 프로젝트에 불과하기 때문에 목적이 있으면 태어났다가 목적을 다하면 사라지는 것이 옳다.
따라서 개인은 회사에 의존해서 살아서는 안 된다.
사원은 회사가 아니라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 전체가 벤처 캐피탈의 역할을 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디 콘트라이브의 독특한 경영방식인 PD제도와 임원입후보제도가 생겨났다.
PD제도란 매스컴에서는 프로그램 디렉터(program director)로 잘못 이해했지만 실은 프로젝트 드라이브(project drive)의 준말이다.
이 제도를 도입하여 가와이는 대표자이면서도 회사의 모든 권한을 포기했다.
사원 각자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 그들이 모두 벤처의 팀장이다.
즉, 이디 콘트라이브란 회사는 벤처들이 모여 있는 벤처의 집합체와 같다.
PD제도 아래 조직은 없다.
단지 할 일이 있을 뿐이다.
조직의 목적아래 모이지 않고 개인의 목적으로 기쁘게 일한다.
경제 활동과 지구 환경의 균형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시스템이다.
임원입후보제도는 전사원의 50%의 신임을 얻으면 사내외에 관계없이 누구나 임원이 될 수 있는 제도다.
물론 창업주인 가와이도 신임투표로 선출되고 있다.
그렇기에 그를 포함한 모든 사원들은 회사에 의존하지 않고 정신적으로 자립할 수 있게 되었다.
창업주가 권한을 가지고 사원과 토론을 벌이면 당연히 창업주가 이기게 된다.
그래서 그는 회사의 모든 권한을 각부문의 프로젝트 리더에게 맡겼다.
일로써는 한 발짝 떨어지고 오히려 인간관계로 관여도를 높였다.
사장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면 얼마든지 좋은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인간관계에 달려 있는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것을 간과한다.
이디 콘트라이브에는 일체의 관리 통제가 없다.
몇 시에서 몇 시까지 근무하라는 규제가 없는 것이다. 자기 할 일을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알아서 처리하면 그뿐이다.
회사를 위한 일이 아니라 사원 개개인의 일이기 파문에 빈둥거리며 눈치보는 사원은 단 한 명도 없다.
지금까지 4년이 계속된 PD제도는 게이오 대학 비즈니스 스쿨의 사례연구에 바로 채용되어 지금도 계속 연구되고 있다.
처음에는 인사관리 분야의 여러 전문 교수들이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교수들이 마음을 돌렸으며, 회사는 매출이 210% 성장했다고 한다.
현재 직원 수는 170명, 오사카에 약 2천 평의 공장이 있고 오다이바에는 1천평 규모의 공장이 있다.
동경에도 아웃소싱으로 공장을 가동시키고 있다.
1977년의 추정 매출액은 24억 엔. 경상이익은 1억5천만 엔 정도다.
멀티미디어로 사람의 마음을 연다
이디 콘트라이브는 요즘 ISDN사업이 한창이다.
통신을 통해 문자는 물론 영상, 음성 등의 정보를 자유롭게 교류하는 것을 추진 중에 있다.
어려운 조작이 필요하지 않게 하여 주부, 노인 등 정보통신의 소외계층까지 모두 불러들이고 싶은 것이 가와이 사장의 바람이다.
멀티미디어는 사람과 사람을 자유롭게, 깊게 접촉하게 만드는 유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이미 코페르넷이라는 통신 네트워크 서비스가 떠서 가입자들을 모집하고 있다. 정보 계층인 10대와 20대 뿐만 아니라 중년과 노인들을 위한 메뉴가 많은 네트워크라는 평을 들었다.
그는 자신과 회사가 사회적 약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것이 다음 목표라고 한다.
그는 "우주 수준으로 생각하는 넓은 시각을 길러야 한다"고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가족이 전부도 아니고 회사가 전부도 아니고, 그렇다고 조국이 전부가 나니라고 하였다.
우리에겐 우주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우주 속에서 저마다 해야할 역할이 있습니다.
자신이 조직의 한 일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 그 역할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가와이는 일본이 좋은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나라는 개인의 꿈은 하찮다고 말하는 데 주저 없는 나라다.
조직을 위해서는 개인쯤은 수백 수천이 회생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나라다.
그래서 일본전체가 스트레스 범벅이다.
"무엇보다 자기다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자기의 삶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 그것이 발견만 된다면 스트레스 없이 살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