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느의 머리카락이 워낙에 긴 탓도 있었지만 그녀가 자꾸 제대로 못
빗냐며 뾰족하게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이 아침 준비를 다
하고 부를 때가 되어서야 그녀의 구박이 잦아들었다. 자기 머리카락
다 망쳤다며 궁시렁 대는 제느를 무시하며 아침을 먹었다. 자기가 빗
을 것이지 평생 저런 긴 머리카락 빗어본 적도 없는 서투른 나한테 빗
으라고 해놓고 저렇게 궁시렁 대는 게 뭐람. 게다가 앉아있는 일행들
의 얼굴도 다들 약간씩 언짢아 보이는 게 오늘 레어에 들어갔다가 살
아서 나오면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침 식사 후 모닥불
을 끄고 무장 등을 정비한 다음 천천히 아침 햇살에도 검게 보이는 커
다란 동굴로 다가갔다.
"뭔가 느껴지는 것 없어?"
"음…. 이상할 정도로 침입자에 대한 방비가 없는 걸? 뭐랄까…주인이
없다거나 그냥 들어오라고 하는 것 같아."
"설마. 아무리 외부와 격리된 곳이라곤 하지만 우리 전에도 많은 사람
들이 왔었는데 그런게 없겠어?"
"아무튼 드래곤의 가디언이 있다는 건 드래곤도 있다는 거야. 게다가
우린 드래곤이 목적이 아니잖아."
"에? 드래곤이 목적이 아니라니요?"
"아무 것도 아니야."
에프릴과 아르도가 조용히 이야기 나누는 걸 들은 제느가 물었지만 아
르도는 고개를 저으며 앞에 뚫린 커다란 동굴 안의 어둠을 주시했다.
제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말을
들은 나는 드래곤을 잡으러 왔다면서 드래곤이 목적이 아니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뭔가 보물이라도 노리고 있다는 건가?
"라이트."
동굴 안으로 들어서면서부터 주위는 급격히 어두워졌다. 마치 동굴 안
은 빛을 거부하는 듯 어둠에 휩싸여 무섭게만 보였다. 그리고 발을 내
디디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워지자 지르미가 하얀색 광구를 띄웠고 이
어서 에프릴도 빛을 띄웠다. 두개의 광구가 하늘에 떠올랐긴 했지만
빛은 동굴의 천장까지도 가지 못하고 어둠에 사그러 들었다. 프릴메이
트는 금빛의 지팡이로 허공을 휙휙 저어보더니 발 밑을 조심해서 걸어
가며 말했다.
"이 어둠은 천상에서 유래한 어둠이야. 빛이 가득한 만큼 더 어두운
어둠이지. 지옥의 어둠이 공포라면, 이 천상의 어둠은 안식이야."
"천상에서 유래한 어둠이라고? 그럴 수가 있어?"
"응. 10써클 중간 급 주문 중에 있어. 물론 인간의 기준으로 10써클이
지. 이름은 어두운 신계.(dark celestial) 마법이긴 하지만 신성 쪽이
기 때문에 우리 같은 마법사들은 쓰지 못해. 어둠을 주관하는 칠흑의
가디스로부터 직접 힘을 빌리는 것이거든. 이건 데몬 급의 악마도 못
들어오는 굉장히 신성한 결계야. 이런 것이 펼쳐져 있다는 건…아크리
치조자 제대로 상대할 수 있을 지 의문이 가는 우리로서는 적대적인
행동은 절대 하지 않는 것이 좋아. 그리고, 우리의 목적은 원래부터
인간의 성검이었잖아."
"프릴! 그건 함부로 말해선…!"
"상관없잖아. 어차피 알게 될 것을."
낮게 말하는 프릴메이트의 목소리였지만 동굴인 탓에 여기저기 울리는
듯 했다. 제느는 프릴메이트의 말 중에서 칠흑의 가디스란 이름이 나
오자 눈에 띄게 놀란 표정을 짓더니 내 팔짱을 끼고 계속 프릴메이트
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어깨에 느껴지는 그녀의 뭉클한 가슴 감촉 아
래에서 긴장한 듯 조금 빠르게 뛰는 그녀의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칠
흑의 가디스라면 어둠의 여신인데 그녀는 알고 있는 걸까?
"조심해. 이 어둠은 안식이다. 천상의 존재나 엘프, 드래곤, 그리고
시전자가 지정한 대상 등을 제외하고는 '안식'을 주는 어둠이란 말이
야. 원래는 천상의 안식이었지만 말이야."
낮게 프릴메이트의 말이 끝나고 주위는 다시 조용해졌다. 바닥을 밟는
단조로운 발소리를 제외하면 말이다. 다들 무척이나 긴장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핑하고 끊어져 버릴 듯한 날카로운
현 같았다. 저런 모습들을 보니 저절로 긴장이 된다. 드래곤이란 존
재가 그렇게 대단한 것이었나? 게다가 프릴메이트가 말한 안식이란 설
마 죽음은 아니겠지?
'당신의 생각이 맞아요. 이 어둠은 최상위 7대 여신님 중 어둠의 여신
님의 신성. 비록 그분의 아주 작디작은 부분의 힘에 불과하지만 보통
인간들은 들어서면 그대로 졸림을 느끼며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는 영
원한 잠에 빠지는 안식의 안개예요. 뭐 당신은 나의 수호를 받고 있고
, 이들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보통 인간이라고 할 수 없으니
버틸 수 있는 거겠죠.'
마음 속에 울리는 제느의 말에 나는 그녀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제느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내게 팔짱을 낀 채 앞을 보며 걷고 있었
다. 그녀의 왼손이 팔짱을 낀 내 왼손에 닿아있는 걸로 보아 반지끼리
닿으면 직접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는 모양이었다.
'저번에 잠시 강신했던 마르에나의 신은 마법의 신이세요. 아마도 저
들이 소속한 미스틱이란 단체 자체가 음지에서 활동하는 마법의 신의
교단인 모양이네요. 그리고 안식의 안개를 불러낼 정도면 파할리메리
안이라는 이 드래곤은 적어도 8000살은 넘긴 모양이에요.'
제느는 역시 신이라 프릴메이트가 모르는 것도 다 아는 구나. 그런데
그 미스틱이라는 것이 난 무슨 마법사 길드 그런 것인 줄 알았는데 마
법의 신의 교단이라니, 그럼 프릴메이트나 마르에나 모두 사제라도 된
단 말이야? 아니, 마법의 신이니까 모든 마법사는 마법의 신의 사제일
수도 있는 거로군. 그렇다면 왜 마르에나만 사제라고 하고 나머지는
모두 그냥 마법사인거지?
'보통 마법사와 사제는 달라요. 마법의 신의 사제는 신의 힘을 빌려
쓰고 보통 마법사는 자연에 퍼진 마나를 이용하죠. 그게 틀린 점이에
요.'
으음. 제느가 뭐 물어보면 척척 대답해주는 컴퓨터 같다.
"으윽!"
"핫!"
"뭐야!"
아…이 사람들 되게 무섭다. 내 옆구리를 꼬집는 제느 때문에 약간 고
통의 신음을 낸 것뿐인데 이 사람들은 마치 일생의 원수와 마주하는
것처럼 줄줄이 섬뜩한 느낌을 자아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무려 6쌍의
맹수 같이 살벌하게 빛나는 눈동자들을 대하고 나니 온몸이 사시나무
떨 듯 떨렸다. 그렇게 한동안 불만 어린 듯 바라보던 여섯 사람은 제
각각 한숨을 내쉬곤 잠시 긴장을 풀고 다들 털썩 주저앉았다.
"후우. 이렇게 된 거 다 말해줄게. 어차피 여기서 들고 나가면 온 세
상에 소문이 퍼질 물건이니."
"그럼 드래곤 잡으러 온 게 아니었어요?"
"여기에 사는 드래곤은 엄청난 고룡이야. 미스틱에 있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에도 언급 돼 있을 정도지. 아마 못해도 6000년 이상은 살아 왔
을 거야. 이전 세기의 그 역사서가 대충 6000년은 넘은 거니까. 그런
데 그런 고룡을 8써클 마스터 네 명으로 이기겠다고? 처음부터 우린
여기에 있는 드래곤이 갖고 잇는 인간의 성검을 가지러 온 거였어. 저
번 세기의 더렵혀지지 않은 유물이자 마도의 왕이 만들어내어 사랑의
여신에게 인정받은 성검이니까."
나는 제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침 날 바라보더니 살짝 고개를 끄
덕여주었다. 역시 사랑의 여신이란 건 세렌인가? 이리저리 얽혀서 하
나도 모르겠다.
"그래. 전세기, 그러니까 마도 세기의 끝에 만들어진 고결한 성검이지
. 천상의 섭리 일부분을 깨달은 마도의 왕이 자신과 그가 가장 사랑하
는 여인의 피와 살을 넣고 1000일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손수 마법
의 불로 제련해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커플의 사랑을 이루어주고 사
랑의 여신의 강림을 청해서 여신에게 성검으로 인정받은 검. 크리스틱
파닐레아 라고 불려. 사랑에 가득 찬 인간의 성검이지. 그리고 그 검
이 마도 세기의 절망의 끝에서 이번 세기로의 희망의 빛을 내어 인간
들을 구원했어."
"마르에나의 말이 맞아. 사랑으로 가득한 희망의 빛이지. 그리고 우린
지금 그 사랑의 결정체를 가져가기 위해 여기로 온 거야. 인간을 구
원한 희망이 드래곤의 손에 들어가 버렸거든.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커플의 손에서 빼앗은 거지. 그리고 그렇게 지나간 마도세기에서 살아
남은 몇몇 고위급 마법사들은 모여서 7클래스 이상의 마법들을 모두
봉인해버렸어. 뭐 확실히 6써클 정도는 세계를 바꿀 힘이 없으니까.
그런데 우리 때에 와서 일이 생겼어. 마왕이 탄생한 거지. 하지만 뭐
정확히는 불행한 마법사거든."
"불행한 마법사?"
"그래. 그 마법사의 연인이 처참하게 간살 당했어. 그것도 잠시 마법
의 힘을 잃고 힘을 보충하던 마법사의 바로 눈앞에서 말이야. 젠장할!
나라도 지르미가 그렇게 죽었다면 완전히 미쳐버렸을 거야. 흠흠. 어
쨌든 그렇게 죽었지. 그 후 마법사는 미쳐버렸어. 자기 연인의 더럽혀
진 시신을 가지고 돌아다니며 소생을 위한 주문을 미친 듯이 찾았지.
나도 한번 봤었는데 그렇게 온 세상을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처음이었어. 마치 엄청난 상처를 입고 마음을 굳게 닫아버린 자폐증
환자 같았지. 미스틱에까지 찾아온 그는 소생의 주문을 달라고 했어.
모든 걸 포기해도 좋으니 그녀를 살려달라고. 안쓰럽게 여긴 교단의
하이 마스터분들 중 한 분이 5년의 생명이 깎이는 것도 마다 않고 위
시를 써서 살려냈긴 냈는데…."
프릴메이트는 거기까지 말을 하곤 날 바라보았다. 아…왜 사람 감질나
게 저렇게 끊는 거냐? 그런데 무슨 소설 읽는 듯 하네. 역사란 다 그
런건가? 아니지, 지금 그 미쳤다는 마법사는 살아있는 사람이잖아. 게
다가 제느가 그런 일을 당했다면 나라도 미쳤겠다. 세상에 눈앞에서
자기 연인이 간살 당하는걸 뻔히 보고만 있어야 했다니 마음이 어땠을
까. 전에 제느가 꼭 죽는 줄로만 알았을 때 나도 미치는 것 같았는데.
"그래…그렇게 살려냈긴 했는데. 완벽하질 못했어. 뭐 죽었던 사람을
다시 살리는데 뭔가 부작용이 없다는 것도 놀랄 일이지. 죽은 사람의
부활은 곧 신의 영역이거든. 신이라면 뭐 손짓 한번에 살려낼 수도 있
겠지만 인간으로선 하이마스터나 되는 9써클의 마법사가 5년의 생명을
희생해야 겨우 살려 낼 수 있는 거야. 게다가 원하는 데로 이루어지
지 않을 가능성도 있고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모르지. 그런데 이번에
정말 황당한 부작용이 일어난 거야. 다시 살아난 그 마법사의 연인은
영혼이 없는 빈 껍데기였어. 말도 못하는 그저 살아 숨쉬는 인형이 되
어버린 거지. 그리고 또 황당한 일이 뭐냐면, 그 여자의 영혼을 누가
가져가 버린 거야. 이미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있던 그는 이제 완전
히 미쳐서 어느 날 사라져버렸어. 그리고 얼마 후 마왕의 등장이라는
소식이 들려왔지."
"그리고 우리가 크리스틱 파닐레아를 찾는 이유는 그 마왕을 진정시키
기 위해서지. 사랑의 성검이라면 그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을 테니
까. 그런데 지금 우리가 주저앉아서 주절대고 있을 상황인가?"
"아. 아니지 빨리 가자. 이러다 아무것도 안되겠어."
멍한 표정으로 따라 일어나며 나는 제느의 얼굴을 한번 바라보았다.
그녀는 뭔가 잔뜩 고민하는 듯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가 내가 바라보고
있는 걸 느꼈는지 팔짱을 낀 팔을 꼭 조이며 살풋이 미소지었다. 역
시 우리 제느야. 나도 마주 꼭 안아주곤 소리나지 않게 입술에 스치듯
이 키스하고 손을 잡았다. 뭐, 죄 없는 드래곤을 죽이려는 게 아니라
불행한 사람을 도와주겠다는 데 얼굴 찌푸릴 이유가 없겠지.
"자자. 아무리 둘러봐도 생명체란 없어. 더 깊이 들어가면 모르겠지만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서라도 긴장은 풀자. 어이 아르도. 검 집어넣어
."
"흐흠. 그런데 프릴. 나 잘못되면 그 사람처럼 진짜 그렇게 미칠거야?
"
"으응? 내가 왜? 스승님한테 부탁하면 되지. 설마 며느리 같은 제자
아내 하나 못 살려 줄까봐 그래?"
"아…아니 뭐…."
"너희들 더 이상 재잘대면 가만 안 둔다! 여기 애인도 없는 남녀가 넷
씩이나 있는데 말이야!"
"어머 아르도. 부럽구나?"
"마음대로 생각해. 돌아가면 공주님 꼬셔 버릴테다."
에프릴하고 마르에나가 아무 소리도 없이 조용한걸 보니 의외로 저 둘
도 사귀는 애인이 없는 모양이다. 내가 워낙 제느를 비롯해서 조카자
매까지 최근에 봐왔던 여자들이 다들 엄청난 미인이다 보니 저 둘은
그리 미인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굉장한 미인들임엔
틀림없었다. 혹시 너무 굉장한 미녀들이라서 오히려 애인 같은 게 없
는 게 아닐까?
"허허허. 이거 50년만의 손님들이신가?"
그때였다. 칠흑의 장막 같던 어둠이 조금 걷히며 하늘에 띄어져 우리
를 따라오던 두 광구의 빛이 동굴 천정까지 뻗어나갔다. 마치 안개를
싹 걷어낸 것처럼 시야가 넓어지자 동굴 안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리
고 그와 동시에 인자한 옆집 할아버지 같은 음성이 부드럽고 잔잔하게
동굴을 울렸다. 둥굴을 울린 목소리가 가진 위압감은 대단했지만 이
상하게도 위축되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마치 세월의 풍파와 경
륜이 모두 스며들어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굽히게 만드는 인
자한 음성이랄까? 게다가 동굴을 쩡쩡 울리는데도 불구하고 귀가 아프
지도 않았다.
"누…누구?!"
"어디냐!"
당황한 아르도가 급히 검을 빼들고 프릴메이트가 금빛의 지팡이를, 레
인필드가 끝에 투명한 고리들이 돌고 있는 하늘빛의 지팡이를 꺼내들
었다. 그리고 나머지 일행들도 급히 전투준비를 했다. 꿀꺽하고 침 넘
어가는 시간이 지나가고 제느가 내 품으로 들어오는 게 느껴져 반사적
으로 그녀를 꼭 껴안을 때 그 인자한 목소리는 다시 동굴을 울렸다.
"이거이거 임전태세가 영 빵점이구만. 허허허. 어딜 보고 있나? 난 여
기 있다네."
"세…세상에. 어두운 신계를 말도 없이 사라지게 했어. 구현하기만큼
다시 돌려보내기도 어려운 건데."
"흠. 호센 현자의 지팡이에, 금 넝쿨의 지팡이, 그리고 레이티의 검이
로군. 오오. 대지모신의 지팡이도 가지고 있군. 그런데 어딜 보고 있
는 겐가. 자네들이 바라보고 있는 오른쪽이라네. 오른쪽."
숲 속에서 보이지도 않는 괴물들의 기척을 느끼던 이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방향도 못 찾아서 헤메다니. 목소리가 자신의 위치를 말해주어
서야 일행은 물론 나도 겨우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을 수 있었다. 역시
나 목소리의 주인공은 책상을 앞에 두고 의자에 앉아있는 풍채 좋은
할아버지였다. 척 보기에 나보다 키가 적어도 얼굴하나는 더 큰 것 같
았다. 곱게 서리내린 하얀 머리카락과 앉아있는 책상 밑으로 길게 뻗
은 듯한 풍성한 수염은 그를 더 근엄하게 만들어주었고 적어도 90세는
되었을 법한 수염과는 달리 맑게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는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은 위엄을 풍겼다. 그가 앉은 앞에 있는 책상에는 여러가지
두꺼운 책들이 조금씩 쌓여있었고 그는 앞에는 막 글을 적고 있었던
듯한 커다란 책을, 한 손에는 검은 잉크가 조금 묻은 손에 커다란 깃
털로 된 펜을 든 채 책상 위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불꽃에 의지하여 어
둠 너머에서 우리를 친손자 보듯 인자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서…설마…. 고…골드 드래곤이십니까?"
"으흠? 호오. 내가 드래곤으로 보이나?"
"그럼 아…아니 십니까?"
"허허허. 그럼 내가 책이나 쓰는 음침하고 평범한 늙은이로 보이나?"
"그…그럼…."
"허허허. 이거 저런 굉장한 것들을 가지고 있는 걸 보니 자네들은 미
스틱의 젊은 인재들이로군."
"허억!"
"어떻게 안 거지?!"
다들 기겁하며 놀라는 걸 보니 이거 어째 저 할아버지한테 줄줄줄 따
라가고 있는 것 같았다. 겉보기엔 말대로 책이나 쓰는 음침한 늙은이
같은데 그 황금색 눈동자는 정말 하늘에서 내린 서기가 흐르는 것 같
았다.
"허허허. 비밀은 오래 지켜지지 않는 법이지. 뭐 인간들의 입장에서야
일 이백년 정도는 오랜 세월이겠지만, 나 같이 음침한 늙은이에게야
찰나간에 불과하다네. 그런데, 어제부터 들어와서 나를 방해하며 여기
까지 들어온 이유는 무엇인가? 어이쿠, 게다가 내 아내 에시리스와 싸
우면서 섬을 말아먹기까지 했는데, 가기 전에 나무라도 좀 심고 가야
할걸세. 내가 일찍이 8000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깨달은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아나? 바로 자연보호라네. 어느 정도 이용하는 것은 좋지만,
다시 되살려주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네. 그렇지 않으면 자연은 보복
하니까. 자, 그럼 나 골드 드래곤 파할리메리안에게 무엇을 얻으러
왔는지 들어볼까?"
"흐억!"
"꺄악!"
"으윽!"
아까와 같은 음성에 인자하게 울리는 말이었지만 위압감은 차원이 틀
렸다. 할아버지가 자신이 골드 드래곤이라는 것을 밝히자마자 마치 제
느가 신성을 풀었을 때처럼 숨막히는 위압감이 온몸을 감싸고 숨을 죄
어왔다. 갑자기 숨이 막혀 켁켁 거리자 제느가 놀랐는지 약한 비명을
지르며 나를 뒤에서 껴안았다. 그 와중에서도 등에 느껴지는 그녀 가
슴의 뭉클함에 약간 긴장이 풀어졌던 나는 곧 그녀가 어떻게 해 주었
는지 위압감에서 벗어나고는 내 가슴을 껴안은 그녀의 손을 만지며 한
숨을 내쉬었다. 그렇지만 다른 이들은 다들 털썩 주저앉아서 여자들은
눈물을 줄줄줄 흘리고 남자들은 몸을 벌벌벌 떨며 연신 침을 삼키고
있었다. 제느는 어떻게 해줄 생각이 없는지 나를 뒤에서 안곤 가만히
있었다. 이렇게 있으니…확실히 제느는 가슴이 크구나.
"겨우 이 정도 피어도 이겨내지 못하면서 무엇을 얻으러 온 것이냐?
이 정도의 각오도 하지 않고 왔느냐? 허허. 인간들이란. 그동안 나에
게 답을 찾는 엘프들도 무수히 왔었다. 그들이 어떠했는지 아느냐? 그
들은 너희들처럼 공포를 느끼고 주저앉아 눈물을 흘릴지언정 비명은
지르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당당히 내게 답과 깨달음을 요구해왔지
. 죽음이 목전에 다가와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너희들의 마음에는 누
군가에 대한 원망과 이런 상황에 내쳐진 것에 대한 불만만 가득하구나
. 그런 마음가짐으로 나에게서 뭔가 얻어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
"…."
다들 아무 말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절망한 듯 앉아있었다. 분위기가
꼭 손자 손녀들을 죽 앉혀놓고 호되게 꾸짖는 거랑 비슷하네? 아니
똑같군. 그렇게 여자들은 줄줄줄 눈물 흘리고 남자들은 바들바들 떨며
아무 말도 못하고 있을 때 아르도가 입술을 꽉 깨물고 일어나더니 부
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검을 바닥에 캉! 소리가 나게 박곤 천천히 말했
다.
"우…우리들은, 크리스틱 파닐레아…를 찾으러 왔습니다. 물론 이런
곳으로…보낸 스승님들을…원망하는 마음도 이…있어 나약한…생각도
했지만…결단코 나약한 마음을 가지고 이곳으로 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래. 그렇구나. 나약한 마음으론 오지 않았겠지. 그러나 지금까지
나에게 온 모든 인간들이 그랬다. 이 나에게 오는데 인간으로서 일생
을 건 결심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이겠지. 하지만 인간들은 금방 굴복
하고 비굴해졌다. 물론 몇몇은 그렇지 않았지. 나에게 찾아온 엘프처
럼 죽음에 직면할지언정 신념을 굽히지 않은 이들에게는 힘을 빌려주
었다. 그러나 지금 너희들은 어떠하냐? 나를 속일 생각을 마라. 지금
너희들의 마음 속에는 온통 고통과 절망만이 가득하지 않느냐? 에시리
스는 너희와 같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불사를 얻었던 것이고."
"크윽! 이 지독한 절망 속에서도 굽히지 않는 마음이란 말입니까?!"
악을 질러가며 대꾸하는 아르도의 목에는 잔뜩 핏발이 서 있어서 무시
무시했다. 땅에 박은 검 자루를 쥐고 몸을 부들부들 떨며 악을 질러대
는 그는 꼭 궁지에 몰린 생쥐 같았다. 나는 제느의 수호 때문인지 드
래곤 피어라는 특유의 위압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조금은 아르
도가 느끼는 걸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도 그는 처음에 나도 느꼈
던 그 위압감을 넘어서 어떤 알 수 없는 본능적인 두려움이 마음을 짓
누르고 있어 저렇게 소리지르지 않으면 말조차 나오지 않을 것임이 분
명했다.
"그래. 아무것도 더 이상 할 수 없을 것 같은 지독한 절망 속에서 살
아있는 한 가닥 희망이란 마음이다. 크리스틱 파닐레아? 마음이 없는
자는 그것을 쓰지 못한다. 마음이 서투른 자 또한 쓰지 못한다. 연인
의 죽음으로 인해 악마의 유혹에 빠져 마왕이 된 이를 구하려 한다만,
너희들이 그를 구할 마음가짐이 되 있느냐? 나의 약한 피어에도 온통
절망만 가득한 마음으로 어떻게 그와 맞서고 그의 손에 크리스틱 파
닐레아를 쥐어줄 것이냐? 너희들이 진정 그에게 구원을 줄 수 있을 것
이냐?"
"어…어떻게 그걸 알고…,"
"나를 너희 인간들과 같은 잣대로 보지 말아라."
엄숙한 골드 드래곤의 음성과 함께 무서운 침묵이 찾아들었다. 금방이
라도 쓰러질 듯한 아르도는 땅에 박은 검을 붙잡고 몸을 기대고 무서
운 눈으로 할아버지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렇게 신경전을 하고 있는
걸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제느가 뒤에서 나를 당겼다. 무슨 일인지
그녀는 돌아본 내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천천히 나를 끌고 일행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물론 일행들은 아르도와 할아버지 사이에만 집중하
고 있어 모르고 있었다.
'자. 어쨌든 여기서 저 일행들과의 여행은 끝났어요. 이제 다시는 저
들을 볼 수 없겠죠.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정이 들었다면 미련을
가지지 말아요. 사랑의 여신님의 성검을 찾는 일은 저들의 일이고 우
리의 일은 다르잖아요. 이제부턴 다시 둘만의 여행인 거예요. 그리고
여행의 끝에는 편안한 집이 기다리고 있겠죠. 돌아가면 맛있는 음식
많이 해줄 테니까 기대해요.'
제느가 머릿속으로 해주는 말을 아무 생각 없이 들었다. 그녀의 말은
맞았지만 약간이라도 정이 든 사람들과 헤어진다는 사실은 가슴을 조
금 아릿하게 했다. 골드 드래곤인 저 할아버지에게 인정받는 순간 저
들은 자신의 일을 마치고 돌아가게 될 거고 그 때는 아마 우리는 없을
거다. 조금 찾을지도 모르지만 처음부터 자신들의 일행이 아니었으니
약간의 아쉬움과 허전함을 느끼며 돌아가겠지. 그리고 그 뒤로는 잊
어버릴 테고. 생각은 그렇게 그냥 헤어진다고 했지만 이제 헤어지면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가슴을 아릿하게 만들고 눈시울을 뜨겁
게 만들었다. 난 조금이나마 정이 들었던 걸까?
'그래도 결말은 보고 가도록 해요.'
제느는 일행들과 꽤나 멀어져서야 발걸음을 멈췄다. 그래보았자 겨우
20걸음 정도를 걸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어두운 동굴 안에서는 그
정도 거리라도 무척이나 멀어 보였고 꼭 저들과 우리 사이가 단절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무서운 침묵 속에서 아르도가 다시 목
소리를 짜냈다.
"우리…마음에 절망만이 가득하더라도 크리스틱 파닐레아를 당신으로
부터 얻어 꼭 그 불행한 마법사의 손에 쥐어줄 겁니다. 어찌할 수 없
는 절망에 휩싸여 한순간 모든 것을 포기해버려도 곧 다시 희망을 찾
고 일어서서 꼭 그의 손에 쥐어줄 겁니다."
"흠. 그런 것이냐? 하지만 나는 그런 마음을 가진 너희들에게 내줄 생
각이 없는데?"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곤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책상 앞
으로 걸어나왔다. 앉아있던 그가 일어나자 아르도 보다도 덩치가 더
컸다. 아니, 키도 비슷하고 덩치도 비슷했지만 아르도와는 달리 뭔가
거대하고 웅장한 것이 움직이는 느낌이랄까? 아르도를 비롯한 일행들
은 다들 눈으로 보일 정도로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할아
버지는 아르도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허공에 한쪽 손을 휘
저었다. 그는 그냥 휘저었을 뿐 더 이상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섰다.
그리고 갑자기 할아버지의 옆에서 눈부신 빛이 마치 공간을 자르고
뛰쳐나오는 것처럼 쏟아져 나왔다.
'사랑의 여신님의 성력이 느껴지네요. 전에 느꼈던 세렌의 것과 똑같
아요. 음…꽤나 잘 만들었는데요?'
허공을 빛과 함께 찢고 나온 검은 제느의 말대로 눈을 의심하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늘씬하고 유연한 곡선을 가진 긴 검신은 마치 제
느의 나신을 보는 것 같았고 그 위로 이어진 손잡이는 성스럽게만 느
껴지는 하얀빛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검신과 손잡이를 나누어
주는-제느는 가드라고 했다.-가드는 파랗고 투명하게 빛나는 작은 실
들로 되어있었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론…마치 어린애가 같고 노는 장
난감 검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리고 한순간 긴장이 다 풀어지는 것 같았다.
"서…설마 그것이…."
"크리스틱 파닐레아. 너희 인간들이 말하는 마도의 왕, 유하네리스의
작품이다. 가져가거라. 그러나 그 검이 인정하는 마음을 가진 인간만
이 손에 쥘 수 있을 터. 그것은 나도 모른다. 그럼 잘 가거라. 너희가
가는 길에 마음가짐을 바로 하지 않는 다면 그 검은 악으로 돌변할
것이다."
"아앗! 자…잠깐만…!"
아르도가 뭔가 말하려는 듯 소리쳤지만 할아버지의 가벼운 손짓과 함
께 지금까지 같이 왔던 일행들은 한쪽에 떠 있던 검과 함께 그대로 사
라져 버렸다. 헤어진다 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쉽게 헤어질
줄이야. 사라진 일행과 함께 빛의 광구는 사라졌고 그대로 동굴 안을
암흑이 감싸안았다. 뭔가 어떤 단어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마음이 허
탈해져서 그냥 하 하는 짧은 한숨만 나왔다. 이제 다시는 못 만날텐데
작별인사도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후우. 그것 참 속이 다 시원하군."
잠시 동굴 안을 애써 비추고 있던 촛불이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힘없이
꺼지더니 딱! 하는 손가락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동굴 안이 밝아졌다
. 에프릴이나 마르에나가 띄어놓았던 광구와는 달리 이번에 동굴을 밝
히는 빛은 불가사의하게도 동굴 벽 전체에서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햇빛들이었다. 그리고 동굴 한중간에는 예의 그 할아버지가 서서 나와
제느가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뒤에서 나를 안고 있던 제느가
내 몸에 감은 팔을 풀더니 내 옆으로 와서 손을 잡았고 우리를 바라보
고 있던 할아버지는 갑자기 금빛에 휩싸였다가 청년으로 변했다.
"그것 언제 떨쳐내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와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제야 한시름 놓을 수 있겠군요."
"뭐 감사는 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지나가야 했을 곳이니까."
"으흠…그쪽 분이 남편이신가요? 아. 우선 이쪽으로 오세요. 드래곤의
생애에서도 볼까말까한 이런 귀한 손님을 모시게 되다니 참 영광이군
요."
저 사람 아까 아르도를 대할 때랑 제느를 대할 때랑 전혀 딴판인 분위
기다. 그렇게 무서웠던 사람이 저렇게 공손하게 변하다니, 여신이라는
제느의 신분은 정말로 대단한 건가보다. 그런데 저 할아…버지가 어
떻게 제느를 알고 있는 거지? 제느는 지금까지 죽 나와 같이 있었는데
언제 만난 걸까? 설마, 제느가 그 때 배에서 나가서 돌아오지 않은
건 골드 드래곤인 저 할아버지와 만나기 위해서였나? 하지만 그렇게
잡혀있었는데 절대 그럴리가 없다. 설마 제느가 날 속일리는 없겠지.
"저기…아르벤."
"응?"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할아버지를 따라 걸어 들어가며 찾아드는 제느
에 대한 의심을 죽이고 있을 때 그녀가 날 불렀다. 내 손을 맞잡은 그
녀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날 부른 그녀의 목소리가 왠지
잦아드는 것 같아 불안감이 가슴에서 치달았다. 설마 저 할아버지가
그녀를 알고 있었던 건 들어오면서 뭔가 이야기 한 거겠지? 절대 제느
는 날 속일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제느의 고개 숙인 표정을 본 순간
마치 불에 덴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급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외면했다
.
"아르벤…. 저기…나…. 미안해요."
"뭐…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미안 할 것 없잖아."
"정말…미안해요. 지금까지 나…당신을 시험했어요."
"시…험?"
"그래요. 사실 당신의 생각대로 나, 납치되거나 한 게 아니에요. 그리
고 그 때, 돌이 된 채 당신을 지켜보았어요. 그리고 당신이 와서 내
손을 잡아주었을 때 정말 기뻤죠. 당신이 사랑스러워서…그렇게…."
떨리는 제느의 목소리에 발걸음이 저절로 멈춰졌다. 아직 뭔가 믿을
수가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제느의 두 어깨를 잡아 나를 바
라보게 하자 그녀는 애써 내 시선을 피했다. 가슴이 아릿해지는 게 뭔
가 욕이라도 하지 않으면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한줄기 밑으로
흘러내리는 제느의 눈물을 본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
다. 그녀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저 말 어느 한군데
에도 사실 아닌 것이 없었다. 절대 그렇게 이해하기 싫었지만 이미 내
손은 극심한 배신감에 그녀의 어깨를 밀치고 있었다.
"꺄앗!"
사랑하는 만큼…배신감도 큰 건가? 머리로 절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끓어오르는 이 가슴에 치가 떨렸다. 제느는 내가 밀친 그대로 쓰러진
채 어깨를 떨며 작게 흐느끼고 있었다. 날 시험했다니. 난 그렇게 걱
정했는데 고작 시험이라니. 갑자기 어지러워져 나도 털썩 주저앉았다.
그럼 겨우 찾았을 때 사랑한다고 했던 말은 모두 연기? 아니, 지금
생각해봐도 그 때의 그녀는 진심이었다.
"미안해요…미안해요. 용서해줘요…미안해요…."
흐느끼는 제느를 바라보아도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가슴이 아릿
하고 마음이 아파서 어떤 생각도 제대로 나지 않았다. 분명히 방금 전
까지 그녀와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걸었었는데 단 몇 마디 때문에 이렇
게 가슴이 끓어오르다니. 그렇더라도, 사랑하는 그녀다. 이건 간단하
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도 나만큼 가슴이 아플지 모르니까.
현기증이 났지만 일어나서 쓰러진 그녀에게 다가가 안아 일으켰다. 그
녀와 몸이 닿자 마치 거부반응이 일어나는 듯 울컥하고 목이 메어왔지
만 지금은 감정만 가지고 해결할 때가 아니었다.
"우아아앙! 미안해요! 끅! 끄흑! 나…나 그렇게 으흑! 당신을 시험했
지만…흐윽!"
"…."
"나 그…그래도 진심으로 당신을…으흑! 사랑하니까…용서해줘요. 미
안해요…미안해요…."
내 품에 안기자마자 제느는 크게 울음을 터트리더니 나를 끌어안곤 계
속 용서해달란 말만 계속했다. 이럴 때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까. 그냥
그녀를 용서해야 할까? 하지만 내가 고생하며 다가오는 것을 그저 지
켜보면서 가증스럽게 연극을 한 그녀를 정말 용서해도 될까? 그렇게
내 마음을 이용한 걸?
"용서해줘요…미안해요. 그저…그저 당신의 마음을 알고 싶어서…그냥
알고 싶어서 그랬어요. 흑흑. 당신의 마음을 시험해서…정말 미안해
요…."
무슨 짓을 해도…예쁘면 모두 다 용서가 된다인가? 방금 눈물짓는 눈
으로 날 올려다보는 제느의 슬픈 얼굴에 온갖 서운함과 배신감, 머리
를 아프게 하던 울화가 그냥 풀려버렸다. 그녀에 대한 각종 악감정이
허탈할 정도로 빠르게 사라진 마음의 빈자리가 안아주고 용서해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버렸다. 그리고 그녀를 와락 끌어안고는 그대
로 정신 없이 키스해댔다. 한순간에, 이래도 돼는 걸까? 결국 사랑한
다는 건 어딜 가지 않는 걸까? 방금 전까지 배신감에 치를 떨었으면서
그 눈물에 약해지다니. 역시 지상최강의 병기는 여자의 눈물이었구나
.
"흑. 흑. 으흑. 용서해줘요."
한참이나 충동적으로 키스하고 나서도 제느의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아…이 얼마나 남자의 가슴을 울리는 울음이란 말인가. 울면서 용서를
비는 그녀를 다시 와락 끌어안고는 등을 토닥여주며 말했다.
"용서해 줄테니까 울지마 제느야. 괜찮아."
"흑…끄흑! 요…용서해 주는 거예요?"
"으응. 그래. 나 괜찮으니까 울지마."
"와아앙! 사랑해요 아르벤!"
용서해주겠다는 말을 하자마자 끅끅거리며 훌쩍이던 제느는 곧 바로
팔을 뻗으며 나를 덮쳐왔다. 이것 참. 원래는 당장 차버려도 괜찮을
것처럼 기분이 나빴었는데 눈물어린 얼굴을 본 순간 그렇게 허망하게
녹아버리다니. 난 아무래도 평생 제느에게 얽매여 살 팔자인가보다.
"우웅. 흑흑. 사랑해요. 사랑해요. 흑흑."
나를 덮쳐서 뒤로 넘어트린 그녀는 연신 사랑한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키스를 해댔다. 아까 키스한 걸로 부족했나? 이것도 문제라니까. 내
위에서 몸을 문대고 있는 그녀의 뭉클한 가슴감촉을 잠시 느끼다가 퍼
뜩 정신을 차리고는 일어났다. 그 골드 드래곤 할아버지, 아니 이제
형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 골드 드래곤이 곁에 있을 텐데 이런
애정을 나눠도 돼는 건가?
"제…제느야. 잠깐만."
"흑. 우웅. 흐윽."
내가 약간 떨어트리려고 하자 내 몸을 안고 키스를 해대던 제느는 그
걸 무슨 뜻으로 생각했는지 다시 울먹거리려고 했다. 이리저리 제느의
눈물과 타액이 묻은 얼굴을 소매로 닦고는 울먹거리며 얼굴을 찡그리
는 그녀를 토닥여주었다. 나중에 얽매여 살든 꽉 쥐고 흔들며 살든,
여자가 우는 걸 보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사랑하는 여자의 저런 표정
앞에서 어떻게 대처한다는 게 군대보다 더 힘들 것 같았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슬쩍 주위를 둘러보니 다행이 그 골드 드래곤은 없고 한길
로 난 동굴만 환하게 보였다. 한길로 나 있으니 계속 가기만 하면 되
는 구나.
"흑. 흑흑. 으흑."
그러다 여전히 끅끅거리는 제느의 얼굴을 보곤 나는 잠시 머리를 쥐어
뜯었다. 이걸 업고 갈까 아니면 그냥 내버려두고 갈까? 전자면 좋아하
겠지만 울음도 그치지 않겠고 후자는 여기가 떠나갈 것처럼 울어버리
면서 털썩 주저앉겠지? 여기다 버리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어쩔 수
없군.
"업혀."
"흑. 으흑. 네?"
"업히라고. 용서하긴 했지만 제느가 날 속인 건 아직 화가 나니까 뚝
그치고 업혀."
"흑! 예에…."
날 안고 울부짖던 방금 전과는 달리 그녀는 순순히 내 등에 업혔다.
이거 아무리 45kg정도 밖에 안 되는 여자아이라고 해도 무겁잖아. 그
래도 그동안의 여행이 도움이 약간은 되었는지 처음처럼 그렇게 무리
가 가는 정도는 아니라서 다행이다.
"…."
"흑…으흑. 끅."
길은 그렇게 길지 않았지만 동굴 자체가 워낙 컸기 때문에 한참을 걸
어가는 듯한 느낌이 났다. 천장이 그야말로 까마득했다. 이 정도 동굴
에 산다면 드래곤의 크기는 한발만 내딛어도 지진이 날 정도는 될 것
같았다.
"안 그치면 여기다 버리고 간다?"
"윽. 흑! 끄윽…."
아무래도 내가 포기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하루 지나면 다시 싱글
벙글 할거 이 기회에 아주 펑펑 울어버리라고 하지 뭐. 제느는 내 말
에 입으로 새어나오는 울음을 그치려고 애쓰는 듯 끅끅거렸다. 그리고
조금 지나자 아까부터 끅끅거린 울먹임은 어느 사이 끊겨버리고 울먹
임이 없는 대신 그녀를 업은 내 등의 목덜미에는 눈이라도 녹은 듯한
물이 옷을 축축하게 계속 적셔갔다.
"흠. 부부 싸움이라도 하셨나보죠?"
"아…."
걸어가다 들려온 젊은 청년의 말소리에 옆을 돌아보니 화려하게 금박
과 보석으로 치장된 문이 열려있고 아까 파할리메리안이라던 청년이
서 있었다. 그는 대뜸 제느를 보더니 친절하게도 부부싸움을 했냐며
물었고 괜히 욱하는 마음에 나는 그를 무뚝뚝하게 노려보았다.
"흠.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니까 상관없겠죠. 들어와요. 내 레어 뒤
에 달린 작은 저택이니까."
철저히 그냥 무시해버리네. 그가 들어가 버리자 제느가 내려 달라고
작게 속삭였다. 역시 남 앞에서 펑펑 우는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은
건지 그녀는 울음을 그치곤 소매로 얼굴을 훔쳤다. 그걸 곁에서 훔쳐
보니 정말로 서럽게 울었는지 얼굴이 온통 부어있었다. 이것 참. 찜찜
하기 그지없네.
"이제 가요…."
주저주저하다 내 손을 잡으며 어깨를 움츠리는 그녀를 계속 바라보다
간 나까지도 기운이 쪽 빠져버릴 것 같아 그대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
하긴, 그의 말대로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가 맞다. 방금 전까지도
나는 제느를 땅바닥에 내팽개치고 헤어지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다시 손잡고 걸어가게 되다니. 그렇다고 해도 이건 전부 다 내
가 물러 터진 결과잖아!
"아까…밀쳐서 미안해. 어디 다치지 않았지?"
"으응. 안 다쳤어요."
우리 둘의 불편한 분위기를 그새 간파했는지 작은 저택의 응접실로 안
내한 파할리메리안은 우리와 마주보고 앉았다. 곧 김이 모락모락 나오
는 세개의 찻잔을 든 금발의 여성이 어떤 방에서 나와서 우리 앞에 놓
고 갔다. 왠지 낯이 익다고 생각했는데 저 사람이 아마도 에시리스인
가 보다. 어제는 붉은 해골로 변신해 있는 걸보고 숨 넘어갈 뻔했지.
극단적인 다이어트를 지향하나? 놓고 간 차를 들어 조금 마셔보니 조
금 쓴맛이 느껴져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리고 내 옆에서 조용하게 차
를 조금 마신 제느는 금새 원래대로 돌아온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여기서 우리가 온 반대쪽 대륙으로 보내 줄 수 있지? 그 쪽에서 눈치
채이지 않게 말이야. 8000살씩이나 먹은 고룡이라면 충분히 능력은
되겠지."
"갈 수는 있으시지만 그쪽 인간들이 요새 옛날 마도세기를 보는 것 같
아서요. 아니, 신성세기라고 해야하나? 어쨌든 워낙 다수로 밀어붙이
다 보니 탐지에 걸리지 않을 자신은 없어요. 아무리 8000살 넘게 먹은
저라도 수백만의 인간들이 만들어낸 탐지망을 뚫기란 불가능이죠. 언
젠가 한번 그쪽을 청소해야겠는데…."
"그럼 네가 우릴 등에 태우고 갈래? 보다시피 난 지금 신성을 봉인해
놓은 상태인데다 하계에 내려온 신들이 어떠한지에 대해선 잘 알겠지?
"
8000살씩이나 되는 까마득한 세월을 먹은 고룡은 제느의 말에 어린아
이처럼 얌전한 태도로 듣고 공손하게 말했다. 제느의 겉모습은 이제
겨우 사춘기를 조금 지난 19살의 소녀이고 파할리메리안의 모습은 25
살 정도 되 보이는 청년의 모습이니 겉으로는 청년이 나이 어린 소녀
한테 극존칭을 쓰는 모습이 꽤나 이상하게 보였다. 하지만 뭐, 제느는
6만 5천살이 넘게 먹었으니까 당연한 거겠지. 그렇지만 머리로는 이
해해도 역시 마음으로는 웃음이 나온다.
"뭐 가서 쓸고도 싶지만 인간들의 역사에는 직접적인 개입이 더 이상
금지가 된 터라 여기서 유유자적하게 생활하고 있을 뿐이죠. 뭐 이렇
게 틀어박혀 있는 것도 별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래. 그렇다면 정 할 수 없지. 내가 워프 마법진 하나 알려줄 테니
까 그려."
"네?"
"뭐 네 능력으로도 탐지에 걸린다면 이 세계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걸
로 해야겠지. 주위에 아까 깔아놓았던 안식의 안개를 좀 깔아 줘. 지
금 악마들에게 쫓기고 있어서 있는 곳이 들키면 조금 곤란하거든."
제느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입술을 씰룩거리며 뭔가 말
하고는 손가락을 탁 쳤다. 그러자 주위를 뒤덮는 어둠…은 없었다. 대
신 멀리 바다가 보이던 저택의 창들이 모두 검게 가려졌다. 완벽한 것
을 확인했는지 골드 드래곤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제느는 머리카락
을 조금 헤치곤 눈을 감았다.
"자. 이제 됐어. 이미지 드레인을 해서 가져가."
잠시 후 눈을 감은 채 그녀가 그렇게 말했고 파할리메리안은 조심스럽
게 그녀의 이마에 잠깐 손을 댔다가 뗐다. 그리고선 다 됐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거 겉으로 보기엔 아무 것도 안한 것 같은데 도대체 뭘
한건지 모르겠네. 잠시 뒤 제느가 눈을 뜨자 파할리메리안은 다시 손
가락을 튕기며 창 밖을 가리던 어둠을 걷어들였고 곧 일어나서 넓다란
응접실 한중간으로 가더니 허공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역시나,
그의 손가락 끝에서도 레인필드가 보여주었던 것처럼 파란색의 빛이
일어나 허공에 궤적을 남겼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한 마법진이
하나하나 그려져 가기 시작하는 걸 보니 지금까지 고생한 것들이 주
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미안해요. 속인 것. 정말 미안해요…."
옆에 앉은 내 손을 조심스럽게 잡은 제느는 그가 마법진을 완성해 가
는 걸 보는 나에게 그렇게 속삭였다. 목소리가 잔뜩 풀이 죽어있어 꿀
꿀했던 기분이 더 안 좋아지려고 했다. 하지만 제느가 이렇게 빨리 밝
힌 것도 다행이라고 할까? 어쨌든 계속 숨기고 있다가 오래 지난 후에
야 말한다거나 하면 둘 사이가 아물지 않을 정도로 나빠질지도 모르니
까.
"이제 그만 해. 괜찮아."
"열려라!"
"아…."
큰 외침에 돌아보니 마법진을 만들던 파할리메리안의 앞으로 다른 곳
과 이어지는 듯한 커다란 구멍이 막 열리고 있었다. 사람 한 명이 통
과할 정도로 커진 그 구멍은 점점 밝아지더니 이윽고 그 너머로 어떤
숲 속의 한적한 길을 보여주었다. 마법진을 다 연 파할리메리안은 한
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이것 참. 이렇게 원거리에 워프 홀을 열어놓았는데도 전혀 마나가 움
직이는 기척이 느껴지질 않다니. 정말 대단하군요. 자 그럼…이제 가
세요."
"그래. 고마워. 아르벤? 이제 가야할 시간이에요."
"으응."
"그 쪽에 가면 조심해야 할겁니다. 하다 못해 로브라도 사서 얼굴이라
도 가리세요. 어이쿠. 이거 힘이 마구 빠져나가는 군요. 빨리 가세요.
전 이걸 그렇게 오래 유지시키진 못한답니다."
"그래. 언젠가 한번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빌겠어."
"뭐 저야 영광이지요."
그렇게 서로 인사말을 나눈 후 제느는 내 손을 이끌고 열린 구멍 앞에
가서 섰다. 구멍 저쪽의 숲에서 차갑고 청량한 공기가 흘러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아무도 지나가는 이 없는 샛길. 그녀는 그렇게 눈을 감
고 한번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고 눈을 뜨곤 나에게 가까이 다
가서며 말했다.
"아르벤. 앞으로…날 믿어줘요. 비록 당신을 속였었지만, 나…어느 순
간에도 진심이 아닌 때가 없었어요. 돌이 된 채 당신을 지켜봤을 때도
가슴이 아팠고 혼자서 이틀동안 밤에 뜨는 별을 헤아리며 견디는 것
도 참기 힘들었어요. 그러니까 나…용서해줘요…."
"…상관없어."
"고마워요. 그럼 이제 가요."
제느는 내 손을 꼬옥 맞잡고 한번 포옹을 한 다음 발걸음을 옮겼다.
차가운 겨울의 공기가 얼굴에 와 닿았다. 이제, 이 여행도 거의 다 끝
나가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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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음음. 3권 끝-_-/~
후아 힘들었다. 음음. 재미있게 써야 한다만 지금은 비극이 감도는
파트라...-_-;;;;;
에헤라 디야~
첫댓글 오늘은 여기까지ㅎ 잘보았습니다 굿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