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에 거주해온 동복오씨 집안은 유난히 충신이 많다. 임진왜란 관련인물과 일제시대 항일운동을 한 인물을 많이 배출한 집안이 동복오씨다.
동복오씨가 해남과 인연을 맺은 것은 문헌상 조선 초이다. 550여 년 전인 1460년 종일(宗一)이 북평면 오산리로 입향했고 이후 1510년경에 빈(彬)이 계곡면 용지리에 들어온다.
현재 동복오씨는 해남에 약 500여세대가 살고 있다.
문헌상에 나타나는 동복오씨들의 애국적인 활동은 먼저 명량대첩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1597년 9월 정유재란 당시 오극신과 계적 부자, 극신의 조카인 홍적은 명량대첩에 참여한다.
홍적은 사재를 털어 의주로 피신한 선조의 행재소에 식량을 지원했고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가솔을 인솔해 흑석산 전투에 참가해 승리를 이끈다. 공이 인정돼 두 번에 걸쳐 벼슬이 내려지나 사양한다. 또 오극신과 함께 명량대첩에 참여해 많은 공을 세운다.
오극신은 아들 계적과 함께 참가한 명량해전에서 전사한다.
이후 선조는 오극신을 병조참의로 증하고 선무원종공신으로 등재시킨다. 인조 때는 병조판서와 병조참판으로 각각 추서한다. 이들은 모두 계곡면 용지마을에 있는 용지사에 배향돼 있다. 또 명량대첩 유적지 기념공원에 비석과 함께 흉상이 세워져 있다.
1930년대 해남에 전남운동협의회가 결성된다.
30년대 전국에서 가장 큰 항일운동조직이자 전남지역을 아우르는 항일조직이 해남 북평면과 산이면을 중심으로 결성된 것이다. 2년여 만에 일본군에 적발된 전남운동협회 주요 인물로 동복오씨였던 북평 오산리 오문현과 오병모, 산이면 상공리 오장록, 오임탁, 오홍탁, 오양탁, 오상록이 활동한다. 이들은 일본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르지만 1946년 친일파 척결과 미군정에 반발해 일어난 추수봉기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사회주의자로 분류돼 공을 인정받지 못한다.
이중 오장록은 지금도 전설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오장록은 일제시대 때 독립운동 사건으로 일본에서 옥고를 치르고 나온 후 집행유예 기간이었던 3년간 벙어리 행세를 하며 지낸다.
집에서도 밖에서도 철저히 벙어리 행세를 했던 그가 해방이 되자 인민위원회 농민위원장이 되어 화려하게 나타난다.
젊었을 때 면사무소 서기로 근무하면서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펼쳤고 해방 후 추수봉기 때는 민선 군수였던 계곡 방춘출신 김정수와 봉기를 사실상 이끈 인물. 봉기 이후 황산면 부곡리에서 체포된 그는 장흥교도소 수감 중 탈옥을 하지만 다시 잡혀 사형을 당했다고 한다. 11월 추수봉기는 화원면을 제외한 13개 읍면에서 동시로 일어난 농민봉기였다.
일제시대 때 경찰이면서 독립운동을 했던 오홍탁도 유명하다. 전남운동협의회 일원이었던 그는 낮에는 경찰관으로 밤에는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당시 그가 체포됐을 때 조선일보는 호외까지 날리며 순사로 재직하면서 적색농민운동 일원으로 활약, 서내에서는 모범 경찰관이라는 제목으로 그를 소개한다. 그러나 오홍탁은 6․25전후 보도연맹 학살사건이었던 진도 갈매기섬에서 경찰에 의해 처형된다.
오임탁은 최근 자손들의 노력으로 독립운동 유공자로 추서됐다.
이러한 집안 내력 때문에 해남거주 동복오씨 집안과 산이면 양지마을 후손들은 숱한 고난을 당한다.
동복오씨 중 해금 오달운은 학자로서 유명하다.
그는 40세까지 해남에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만 힘을 쏟았다.
고을 향시에 4번이나 장원을 하나 과거시험에는 뜻을 두지 않고 서당을 설립, 연로한 부친을 봉양하고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인다. 그러나 끈질긴 제자들의 권유로 영조16년(1740년) 41세의 늦은 나이에 과거시험을 응시, 감시양장(監試兩場)에서 각각 장원을 하고 동당시(東堂試)의 논(論)· 책(策)에서도 장원에 오른다. 또 대과(大科)인 회시(會試)에서도 장원을 해 1년에 5도장원(현재의 회계사, 변리사, 외무고시, 행정고시, 사법고시)을 모두 휩쓴다. 임금 앞에서 보는 마지막 과거시험인 전시에서도 병과에 장원급제함으로써 그 명성은 온 나라에 알려진다. 5도장원은 율곡 이이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해금공은 임지인 전북 임실과 해남을 왕래하면서 산이면 양지리 상공산을 자신의 묘 터로 잡고 양지마을을 후손들이 영원히 살아갈 땅으로 잡는다.
해금공은 수많은 문집을 남기는데 1828년 후손들에 의해 문집 전5권이 발간돼 전국 향교 등에 배포된다. 해금문집은 현재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지난 1991년 순천대 조원래 교수는 해금 오달운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연구논문을 발표, 해금학문을 처음으로 조명한다. 조원래 교수는 오달운의 문헌과 저술은 47년이란 해금공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실학사상을 18세기 초로 앞당긴 진보적 사상을 품고 있다고 평가했다. 18세기 후기 다산 정약용에 의해 전성기를 맞는 실학사상이 사실상 해금공에 의해 18세기 초에 시작됐다는 것이다.
그의 후손들은 1992년 국역 해금공 오달운 문집 1000권을 발간해 전국의 대학교와 언론사, 문화원, 향교 등에 배부했다.
동복오씨 후손들은 현재 박사와 의사 등 세계 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학자였던 해금공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서울 영신여고 오광현 교장 등을 비롯해 20여명이 교장으로 그리고 많은 이들이 학문과 연관된 일을 하고 있다.
이전 해남 산림조합장이었던 오항록씨와 오종배 산이조합장, 오병철 전 계곡조합장도 이 집안 출신이다.
해남출신 동복오씨들은 해남을 비롯해 서울 등 경향 각지에 4500여 세대가 살고 있다.
해남에는 주로 계곡면 용지리와 월신리, 산이면 양지리, 북평 오산, 묵동 등지에 거주하고 있다.
해남지역 오씨 성은 동복오씨를 비롯해 해주, 보성, 장흥, 군위, 나주 등이 있다. 해남 범 오씨종친회에서는 지난 4월 제5대 오씨 대동종친회 회장으로 오길록씨를 추대했다. 오길록 종친회장은 종친회 활성화를 위해 젊은 30~50대 종친들의 참여를 독려할 것이라며 선조들이 남긴 애국혼과 학문에 대한 열정을 후손들이 이어갈 것임도 밝혔다.
한편 동복오씨는 오녕을 시조로 삼고 있다.
고려 고종 3년 거란족이 침입하자 오수권은 아들인 현보와 현좌, 현필에게 이를 격파케 한다. 이 공으로 오현보는 해주군에, 오현좌는 동복군에, 오현필은 보성군에 각각 봉해졌다. 동복군에 봉해진 현좌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인 녕(寧)도 아버지에 이어 동복군에 봉해져 동복오씨의 1세가 된다. 둘째 아들 숙귀는 군위오씨로 분적한다. 그리하여 동복오씨는 오녕을 시조로 하고 동복을 관향으로 삼고 있다.
동복은 화순군에 있는 지명이며 동복오씨는 현재 17개 파로 나눠져 있다.
박영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