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사상 대왕국을 개창한 대성(大姓)의 성씨가 희성이 된 예는 적지 않다. 여기에서 논하고자 하는 태(太)씨와 대(大)씨의 경우도 그 한 예라 하겠다. 동아시아 사상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그 위상을 크게 떨친 발해의 시조 고왕(高王)은 걸걸중상(乞乞仲象)의 아들인 대조영(大祚榮)이었다.
중상은 고구려 현하나인 말갈부락을 통활하던 무장으로 당나라로부터 진국공(震國公)에 봉해지기도 하였다. 걸걸중상은 아명(兒名)으로 걸걸은 우리말로 걸지다 걸걸하다는 뜻을 한자로 풀이하여 대자(大字)를 붙여 대씨성(大氏姓)이 되었다.
이후 그의 아들 이름은 대조영이라 하였다. 대조영이 발해국을 건설한 이래 16대 228년 동안 왕권을 유지해 오다가 그의 7세손 이라고나오는데 이것은 틀린말이다 세대가맞지않기때문이다 애황제대인선의 후손이나 방계후손으로 말하는것이 적당하다 흥료국을세운연림왕(대연림)을 마지막으로 대씨나라는 망하게된다 연림왕의 아들 대탁이 자손들을 거느리고 지금의 밀양에 망명 이주하여 정착 세거함으로써 본관을 밀양으로 하였다.
대씨는 본래 단본으로 대산 대씨로 알려져 있기도 하나 오늘날에는 주로 밀양 대씨가 대종을 이루고 있다.
망국 이후 발해국 끝 왕인 애왕(哀王) 대인선의 아들 대광현(大光顯:일부 기록에는 太光顯이라함)은 그의 아우 지균(知鈞), 예부경(禮部卿) 대화균(大和鈞), 대균로(大鈞老), 사정(司政) 대원균(大元鈞), 상부경(上部卿) 대복마(大福謨), 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 대심리(大審理) 등 수만의 군사와 함께 고려 태조 9년 왕건에 투항하여 왕씨 성 사성(賜姓)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대국의 나라황손이 소국왕에게 사성을 받을수있나라는 자존심문제로 더욱크다는 태씨로 바꿨다고한다 따라서 대씨와 태씨는 그 뿌리가 하나이다.
태씨의 본관은 협계, 영순, 남원, 밀양, 통천 등이 있는데 도시조는 태중상이다. 이러한 태씨의 뿌리를 밝혀주는 협계 태씨 족보가 있다.
족보라고 할 때 그것은 한 족속의 계보를 기록한 것이거나 개별적인 인물들에 대한 제한적인 기록인데, 협계 태씨 족보는 특이하게 민족사의 여백을 채워주는 필요 자료로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역사를 연구 해명하는데 유일무이한 자료로 보여진다.
그러면 이 족보의 독특한 체계와 편찬경위에 대하여 먼저 살펴 보기로 하자.
일반 족보들은 족보의 기본 내용 외에 조상들의 내력을 간단히 밝힌 서문만 붙어 있지만 협계 태씨 족보에는 서문만 하여도 구보서(남북 구보서 남도구보서 북도구보서) 정묘신보서 등이 있고 이외에 편자 식 및 발(정묘식 정묘발), 범례 등 여러 개가 첨부되어있다. 여기에 특기할 것은 발해국 기원, 발해국왕세략사, 발해유민이 고려 때에 세운 공훈 판서공 이하 8충신의 사적, 발해국 지리와 강역 및 지도, 대씨가 태씨로 변한 사실 연대표 등 발해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는 내용들이 실려 있다.
그 가운데서도 발해국왕세략사에는 발해국외교문서, 홍연천의 발해세가, 발해멸망후 대씨의 변동 등 독자적인 체계를 부록으로 덧붙여 주고 있고, 발해국 지리와 강역 및 지도에는 발해의 5경 15부 62주 발해강역고, 지도 등 소제목들이 있으며 대씨가 태씨로 변한 사실 이외에도 명태의 명칭 유래와 연관이 있는 명천군의 건치연혁도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협계 태씨 족보의 구성체계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기 때문에 그 내용이 여타의 족보와는 비할 바 없이 풍부하고 이채롭다.
족보의 편찬경위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면 그 원형은 발해국 대씨 왕실의 후손들이 조상대대로 전해내려오면서 가지고 있던 왕실역사와 가문의 역사를 함께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발해왕조가 망한 다음 그들은 망국 유민으로서 동족의 나라인 고려에 넘어왔는데 위의 기록을 고스란히 가져왔던 것으로 판단된다.
대씨가 고려에 들어온 이후인 13세기 고려와 몽고 전쟁 때 전투에 참가하여 크게 공을 세우고 협계공의 봉작까지 받은 태집성이 분파를 형성하여 그 후손들이 협계태씨로 자리잡았다.
협계 태씨 족보는 1706년 태창도가 편찬하였고 뒤이어 1809년에는 김굉(1739~1816)이 증보 편찬하였으며 1856년에는 이행연이 재차 편찬하였다.
여하튼 협계 태씨 족보의 내용에 주목되는 점 몇 가지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발해국의 서경압록부의 위치에 대한 문제이다.
이 문제는 일부 학자들은 서경압록부의 위치를 8세기 후반 당나라 지리학자 가탐(730~780)이 쓴 고금군국지의 거리기사에 의존하여 그 위치를 오늘의 중국 임강지방에서 찾으려고 하였는데 이 족보에는 발해국 지리와 강역 및 지도의 모주성에 대한 세주(細註)에 서경압록부가 조선경내에 있다고 하였다. 즉 모주성은 본래 발해의 안원부인데 녹주에서 서쪽으로 2백리 떨어져 있다. 즉 녹주는 곧 압록부이며 오늘의 조선경내에 있다. 기사에 의하면 녹주인 서경압록부는 조선경내에 있고 모주성은 녹주에서 서쪽으로 2백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것으로 된다. 이처럼 협계 태씨 족보의 편자는 안원부를 요동에 위치한 것으로 보고 그 곳에서 동쪽으로 2백리 되는 곳에 서경압록부가 있는 것으로 적고 있다. 다시 말해 서경압록부인 녹주는 조선경내에 위치하였다고 단정하였다.
이같은 견해의 정확성 여부는 앞으로 고고학적인 발굴과정에서 보다 명확하게 밝혀지겠지만 안원부를 요동반도에서 찾고 발해 5경의 하나인 서경압록부를 조선경내의 압록강 언저리에서 찾으려고 시도한 것은 새로운 문제점을 제기한 것이라 보여진다. 고금군국지의 거리 기사에 의존하여 압록강어구에서 1백30리 거슬러 올라간 박작구를 발해와 당나라의 경계로 본다면 요동반도의 압록강 어구일대인 평안도의 많은 지역이 당나라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그러나 협계 태씨 족보에서는 가탐의 이러한 잘못된 견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완전히 새로운 견해를 내놓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족보의 서경압록부 위치기사에서는 매우 주목할만한 사료적가치가 있다고 보여진다.
두번째 새로운 내용이라고 할 만한 것은 발해와 통일신라와의 선린관계에 관해서이다.
예를 든다면 발해국왕세략사 무왕조에는 개원 19년(731) 봄 2월 일본이 전함 300척으로 신라의 동쪽에 침범하여 왔는데 왕이 신라군사와 함께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는 기사와 다음 발해국왕세략사 원왕조에는 동왕 8년(864) 여름 6월 신라에서 황룡사탑이 벼락을 맞아 파괴된 사실을 알려왔다고 하였다. 그런데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 성덕왕 30년(731) 여름 4월조에 신라가 일본병선 3백척을 크게 격파하였다는 내용의 기사가 있다.
위 두 기사는 거의 같은데 차이나는 점은 사건이 있던 달이 하나는 2월이고 다른 하나는 4월이라는 것이다. 또 발해군사가 신라군사와 합세한 사실이 삼국사기에 누락되어 있다는 점이다. 삼국사기에 발해의 참전문제가 없는 것은 통일신라를 일방적으로 내세운 저자 김부식이 고의적으로 빼 놓은 것으로 보여진다.
발해와 신라와의 관계는 적대적 대립관계에 있으면서 접촉이 없었던 것으로 삼국사기는 적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발해와 통일신라 군사들이 협동하여 왜선을 격퇴하였고 이즈음(731년)에는 발해의 영토가 오늘날 양양계선에까지 이르렀다. 또 하나의 사실은 신라의 황룡사탑이 벼락을 맞아 파괴된 것을 발해에 알려왔다고 하였다. 이는 삼국사기 권11 신라 경문왕 8년 6월조의 기사에 황룡사탑이 벼락을 맞았다고 한 기록과 일치되는 것이다.
그런데 발해에 통보사실이 없는 것은 김부식이 일길찬 백어를 북쪽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던지, 급찬 중정을 북국에 사신으로 보냈다 라고 적음으로써 발해국을 북쪽 왕조 내지 북쪽나라 라고 하여 굳이 발해라는 국명을 기피한데 기인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밖에 동국여지승람이나 고려사에도 영순현(永順縣)이 승격된 구체적인 유래가 없는데 반해 이 족보에는 영순폐현이 상주목 북면 임하촌의 태씨 성을 가진 사람을 태금취(太金就) 라고 함으로써 사료로서의 신뢰성을 높여 주고 있다.
또한 충청도 청양이 영산(永山)이요, 아직도 협계군이 어디일까라는 생각을 하게한다 사학자들은 협계을 지금의황해도 신계군으로 보고있는데 족보상에는 협계가 옥천의 옛 이름이라고 나와있다 태집성공의묘소가 옥천에있으므로 추론을하게된다 불필요한 글자을 지우기위해서이렇게 나와있을수도 앞으로 생각해볼만한일이다 그리고 여러지명을 고증할 수 있어 옛 지명 연구에도 참고가 되고 있다. 특기할 점은 고대 경제사 연구에 귀중한 연구자료가 될 수 있는 종이돈인 저화(楮貨)와 전시과(田柴科)에 관한 기사 등등도 실려 있다.
요컨대 본고의 요지인 태씨와 대씨는 한 뿌리로 태씨는 본관이 협계(陜溪)를 대종으로 영순(永順) 밀양(密陽) 남원(南原) 통천(通川) 등으로 되어 있고, 대씨는 김해지방인 대산(大山)을 본관으로 하고 있으며 이들이 간직하고 있는 협계 태씨족보는 흔히 한 문벌 중심의 단순한 가승(家乘)이 아니라, 빈약하고 영성한 발해사를 보충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자료로 성씨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을 덧붙일 수 있는 중요한 소재가 되고 있음을 상기케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