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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 유전공학과/필휴먼생명학연구소 구미정 교수 저서
"이제는 생명의 노래를 불러라" (올리브나무, 2004) : 21세기 유배지에서 살아남기 위한 여성신학적 제언
1. 노래 부를 수 없는 우리, 유배지의 포로들
바빌론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눈물 흘렸다.
그 언덕 버드나무 가지 위에 우리의 수금 걸어 놓고서.
우리를 잡아 온 사람들이 그 곳에서 노래하라 청하였지만,
우리를 끌고 온 그 사람들이 기뻐하라고 졸라대면서
“한 가락 시온 노래 불러라”고 하였지만,
우리 어찌 남의 나라 낯선 땅에서 야훼의 노래를 부르랴! (시편 137:1-4)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아마도 바빌론 포수(捕囚)일 것이다. 예루살렘은 다윗 왕에 의해 건설된 후 3백년이 넘도록 단 한 차례의 외적의 침입도 받지 않았다. 자기들의 하나님 야훼께서 지켜주시기 때문이라고 유대인들은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BC 586년,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이 무참하게 함락당하고, 야훼의 성전이 초토화되고 말았다. 느부갓네살은 당시 유대 왕이었던 시드키야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내와 자식들을 살해하고 그의 두 눈을 뽑아 사슬로 묶어서 바빌론으로 끌고 가 처형했다(왕하 25장). 그리고 생존한 유대인들 역시 전쟁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압송되었다. 이렇게 이방 땅에서 노예가 된 유대인들은 그들 고유의 율법과 절기를 지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도 없는 비참한 유배(exile) 생활을 하게 된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바빌론 포수는 한마디로 지금까지 그들의 생존 기반이었던 야훼 하나님 신앙의 해체요, 민족적 정체성이 완전히 말살되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바빌론 강가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리며 극도의 절망감과 삶의 무의미성에 사로잡혀 하루하루 연명해 가는 판에, 어찌 시온 노래 한 가락 불러보라는 정복자의 요구에 응답할 수 있으랴? 이 요구야말로 부당한 희롱이요, 가당찮은 코미디가 아닌가? 더 이상 부를 수 없는 시온 노래 한 가락, 차마 정복자의 흥을 돋우기 위한 노래가 입 밖으로 내뱉어지지 않는 심정... 그들의 유배는 다름 아닌 야훼 하나님의 유배요, 생명의 노래의 유배가 아니었을까?
미국 성공회 감독 존 쉘비 스퐁(John Shelby Spong)은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에서 오늘날의 기독교인도 그와 같이 “유배당한 신자(believer in exile)”라고 명명한다. 존 쉘비 스퐁,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김준우 역 (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1), 49.
유배란 원해서 당하는 것이 아니다. 스퐁에 따르면, 유배는 “항상 어떤 일이나 상황에 의해 개인이나 집단에게 몰아닥치는 것인데, 그 일을 당하는 사람은 그 일을 통제할 수가 없다.” Ibid., 51.
유배의 비극은, 더구나 그것이 일종의 정거장처럼 잠시 거쳐 갈 성질이 아니라는 데 있다. 강제 이주로서의 유배는, 떠나왔던 곳으로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불확실성 때문에 더욱 비극적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기독교인의 유배는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스퐁은,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에게서 시작되고, 뉴턴-다윈-프로이드-아인슈타인 등에 의해 가속도가 붙어, 마침내 우리가 도달한 포스트모던 세계가 바로 유배의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이 세계에서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유신론적이며 초자연적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이해하는 것은 더 이상 먹혀들지 않게 되었다. 우리 사회의 작업가설(working premise)로서 존재했던 하나님은 이제 빠져나가고 없다. 이생에서든 내생에서든 주어질 보상과 처벌은 더 이상 우리의 행동의 일차적인 동기가 되지 않고 있다... 우리가 예배했던 하나님은 우리의 눈앞에서 흔적도 없어지고 말았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이 누구이며, 또한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게 되었다. Ibid., 69.
그동안 기독교를 지탱해왔던 유신론에 입각한 하나님 신앙은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더 이상설자리를 잃고 말았다. 스퐁은, “죽일 수 있는 신은 죽여야만 한다(Any god who can be killed ought to be killed)” Ibid., 27.
는 명제를 인용하며, 우리 역시 전통적인 하나님 상을 해체할 것을 요구한다. 오늘날 기독교인의 영적 순례에서 “첫 번째 관문은 유배의 현실을 인정하는 것” Ibid., 71.
이 되어야 한다고 권고하는 그는, 우리가 이것을 정직하게 대면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믿음도 헛될 뿐이며, 기독교 자체가 사망선고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본회퍼가 말했듯이, 포스트모던 시대 속으로 유배당한 기독교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ohne Gott, vor Gott)’ 서야 할 새로운 신앙의 단계로 접어든 셈이다.
2. 매트릭스 안의 행복한 노예들
이름하여 ‘행복한 노예론’이란 것이 있다. 노예 상태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예속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할 만큼 그들을 교묘히 통제하고 조작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노예를 다스리는 가장 편리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겠는가?
올더스 헉슬리(Aldous L. Huxley)가 1932년에 쓴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권세호 역 (서울: 서문당, 1985).
에 보면, 시대 배경이 AF(After Ford) 632년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 ‘포드’의 창설자인 헨리 포드(Henry Ford, 1863-1947)는 이른바 ‘포드 시스템’이라고 하는 조립 라인 방식에 의한 대량생산 체제에 의해 자동차를 대중화시키면서 자동차 시대의 문을 열었다. 그가 최초로 자동차를 만든 것이 1908년이기 때문에, 소설 속 AF 632년이란 AD 2540년을 가리킨다.
으로 되어 있는 가상의 유토피아가 등장한다. 여기서 ‘AD(그리스도 이후)’가 아닌 ‘AF(포드 이후)’라는 연호가 사용되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현대 사회의 시작점을 자동차 왕 헨리 포드에서 잡는다는 의미이자, 동시에 기독교에 대한 과학기술의 궁극적인 승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인간에게 시간과 공간을 제어하는 권력을 부여해 준 자동차라는 이 신통한 발명품의 문명사적 의미를 간파한 작가적 혜안이 아닐 수 없다. 여하간 ‘공동ㆍ균등ㆍ안전’이 세계 국가의 표어로 되어 있는 그 시대에는 뽀카놉스키 본래 한 개의 난자에서 한 사람(혹은 쌍둥이래야 많아도 네 쌍둥이)이 나오는 것이 정상적인 생식 방법이지만, 수정란을 뽀카놉스키화(化)시키면, 최대 96명까지, 동일한 유전자를 지닌 쌍둥이가 발생한다고 한다. 헉슬리의 소설에서는, 사회 엘리트 계층에 속하는 알파와 베타 이외의 피지배계층, 곧 감마, 델타, 엡씨론이 뽀카놉스키 방법에 의해 대량생산됨으로써, 상위 계급에 봉사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방법으로 태어난 인간들이 날마다 중앙에서 배급되는 소마(soma, 일종의 항우울제)를 먹으며 행복감에 젖는데, 이 소마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운명을 사랑하게끔 만들어주면서 도저히 비판의식과 저항의지가 생기지 않게끔 미연에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소마가 존재하고 사람들이 그것에 의지하는 한, 계급투쟁이 없는 평화로운 낙원이 지속되리라는 낙관주의도 과히 틀린 것 같지는 않다. 그야말로 행복한 노예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하루 평균 40여건의 전쟁이 진행 중이거나 휴전 중인 위험한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누가 어디서 왜 싸우는지에 아무런 관심이 없고 그저 하루살이처럼 일상의 거짓 평화에 안온해 하는 우리의 무딘 감각이 사실상 더욱 위험하지 않은가? 그래서 미셀 푸코(Michael Foucault)도, 처벌이나 감금보다 더 무서운 것이, 학교나 병원, 군대, 공장 등 사회 전체가 하나의 감옥이 되어 통제하고 조작하는 것이라고 꼬집지 않았던가? 미셀 푸코, 『감시와 처벌 : 감옥의 역사』, 오생근 역, (서울: 나남출판, 1998).
유비쿼터스(ubiquitous) 라틴어로, “언제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의미의 ‘유비쿼터스’는 장소와 시간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는 환경/공간을 뜻한다. 이것은 우리 주변의 모든 사물에 칩(RFID)을 삽입하여, 그 칩이 깃든 사물이 곧 컴퓨터가 되게 하는 방법인데, 이로써 인간의 삶 자체가 온라인 상에 있게 되는 전자 정보 혁명이 완결되는 것이다. 애초 이 용어는 1988년 미국 제록스 사의 마크 와이저가 고안한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2002년에 소개되어, 2010년경이면 유비쿼터스 환경을 완벽히 갖춘 디지털 홈이 뚜렷이 자리를 잡을 전망이라고 한다. 네이버 백과사전 등 참고.
시대를 코앞에 둔 21세기 인류는 푸코가 말하는 거대 감옥 속에서 대중매체가 끊임없이 재생해 내는 행복한 노예론에 설득당한 지 오래다.
속박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물론이요, 지배 권력의 실체에 대해 의심조차 품지 못하도록 교화/세뇌당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영화 <매트릭스(matrix)> <매트릭스>는 본래 ‘모체’, ‘자궁’을 뜻하는 말로, 영화 속의 배경이 되는 가상공간을 뜻한다. 인간 두뇌의 기억을 조작하여 인간을 지배하려는 컴퓨터와 이에 저항하는 인간 간의 대결을 그린 이 영화는 워쇼스키 형제가 감독하고, 키아누 리브스 등이 주연을 맡은 1999년도 미국 작품이다.
가 재현하는 세계와 다름없어 보인다.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시대, 아니 오히려 가상의 세계 속에 있는 편이 훨씬 더 안전하고 평화롭게 느껴지는 시대,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삶의 터전이 바로 여기이다.
과거, 이데올로기 시대의 매트릭스는 국가간 경계가 분명한 전제 아래서 권위주의적인 정부가 공권력을 동원하여 자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그런 구조였다. 따라서 싸울 대상이 비교적 명백하였고, 싸워서 얻을 목표 역시 분명하였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는 가고 새로운 비디올로기(videologie) 미국 럿저스 대학의 벤자민 바버(Benjamin R. Barber)는, 미국 문화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MTV와 맥도널드, 그리고 디즈니랜드가 “비트로 표출되는 소리와 비디오에 기초한 비디올로기”가 되어 우리의 의식과 문화를 지배한다고 고발한다. 상품 자체보다는 로고에, 그리고 스타와 브랜드와 광고 이미지에 열광하는 신인류를 보노라면, 이데올로기는 가고, 비디올로기가 도래하였다는 그의 지적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벤자민 바버, “민주주의에 반하는 맥월드 문화”, 이냐시오 라모네 등저, 『프리바토피아를 넘어서』, 최연구 역 (서울: 백의, 2003), 66.
가 세계를 제패한 오늘에 와서는 매트릭스의 정체를 규명하는 일이 쉽지 않다. 현대인들이 투쟁이니 정의니 하는 단어를 구시대적 유물이라고 생각하고, 맞서 싸울 의지를 간단히 꺾어버리는 것도 그 대상의 모호함 때문일 것이다. 강제성을 띄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일상의 중심을 파고들어 의식을 마비시키는 이 매트릭스의 씨줄과 날줄은 무엇인가?
영화 <매트릭스>에 보면, 주인공 네오(Neo)로 하여금 매트릭스의 실상에 눈을 뜨고 자신의 소명을 확인하도록 이끈 예언자 오라클(Oracle)이 등장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시대에도 많은 오라클들이 있어 우리더러 가상의 꿈에서 깨어나라고 손짓한다. 그들이 한결같이 강조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와 또한 거기에 편입된 테크노폴리(technopoly) 미국 뉴욕대학의 커뮤니케이션학 교수인 닐 포스트만(Neil Postman)은 인류가 맨 처음 ‘도구 사용 문화’로부터, ‘과학주의 문화’로, 그리고 최근의 ‘테크노폴리 문화’로 이행하였다고 분석하는데, 여기서 테크노폴리란 ‘맹신적 과학기술주의’를 뜻하는 것으로, 오로지 기술진보만이 인간이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리킨다. 이 단계에서는 과학기술이 가져다주는 정보가 인간에게 유일한 축복이며, 이를 무한정 생산ㆍ보급함으로써 인간이 자유와 창의성, 그리고 마음의 평화까지 얻을 수 있다는 신념이 팽배하기 때문에, 테크노폴리는 다른 말로 “전체주의적 기술주의 문화”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닐 포스트만, 『테크노폴리』, 김균 역 (서울: 민음사, 2001), 75.
가 바로 우리의 현실을 구성하는 매트릭스라는 것이다. 이 정교하게 잘 짜여진 매트릭스 안에서는 경제성장과 과학발전만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길이라는 도그마가 지배적이어서, 거기에 반대하는 어떠한 목소리도 정당성을 잃게 된다. 더욱이 가치중립성과 지식의 객관성을 표방하는 과학 연구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상품(의료상품/군사물품)으로 연결되어야지만 그 가치가 인정받는 것을 볼 때, 아니 애당초 연구 자체가 ‘보이지 않는 큰 손’, 즉 금융 자본가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을 볼 때, 과학 연구는 경제논리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로테 브누아 브로바에이스ㆍ장-클로드 카플랑, “유전적인 차별”, 『프리바토피아를 넘어서』, 107 참고.
그러니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 6:24; 눅 16:13)는 성서의 말씀은 얼마나 적절한 촌철살인의 경구인가?
소위 무한경쟁과 무한진보라는 슬로건에 함축되어 있듯이, 시장의 우상화로 특징 지워지는 세계화 시대의 현대인들은 사실상 ‘카지노 경제’의 희생양이 되어 이용되고 소모되고 유기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현실에 눈을 뜨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온갖 다양한 경로를 통해 우리의 의식에 파고드는 대중매체의 메시지들이 ‘소마’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대중매체는 효과적인 문화적 억압 도구이자 대중의식 조작의 수단인 광고를 통해 전지구인에게 ‘소비자’라는 획일적인 이름을 부여해주고, 그 이름에 걸맞게 살도록 유인한다. 도로테 죌레(Dorothee Sölle)에 따르면, 광고의 목적은 단순히 특정 상품을 팔려는 데 있는 것만이 아니라, “판매와 구매, 거래와 부의 축적이 인간의 활동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하는 일종의 분위기를 형성시키는 데 있다” 도르테 죌레, 『사랑과 노동』, 박재순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2), 199.
고 한다. 이처럼 인간의 ‘궁극적 관심’을 소비, 곧 특정 브랜드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에 붙들어 매는 광고에 의해 우리는 소비 지상주의에 세뇌된 행복한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3. 소비주의와 과학주의, 그리고 가부장제의 동맹
“나는 쇼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I shop, therefore I am)”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소비사회에 맞게 패러디한 이 문장은 미국의 현대미술가인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의 작품에 등장한 것이다.
는 소비 사회의 존재론이 육화(肉化)의 대상으로 여성을 노리고 있다는 것은 씁쓸하지만 사실이다. 죌레는 소비자로서의 여성이 “새로운 대중조작의 공격목표이자 동시에 희생자가 되었다는 것은 결코 놀랄 만한 일이 못 된다” 도르테 죌레, op.cit., 200.
고 폭로한다. 공적인 영역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제대로 발휘해볼 기회를 갖지 못한 여성에게 소비의 주체라는 타이틀은, 비록 그것이 주입되고 강요된 이름이요, 인위적으로 조작되고 왜곡된 욕구일망정 달콤한 유혹이 아닐 수 없다. 돈을 쓰는 한, 여성은 자유롭다고 느낀다.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소비하는 일에 길들여지는 한, 여성은 가부장적 자본주의 시스템의 성적 함의를 꿰뚫어볼 수가 없다. 구매력과 자유가 동일시되는 사회에서는 더 많이 소비할수록 더 능력 있는 존재라는 허위의식이 우리의 발목을 붙든다.
이국적인 욕실에서 여유롭게 거품목욕을 즐기다가, 멋진 이브닝드레스를 차려입고서 ‘퐁듀를 요리하며 “여자라서 행복해요”라고 미소 짓는 심은하를 보라. 초호화 아파트라는 사유화된 공간에서 공주 같은 딸과 요가동작을 취하며 “잘 먹고 잘 살자”고 외치는 황신혜를 보라. 실제 이들이 선전하는 것은 냉장고나 아파트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것들이 상징하는 풍요의 이미지, 곧 철저히 비정치화되고 파편화된 프리바토피아(Privatopia) “프리바토피아(Privatopia)”란 영어로 ‘사적(private)’이라는 의미와 ‘유토피아(utopia)’의 합성어로서, 모든 것을 ‘소유’의 관점 아래 귀속시키는 소비문화의 궁극적 목표를 비꼬는 말이다. 이 용어의 고안자 벤자민 바버는 본래 공공의 광장이었던 자리를 개인 소유의 대형 상점가로 바꾸는 건축 트랜드가 프리바토피아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벤자민 바버, “민주주의에 반하는 맥월드 문화”, op.cit., 70.
이며, 이와 더불어 여성이 프리바토피아에 들어가려면 무조건 예쁘고 날씬해서, 그로 하여금 무한대의 구매력을 행사하도록 해 줄 백마 탄 왕자님에게 간택되는 것이 지름길이라는 속설인 것이다. 경이로운 50퍼센트 대의 시청률을 자랑하며 막을 내린 <파리의 연인>이라는 드라마의 성공이 그 좋은 예이다.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장사가 되는’ 문화상품이다.
2001년 기준, ‘뷰티 산업’의 국내 시장 규모가 무려 26조 4천억 원에 달하고, 다이어트 시장이 1조원 규모에 이른다는 사실, 『조선일보』, 2001. 7. 25.
그리고 최근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까지 언급된 한국형 성형수술 붐이라든가 ‘명품 숭배’라는 신흥 종교의 급부상은 그러한 세속 구원론이 얼마만큼 위력이 있는지를 입증해 준다.
페미니스트 과학사가 캐롤린 머천트(Carolyn Merchant)는 근대과학의 아버지 프란시스 베이컨 이후의 과학이 그 방법론에서 철저히 폭력적이라고 비판한다. Carolyn Merchant, The Death of Nature (New York: Harper and Row, 1983).
연구대상을 공생적 맥락에서 강제로 분리하여 실험실에 격리시키지 않고는, 생명의 신비를 밝힌다는 명목 하에 생명체를 산산조각 파괴시키지 않고는, 과학자들이 새로운 지식을 얻을 길이라곤 없다. 본래 여성과 자연에게 속한 생산력과 창조력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두어, 스스로 생명의 창조자가 되고자 획책하는 사람들이 바로 과학자들이라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메리 데일리는 첨단공학의 업적들이 ‘남성 생식 증후군(male fertility syndrome)’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집, 병원, 사무실, 비행기, 우주선, 원자폭탄, 로켓 같은 다양한 기술적 창조물들은 남성의 인공 자궁이 낳은 것이다. Mary Daly, Gyn/Ecology: The Metaethics of Radical Feminism (Boston : Beacon Press, 1978), 61 참고.
리 실버(Lee Siver)가 예견한 대로, 생명공학은 소위 ‘돈이 되는 유전자’에 투자하는 법이므로, 리 실버, 『리메이킹 에덴: 복재생명, 재앙인가 축복인가』, 하영미ㆍ이동희 공역 (서울: 한승, 1998).
그것의 주요 소비자가 될 부유층이 연구의 방향을 결정짓게 되리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올해 초 세계 최초로 여성의 난자에서 인간배아 줄기세포를 추출해 내는 실험으로 주목받는 황우석 교수의 사례가 그 좋은 예이다. WS HWANG, SY MOON, et.al., "Evidence of a Pluripotent Human Embryonic Stem Cell Line derived from a Cloned Blastocyst", Science, 2004 303, 1669-1674.
“세계 최초”, “처음 성공”, “난치병 해결”, “과학적 쾌거” 등 선정적인 언론의 현란한 수사학에 가려진 부도덕한 진실 하나는 그가 242개의 난자를 이용했다는 것이고, 그 가운데 성공한 거의 마지막 난자 한 개를 제외하고는 241개의 난자가 폐기되었다는 것이며, 이렇게 많은 난자를 제공/판매(?)한 16명의 여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설령 이 여성들이 이타적인 목적에서 자발적으로 난자를 무상 제공하였다고 해도,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암, 당뇨, 치매, 척수손상 등 현대의학으로 고치기 어려운 난치병 환자들에게야 인간배아 줄기세포가 마지막 희망일지 모르나, 한 사람의 난치병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난자의 희생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필연성은 궁극적으로 여성 난자의 상품화를 불러일으킬 것이 자명하다.
현재 상용화되어 있는 인공수정기술(IVF)만 해도, 불법 난자 매매 브로커라는 신종 직업을 양산하였고, 이들에 의해 여성의 난자가 지하시장에서 평균 200만원에 거래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10월 중순, 이화여대 앞에 뿌려진 휴대용 화장지 속 광고 문안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여성 도너 구함. 불임부부를 도와주실 분을 찾습니다. 만 20-29세의 신체 건강하고 용모 단정한 여성분. 도와주신 분께는 최선의 사례를 할 것임.” 브로커들에 따르면, 최근 여대생들 사이의 난자 매매는 공공연한 비밀로서, 명품 소비 등 씀씀이는 커진 반면에 힘든 아르바이트를 꺼리는 학생들이 주로 찾아온다고 한다. 브로커들의 신청서에는, 학벌, 가족사항, 키와 몸무게, 아이큐, 혈액형, 쌍꺼풀 여부, 취미와 특기 등을 꼼꼼하게 기록하도록 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불임부부와 연결된 여성들은 난자 채취 1회당 평균 200만원의 기본 사례금을 받는데, 경우에 따라 외모나 학벌이 출중하여 불임부부의 마음에 쏙 들기만 하면 값은 1천만 원 이상 천정부지로 치솟는다고 한다. 『원광보건대 신문』 141호, 2004. 10. 28. http://press.wkhc.ac.kr 참고;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불임클리닉은 거의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고 있으며, 일본에 비해 난자 매매가 손쉬운 편이어서, 일본 불임부부들의 난자 쇼핑이 잦은 것도 최근의 한 경향이다. 합법적인 회사의 형태를 띠고 있는 공식적 난자 매매 업체인 “DNA 뱅크”는 일본어로 된 홈페이지까지 따로 운영할 정도로 일본시장 공략에 공을 들이고 있다. 『주간동아』458호, 2004. 11. 4. http://www.donga.com 참고.
따라서 치료용 인간배아복제연구가 활발해지고, 이로써 얻어지는 배아 줄기세포에 대한 수요가 많아질수록 난자 매매는 더욱 성행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마디로 현재의 생명복제기술은 난자를 먹음으로써 제 몸집을 불려나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아무리 ‘첨단’으로 포장된 과학기술이라도, 과학혁명의 근본 전제, 곧 여성/자연 정복의 연장선상에 있는 한, 그것은 여성의 자궁을 식민지화하여 여성 종속을 심화시키려는 가부장적 프로젝트로서의 혐의를 벗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4. 어린아이 같아야
일본의 마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만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은 2002년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과 2003년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함으로써, 작품성을 추구하는 애니메이션으로는 보기 드물게 상업적 성공을 거둔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있다. 평범한 열 살짜리 소녀 치히로가 어쩌다 너무나 낯선 환경, 곧 온갖 요괴와 도깨비들이 들끓는 온천장에서 일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모험 이야기가 줄거리다. 마녀(유바바)에 의해 운영되는 그 온천장은 누구든지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는 곳, 심지어 열 살짜리 어린이의 노동력마저 가혹하게 착취하는 곳으로서, 이것은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로 평정된 세계의 축소판이라고 하겠다. 특히 황금으로 사람들을 유인하는 ‘가오나시’ 신은 이 시대의 가장 강력한 반신적 우상을 적절히 묘사한 캐릭터로 이해된다.
영화는, 치히로네 가족이 이사하던 중, 길을 잃고 어느 터널을 통과하게 되는데, 그 터널 밖이 바로 ‘신들의 온천장’이라는 설정으로부터 출발한다. 치히로는 이 온천장으로 유배된 것이다. 스스로 선택해서라기보다 부모 때문에, 더 정확히 말하면 ‘돼지’로 변해 버린 부모의 탐심 때문에 온천장에 갇히게 된 치히로는 어쩌면 후기 자본주의 시대 속으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던져진 현대인의 전형인지도 모른다.
마녀는 치히로에게 새 이름 ‘센’을 부여해준다. 치히로는 ‘천 길’, 즉 헤아릴 수 없이 깊고 높은 세계를 의미하지만, 센은 단순히 숫자 ‘천’을 의미할 뿐이다. 이제 센으로 살게 된 치히로는 유배지에서 철저한 정체성 말살의 통과의례를 거치게 된다. 치히로(세대)는 부모(세대)의 자본 우상화를 치유할 책임을 떠안은 셈이다. 이 어린 소녀는 과연 자기 자신과 부모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까?
처음부터 센의 은밀한 조력자로 나오는 하쿠는 센에게 이름을 잊지 말도록 당부한다. 이름을 잊어버리면 그곳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센은 죽기 살기로 자기 옛 이름 치히로를 잊지 않으려고 한다. 자기의 본래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영화에서 그것은 이 소녀가 맺는 관계의 특이성에서 암시된다.
예를 들어보자. 치히로의 첫 손님은 일명 ‘오물’신이다. 그에게서 풍기는 악취로 온천장의 다른 일꾼들이 모두 코를 막으며 도망친다. 그러나 치히로는, 인간이 버린 쓰레기들을 다 토해내고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게끔 그 오물신을 정성을 다해 모시고 보살핀다. 다른 한편 자기의 환심을 사기 위해 황금을 뿌려대는 ‘가오나시’신 앞에서도 그는 전혀 미혹되지 않는다. 온천장 주인의 아들인 망나니 ‘보우’와도 친구가 되고, 마침내 마녀 유바바마저 참회시키는 힘이 치히로에게는 있다.
이와 같이 이 영화에서 감독은 치히로라는 어린 소녀의 캐릭터를 통해, 전지구적ㆍ가부장적 소비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서 맘몬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전한다. 인간의 모든 사회적 관계를 거래/경쟁 관계로 왜곡시키고, 인생의 가치를 수량화하며, 돈만 있으면 다 된다는 식의 천박한 맘몬적 패러다임에 물든 기성세대의 가치관에 도전하여, 감독은 진정한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참으로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해줄 거울로서 치히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설정은, 미국 영화 <매트릭스>에서 인류의 구원자로 등장하는 인물이 근육질 남성 네오이고, 그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취하는 방식이 전쟁인 점을 감안하면, 거의 혁명에 가까운 발상의 전환이 아닐 수 없다. 서양 영화의 상상력은 대부분의 경우 메시아적 캐릭터를 성인 남성에게 국한시키고 있으며, 여성, 그것도 섹시미가 강조된 여성은 다만 그의 조력자로 배치될 뿐이다. 그러나 미야자키 감독은 과감하게, 그리고 일관되게 인류의 미래가 여성 어린이, 즉 부드럽고 여리고 민감하고 유연하며 자연친화적이고 다른 존재와의 교감능력이 탁월한 소녀에게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신념은 생태여성신학적 상상력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본다.
성서적 전망에서 보면, 여성과 어린이는 동일 범주에 속한다. 둘 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자기 혼자 힘으로는 설 수 없는 의존적인 존재들이고, 사회의 중심부에서 배제된 변두리 집단이며, “가장 작은 자”(마 25:45)에 속한다. 이신건은 『어린이 신학』에서 어린이 학대가 흔히 여성에 대한 폭력과 맞물려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연약한 어린이, 어린 여성-물론 성인 여성까지 포함하여-에 대한 남성의 폭력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는 무력숭배만이 아니라 남근숭배(가부장주의, 남성우월주의)에도 과감한 종말을 선언해야 한다” 이신건, 『어린이 신학 : 하나님을 어린이로 생각하기』 (서울: 한들출판사, 1998), 49.
고 강조한다.
예수는 어린이 하나를 불러 제자들 사이에 세우고 포옹하면서 말한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또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곧 나를 보내신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막 9:37). 어린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디온(paidion)’은 주로 7세 미만의 미숙하고 이해력이 부족하며 엄한 교육을 필요로 하는 존재를 지칭하는데, 마가는 특히 이 개념을,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약자의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예수와 하나님이 둘이 아니듯이, 어린이와 예수도 둘이 아니라는 선언이다. “...사회학적 차원에서 조명된 어린이를 예수는 자기 자신과 일치시키고 있고, 그를 영접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김명수, 『원시그리스도교 연구』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9), 253.
한편, 대승불교에서 보는 어린이관도 이와 상관성이 있다. 거기서는 어린이가 미성숙한 존재가 아니라 이상적인 인간상인 ‘보살(菩薩)’로 나타난다. 타자를 이롭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자기도 이롭게 되는 자리이타행(自利利他行)을 실천하는 이상적 구도자로 어린이가 묘사되고 있다. 특히 <화엄경>의 “대열반경”에 보면, 보살이 닦아야 할 다섯 가지 수행(五行; 聖行, 梵行, 天行, 嬰兒行, 病行) 가운데 ‘어린이 수행(嬰兒行)’이란 것이 있다. 갓난아기와 같은 마음으로 자비를 베푸는 수행이 그것이다. 밀교의 경전 가운데 하나인 “대일경”에서도 중생이 선심(善心)으로 해탈에 이르는 8단계 가운데 맨 마지막 단계를 ‘영동심(嬰童心)’이라고 말한다. 어린이의 마음은 잡념이 없기 때문에, 해탈에 가장 근접해 있다는 것이다. 황옥자, 『불교아동교육론』(서울: 불교시대사, 1994), 27-28 ; 성결신학연구소 홈페이지(이신건 박사 운영, http://sgti.kehc.org/)의 ‘어린이 신학’ 참고.
어쩌면 미야자키 감독은 이러한 불교적 관점에서 힌트를 얻어 어린 소녀(童女) 치히로를 현대 자본주의 문명의 중병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할 보살의 현신(顯身)으로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치히로는 에고(我相)가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누구를 만나도, 그 상대가 자기를 이롭게 하든지 해를 입히든지 상관없이 마음을 나눔으로써 친구가 된다. 한없이 연약하고 무력한 소녀일 뿐인데, 그런 그가 강하고 힘센 자들을 무너뜨리고 자기 가족뿐만 아니라 온천장에 붙잡혀 있던 노동자들을 해방시키며 신마저 구원하는 엄청난 능력을 발휘한다. 노자는 도(道)를 부드러운 물에 비유하였다.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입니다. 물은 온갖 것을 위해 섬길 뿐, 그것들과 겨루는 일이 없고,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을 향하여 흐를 뿐입니다. 그러기에 물은 도에 가장 가까운 것입니다.”(도덕경, 8장; 78장 참고) 노자, 『도덕경』, 오강남 풀이 (서울: 현암사, 1995). 47.
아상(我相)이 없는 치히로야말로 노자가 말하는 물과 같은 존재일 것이다.
5. 둥글게 둥글게, 다시 부르는 노래
우리는 이러한 치히로의 모습을 앨리스 워커(Alice Walker)의 소설 『더 컬러 퍼플』에서도 만날 수 있다.
하나님이 나 위해 무엇 해 주었나요? ... 그는 린치 당한 아버지와, 미쳐 버린 어머니와, 더러운 개 같은 의붓아버지와 어쩌면 절대로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될 여동생도 주었죠. 어쨌든 내가 기도드리고 편지한 하나님은 인간이에요... 그리고 내가 아는 다른 모든 인간과 똑같이 행동하고요. 치사하고, 잊어버리기도 잘하고, 비열해요... 내가 한 마디 해두겠는데, 불쌍한 흑인 여자들 하는 말에 하나님 조금이라도 귀 기울였다면 세상이 달라졌을 거예요... 하나님 저 높은 곳 앉아 귀머거리 노릇만 하며 영광을 누리는 모양이에요... 그는 몸집 크고, 나이 많고, 키도 크고, 수염이 허얗고 백인이죠. 그는 하얀 옷을 입었고, 맨발로 돌아다녀요...
성경 읽으면 하나님이 백인이라는 생각 저절로 들어요... 난 하나님이 인간이고 백인이라는 생각 들자 그에 대한 관심 잃게 되었어요... 나 이렇게 믿어요. 하나님 당신 마음속과 다른 모든 사람 마음속에 살아요. 당신 하나님과 더불어 이 세상에 왔어요. 하지만 자기 내면에서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만 하나님 찾게 된답니다. 때로는 찾으려 하지도 않거나 무엇 찾는지 알지 못할 때 그것이 그냥 스스로 나타나기도 해요... 그래요 그것이죠. 하나님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며, 그러니까 그것이죠. 앨리스 워커, 『더 컬러 퍼플』, 안정효 역 (서울: 한빛문화사, 2004), 218-223.
앨리스 워커의 『더 컬러 퍼플』에 나오는 ‘씰리’와 ‘슈그’의 대화이다. 여성 중에서도 더 가난한 하층 계급의 흑인 여성으로서 지지리도 고단한 밑바닥 인생길을 걸어온 두 사람이 전통적이고 대중적인 하나님 이해를 떠나 진실로 자기 삶에 유의미한 원천으로서의 하나님을 재발견하는 영적 각성이 담겨있다. 슈그의 고백에서 하나님은 더 이상 신인동형론적이거나 초월적ㆍ유신론적 이미지가 아니다. ‘그것’으로 경험된 이 하나님은 “지금 존재하거나 과거 언제나 존재했거나 앞으로 언젠가 존재할 모든 세상만물”그 자체로서, 우리가 “만물의 한 부분이며 전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는 느낌”에 사로잡힐 때, 우리 안에서 슬며시 나타나는/탄생하는 그런 하나님이다. Ibid., 223.
인생에서 만난 거의 모든 남자들로부터 강간과 폭행의 대상이 되고, 의붓아버지와의 사이에서 난 두 자녀까지 빼앗기며, 기껏 시집을 가서는 전부인의 소생들로부터 푸대접에 온갖 멸시를 당하는 씰리를 보면, 도대체 그를 살아있게 하는 힘이 무엇일까,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과연 무슨 기운으로 이 야만적이고 배반적인 생을 지속해 나가는가? 그리고 그에게 있는 무엇 때문에 결국 모든 존재들, 심지어 의붓아버지와 남편과 슈그와 의붓자식과 며느리와 여동생과 친자녀 모두 그에게로 돌아와 안식하는가?
씰리는 글도 모르는 바보라 무시당하지만, 자기를 강간하고 때리고 욕하고 다시 강간하는 의붓아버지와 남편의 악행을 무조건 용서할 만큼 바보는 아니다. 그에게는 자기를 노예취급하고, 또 자기가 사랑하는 슈그를 창녀라 욕하는 시아버지의 커피 잔에 침을 탁 뱉어서 능청스럽게 갖다 줄 만큼의 귀여운 복수심도 있다. 하지만 그는 결정적으로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때려본 적 없” Ibid., 51.
는 사람이다. 그는 한마디로 싸울 줄을 모른다. 화가 나는 것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으나, 그 감정을 폭력적인 방법으로 풀어낼 줄은 모른다. 한마디로 ‘삭힘’의 영성으로 ‘살림’을 해나가는 그런 여자다.
씰리는 마침내 하늘 저 높은 곳에 앉아서 땅의 지배-종속 관계를 떠받치는, 백인 남성으로 육화된 하나님 상을 과감하게 떨쳐 버린다. 그리고는 아래로부터, 내면으로부터 생명력의 원천이 되는 하나님 상을 새롭게 재구성한다. 그 하나님은 만물의 상호 연관성과 상호 의존성을 부양하면서 영원토록 생과 사의 순환 리듬에 몸을 맡긴 채, 우리가 들에 핀 자주빛깔 꽃 한 송이에 기뻐할 것을 기대하는, 우리로 하여금 나무와 꽃과 바람과 물과 바위의 기쁨에 참여하도록 초대하는 그런 하나님이다.
이러한 통찰은, 스퐁 감독이 던진 화두와 같은 맥락에 서있다. 스퐁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로 옮겨간다면, 그리고 하나님을 “파악하는 것”에서 “경험하는 것”으로 옮겨간다면, 더 나은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제안한다. 존 쉘비 스퐁, op.cit., 92.
그렇다면 폴 틸리히(Paul Tillich)가 일러준 대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세상 밖의 높은 곳(eternal height)’을 바라보지 않고, 그 대신에 ‘내면의 깊은 곳(internal depth)’으로 눈을 돌린다면, 어떻겠는가?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질까?
자기 몸/성의 경험을 소중히 받아들이게 된 씰리는 비로소 노래를 흥얼거린다. 슈그(가수)의 노래들이 씰리에게도 전염되었다. 노래하는 씰리는 더 이상 폭군 아버지와 남편에게 짓눌려 기죽은 노예가 아니다. 이미 가부장적 사회 규범으로부터 출애굽을 단행한 씰리는 아무에게도 자신의 노래를 빼앗기지 않을 만큼 지혜롭고 용감해졌다. 들에 핀 자주빛 꽃을 보고도 노래가 흘러나오는 우주적 기쁨에 참여하게 되었다.
매튜 폭스(Matthew Fox)는 우리가 영성을 이야기하면서 이제 ‘야곱의 사다리’ 오르는 짓을 그만 두자고 말한다. 매튜 폭스, 『영성-자비의 힘』, 김순현 역 (서울: 다산글방, 2002), 제2장 참고.
야곱의 꿈에 대한 남성적 해석, 곧 “초월적인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 대지에서 벗어나는 것” Ibid., 96.
은 “몸과 대지와 물질과 어머니와 관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과 다르지 않다.” Ibid., 101.
이렇게 땅을 버리고 위/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영성이라고 생각하는 한, 여기에는 “양육과 돌봄과 땅성(earthiness)을 배제하는 가부장제의 전제가 깔려” 있기 마련이고, 따라서 그러한 전제를 가진 남성들과 남성들의 제도는 필연적으로 “어린이와 여성”에게 위해를 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Ibid., 94.
그러므로 폭스는, 사다리를 오르느라 힘에 겨워서 웃거나 기뻐할 겨를이 없는 그런 난폭한 영성 말고, “사라의 원무(圓舞)로 대표되는 웃음과 기쁨의 영성” Ibid., 107.
을 취하자고 권한다.
여성과 영성은 글자 형태상 ‘동그라미(O)’ 하나 차이다. 원은 지구와 자궁의 전형적인 표상이다. 텅 비어있으되, 그렇기 때문에 뭇 생명이 깃들어 살 수 있는 생명의 요람이고, 하나의 중심이 해체된 자리에, 서로 연결된 무수한 주변이 중요하게 부각되는 민주적이며 비폭력적인 구조의 상징이다. 이러한 이유로, 폭스가 말하는 ‘사라의 원무’는 오늘의 여성이 적극적으로 육화(embodiment)해야 할 영성-실천의 모범이 아닌가 생각된다. 둥글게 둥글게 크고 작은 원을 그리며 춤추고 노래하는 자리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고, 지배자도 노예도 없으며, 다만 함께 어울려 춤추는 벗들의 환희와 환대만이 있을 뿐이다.
남보다 앞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정상에 서라는 메시지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논리에 부합되는 것이지, 이 시대가 요구하는 생명의 영성은 아니다. 우리 안에서 움(womb)터야 하는 영성은 함께 노래하고 춤출 줄 아는 영성이다. 누가 내 ‘위’에 있는가보다 누가 내 ‘옆’에 있는가가 더 중요한, 그가 없이는 우리 모두의 춤이 중단되고 말리라 여기면서 그를 소중히 모시는 살림의 영성이다. 치히로와 씰리가 보여준 것은 바로 그러한 몸통한 영성(embodied spirituality)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자기 자신과 다른 생명의 치유자요 구원자가 될 수 있었다.
우리가 유배지를 벗어나 귀향하는 길은 몸통한 영성으로 생명의 노래를 부르며 자비의 춤을 추는 길밖에 없다. 자신의 본래 이름이 ‘생명(하와)’인 것을 잊지 않았던 수많은 선배 자매들이 시작한 춤과 노래가 우리를 통해서도 계속 이어지기를... 둥글게 둥글게!
" 생태여성주의와 기독교윤리" (한들출판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