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읽기 난감한 책이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커서 본문보다 주해가 더 많다.
하지만 한번쯤은 읽어볼만하다.
더욱이 최부의 행로를 따라 그려지는 자세한 주해는
지리공부하는데 제법 도움이 될 것 같다.
감상은 따로 할 것이 아니라 마침 중국사람의 평가가 있어
그대로 옮긴다.
글쓴이: 갈진가(葛振家) 북경대 교수, 한국학연구중심 부소장
글이 나온 곳: 제2회 한국 연구 환태평양 국제회의 논문(1994 7.26-28. 동경 발표)
갈진가 편저 「최부표해록연구」
제목: 표해록 재평(再評) -동방견문록등 역사상 외국인 중국기행과 비교참조하여-
번역: 金藝花, 중국 조선족으로 중국어 통역관 정리: 최철호
"비교가 없으면 감별(鑑別)이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명언이다.
사물자체는 임의의 상황에서 모두 비교되며 존재하는 것이다.
조선의 학문 고적인 "표해록"의 가치에 대해서는 표해록 초보탐구(표해록 중국 완역본)에서 이미 초보적으로 언급하였다.
본문은 "동방견문록"등 역외(域外) 중국에 대해 기술된 저작을 참조하여 재탐색하고 토론하고자 한다.
역사상 외국인의 중국기행
"동방견문록"(馬可波羅 여행기)을 이야기 하면 자연히 중국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이와 필적하는 "표해록"은 도리어 세인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특히 중국인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옛부터 중국이 세계에 대해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시에 세계도 중국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 과정 중 "동방견문록"이란 한 책만으로만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세계의 중국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동방인은 서방인보다 훨씬 더 깊은 인식을 갖고 있었다.
우선 역사상 대표적인 몇 부의 중국기행에 대해 간략하게 비교 소개를 하겠다.
"입당구법순례행기(이하 입당기라 칭함)"의 작가인 일본 스님 엔닌(794-864)이 일본 인명조 승화 5년(당 문종 개성3년 공원 838년)인 45세 때에 당나라 사절 등원상사(藤原常嗣)의 일행을 따라 당나라에 들어 갔다.
그는 중국에서 9년 7개월간 당 문종, 무종, 선종의 3대를 걸쳐 구법 순례하였는데
그의 발자취는 지금의 강소, 안휘, 산동, 하북, 산서, 섬서, 하남 등지에 널리 남겨져 있다.
입당기는 그가 10년 동안 당나라를 여행하면서 자신의 견문을 기록하였는데 원본은 이미 유실되었다.
일본 전적에 의하면 일본 후삼조 연구4년(송 신종 희년 5년, 공원 1072년)에 송나라에 들어온 일승 성심(成尋)이
송 신종을 알현하였을 때 엔닌의 입당기 정3권을 증정하였다 한다.
이는 그 당시 이미 입당기가 세상에 전해지고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며 아울러 송 신종때 중국에 들어온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1936년 중국에서 입당기 석인본이 간행되었으며
1986년 상해 고적출판사에서 고승보(顧承甫), 하천달(何泉達)의 점교본(点校本)이 발간되었다.
"동방견문록" 일명, "馬可波羅여행기"(이하 견문록이라 칭함)의 작가는 이태리의 여행가인 마르코폴로(약 1254-1324)이며
그는 베니스의 상인 귀족 가정에서 태어났다.
1271년(몽원 지원8년) 당시 17세인 그는 부친과 삼촌을 따라 실크로드로 중국여행을 시작했다.
중국에 들어 가서는 대체로 현장이 인도에 가서 취경할 때의 도정을 따랐는데 방향은 반대였다.
그는 3년 반의 시간을 거쳐 1275년 몽고 대한(大汗)이 거주하던 상도(上都, 지금의 내몽고 다륜 이북)에 이르렀다.
그 후 줄곧 중국에서 여행하였고 원조에서 응차(應差)로 있기도 하였다.
1291년(원 지원 28년)에 이르러서야 중국을 떠났다.
그는 중국에서 17년간 생활하였는데
그의 발자취는 지금의 산강, 감숙, 내몽고, 하북, 산서, 섬서, 사천, 서장, 운남, 호북, 강서, 절강, 복건 등지에 널리 남아 있다. 견문록은 약 20만자로서 모두 동방에서의 견문을 기록하였으며 중아세아, 서아, 남아, 동아 등 많은 나라의 정황도 곁들였다. 그 중 3/4인 약 15만 자는 중국에 관한 것이었다.
견문록은 마르코폴로의 친필이 아니고 그의 구술에 의하여 친구가 프랑스어로 기록, 정리한 것이다.
1477년 독일어로 된 역본이 출판되었는데 이 번역본이 첫번째 인쇄본인 것이다.
연구 통계에 따르면 지금까지 세계 각종 언어로 된 번역본은 수십종에 이른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마르코폴로에 대한 소개를 처음으로 1874년 북경 동문관 출판의 "중서견문록" 제 21호에 영당거사(暎堂居士)가 쓴 "원대서인입중국술(元代西人入中國述)을 실으면서부터이다.
청나라 말기 위이(魏易)가 처음으로 "견문록"을 번역하여 "경보(京報)"에 연재하였고 1913년에 완역, 출판되었다.
이 때 제목은 "원대객경마가박라유기(元代客卿馬哥博羅游記)라 하였다.
이후 여러 종류의 번역본이 나왔다.
금세기 80년대 중국과 외국이 합작하여 텔레비전과 영화로 "馬可波羅"가 제작 촬영되었다.
견문록에는 사실 누락이 많은데 특히 중국의 가장 대표적인 만리장성과 차문화에 대해 일언반구의 언급이 없어
그가 중국에 와본 적이 없을 것이라는 의문을 남기고 있다.
이는 도리가 없는 말은 아니며, 차후 이 의문이 해명되기를 기대한다.
중국기행(이하 기행이라 함)의 작가, 중아인(中亞人)인 싸이드 아크바르 카타이는 이슬람 교인이나 국적은 분명치 않다.
책자에는 그가 어떤 경로로 중국에 왔는지 또 중국의 어느 지방을 다녔는지 기술되어 있지 않으나
그는 명 무종 정덕 시기에 중국에 왔다고 한다.
기행은 1516년부터 3개월간 중국에 머물면서 약 7만자의 중문으로 쓰여졌는데 당시 중국사회 각 방면의 정황을 서술하였으며 지리, 종교, 군대, 창고, 황제, 궁정, 사법, 학교, 화폐, 민속 부분까지 연계시켜 기술하였다.
1936년 장성랑(張星 )이 중국 "지학잡지(地學雜誌)"에 기행을 소개하였고,
1988년 장지선 등이 페르시아 문의 카이로(Cairo) 수초본(手抄本)과 파리 수초본, 아프샤르(Afshar)의 신 페르시아 문본 등에 근거하여 처음으로 중국어 완역본을 출판하였다.
표해록의 저자 최부(1454-1504)는 조선조정의 하급관원으로서 조선 성종(명 홍치원년 공원 1488년)때 사람이며
그당시 35세였다.
그는 공무로 제주에 출장중 부친의 사망비보를 받고 돌아오던 중
그가 탄 배가 풍랑을 만나 일행 42명과 함께 조선 제주도 근해에서 중국의 절강성 태주부 임해현까지 표류해 왔다.
처음에 왜구로 의심받았다가 후에 여러 조사심문을 받은 후에야 왜구의 혐의를 벗어났다.
그들 일행은 수로로 운하를 거쳐 북경에 들어갔다.
다시 육로로 압록강까지 와서 조선으로 돌아갔는데 중국에 머문 시간은 4개월 반이었다.
최부는 귀국한 후 즉시 명을 받아 기행록을 엮어 진정(進呈)했는데 조정의 깊은 중시를 받았다.
표해록은 유창한 한문으로 5만 여자로 기술되어 있는 바,
우리나라의 명 홍치 초년과 명조 전기 중국의 사회정황, 정치, 군사, 경제, 문화, 교통및 시정풍정 등 다방면에 대해 기록했다. 표해록은 조선 임금에게 진정한 내부 보고서로 일류의 얻기 어려운 정보를 제공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내부보고는 조정에서만 열람이 가능했으므로 일반인에게는 유포될 수 없었다.
거의 100년 후인 1573년에 이르러서야 최부의 외손인 시임교서제조(時任敎書提調) 유희춘(柳希春)에 의해서 교정본(校正本)으로 간행, 세상에 알려졌다.
일본에서는 1769년에 표해록을 일본문으로 번역하여 "당토행정기"라고 개명했다.
1965년에 미국에서 "금남표해록역주"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1979년에 최부의 방손인 최기홍(崔基泓)에 의해 표해록을 본국문으로 서울에서 출판되었다.
1968년에 평양에서 한문대조본 표해록을 발간, 조선고전문학선집 제 29책에 수록되었는데
한문본 누락이 많아 심히 불완전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이 "중원을 묘사한 거대한 필"은 아직도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
필자는 1987년에 평양에서 이 책을 읽은 후 고려대학 신승하 교수의 도움으로 완전한 통행본을 열람 1년 간의 시간을 거쳐 정리, 점주, 평가를 진행하였으며 1992년에 중국에서는 처음으로 간행했다.
"동방견문록"은 서방인들이 동방문명을 알게 하는데 있어서 개척적 문헌이라면
"중국기행"은 중아세아인이 중국을 이해하는데 처음으로 지남침 역할을 하는 책이다.
"입당구법순례행기"가 동으로 인접한 일본에서 중국 상황을 기재한 대표적인 책이라면,
표해록은 가까이 인접한 조선의 중국에 대한 최상의 지적묘사 작품이다.
역사, 문화의 배경 차이로 서방인의 중국에 대한 인식은 동방인에 비하여 너무나도 미약하다.
즉 동방인들이 전부터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는 사물이 서방인에게는 천방야담(千方夜談)인 것이다.
서방인들이 일상적으로 알고 있는 사물 또한 동방인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하고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같은 동방인 일지라도 한문 문화권에 있는 조선, 일본인의 중국문화에 대한 이해는
이슬람권에 있는 중동 지역인보다 훨씬 깊다.
같은 한문 문화권내에 있다하더라도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최부는 구법인 엔닌보다
중국의 역사, 문화에 대해 더욱 더 상세하게 숙지하고 있으며 중국에 대해 더 본질적인 이해를 지니고 있었다.
각기 특이한 역사적 의의와 학술적 가치를 지닌 외국인의 중국기행을 탐색하고 토론하는데 있어서
이의 비교 연구는 자연스러운 과제이다.
역사상 외국인의 중국기행은 저자가 모두 지식인들이며 본국인을 위해 쓴 것이다.
본국인들에 중국문명을 인식케 하고 중, 서 문화교류에 이바지하는 중요한 역사적의의를 지니고 있다.
중국인은 외국인 관점으로부터 그들이 미처 살펴보지 못했던 많은 문물을 중국기행을 통해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중국역사에 수록되어 있지 않은 중국사회의 진실한 정황을 서술하였으며
이것들은 우리들이 중국역사를 연구하는데 아주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계선림(季羨林)선생은,
"이러한 책자는 외국인 학자들이 중국을 연구하는데 도움을 줄뿐만아니라 중국인들 자신이 과거를 이해하는데도 도움을 준다"라고 언급했다.「季羨林敎授序, 中國紀行, 三聯書店, 1988, 제3항」
상술한 중국기행은 모두 가치있는 문헌고적임이 틀림없다.
이 중국기행들은 우리 나라의 당, 원, 명시대의 시회정황을 기록하였지만
광도(廣度), 심도, 과학적인 면에서 각기 아주 현저한 차이를 지니고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표해록은 전시대를 초월했고 동시대에서 빼어났다.
다영역, 다방면의 묘사
"표해록" 등 중국기행은 일반 여행기와는 다르다.
표해록은 중국의 각기 다른 시기의 정치, 군사, 경제, 문화, 민속 등 각 방면의 견문과
우리 나라 역사상 보지 못했던 상세한 역사자료를 기술했다.
이 점이 표해록의 학술가치를 돌출케 하고 있다.
제왕, 공업(功業), 권위, 궁전, 예의, 정벌… 이것들은 역사상 제왕정치의 주요내용으로서
역사상 많은 외국인의 중국견문에 있어서 중심을 이루고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동방견문록"은 많은 부분에서 쿠빌라 황제의 위업과 권위를 기술했다.
「동방견문록 제2권 제1장」 예를 들면, "황제의 나얀 토벌"
「동방견문록 제2권 제3장」"칸발리크 부근의 웅장하고 호화로운 궁전"
「동방견문록 제2권 10장」"황제의 귀족 접견시 의식과 귀족들의 대향연"
「동방견문록 제2권 14장」"황제가 환락으로 세월을 보내는 방식"
「동방견문록 제2권 21장」"황제의 미엔과 방갈라 왕국의 정복 방법"
「동방견문록 제2권 51장」등을 상세히 기술했다.
"중국기행"에서도 상당한 부분에서
"싸스터스 왕국"「중국기행 제6장」
"중국감옥의 정황"「중국기행 제7장」
"연회와 예의"「중국기행 제10장」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기술한 주요내용은 불교방면으로 이 또한 사회, 정치, 경제라는 대배경을 떠나지 않았다.
구법순례행기도 여러 차례 당, 무종시의 정치분야, 궁정투쟁, 대회국(回國) 용병, 회창멸불(會昌滅佛)의 정황을 기술했다.
"표해록"은 간단히 제왕의 공적과 업적으로부터 중국의 사회, 정치를 묘사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당대의 정치 중 중요한 것 즉, 명대의 정치, 군사의 주요측면인 해금(海禁), 해방(海防)을 상세히 고찰, 기술했다.
왜구는 명나라의 일대 우환으로 관민의 신경을 날카롭게 했다.
우리 나라 역사에 수록된 많은 기술(명사 91권, 志67, 兵 3)은 전편적으로 명대의 변방과 해안방호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표해록에서 제공한 재료는 더욱 구체적이고 생동감이 있다.
왜구에 대항한 고성인 도저소에서의 기술을 보기로 하자.
"행렬이 한 성에 도착하였는데 그 곳이 도저소였다. 성을 중심으로 전후 7-8리 거리에는 군졸이 갑옷을 입고 창, 총, 방패 등으로 무장하고 지키고 있었다. 그 성에는 중문이 있었고 문은 철로 되어 있었다. 성곽위에는 성을 수비하는 초소가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표해록 권1, 정월 19일」,
"성곽은 마치 관방과도 같았다."「표해록 권 1, 정월 18일」
이러한 도저소에 관한 서술은 척계광이 그 지역 주민을 동원, 왜구에 대항하기 위해 성루를 쌓은 석성(石城)보다 70년이나 더 이른 것이다.
다시 표해록을 보면 왜구의 침입을 수차례나 받은 절강성 태주부 임해일대의 군민의 고도의 해안 방위의식에 대해서도 생동한 기술이 되어 있다.
즉 당지 주민들은 의심되는 사람만 보면 한편으로는 포위하면서 캐어 묻고, 한편으로는 관부로 몰고 갔다.
"동네 사람들 중 어떤 사람은 북과 징을 치고 하여 길에서 북치는 소리, 징치는 소리가 요란하고 그 소리에 따라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 들었다. 그들은 떠들어 대면서 이리 저리 날뛰는가 하면 좌우를 끼고 전후를 가로 막으며 우리 일행을 몰아 세워 끌고 가면서 마을마다 차례차례로 체송하고 있었다."「표해록 권1, 정월 17일」
이러한 실지(實地)의 견문기록 제공으로 명대 연해에서 축성, 증병(增兵), 해안 경비강화, 해금엄수의 역사적 사실을 생동한 실례로 보여주고 있다.
역사상 중국의 사회, 경제를 보면 남북 대운하의 기능과 의의를 소홀히 할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대운하는 중국 남북을 종관(縱貫)하는 인공운하를 가리킨다.
중국에서 운하의 수운(修運)은 진나라통일 전부터였다.
맨처음으로 개척한 절동(浙東)운하는 아마 춘추말기였을 것이다.
각지운하를 대운하로 연결한 것은 공원 610년 수양제 대업(大業)6년이었으며 그후 대대로 수리하였다.
당, 북송, 원, 명, 청의 각대는 대운하에 의존하였는데 다만 정도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각대의 정치중심 즉 국도가 바뀜으로 인하여 대운하의 기점도 각기 달랐다.
그러나 역대정부는 대운하를 정치중심과 경제중심을 잇게하는 생명선으로 남과 북의 정치와 경제를 연계시키는 유대(紐帶)로 간주하였고 역사상 남북의 교통왕래, 군량및 곡물운송의 불가대체의 수상통로였다.
중국 대운하의 기능과 의의는 우선 경제적 효율면에서 표현된다.
"동방견문록" 등 중국기행과 비교해 볼 때
유독 "표해록"만이 중국 역사상 이 교통의 대동맥과 경제 생명선에 대해 상세한 기술을 했다.
마르코폴로는 중국에서 17년간 체재하면서 대운하의 회통하단(回通河段), 제주하단(濟州河段), 황하단(黃河段), 양주운하단(楊州運河段), 강남운하단(江南運河段)을 따라 임청, 동평주, 임주, 정주, 회안, 보응, 고우, 과주, 진강, 상주, 소주, 오강, 항주 등 운하연안의 성시(城市)에 도착하였다.
엔닌은 중국에서 10년 동안 살면서 역시 대운하의 한구 운하단(運河段)을 경과하여 양주, 고우, 보응, 산음, 초주 등지에 가 보았다. 하지만 이들이 중국 역사상 다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이 남북 대동맥에 대한 기술은 너무도 간략하다.
"입당기"에 당대 운하에 대한 기술은 단지 몇 글자에 그칠 뿐이다.
":수로로 양주를 가며 보니 물소 두 마리가 배에 끈으로 묶여 있고… 도랑의 넓이는 2장 남짓하고 물의 흐름은 곧고 막힘이 없다. 수양제가 바로 판 도랑이다."「입당구법순례행기 권1, 7월 18일」
"견문록"에서 원나라 운하에 관한 묘사중 중요한 것은 아래와 같다.
임청: 한 갈래의 넓고 깊은 하류가 여기를 흘러간다.「동방견문록 제2권 제 61장」
동평주: 강위에 돛배들이 수없이 많이 떠있다.「동방견문록 제2권 재62장」
회안: 대량의 상품 집산지이고 운하를 통해 화물을 각지에 운송, 판매한다.「동방견문록 제2권 제67장」
과주: 여기에는 매년마다 대량의 보리와 쌀이 집중되며 이 중의 많은 부분은 칸발리크로 운송된다「동방견문록 제2권, 제72장」.
이 운하의 가치는 남북국토를 관통시키고 사람을 놀라게 하는 그 길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운하가 연안의 허다한 도시민에게 무궁한 복을 가져다 준 것이다.「동방견문록 제2권 제72장」
"견문록"에서 과주운하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팠다고 기술한 것은 역사사실과 부합되지 않으며, 확실한 착오이다.
"이 운하는 황제의 명령에 의해 판 것으로 그 목적은 작은 배가 다만 한 갈래의 대하에서 다른 한 갈래의 대하로 갈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만자성에서 직접 칸발리크에 도착할 수 있으며 해상을 거칠 필요가 없다." 이 문장의 뜻으로 볼 때 "이 운하"는 과주운하를 가리킴이 분명한 것이다.
마르코폴로의 중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이해로 볼 때 아마도 과주운하의 내역에 대해서는 명확히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수, 당때에 경구(京口)와 양주사이를 배들이 오가려면 반드시 과주를 돌아 큰 강에서 수십리를 돌아서 가야 하는데 시간만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파도와 풍랑을 만날 위험이 있다.
당 중업개원(공원 737년) 윤주 자사(刺史) 제한이 과주에 길이가 25리 되는 인공 하도(河道)를 팠다.
이것이 바로 과주운하이며 역사상에서는 이루하(伊婁河), 신하(新河)라고 부른다.
당나라 시인 이백은 "題瓜州新河錢族舍人賁"의 시에서, "齊公業新河 萬古流不絶"이라 찬미했다.
마르코폴로는 이 공덕을 몇 백년후인 황제의 공으로 돌렸는데 이는 착오인 것이다.
마르코폴로와 비교해 볼때 조선인 최부는 표해록에서 명나라의 중국대운하에 대해 비교적 완전한 기술을 하였다.
명 홍치년간은 운하사상 비교적 창통(暢通)한 시기로서
의외의 표류로 말미암아 최부는 경항운하가 관통된 후 맨 처음으로 전정(全程)을 다녀간 조선인이 되었다.
"표해록"에서 명대 전기에 운하를 수운한 정황에 대한 기술을 보자.
맹성역(고우주성 남쪽 3리 떨어진 곳에 위치함)에서 바라볼 때,
"고우주의 돌로 쌓은 새로운 제방은 길이가 30리 가량되었다."「표해록 권2, 2월 24일」이 기술과
「淸乾隆淮安府志 권6, 운하」에 기재된 "영락 19년(공원 1421년)에 고우주에서 새로운 호수제방을 수축", "호수의 길이는 35리"와 일치하고 있다.
회음역을 거쳐 범광, 보응, 백마 제호(諸湖)를 지났다. "범수포로부터 회음역까지 동쪽 강기슭에 돌 혹은 목책으로 긴 제방을 쌓아 연이어져 있었다."「표해록 권2, 2월 26일」이 기술과
「명사 권 85, 河渠志三, 運河上」의 "築 보응, 범광, 白馬諸湖堤" 기술과 서로 부합된다.
회안에서 회구(淮口)의 이풍, 청강, 복흥, 신장에 있는 4개의 수문을 지났다.
「명사 권85, 하거지삼, 운하상」에서는, "회구에 4개의 수문을 설치하였는데 이풍, 청겅, 복흥, 신장에 각각 있었으며 시간에 맞추어 닫고 열었다." 이것이 바로 명나라 때 운하를 다스린 중요한 공정중의 하나인 開淸江浦河道工程이었다.
"표해록"에 수록된 협구역에서 황가갑에 이르렀는데 수문 위쪽에 미산이 있고 "만익비"가 있었다는 귀절은
운하사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문헌이다. 그 비석내용을 간략하게 옮겨본다.
"홍유 我朝太祖高皇帝는 …" 「표해록 권2, 3월5일」(작성자 주: 본문 생략)
그 비문으로 인하여 대운하는 명대에 이르러 운도(運道)의 기본틀이 잡혔고
남북 물자 및 문화교류의 대동맥으로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명대 운하 수운의 중점은 주로 양, 회, 서, 제 지대였다.
이러한 비문의 소개는 우리 나라 사적과 지서(志書)에서 뿐만이 아니라 우리 나라 운하사 연구자의 인용과 연구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명대운하의 제방수문에 대해 표해록은 비교적 상세한 기록을 했다.
"강물이 다량으로 쏟아지는데 대비하여 언과 파를 설치, 일시에급하게 쏟아지는 물을 막았다…"「표해록 권 3, 부기」(작성자 주: 본문 생략)
최부는 운하로 항주에서 북경에 이르는 사이에 그 연해안의 모든 크고 작은 성시를 경과했으며 항주, 소주, 양주, 회안, 임청, 덕주, 천진 등 운하로 인하여 공업이 발전한 상황을 아주 실제적으로 기록했다.
표해록은 중국의 대운하에 관해 다방면으로 실제적인 기술을 했다.
이러한 학술적 가치를 갖고 있는 기재는 중국의 남북운하사를 연구하는 데에 아주 진귀한 첫째가는 역사적 재료인 것이다.
"표해록"은 최부가 한문으로 적은 것이다.
내용 중에 많은 부분을 관민과의 대화를 적었다. 엄격히 말할 때 필담은 완전한 구술은 아니지만
상당한 부분이 구술대로 적혀 있다.
표해록이 언어학 방면에 있어서의 학술가치는 언어학자들이 탐구해야 할 것이기에
책속에 나타난 몇개의 단어들에 한해서만 보기로 하자.
"恁(중국어 발음 '넌'" 「표해록 권1, 윤정월 17일」:
(중국어 발음 '닌')으로 원, 명대에 사람들이 주로 사용.
"我每(중국어 발음은 '워메이'"「표해록 권1, 윤정월 22일」:
我們(중국어 발음 '워먼')으로 '메이'는 '먼'과 같이 사용되고 원, 명대에 사용.
"曉得(중국어 발음으로 '쑈우더'" 「표해록 권2, 초8일, 2월 18일」:
중국 남방인들이 주로 사용하였고 현대 한어에서도 상용.
"표해록"에서 보여주다시피 5백년 전에 중국 남방사람들이 벌써 일상적으로 시용하고 있었다.
항주부에서, "한 사람이 와서 묻기를: "… 曉得不(니 쑈우더 뿌:당신은 아는가)",
석산역(항주 북쪽)에서 최부는 한 관인 질문에 대답할 때 다음의 단어를 사용하여 즉, "…不曉得(뿌쑈우더)"라고 대답함으로써 모른다는 뜻을 나타냈다.
장강이북을 지나면, "曉得(쑈우더)" 라는 단어는 표해록에서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북경 兒化('얼'화) 단어는 가끔씩 나타나곤 한다.
'얼'化음(중국어 발음으로 혀를 감아 올려 발음하는 것을 가리킴)은 중국 북방 구어에서 아즈 특색있는 어음변화이다.
표해록에 기재된 '얼'화음 단어는 모두 북방의 지명에서 발견된다:
千溝兒「표해록 권2, 3월 초1일」 : 중국어 발음으로 "깐꺼우울"
(작성자 주: 이하 예문 생략)
상기 '얼' 화음은 강북의 정주, 서주, 패현, 임청, 덕주, 천진, 통주, 난주, 영원, 요양에서 압록강까지의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당지의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표해록에 기재된 것이다.
이는 추호의 의문이 없을 것이다.
"大大的烏也機(중국어 발음:따따더 우예지)"「표해록 권2, 3월 초8일」는
"大人"을 나타내며 "大大的"은 일어의 훈독으로 "大"를 의미한다.
"烏也機"는 일어의 음독으로 "大人"을 나타낸다.
이 기재는 500년 전의 중국인들이 이미 일어의 훈독 "大大的"을 사용할 줄 알았을 뿐만 아니라
"大大的烏也機"처럼 훈독과 음독을 혼용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표해록을 보존, 연구해 간다면 중국언어사 방면에 아주 얻기 어려운 참증적 재료를 제공해 줄 것이다.
심도있는 비교적 기재
"표해록"에 기재된 것은 당연히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것이며 겉으로 평탄하고 직설적인 것 같지만
이는 결코 평면적인 것이 아니다.
깊이가 있고 비교가 있는 것이다.
명대 정치의 가장 큰 폐단은 환관의 해악이다.
표해록은 산동성 노교갑(魯橋閘)위에서 한 장면에 대한 기술을 했다.
"성이 유씨인 태감(내시)이 명령을 받아 서울로 올라갈 때 오색 깃발이 휘날리고 갑옷과 투구를 착용을 하고 종과 북을 두드리고 관현악기로 길거리를 울리게 했으며 강하를 진동시켰다… 유씨는 뱃사람들을 향해 마구 총을 쏘아대니 그 광란은 황당하기 그지 없다."
환관의 광란을 표해록에 넣은 것은 최부의 식견의 높음을 한층 더 설명해 준다.
이 기술은 명대사회 정치의 심각한 모습을 반영시키고 있다.
"입당기"는 불교를 주지로 한 중국기행으로 당나라 사원, 종파, 승제, 의례, 법규 및 조정의 불교정책에 대해 상세한 기록을 남겨 불교사의 연구에 중요한 문헌이 됐지만 시회, 정치, 경제면에서는 광도와 심도에 있어서 표해록과는 비교가 안된다.
엔닌이 당나라에 왔을 때 당나라는 이미 후기에 들어서고 있었다.
번진(藩鎭)의 할거는 당후기의 시회, 정치에 하나의 큰 악폐였다.
9세기 초에 이미 "천하는 방진(方鎭)으로 갈래 갈래 나누어졌다."라고 말할 지경이었다.
그때 엔닌은 입당기에서 회창멸불시 하북 번진과 이에 따른 조정의 태도는 부동(不同)하다는 것만 서술했을 뿐
위에 서술한 당 후기의 악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심각한 기술은 심각한 이해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입신행사에 있어서 유가사상에 입각한 최부는 중국의 역사, 문화에 대해 숙지하고 정통했다.
이는 마르코폴로 등 여러 사람이 소망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표해록은 경전을 인용했는데 논어, 맹자, 효경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 지리 고적인 우공(禹貢)에 대해서도 십분 통달했다.
표해록이 우공에서 인용한 예를 몇가지 보기로 하자.
"대양에서 표류…서북은 바로 우공편에 나오는 청주, 연주 지방이다."「표해록 권1, 윤1월8일」
"소주부에 도착…태호는 우공에 '세금 내는 대상을 정하는데 주나라 직방이 양주수를 좁은 땅'이라 했는데 바로 그곳이다."「표해록 권2, 2월 16일」
"양자강에 도착…양자강이라 했으며…우공에서 '민산도강'이라 했던 게' 바로 여기였다"「표해록 권2, 2월 21일」
"고우주를 지나다…옛적 한주라 했으며…하우때 양자강, 회수가 통하지 못햇기 때문에 우공에 '沿于江海達于淮泗'라 한 데가 바로 이 지방."「표해록 권2, 2월 25일」
"비주를 지나다…우공에서 말한 '사빈부경'의 주에 의하면 '비주에 석경산이 있다 했는데 혹시 옛날 경(磬)을 이름으로 취한 것이 아닌지?"「표해록 권2, 3월 1일」
"방촌역을 지나다…여량홍에 도착…우공에 '治梁及岐'라 했는데 주에 '량은 여량산' 이다."「표해록 권2, 3월 2일」
"개하역에 도착…남왕호에 도착…동쪽에 푸른 벌판이었는데 우공에 '물을 잘 막아 못을 만들었다'는 곳이 여기이며 지금은 인가가 가득 차 있었다."「표해록 권2, 3월 10일」
"개하진을 지나다…동평주 지방에 도착. 동평주는 우공에 '모래가 많고 슴한 땅이다."「표해록 권2, 3월 11일」
"무성현 이북…우공에 '바다를 넓힌 땅, 즉 간척지'가 바로 여기였다."「표해록 권3, 부기」
한 외국인이 처음으로 중국 각지를 여행하면서 실제적으로 중국의 고적을 인용해 가며 참증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더 경탄을 금치 못하는 것은 연도(沿道) 각지의 전고(典故)를 하나하나 지적, 저술하였다는 것이다.
지면의 제한으로 여기에서는 최부가 서술한 중국의 역사 인물과 연관되는 전고만을 뽑아 보기로 하자.
영파부 하지장이 젊었을 때 살던 곳「표해록 권1, 윤 1월 29일」
난정은 누공부 위 천장사 앞에 있는데 바로 왕희지의 수계처이다「표해록 권2, 2월 5일」
하지장의 천추관의 옛터「표해록 권2, 2월 5일」
자유가 대규를 찾았던 시내, 섬계「표해록 권2, 2월 5일」
채옹이 연죽을 발견, 퉁소를 만들었다는 가정의 유지「표해록 권2, 2월 5일」
항주는 오월이었으며 송의 고종때 도읍으로 소위 임안부「표해록 권2, 2월 12일」
오자서묘「표해록 권2, 2월 12일」
서하령 입구의 악악왕묘「표해록 권2, 2월 12일」
허유가 물을 마셨다는 냉천정「표해록 권2, 2월 12일」
소동파가 지은 비문이 있는 표충관비「표해록 권2, 2월 12일」
소동파가 재주를 연마하던 곳, 풍황령「표해록 권2, 2월 12일」
사마온공이 예서로 쓴 제자가 있는 남병산「표해록 권2, 2월 12일」
소동파가 항주에 장관으로 있을 때 건축한 소공제「표해록 권2, 2월 12일」
원소가 주청하여 세운 정덕관「표해록 권2, 2월 12일」
동파가 읊은 남의당 두견화의 옥호원「표해록 권2, 2월 12일」
백낙천이 호석기에서 길고한 석함교「표해록 권2, 2월 12일」
어서로 동파시 '담장농말총상의'를 쓴 편액의 총의당「표해록 권2, 2월 12일」
진시황이 동순하기 위해 배를 탔을 때 배를 매던 곳「표해록 권2, 2월 12일」
고산의 동쪽에 임화정이 은거했던 옛 집터 및 묘「표해록 권2, 2월 12일」
백문공, 임화정,소문충공의 사당인 삼현사「표해록 권2, 2월 12일」
가흥부에서 당 승상인 육치의 옛 고향「표해록 권2, 2월 15일」
범려가 놀았던 태호「표해록 권2, 2월 16일」
오나라가 아름다운 연석으로 건축했다는 연석산「표해록 권2, 2월 16일」
추응부가 중건했다는 보대교「표해록 권2, 2월 16일」
옛 오왕 합려가 오자서로 하여금 성을 축조, 도읍한 소주「표해록 권2, 2월 17일」
오자서가 살았던 서호「표해록 권2, 2월 17일」
구오 태백이 도읍한 무석「표해록 권2, 2월 19일」
오계자의 채읍지인 연능군「표해록 권2, 2월 19일」
∼(작성자 주: 생략)
한고조가 노래하던 가풍대「표해록 권2, 3월 6일」
∼(작성자 주: 생략)
맹강녀가 남편을 찾아왔던 망부대「표해록 권3, 5월 7일」
"표해록"은 위와 같이 많은 중국역사 전고를 인용, 서술했는데
이러한 전고-중국 민족문화 전통의 적정(積淀)-를 통해 중국사회와 윤리도덕을 주제로 한 유가문화
즉, 중용, 질서, 충서(忠恕), 예양(禮讓), 친정(親情), 존로(尊老), 경현(敬賢)의 전통을 반영시켰다.
표해록은 기술중 많은 비교법을 사용하여 평행 비조(比照)를 진행하였으며 그렇게함으로써 문장이 생동하고 심각하다.
예를 들어 중국과 조선에서 각기 출사하는 길인 과거제도의 비교, 양국 환관제도의 비교, 양국 품관의 산(傘), 개(盖), 관, 대의 비교, 양국에서의 손님을 대법할 때의 차, 술 등 각기 다른 국속(國俗)비교를 했는데
이 비교들은 아주 높은 참증가치를 지니고 있다.
더욱이 중국의 대강(大江)남북의 시정(市井)풍속에 대한 비교에서 한층 더 세심한 필치로 묘사했다.
표해록에 기재된 우리 나라 남북의 풍습비교를 보기로 하자.
시사(市肆)물산:
양자강 이남의 모든 부, 성, 현, 위 소재지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웅장하고 화려하지만 진, 순검사, 천호소, 채, 역, 포, 마을, 파 등의 소재지 부근 3-4여리 간 혹은 7-8리 간 혹은 10여리 간, 20여리 간에 주택이 밀집되어 있고 상점들이 연접하여 왕래하는 길조차 좁고 누대는 서로 마주 볼 정도로 외관 좋은 위치에 세워져 짜임새있는 도시들이 고루 분포되어 있었다….(작성자 주: 이하 생략)
주택:
강남은 대개 기와를 가지고 지붕을 얹었고 벽돌로 지었으며 섬돌은 거의 연석을 썼고 간혹 돌기둥을 세운 건물도 있어서 모두 웅장하고 화려했다. 그러나 강북은 왜소한 초옥이 태반이었다.
의관:
강남사람들의 의복은 대개 넓고 큼지막하며 능라, 견, 초, 필단으로 만든 검은 바지에 속옷을 입은 사람이 많고 어떤 이들은 양모 모자나 검은 필단으로 만든 모자… 부녀들의 옷 입은 것은 대대 좌임이었다…창주 이북 여자들의 옷섶은 좌임도 있었고 우임도 있었으며 통주이후에는 거의 우임이었다. 산해관 이동의 사람들은 사람됨이 거칠고 야비하며 의관도 남루했다. 해주, 요동 등의 사람들은 반은 중국 사람들이고 반은 우리 나라 사람이었다. 석문령 이남에서 압록강까지는 모두 우리 나라 사람이 이주하고 있어서 그들의 관상이며 언어및 부녀의 수식류까지도 우리 나라와 같았다.
성정(性情):
강남 사람들은 화순하며 어떤 이는 형제, 어떤 이는 당형제, 재종형제끼리 한 집에서 동거하고 있었다. 오강현 이북은 간혹 부자가 별거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남들이 모두 비난하고 있었다. 남녀노소할 것 없이 모두 승상(繩床)이나 교의(交椅)에 걸터 앉고 있었다. 강북은 인심이 세고 사나왔으며 산동지방에 이르면 사람들이 화목하지 못하고 다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어떤 지방은 살인 강도 등이 많다고 했다. 산해관 이동 사람들은 성격과 행동에 오랑캐풍이 있어 아주 사나웠다.
문화지식:
강남 사람들은 독서를 업으로 삼고 있었으며 어린아이 및 뱃사공이나 선원이라 하더라도 거의 글자를 알아보고 있어, 글로 써서 물어보면 누구든 산천, 고적, 토지, 연혁등을 잘 알아듣고 자세히 알려주곤 했다. 강북은 그와 반대로 배우지 않은 사람이 많기 때문에 물어보면 거의, '나는 글을 안배워 무식하오' 라고들 말했다.
어로:
강마에서는 작은 배에다 대바구니를 싣고 도시락을 가지고 떼를 지어 고기잡는 사람들이 많은데 비해서 강북에서는 제영부 남쪽 왕호등에서만 고기 잡는 광경을 볼 수 있었고 그 외에서는 고기 잡는 도구조차 볼 수가 없었다.
부녀:
강남 부녀자들은 거의 문밖으로 나다니지 않았다. 즉 누각에 올라서서 주렴을 걷고 밖을 관망하고 있을 뿐이며 문밖에 나와서 일하는 여자도 없고 행길에 다니는 여자도 없었다. 그러나 강북에서는 부녀자들이 밭농사를 하며 도주(棹舟)등의 일에 모두 자연스럽게 종사하고 있었다. 심지어 서주, 임청 같은 곳에서는 부녀자들이 화장품 행상을 하며 생활비를 벌고 있다고 하는데 그런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무기:
강남의 무기는 창, 검, 모극(矛戟), 갑옷, 투구, 방패 등인데 갑옷, 투구, 방패 등에는 용(勇)자를 주자(鑄字)하였으며 궁전(弓箭)과 전마(戰馬)는 없었다. 강북에서 비로소 활과 화살을 메고 있는 군인을 보았다. 총주 이동 및 요동 등의 사람들은 거의 활쏘고 말 달리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는 듯했다.
장식:
강남 사람들은 치장을 좋아하여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치장도구로 거울, 머리빗, 대로 만든 칼, 칫솔 등 물건을 상자속에 넣어서 휴대하고 다니는데 강북도 치장하는 것은 강남과 다를 것이 없지만 치장도구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못 보았다.
화폐:
강남시장 안에서는 통화용으로 금과 은을 사용하는데 비해 강북은 동전을 쓰고 있었으며 강남의 아이들에게는 보신용으로 주석으로 만든 패같은 것을 팔뚝에 달아주고 강북 아이들에게는 납으로 만들어서 달아 주었다.
종업:
강남 사람들은 농, 공, 상업에 힘쓰고 있는데 반해 강북 사람들은 놀고 먹는 이들이 많았다.
행로공구:
강남 사람들은 육로로 다닐 때는 가마를 이용하고, 강북 사람들은 말 혹은 노새를 이용하고 있었다. 강남에서는 양마(良馬)를 본 적이 없으나 강북에는 용마(龍馬)들이 많았다.
장제:
강남에서는 사람이 사망하였을 때 명문거족에 속하는 사람들 중에는 사당을 세우고 정문을 세운 사람도 있었으며 보통 사람들은 대개 관을 쓰고 있으나 매장하지 않고 물가에 버리거나 했다. 그래서 소흥부성 주변 같은 곳에는 백골이 무더기로 쌓여 있는 곳도 있었다. 강북의 양주 같은 곳은 선산에 봉분하기도 했는데 어떤 곳은 강변에 혹은 밭두둑에 혹은 동네안에 봉분하고 있었다. 강남에서는 상을 당한 사람이나 중들 가운데는 고기는 먹어도 매운 것은 먹지 않으나 강북은 거의 매운 음식을 먹고 있었다.
상기와 같이 표해록은 우리 나라 남북민속의 특이성을 비교했을 뿐만 아니라 공통점고 개술(槪述)했다.
즉 "그들의 서로 같은 점은 귀신을 받들고 도교나 불교를 숭상하고 있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은 말할 때에 반드시 손을 흔드는 습관이 있고 화를 낼 때는 반드시 입을 찡그리고 게거품을 내면서 말을 하고 음식이 정결치 못하고 서로 같은 그릇과 같은 상을 쓰고 있으며 젓가락도 제각기 일정한 것이 없이 돌려 쓰고 있었다. 이는 반드시 입에 넣어서 씹고 절구통은 모두 돌로 만들었으며 맷돌을 가는 일은 노새나 소를 부리고 있었다. 술집은 술집이란 기를 세우고 행인들은 물건을 어깨에 메고 다니기는 하여도 머리에 이는 법은 없었으며 거의가 상업에 힘쓰고 있었다. 비록 관직을 가진 거족이라 하더라도 몸소 소매 속에 저울을 넣고 다니면서 하찮은 이해일지라도 따지는 사람도 있었다. 관부에서는 일정한 형이 있기는 하나 곤장 같은 것으로 다스릴 때에는 담석지속(소인 등속)이라고 손가락질 하면서 달아나곤 했다."
"표해록"은 연도에서 본 우리 나라의 남북민속 차이와 공통점에 대해 사실적으로 기재했다.
이러한 제일의 재료는 진실하지 않다고 말할 수가 없다.
비록 주마관화(走馬觀花)했지만 일부분에 대한 관찰은 아주 세심했다.
예를 들면 '강남 부녀자의 옷차림은 대개 좌임이었으며 창주 이북의 옷섶은 우임 혹은 좌임, 통주 이후는 거의 우임이었다' 에 대해서는 가히 세치입밀(細致入密)이었다.
또한 강남에서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비교적 간단하며 보통 한 접시의 돼지고기만을 준비한다고 서술했다.「표해록 권2, 2월 18일」
하지만 북방에서는 손님 접대가 굉장한데 그 열정은 너무도 지극했다. 주로 돼지는 통째로 술은 단지로 대접했다.「표해록 권3, 5월 17일, 5월 25일」
보다시피 남방인은 비교적 세심한 반면 북방인은 호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주 생동하고 심각한 묘사라 아니 할 수 없다. 그의 '이를 입에 넣고 씹는다' 는 서술은 누습(陋習)에 속한 것이다.
근엄, 간명, 완정한 기사(記事)
문헌의 가치는 우선 기술의 정밀성에 있다.
"표해록"은 일록체(日錄體)로서 매일 기록을 했으며 매항의 기사마다 모두 구체적인 시간, 명확한 지점과 실제적인 인물이 기록돼 있다.
기술시간은 구체적인 시진(時辰)까지 표기되어 있다:
매상(昧爽, 먼동이 틀 무렵), 지명(遲明, 날이 샐 무렵), 힐조(詰朝, 이른 아침), 평명(平明, 아침), 향만(向晩, 어두어질 무렵), 천장모(天將暮, 해질 무렵), 일모(日暮, 해가 저물음), 석(夕, 저녁), 야이앙(夜已央, 밤중), 자반(子半, 한밤중), 야2경, 야3경, 야4경, 5경, 향서(向曙, 새벽 무렵), 달서(達曙), 일서(日曙) 등등이 그 예다.
표기된 지점과 인물을 장소, 환경, 직책 및 안고 서는 방법에 대해서까지 세밀히 기재했다.
예를 들면 소흥부에서 삼사회심(三司會審)을 접수할 때의 관련시간, 지점과 인물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상세히 기록했다.
2월 4일 날 샐 무렵에 소흥부에 도착하다.
"총독비왜도지휘 첨사인 황종과 순시해도부사인 오문원, 포정사분수 우참의인 진담 등이 연좌한 징청덩 북쪽에 무장한 병졸이 태, 장 등을 삼엄하게 갖추고 있는 가운데 나(최부)를 불러 탁자 서쪽을 향해 서게 했다."「표해록 권1, 2월 4일」
또한 북경 병부의 정황을 기록함에 있어서도 시간, 지점과 인물을 정확히 기재했다.
3월 29일 병부에 도착하다.
"별실에 성서인 여자준이 앉아 있었고 좌시랑인 하씨와 우시랑인 완씨가 마주 앉아 있었으며 낭중 두 사람과 주사관 네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우리는 먼저 시랑을 방문, 다음에 상서를 방문한 후에 낭중과 주사관을 방문했다."「표해록 권3, 3월 29일」
"동방견문록"과 "중국기행"은 적지 않은 부분이 문헌참고로는 될 수 없다. 이유는 사항기재시 시간이 불명확하고 지점이 똑똑치 않으며 인물이 구체적으로 표기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도 학술가치에 있어서 많은 배척을 당하고 있다.
아래에 "동방견문록" 제2권 제4항의 "황제와 나얀의 전쟁"에 대한 기사를 보기로 하자.
"이 전쟁은 '어느 한 구역' 에서 진행되었으며 '군영은 산뒤에 설치하고', '산의 다른 한편은 모두 평원이었다.',
'이러한 악전(惡戰)은 아침부터 점심까지 진행되었으며…', 나얀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사로잡혔다.'"
이처럼 시간도 지점도 없이 기재한 기사는 "표해록"과 비교할 때
기실(紀實)성의 차이가 있으며 참증적인 가치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표해록"의 특징은 간명과 요점의 기술에 있다.
간명하다는 것은 '번거러운 문장을 경계하는데 힘쓰다'이며
요점만 기술했다는 것은 '사용한 단어가 적절하고 이치에 맞는다'는 것이다.
표해록은 5만 여자로서 내용이 포라만상(包羅萬象)이며 주지가 간명, 돌출하며 문자가 생동, 유창하다.
한 눈에 요령을 파악할 수 있다.
경성, 북경성에 대한 기술을 보자.
"북경은 원나라 도성으로 영락년간에 증광 수축했으며 성문이 아홉 개다. 그 남쪽에 정양문, 정양문 오른쪽에 선무, 정양문 왼쪽에 숭문이 있고, 그 동쪽에 동직조양, 서쪽에 서직부성, 북쪽에 안정, 덕승이 있다. 성 중앙에 황성문, 황성문 안에 서원, 태액지, 경호도, 만세산, 사직단, 태묘가 있고 황성의 장안좌문은 남향이다. 종인부, 이부, 호부, 예부가 차례로 남향이며 종인부 뒤에 병부, 공부, 홍려시, 흠천감, 대의원이 차례로 남향이다. 장안우문도 남향, 5군도독부 중, 좌, 우, 전 등 도독부도 차례로 남향을 하고 있다. 후군 도독부는 중부 뒤에 있으며 후부의 남쪽에 행인사, 대상시, 통정사사, 금의위도 차례로 남향이며 기수위는 통정의 뒤에 있다.…옥하는 옥천산에서 출원하여 황성 궁궐안을 경우하여 도성 남쪽으로 나와 대통하가 되어 고려장에 이르고 상건하와 함께 백하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해자 둘이 있는데 하나는 황성 서쪽 3-4리쯤에 있으며 여러 산에서 흐르는 물은 거의 다 이 해자에 저수되곤 했다. 한군데의 호수는 성 남쪽 바로 동물원 지역에 있었고 그 위에 누각이 있는데 피운각, 중심관…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북경은 곧 우순 때의 유주 땅이고 주나라 때는 연나라와 계나라로 분할되었다. 그리고 후위 이래 풍속과 관습은 호(胡)에서 생긴 것이며 그후 요나라 때는 남경이 되고 금나라 때에는 중도 원나라 때는 대도가 되는 등 북방계 제국의 군왕들이 계속해 도읍으로 세웠기 때문에 그 민풍토속은 모두 호풍을 물려 받고 있었다. 지금 명나라는 구습일소의 정책으로 좌임의 차별과 속된 의관의 풍습을 일소케 하는 등 조정의 문물을 개혁하여 발전시키는 정책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여염간에는 도교와 불교를 숭상하고 유를 숭상하지 않고 있었으며 장사를 업으로 하며 농사에는 힘쓰지 않았다. 또한 의복이 좁고 짧아 남녀공용이며 음식은 비린내가 나고 정결치 못한 편이고 존비동기(尊卑同器)하고 있었으나 그밖 풍속은 다 기록하지 못하겠다. 그리고 한심스러운 것은 산이 모두 헐벗었고 냇물이 더러우며 그 토질은 모래흙으로서 먼지가 일어나서 하늘을 뒤덮었고 오곡은 흉작이며 그 지대의 인물, 누대, 시가지 등의 발전도는 소주나 항주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 성안의 수요물자도 거의 남경 및 소주나 항주에서 보급되고 있는 듯했다."「표해록 권3, 4월 23일」
900자로서 북경의 역사, 지리, 황성, 관서, 자연조건, 사회경관, 인문환경을 남김없이 서술했다.
그중 "그 토질은 모래흙으로서 먼지가 일어나 하늘을 뒤덮었다" 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 표현으로 현재의 북경 사람들은 500여 년전 북경의 모래바람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표해록"의 작가 최부는 포학지사(飽學之士)이며 또한 정도직행지사(正道直行之士)로서 처세,
치학에 대해 아주 근엄한 태도를 취했다.
책자에 소개된 것은 대부분 몸소 겪은 경험이며, 직접 목격한 것들이다.
일부분의 들은 것에 대해서는, "이상은 모두 모모가 나에게 말해준 것이다."「표해록 권2, 2월 12일」라든가,
"내가 듣기로는…알 수 없었다."「표해록 권3, 부기」라고 주를 달아 밝혔다.
직접 목격했다 해도 때때로 고적을 인용하여 참고, 비교했다.
예로서 황하와 회수가 회안에서 합류하는 것에 대해서 그는 동행한 중국 관헌에 물어 도움을 청했다.
"우공에서 본 황하는 적석, 용문, 화음, 저주, 대비 등 여러 산을 경유하고 또 강수(降水)대륙을 넘어 아홉 줄기의 강이 되고 다시 황하를 거슬러 동북쪽의 바다에 빠진다하였고 회수는 동백산을 지나 사수와 기수에서 합류하여 동쪽바다에 빠진다고 하였으며 황하의 하류는 연주에서 받는다 했고 회수의 하류는 서주에서 받는다고 하였소. 그렇다면 회수는 황하와 그 발원이 같지 않고 그 줄기도 다르며 강물이 빠지는 바다도 같지 않소. 그런데 여기에서 회수와 황하가 합쳐진 것은 어떻게 된 일이오?"「표해록 권2, 2월 27일」
상기에서 표해록의 근엄한 학풍을 알 수 있다.
얼마 전에 필자는 최부 선생의 후손인 최기홍(崔基泓)선생 일행과 옛날 표해록의 여정을 따라 영파, 항주, 소주, 북경, 요양 등지를 찾아 표해록의 기재에 따른 실제 현지답사를 했다.
비록 실물들은 거의 보존되어 있지 않지만 그가 기술한 것들은 정밀하고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
중국에서 역외 중국기행에 대해 중국인들이 가장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것은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이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는 아는 사람이 훨씬 적다.
그러나 "표해록"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중국사람들이 모르고 있다.
이에 대해 이해를 못해 홀시하게 되었는가, 아니면 홀시를 해서 이해를 못한 것인가.
이 현상의 원인조성은 역사가 장본인이 아니겠는가.
여기까지 서술하고 나니 또다시 화제의 첫머리로 돌아가게 된다.
즉 비교가 있어야 감별할 수 있다.
첫댓글 역사를 좋아하는데 기록당시의 상황을 소상하게 기록한 책이군요.
웹상에서 검색해보면 구입할수도있는데 한번 구입해서 읽어봐야겠네요...
예..맞습니다..그러니까 학계에서는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보다 빼어난 기행문학이라고 평가를 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