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 속에 여기저기 피란민들이 가마니와 거적을 치고 보루박스(골판지 상자)를 덮어 겨우 비바람만 가리고 노숙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포격을 맞아 부서진 건물 한구석에 자리 잡기로 하였다.
파괴된 폐허에서 깨진 벽돌과 나무판자를 모아 지붕과 벽을 만들고 생철과 가마니 거적을 주워 다가 둘러치니 우선 바람막이를 만들었다. 벽돌조각을 모아 불을 지필 아궁이를 만들고 파괴된 건물에서 나뭇조각을 주어다가 땔감까지 준비 하였다.
몇 시간 동안에 집(?) 두채를 지은 셈이다.
같이 온 형 학생이 나갔다 들어오면서 내가 궁금하게 여기던 낚시통 같은것 두 개를 들고 들어왔다. 내가 그곳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가 궁금해 하던 것이 그 속에 들어 있었다.
이것이 구두닦이 통이다.
“야 이젠 우리도 벌어먹어야 하니 나하고 구두닦이 나가자”
“어떻게 하는 건데?”
“미군한테 가서 슈-샨? 하는 거야. ‘오케' 하면 이렇게 하는 거야”
친절히 구두 닦는 요령을 가르쳐 주었다.
구두 통을 메고 거리에 나갔다. 조금 간격을 두고 서로 보일 수 있는 거리로 구두를 닦으러 나섰다.
길거리에서 미군을 만날 때 마다
“헤이! 슈 샨”
미군이 많이 있는 데를 찾아다니다 보니 과연 시내에서 미군이 모이는 데는 결국 술집과 창녀촌 근방이었다. 창녀촌에서는 미군이 여자와 방에 들어가면 창녀나 마담이
“야! 이리와 이것 닦아라”
하고 군화를 던져 주었다. 신은 군화를 닦는 것보다 벗은 군화를 닦기는 힘이 더 들었다. 서로 신을 붙잡아 주며 형과 동업을 시작 하였다. 서로 한 짝씩 나누워 닦기도 한다.
하느님은 사람이 두발로 걸어 다니게 만들었음으로 군화를 한 짝씩 나누어 닦을 수 있어 동업이 성립된 것이다. 네발로 다닌다면 군화가 네 개나 될 텐데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첫 수입으로 많은 돈은 아니지만 굶지는 않을 수 있었다. 쌀가게에 가서 보리쌀 한 됫박과 소금에 저린 고등어 한 손을 사들고 이제 막 지어 놓은 집으로 들어갔다.
거적때기로 둘러싸서 만든 노숙 건물은 그런대로 바람막이가 되었다. 주위에서 타다 남은 폐허의 나뭇가지를 주워 다가 나뭇가지를 피워 밥을 짓고 그 남은 불에 고등어를 구어 물에 말아 먹었다.
오랜만에 지어 먹은 통보리 밥과 간고등어(자반고등어) 구이의 맛은 지금도 잊지 못하는 어디에 비교도 안 되는 아련하게 기억나는 맛이 있었던 그리운 음식이다.
창녀촌을 돌아다니며 구두를 닦으니 이때 내 나이에 보지 못할 장면이 너무나도 많다.
“야. 이애 좀 잠간만 봐줄래. 그리고 이애 데리고 이것도 닦아 놓아라.
전쟁에 지친 엄마가 3-4살 백이 딸을 데리고 창녀가 되어 있었다.
엄마가 미군하고 돈 버는 사이 애를 옆에 놓아 둘 수도 없고 그사이 딸을 좀 데리고 있으라는 상황이었다.
이 슬픈 장면이 전쟁이 아니고서는 어디서 또 다시 볼 수 있단 말인가? 이 애기들이 자라면서 어렴풋이나마 엄마의 하던 일들을 기억할 수 있을 텐데 그것들은 어떻게 이 기억들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전쟁의 비극을 죽음보다도 더 소름끼치게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미군이 많이 있는 곳은 미군 부대일 것이다. 지금 중부 동부 전선에서는 중공군의 인해 전술이 한창 진행 중인 치열한 전쟁 중이었다. 학교는 모두 휴교를 하고 인천 여중은 미군 신병 보충대가 되어 미군이 주둔 하고 있다.
이제 슈샨 보이로서 차차 이력과 요령이 생기기 시작한다. 부대 앞에서 얼쩡거리면 철조망 안에서 구두가 넘어와 닦으라고 하였다.
가끔 부대 안에 불려 들어가 구두를 닦을 기회가 생기면 대박 나는 날이다. 내 나이 또래의 군복 줄여 입고 영내에서 심부름하는 하우스보이들의 권력은 대단히 존경스러워 보인다.
이때 내게 소원이 있었다면 영내에서 군복입고 거들먹거리는 하우스보이가 되어 보는 것이었다. 여기에도 텃세가 있어 굴러 들어온 애들은 발 붙이기가 힘들다.
구두 닦은 돈을 삥땅 뜯어가는 패들도 있고 도둑질을 강요당하기도 하였다. 할 수 없이 다시 시내로 들어가 거리의 구두닦이가 되는 것이 오히려 편할 수밖에 없었다.
가끔 한국사람 고객을 만나는 경우도 있다.
“아저씨 구두 닦으세요. 구-두-닥-으세요. 할로우 슈-샨-”
하고 외치며 인천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야! 이거 기선이 아니가”
“어!! ?? 재권아 !”
중학교 때 단짝 김재권이다. 별명은 호박이었다.
얼굴이 둥글넓적하고 머리는 짱구 대가리 마음씨 착하고 그림 잘 그리는 학교에서는 늘 일, 이등을 다투던 단짝 친구였다.
아주 부잡스러워 “범벅”이라는 별명을 가진 경진이와 나 땅개 그리고 호박인 재권이, 개구쟁이 3총사의 하나이다.
“어! 야 너 어떻게 된 거니 ?”
“응 난 혼자 내려 왔어, 너는 ?”
나의 꼴은 말도 안 되게 초라했다. 손과 여름 셔츠에는 구두약이 묻어 있고 아마 얼굴에도 묻었겠지.
“우리 식구는 다 왔는데 배다리 시장 옆에서 아이스케키 집을 해”
“넌 학교 들어갔구나.”
“인천중학교 3학년에 들어갔어. 너 어디사니?”
“저~어~기”
대강 인천공원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배다리 시장 입구에 있는 청량 빙과점이야. 우리 집에 가자”
“응, 다음에 갈게”
재권이와의 만남은 나의 몰골이 너무 창피하고 참담하고 초라해서 더 이상 그곳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먼저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 나왔다. 그 후 보고 싶고 그리워하고 늘 생각하면서도 소식조차 듣지 못하고 늙고 말았다.
혼자서는 너무나 쓸쓸하고 외로웠다.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 누나, 동생들이 보고 싶고 한없이 그리웠다.
내 곁에 부모형제가 있었으면 아무리 어려운 전쟁 때라도 서로 보살피며 어려워도 의지가 되고 하루 있었던 작고 큰일들도 자랑도 할 수도 있고 돈을 벌어 오면 잘 했다고 칭찬도 해주었을 텐데.
‘나도 학교도 다닐 수 있고 공부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몸이 고단하고 힘들어 잠을 못 이루는 밤도 여러 날 있었다.
어머니와 누님, 기란이, 촌티가 흐르던 정님이, 하나 밖에 없는 남동생 그리고 제일 어려운 시기에 태어난 불쌍한 기명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무리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해주에 남겨 놓고 나왔지만 분명히 아버지만은 남한으로 내려가셨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버지를 찾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