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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갯벌작가상 - 이영균 시평]
눌함(吶喊)을 간직한 시인,
그 팽창과 분출의 서정을 기다리며
한 기 홍
(갯벌문학회장)
1. 수미일관(首尾一貫)의 창작정신과 심원한 청산(靑山) 만들기
이영균 시인은 강직한 사람이다. 얼핏 외면으로만 본다면 투박한 그의 손만큼이나 인상도 근엄하며, 그리 살갑지 않은 이웃집 아저씨와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그와 이런저런 연유로 마주할 기회가 여러 번 있다면 그의 친화력과 세심한 배려지심에 시나브로 쌓여가는 신뢰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본인이 약속한 바는 반드시 지키고 실천한다. 여러 행사나 모임, 혹은 개인적인 만남에 있어서도 한 번도 어긋난 경우를 보지 못했으니 그야말로 철두철미한 사람이다.
필자는 6~7년 전 그와 처음 만났을 때의 첫인상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자유공원 밑 어느 중국음식점에서 당시까지만 해도 두주불사였던 장현기 갯벌명예회장님과 심종은 당시 회장, 서부길 선배와 함께한 자리였다. 아마도 이영균 시인의 갯벌문학회 입회에 대한 ‘신고식’ 이었을 것이다. 빼갈(白乾)에 탕수육을 필두로 코스요리를 들며 이런저런 주담에 젖어들었는데, 이시인은 본인에게 집중된 독한 환영주 잔을 척척 비워버리며 문단선배들을 정중히 접대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주량도 보통이 넘는 듯 했고, 2차 소주집까지도 넉근히 감당했는데 그때까지도 곧고 정중한 자세가 일관되고 있어 감탄했던 기억이다.
그의 외강내유(外剛內柔)하지만 다소 원칙적인 신념은 문단 일곽에서 이런저런 에피소드도 맴돌게 했으나, 필자가 느끼기에는 시인은 표면적인 강직한 모습 이면에 부드러운 감성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무엇보다도 시인의 창작세계에 스며있는 순구한 서정과 깊고 따뜻한 사유들이 그의 내면을 잘 확인해주고 있다. 시작과 끝이 여일(如一)한 사람. 이영균 시인이다.
이영군 시인의 작품세계를 조망하려면 그가 출산한 시집들과 지상에 발표된 작품들을 면밀히 고구(考究)하여야하나, 필자의 여러 시간적 공간적 여건이나 한부분에 진즉하게 천착치 못하는 성정 탓으로 금번 갯벌작가상 후보작으로 입수된 몇편의 시로서 단편적이나마 시인의 시세계를 엿보고자 한다. 그러나 시인의 시 몇 편으로 보는 한정적 조망은 꽤 편협한 방식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 몇 편에 녹아있는 시인의 창작기술과 서사의 밀집도, 시인 특유의 이미지 생성 내력, 서정의 내공들은 한 시인의 전체를 유추하고, 비춰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른바 ‘척 보면 안다’는 고수심리(高手心理)는 아니더라도, 시인의 체취와 입고 있는 옷의 때깔은 분별해 볼 수는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시인의 발표작품은 그간 간간히 감상하여 왔던 터요, 시인이 지향하는 창작세계를 느끼고 있었으니 아래 몇 편의 감상노트는 낯선 작업은 아니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시인의 시 몇 편을 고구 해봐도 큰 오류는 없을 것이라 판단하면서 졸필을 세워봤다. 역시 2015년도 갯벌작상 수상자답게 내공이 충일한 바가 있어 자못 경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중년의 중후함 속에 담겨진 시의 열락(悅樂)을 발견했으며, 시인의 문향 또한 감동을 주기에 손색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시인에게는 수미일관의 창작정신과 그의 아호 청산(靑山)에 걸맞는 심원한 그리움에의 지향점이 뚜렷했다. 더욱 경이로운 점은 그의 창작세계에는 용암이 분출하듯 폭발력 있는 함성이 들리고 있었고, 팽창하는 시맥(詩脈)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어서 필자를 놀라게 한다.
소년인 날에 서 있다
그녀는 푸근한 구름이고
한없이 순종적인 책가방이다
책을 꺼내 펼쳐 놓으면 세상은 변했다
그녀와 멀어졌다고 느껴지던 날엔
어느새 어른이고
한 가정의 가장이다
돌아보니 그녀 역시
늙어 다 쭈그러진 거죽만 있었다
속은 점점 어려져
책가방이기 전으로 간다
아이가 된 낯선 그녀를 애써 아이로 만난다
그 세월은 60년이나 전에서 해가 뜬다
아니 그녀가 잠이 드는
그런 날이 60년이나 걸렸다
고작 서너 시간의 밤을 위해서 잠들기를
점점 어려져 가던 그 밤
그 짧은 시간에 60년보다 훨씬 전인
90년을 거슬러 와서는 샛별로 갔다
날아갈까 잊혀질까
우린 샛별을 액자 속에 가두었다
그리곤 잠이 들면 나는
책가방을 조르는 소년이었다
* 치매이셨던 어머니의 영전에서
-시 ‘소년인 날에 서 있을 때’ 전문
문학작품은 공감감적인 묘사로 세상 사람들의 삶 속에서 우러나오는 반향(反響)을 머금을 때 기꺼이 의미의 존재로서 구현된다. 신경림의 ‘농무’에는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는 외침이 있다. 이 원통한 외침이 하나의 객체로서의 절규라면 그저 그런 외침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만인의 삶 속에 투영되는 언어로 부조화(浮彫化) 되었다면 이른바 감동의 카타르시스로서 문학의 향기를 뿜어낼 수 있다.
위 시는 이제는 고인이 되신 어머니를 그리는 시다. 그 치열하고도 고통스러웠던 말년의 치매노인과의 모자지정을 깊은 텃치로 형상화하고 있다. 구순을 넘어 별세하셨으니, 천수를 다했다는 세간의 위로도 있으련만, 시인은 통곡하면서 모정의 귀천에 대해 절규하고 있다. 필자가 이 시에서의 주목하는 이미지는 ‘책가방’이다. 아마도 시인이 애통하게 고인을 추억하는 것은 책가방으로 형상화되는 ‘잃어버린 동심과 각박함’ 일 것이다. 그렇다. 학교에 들어가 철이 들면서 시작한 공부의 길은 엄혹했다. 출세지향적인 시대의 음울한 개발지상주의 세상에서 적자생존의 길을 걸어야 했던 이 땅의 어렵게 살았던 현재의 중년층 이상에게는 ‘개천에서 용 난다’는 신화는 모두의 꿈이요, 현실적인 길이었다.
시인이 책가방을 들기 이전으로 돌아가 어머니께 응석부리며 젖 냄새 풀풀나는 옷고름을 부여잡고 싶은 동심에의 회귀갈망은 바로 세상에 하나뿐일 수밖에 없는 거룩한 어머니를 보듬어 안을 수 있는 유일한 시공인 것이다. “소년인 날에 서 있다/ 그녀는 푸근한 구름이고/ 한없이 순종적인 책가방이다” 첫 연에서 이 시의 귀향점이 축약되어 있다. 오늘 날 5~60대 가장들이 그러했듯이 시인 또한 세파에 시달리며 적자생존을 위해 독일병정처럼 악착같이 치달렸을 것이다. 책가방은 그 치열한 삶의 상징이다. 어느덧 젊은 날의 초상을 되돌아 볼 즈음, 어머니는 이미 치매노인이 되어 망각의 저편에서 한그루 애잔한 단풍나무로서 존재할 뿐이었다.
시인은 책가방 이전으로 돌아가고자 부르짖고 있다. 잃어버린 시대를 찾아서, 피폐한 얼굴에 기원의 눈길로 수 십년을 초조해하며 ‘창백과 열꽃’의 안색을 교차하던 아들의 개척사를 바라봐야 했던 어머니의 간절함을 들여다보기 위해서…. 시인에게 책가방은 과거의 굴레요, 현재의 공허함이지만 또한 시공을 엮는 담쟁이 줄기 같은 끈이다.
“돌아보니 그녀 역시/ 늙어 다 쭈그러진 거죽만 있었다/ 속은 점점 어려져/ 책가방이기 전으로 간다.” 세상의 모든 자식들에게 어머니는 영원히 살아 숨 쉬는 고향이요 불멸의 바다다. 또한 생전에 못한 효도를 후회하며 늘 가슴 속으로 눈물짓는 슬픔의 표상이다. ‘돌아오지 않는 강’과 같은 책가방으로 상징되는 시인의 사모곡은 그래서 만인이 공감각적으로 함께 회억에 잠기게 하고 처연한 감동을 공유할 수밖에 없는 시대의 소야곡이라 할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는 놓고 싶지만 놓을 수 없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초연하게 그리고자 했으나 결국은 더욱 깊어지는 후회지심을 깊은 시적 여운으로 갈무리 하고 있는데, 시인의 탁월한 시 축조 역량을 엿볼 수 있다.
“날아갈까 잊혀질까/ 우린 샛별을 액자 속에 가두었다/ 그리곤 잠이 들면 나는/ 책가방을 조르는 소년이었다”
2. 착종(錯綜)의 세계를 극복하는 진한 삶의 내력들
달려야 했고 부딪쳐야 했다
아무것도 없는 애송이 나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혹독한 해빙기를
견뎌야만 했다
돈벌이가 밥술이나 될 때까지는
덕장 골방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얼었다 녹았다 속살 노랗게 익도록
온몸 뒤척여야 했다
드디어 산이 녹는다
아내는 그날부터 방망이질을 시작했다
아직 얼은 속살이 탕탕 튀었다
태평양 광활한 바다가 고향인 나는
그런 매가 싫다
구박에 날품이라도 팔아야겠다
산에서 내려가니 돈 되는 일자리 찾기가
겨울 산 산마루만 같았다
힘 빠져 맨손으로 돌아오면
매도 맥없이 몸에 붙는다
힘 떨어지고 돈 떨어지고
다 늙은 태배 속살이 노랗게 퍼석거려도
돌아보면 삶 욕심 없이 잘 말라
푹 끓여지는 진국이 된다
- 시 ‘북어’ 전문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산업화와 테크롤로지 사회 속에서의 인간은 상품화 된 인간, 즉 자동기계적 인간으로 변모하며 소외된 인간으로 남게 된다” 고 말하면서 인간가치의 회복을 강조했다. 구조적으로 물질화 된 사회에서 따뜻한 인간으로의 회귀는 사실 연목구어(緣木求魚) 격이랄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인들은 이러한 각박함 속에서 삶의 체온을 끌어 올리며 인간정신의 심지에 불꽃을 점화하는 사람들이다.
위 시 ‘북어’는 일견 시인의 치열한 삶 속에 응어리진 눌함(吶喊)을 아내의 채근질로 풀어내면서, 시인이 천착해 나가는 ‘삶의 진의’에 도달하기까지의 노정을 그려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항간에 풍자되는 속설에 ‘북어는 두드려야 부드러워진다’는 말이 있다. 그 두드리고 두드려서 잘 다져지기까지의 간난신고를 딛고 일어선 시인의 눈앞에는 바로 프롬이 지향하는 인간회복의 열쇠가 쥐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시인의 젊은 날의 초상은 그 열정만큼이나 무척 치열한 곡절을 수없이 감내한 듯하다. 전술한 시 ‘소년인 날에 서 있을 때’에서의 ‘책가방’과 같은 굴레로서 심안에 각인된 북어는 시인의 고통의 이력이자, 오늘을 있게 한 삶의 진적(眞跡)으로서의 이정표였다.
그래서 “힘 떨어지고 돈 떨어지고/ 다 늙은 태배 속살이 노랗게 퍼석거려도/ 돌아보면 삶 욕심 없이 잘 말라/ 푹 끓여지는 진국이 된다” 고 달관한 각자(覺者)로서의 면모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 시는 세파를 헤쳐 오면서 고개를 숙이고 암담해 했던 여러 질곡들에게서 시인이 가졌던 울분과 희망, 알 듯 말듯한 감각의 착종(錯綜)의 세계를 극복한 한편의 수기인 것이다.
보리 타작을 한다는 망종이 지난 지도 꽤 되었는데
거리엔 늘 타작 소리가 끊이질 않던 초복 날이었다
멍들고 불에 그슬린 몰골의 그를 맞닥뜨린 건
달빛도 섧다는 판자촌 솔은 골목이었다
구김 없이 해맑아 해바라기라 불리었던 그는
무허가 천막 건물이 단속반에 철거될 때도
해는 지지 않는다며 희망을 일깨웠었는데
마른장마에 가물어 빛바랜 저녁 그림자처럼
너슬너슬 쓰러져 왔다
장차 개 잡듯 사람 잡는 백정이 아닌
순화시키는 법조인이 되겠노라며
가난을 밥 말아 먹을 줄 알아야
시궁창에서도 왕성한 미나리가 될 수 있다던 그가
파초가 되어있었다
어깨를 부축하며 고추 말대로 뻗치고 서서
그의 말처럼 민주화가 무르익기 바랐었는데
또 복날이다
그의 생에 가장 뜨거웠을 그날이다
훗날 그를 면회하면서
해는 지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개 패듯 팰 땐 가끔은 저물기도 한다며 그는
제법 성숙한 미나리다웠다
섧던 세월도 변해 살만한데 시궁창엔
"컹컹"
복날 개 짖는 소리 여전하다
-시 ‘생에 가장 뜨거웠을 날’ 전문
공자의 말씀 중 ‘술이부작(述而不作)’이 있다. 원래의 뜻은 기술하기만 할 뿐 지어내지 않으며, 옛 성인(聖人)의 말을 전하고 자기의 설을 지어내지 않는 것을 말한다. 논어 술이편에 있는 유명한 말씀이다. 위 시는 시인의 자화상일 수도 있고, 액면 그대로 지인의 신산한 한시절을 술이(述而)한 시일 수도 있다. 필자는 이 시에서 술이부작의 한 원형을 엿볼 수 있다. 공자는 작(作)보다 술(述)이 후세에 더 많은 가치와 빛을 발휘할 것을 알고 있었다. 어설픈 작(作)은 그것이 지닌 약점으로 인해 시간이라는 역동적인 힘에 의해 마모되고 부정될 확률이 많다는 사실을 예견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시는 편린처럼 꽂이는 한 시대의 질곡과 극복의 처절한 심상을 여과 없이 그려내고 있으며 독자에게 고스란히 그 이해와 상상의 여지를 남겨주고 있다. 술이의 전범이라 할 만한 작품이다.
“시궁창에서도 왕성한 미나리가 될 수 있다던 그가/ 파초가 되어있었다/ 어깨를 부축하며 고추 말대로 뻗치고 서서/ 그의 말처럼 민주화가 무르익기 바랐었는데/ 또 복날이다/ 그의 생에 가장 뜨거웠을 그날이다”
천부의 선량한 심성으로 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세파는 모든 사람들의 일생에 그 천부의 선함을 유지하게 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욕칠정이 난무하는 인생사의 영욕을 보내면서 백거이(白居易)는 비파행(琵琶行)에서 ‘동시천애윤락인(同是天涯淪落人)’ 즉 ‘우리들은 똑같이 세상의 변방을 떠도는 신세들‘이라 탄식했으니 말이다. 시인은 ’또 복날이다‘는 화두로 개를 때려잡는 염천지절 복날의 정경을 치환한 아픈 기억으로서 그 핍진했던 인생의 한 계절을 회억하고 있다. 이 시에서 강조되고 있는 시적 서사는 곧 술이의 한 방편이다. 또한 시인의 성장시(成長詩)라고도 할 수 있다.
3. 시인의 눌함(吶喊)을 기다리며
이영균 시인은 문단에서 부지런한 작가로 정평이 나있다. 그의 근면하고 성실한 생활태도는 곧 창작세계로 까지 이어져, 문인이라면 자칫 빠져들기 쉬운 ‘휴필(休筆)의 유혹’을 용납하지 않고 끊임없이 작품창작 활동을 유지하는 모범적인 작가다. 이제 시인은 달필의 경지를 벗어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선상에 서 있다. 시인의 올곧은 창작정신과 박진감 넘치는 집필 자세는 함께하는 모든 문인들의 귀감으로 평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시인에게는 분명히 아직 토해내지 않은 보물 같은 눌함(吶喊)들이 내장되어 있다. 그 외침들이 시인의 손끝에서 머물다 터져 나오는 시기도 멀지 않은 듯하다. 그래서 시인을 바라보는 독자와 문인들은 그 폭발력을 즐겁게 긴장하면서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시인의 문향을 아끼는 시세계의 전율일 수도 있다. 좋은 시를 기다리는 것은 기대감 넘치는 흥분이요, 전율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자연 사상가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는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고 전율하지 않는 사람은 한물 간 사람이다. 오래 살고 싶으면 일출과 일몰을 바라보는 습관을 가져라.”라고 말했는데, 열정적인 시인의 창작 또한 심안을 울리는 전율이기 때문이다.
갯벌문학회는 2015년도 갯벌작가상 수상작가로서 청산 이영균 시인을 선정하였다. 시인의 창작역량과 문학회에의 헌신적인 기여도는 외적으로도 탁월하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더욱 절차탁마하여 한국문단을 이끌어가는 중추적 문인으로서 우뚝 서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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