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탈출, 중국 선양/단동
경계(境界)란 회색이다. 경계란 흑(黑)과 백(白)이 만나 부딪히면서 둘을 구분하는 선(線)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흑과 백이 가까워지면서 서로의 몸빛이 서서히 섞여 어느새 회색으로, 그리고 다시 백과 흑으로 뒤바뀌는 일련의 과정이다.
우리 민족에겐 그런 경계가 낯설다. 땅덩어리의 세 개 면이 바다로 막혔고 나머지 한 쪽은 휴전선이란 철창으로 허리가 잘렸다. 한동안 서로 다른 색이 자연스레 이어져 섞일 여지가 없었고, 세계인이 뒤섞여 살아가는 '지구촌'에서 '단일민족사회'라는 것을 유난스레 자랑스러워했고, 최근에 이르러서야 '다문화사회'로의 변화를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한반도라는 조그만 땅덩어리를 벗어나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이미 100년이 넘는 세월을 '다민족·다문화사회'의 일부로 살아온 우리 민족의 회색 땅이 있었다. 중국 동북지역에 위치한 만주(滿洲)가 바로 그곳. 문득 그곳이 궁금해졌다.
새삼 지금 이 시기에 '민족'이라는 개념을 들먹이는 것이 어쩌면 다가올 추석을 대한 일종의 의무감일 수도 있겠다. 그런 연유로 중국 선양(瀋陽·심양)행 비행기에 올랐다.
·작은 '통일 한국' 선양 한인 타운
중국 동북3성 중 하나인 랴오닝(遼寧·요녕)성의 성도(省都) 선양은 우리들에게 봉천으로 더 잘 알려진 도시. 서울 봉천동이 아니라 그 옛날 우스갯소리로 말하던 '봉천에서 개 타고 말 장사 하던 시절'의 그 봉천이다. 실제로 개장사 골목이었던 서탑 주변은 현재 한인 타운으로 변모했다. 중국 개방 이후 한국의 많은 자본이 이곳으로 흘러들어온 덕분이다.
이곳 한인 타운은 마치 작은 '통일 한국' 같다. 중국 한족과 조선족, 그리고 한국인과 북한인이 다 함께 어우러져 생활한다. 이곳 한인 타운에 사는 한국인의 수가 5천여 명, 조선족이 2만여 명이다. 북한인의 수는…, 파악이 좀 어렵다.
한인 타운 내 서탑시장에 들렀다. 이건 마치 한국 시골의 시장 속을 돌아다니는 느낌. 흥정하는 목소리도 우리말이다. 깨, 마른 멸치, 김치, 젓갈, 고추장, 된장 등 우리네 시장에서 파는 것들과 전혀 다를 바 없다. 이런!! 김밥, 떡볶이, 순대도 있다. 이 모든 것들이 현지의 재료로 만들어진다. 단, 북한 진미명태 만은 수입산(?)이다.
그래서일까? 이곳 선양은 우리네 먹을거리로 가득하다. 우리 음식이야 우리나라에서 먹으면 되지, 굳이 만주 벌판까지 왕림하실 필요가 있냐고?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 이곳에서 '우리'가 가지는 의미는 한국 사회의 것보다 확대된 개념으로 한국과 북한, 그리고 조선족을 아우른다. 우리 민족의 갈래가 모인 만큼 그네들의 음식도 당연히 모일 수밖에. 한국의 음식과 북한의 음식, 조선족들의 음식이 한데 어우러져 '우리' 전통 음식의 경연장을 이룬다.
·한국음식점 '백제원'과 남북 음식
선양에서 한국 음식점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대표적인 곳이 바로 '백제원(百帝園)'. 16년 전 홀홀단신으로 이곳에 들어와 한국전통음식점을 연 여태근 사장은 한국 외식업계에서도 꽤나 잘 알려진 인물이다. 현지 재료로 만든 불고기, 냉면 등이 완전 우리네 입맛이다. 한국 물가로 보면 보통 가격이지만 이곳 선양의 물가로 볼 땐 굉장히 고급음식점. 그럼에도 손님의 대다수가 현지 중국인들이다. 그만큼 한국 음식이 그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방증.
이곳 백제원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음식의 조리법을 메뉴얼화해 누구라도 만들 수 있도록 해놓았다는 점이다. 여태근 사장의 집무실에 한 가득한 조리법 파일이 16년간 황량한 만주 벌판의 찬바람을 이겨낸 비결이다. 여태근 사장은 "손맛도 좋지만 한식의 세계화를 위해선 누구라도 만들 수 있도록 조리법을 계량화해 통일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며 "그 결과 항상 변하지 않은 맛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북한 음식점도 많다. 김치부터가 다르다. 짜거나 신 맛이 덜한 대신 시원한 느낌이 강하다. 가자미식해나 평양냉면, 온면 등등…. 20~30대에는 신기한 음식들이지만 앞 세대 특히 실향민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고향의 맛이다.
조선족들의 음식 역시 특이하다. 최근 조선족 음식점으로 크게 성공한 식당 '한도(韓都)'에서 조선식 불고기를 맛봤다. 양념이 거의 없고 담백하다. 반면 냉면은 강하다. 회색 면발은 꽤나 질겨 먹기가 어려울 정도.
·청나라 초기 영화로움이 묻어나는 선양 고궁
선양까지 왔는데 청나라 옛 궁(宮)을 구경하지 않으면 섭섭하다. 청나라 초기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 태조 누르하치와 2대 황제 태종이 머물던 고궁은 베이징의 자금성처럼 화려한 느낌은 부족하지만 그런 만큼 이후 현대사에서 부침을 겪었던 만주족의 옛 영화(榮華)로움이 더욱 아련하게 느껴진다.
어디 세월의 부침이 만주족뿐이랴?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북한에 친척을 두고 있는 조선족들은 그 친척이 반갑고 자랑스러운 존재였다. 그만큼 북한의 위상이 컸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그만큼 북한이 어려워졌고 상대적으로 조선족들은 부유해졌다. 자본의 힘이다.
문득 북녘 땅이 보고 싶어졌다. 하루를 비워 선양 인근 단둥(丹東·단동)으로 향했다. 인근이라고 해도 차로 4시간 가까이를 달려야 하는 거리. 우리나라 안에서라면 절대 가까운 거리라 말할 수 없는 거리.
·압록강 넘어 북한 보이는 국경의 땅 단둥
단둥은 북한과 중국의 교류가 가장 활발한 육상통로다. 압록강을 경계로 북한의 신의주와 마주하고 있다. 고려말기 이성계가 요동정벌론에 반대해 칼끝을 고려왕에게 돌린 그 역사적 현장인 위화도가 그 사이 압록강 위에 떠있다. 그리고 그 아래 압록강 철교.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에 의해 지어져 한국전쟁 때 끊어진 구 철교와 새롭게 놓인 신 철교가 나란히 서있다.
구 철교는 지금은 관광자원이 됐다. 북한을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보고 싶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압록강 중앙까지 연결된 구철교 위에 올라서면 강이 흐르는 방향 왼쪽으로 북녘 신의주가, 오른쪽으로 중국 단둥이 펼쳐진다.
조금이라도 북한 땅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유람선을 타는 것도 좋다. 강 건너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모습들이 강 위에선 형체를 갖추고 눈에 들어온다. 자전거를 타고 바삐 가는 사람들, 둘러 앉아 담배를 피우는 모습.
단둥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면 '일보과(一步跨)'가 나온다. 한 걸음만 넘으면 북한 땅이라는 의미. 분명 '넘을 과(跨)'자를 쓰는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흔히들 '일보하'라고 부른다. 어쨌든 압록강이 갈라진 작은 물줄기 5미터 뒤 철조망 너머가 바로 북한 땅이다.
철조망은 2년 전에 만들어졌다. 철조망이 없던 시절 관광객들은 이곳을 지키는 북한 군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빵, 담배 등을 건네기도 했다고. 그러나 그런 것들이 한국 관광객들에 의해 인터넷으로 옮겨지면서 북한 측에서 철조망을 쳤다고 한다. 지금도 작은 통통배를 타고 나가면…, 더 이상은 언급 않겠다. 때로는 말을 아낄 필요도 있는 법이다.
국경에 밤이 내린다. 화려한 야간 조명의 단둥 강변에서 깜깜한 압록강 너머를 바라보자니 괜히 센티해진 마음에 소주 한 잔을 들이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