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계리(龍溪里)
원용계·은행정이·용계 (龍溪) 조선조 肅宗 때 權舜紀가 마을 뒷산이 용이 누운 형상이라 하여 龍溪라 하였고, 은행정이는 은행나무가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은행나무 慶北 安東市 吉安面 龍溪洞에 자리잡고 있는 이 나무는 卓宗 漢의 소유로 천연기념물제175호로 지정되어 있다. 높이가 약 47m 이며 수령은 미상이나 500년 까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은행나무는 낙엽큰키 나무로 촌락이나 사원 부근에 風致木이나 亭子木으로 가꾸며 우리나라 전역과 일본 만주 중국이 원산이다. 이 나무는 조선 선조 때 훈련대장을 지냈던 卓順昌公이 가꾸었다고 하며 임진 왜란 후 공이 고향으로 내려와서 隱居時에 나무를 보호하기 위하여 臺를 쌓고 동지들과 杏亭契 를 조직하였고 매년 칠월이면 이 나무 그늘에서 흥겹게 놀았다는 기록이 公의 年譜에 남아 있다.
또한 지금까지도 이 마을에서는 공이 나무를 심은 뜻을 기리기 위하여 杏亭儒契가 전해 내려 오고 있다 한다. 국내의 은행나무로서는 龍門寺 및 영월 등지에 몇그루가 천연기념물로 보호를 받고 있으나 영남지방에 서는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1966년 1월 13일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구 역을 설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임하댐 수몰로 은행나무가 수몰될 위기에 처했으나 당시 전두환대통령의 지시로 현재의 위치에 나무 를 올려심는 공법으로 나무를 살렸으며 2000년 10월 2일에 전두환 전대통 령 낸외분이 은행나무에 다녀 가시기도 했다
도랫마·회천리 (回川里) 원용계에서 흘러 내리는 개울물이 이 마을 앞 을 돌아서 흐른다고 도랫마라 칭하였으며 이 곳의 특산물은 주로 고추와 담배이며 金氏가 주성을 이루고 있었으나 임하댐수몰로 주민 모두가 이 주 하였으며 마을이 없어졌다.
한밭·섬산·대전 (大田)·도연(陶淵) 도랫마 북쪽에 있은 마을로 밭이 있어 한밭이라고 했으며, 또 옛날에 물이 저수지같이 모여서 고여 있다 고 하여 陶淵이라고도 하였다. 폭포 옆에 있는 섬산은 靑松 땅에서 내려 오는 大水가 암반을 형성하고 있는 도연폭포로 전부 흘러 내리지 못하고 산을 한바퀴 돌아 흘러 돼지가 누워있는 모양과 같이 생겼다고 도연이라 부르게도 되었다.
도연삼절(陶淵三絶) 도연폭포·隔塵嶺·仙遊蒼壁을 陶淵三絶이라 하며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陶淵폭포는 망천에서 반변천을 따라 10km 쯤 올라가면 길안면·임동면·임하면의 경계에 도연폭포가 위치하고 있 다. 이 폭포는 안동 팔경중의 으뜸으로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이 폭포 와 선찰암 사이에 조그만 독산이 하나 있는데 옛날에는 폭포가 없었으며 강물이 이 독산 끝을 돌아 선찰암 앞으로 흐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지금의 폭포 밑 깊은 沼에 사는 龍과 선찰암에 있는 부처와의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유는 용은 물을 바로 흐르게 하자는 것이요, 부처님은 그 전대로 돌아 흐르게 하자는 것이었다. 싸움은 쉽사 리 끝나지 않았고 성이 난 龍은 그만 꼬리로 산을 쳤다고 한다. 그 산을 친 자리가 갈라져서 지금의 폭포가 되었다고 하며 폭포 밑의 소는 깊어 서 명주꾸리 하나를 푼다고 하며 그 속에는 천년 묵은 이무기가 산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폭포는 아득한 옛날엔 격진경 산허리가 물길을 가로 막고 있어서 물이 멀리 산자락을 돌아 흐르던 것이 오랜 세월 홍수와 급류가 산허리를 드리받아 그만 산을 무너뜨리고 바로 떨어지게 된것으 로 요사이도 홍수가 지면 비좁은 폭포로만 다 흐를 수가 없어 멀리 산자락을 돌아서 흐른다. 폭포의 높이는 불과 4m에 불과 하지만 낙동강 지류의 수 개의 폭포 중 가장 으뜸이다.
격진령 은 폭포 옆에 깎아지른듯이 높이 50m 길이 300m 의 바위산으로 서 층암절벽의 琪花瑤草와 산마루에 솔숲을 얹고 있는 품이 天下一色이 다. 隔塵嶺을 아늑히 둘러 싼 높고 짙푸른 산색과 검은 벼랑 밑을 미끄 럽게 흐르는 파아란 물빛과 햇빛 아래 더욱 하이얀 돌빛과의 앙상불, 폭 포 주변의 경관은 보는 이로 하여금 탄식을 연발케 한다.
여기 陶淵의 날카로운 봉우리 긴 절벽이 하필 隔塵嶺으로 불러지게 된데 는 사연이 있다.
丙子胡亂·三田渡의 굴욕에 悲憤慷槪한 선비 金是?이 여기 도연 위에 깊 숙이 숨어 山水에 마음을 붙여 울분을 달래며 학문을 벗하여 逍遙自適 했는데 얼마나 세상이 귀찮았으면 隔塵嶺이라 했을까 사람들이 그를 가 리켜 崇禎處士라 일컬었다 하거니와 여기는 그가 은거하던 松亭 臥龍草 堂등이 보존陂 숭정처사 遺墟碑도 있다. 돌아 흐르는 물을 따라 격진령 의 끝으로 가면 돌다리를 건너 先刹寺 입구가 보인다. 사변전 화재로 지 금은 山神閣만 남아 있고 마당 앞에는 石間水만 쉼없이 흐르며 옆 벼랑 위엔 쪽대문만 남은 仙遊亭 옛터 또한 세월 속에 까마득히 잊혀져 가고 있어 적막한 기분을 맛보게 한다.
아쉽게도 임하댐건설로 수몰이 되어 도연폭포는 그모습을 볼수없게 되었다.
길목·도항 (道項) 陶淵 臨河面 사의동을 통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고 길목 또는 道項이라고 불려 왔으며, 교통이 불편하여 高令層의 몇 세대만이 이 고을을 지키고 있었으나 임하댐수몰로 이주하고 마을은 없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