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 이번 구정에 고향에는 잘 다녀 왔능가?
그런 고향을 생각하면서 내가 글을 올린다.
우리 모두 학교다닐때 등교길에 얽힌 추억들이 많이 있다.
그런 기억들이 있으면 내가 1탄을 올렸으니 계속해서 바통을 받아
추억담을 올리기 바란다.
5km 되는 등교길을 국민학교 6년 중학교 3년을 걸어서 다녔다. 지서리에서 대항리가는 길은 국민학교때는 그렇게 멀게만 느껴졌다.지금은 한 두명의 학생으로 학교에서 통학버스가 운행이 되는데 그때는 학생들도 많아 50여명이 학교를 다녔다.
그 학생들은 모두 고향을 떠났고 그 등교길은 없어저 반듯한 포장도로로 바뀌었지만 산천초목에 얽힌 기억은 변함이 없다.
추억속의 학교길이 가끔씩 주마등처럼 생각이 난다.거기에는 어릴적 꿈이 있었고 낭만이 있었고 애환이 있었고 그리고 첫사랑의 추억이 있었다.
봄에는 진달래 피는 산길을 걸었고 여름이면 또랑에서 붕어를 잡고 가을이면 노랗게 물든 들길과 코스모스길을 걸었고 겨울이면 꽁꽁언 얼음위를 걸었다. 그렇게 계절이 9번이나 바뀌여 중학교를 졸업을 했다.가끔씩 추억에 잠기기도 하고 가끔 어린시절이 꿈에서 나타난다.
그런 추억들을 하나하나 그려 봤다.
제 1 탄 산불을 내다.
따뜻한 봄이였다. 산에는 진달래가 피어나고 산밭에는 새파랗고 토실토실한 보리고개가 나오고 있었다.보리밭사이로 꿩들이 둥지를 틀려고 분주히 돌아다니고 거기에 질세라 뻐꾸기도 짝을 찾는지 이산 저산 메아리를 치고 있다. 핵교에서 반 굉일이라고 수업을 일찍 끝내 줬다.그렇게 일찍 끝나는 날은 신장로 보다 우리는 산길을 택했다. 지동리를 거처 띠빠동에서 도고때(절구대 대항리 사투리) 고개를 넘고 자미동에서 다시 귀신고개를 넘으면 큰골 작은골을 지나면 마웅게(지금의 방포)가 나오고 거기서 작은 산 마웅게 고개를 넘으면 대항리에 도착하는 등교길 코스였다. 도고때 고개는 도고때처럼 넘어가는 고개가 움푹 파여서 이름이 붙여졌고 귀신고개는 6.25때 그 고개를 넘어 큰골과 작은 골짜기에서 많은 동네 사람들이 빨갱이한테 끌려가 죽었다고 이름이 붙여졌다.어른들의 말을 빌리면 비오는 날은 정말로 귀신들이 자주 출몰한다고 하고 목격을 한 사람도 많았다.신장로 보다 산길은 그렇게 무섭고 험했지만 개구장이들 한테는 놀기도 좋은 곳이며 먹을 것도 많아 그 산길을 택했다.오솔길을 걷다보면 산때왈도 많았고 작은 갈대와 잔디밭에는 삐비와 장판(산난꽃)이 있고 중턱에 올라가면 포리똥이 있었고 가을이면 머루와 달래 그리고 재수가 좋은날은 어름까지 따 먹을 수 있었다.
친구인 득실이는 산속에 숨어있는 진귀한 보물들을 정확한 장소를 알고 있었다. 산길을 걷다가 더덕냄새가 난다며 다가가 더덕 두 뿌리를 캤다.또한 친구인 도장밥은 고사리를 한 웅큼 끈어다 책보속에 쑤셔 넣었다. 생 고사리는 쇠뱅이와 고추와 호박을 넣어 찌게를 끓이면 재맛이 난다. 노랑개코는 인공때 죽은 이름모를 묘똥에서 할미꽃을 끊어왔다. 할미꽃을 끊으면 재수 나쁘다고 어른들한테 들은 적이 있어 노랑개코한테 끊지 말라 했다.
그렇게 우리 산길 멤버들은 4명이였다.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도 있고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궁금하고 옛날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연락이 모두 끊겼다. 그런 친구들은 온데간데 없지만 한 사람씩 기억을 되살리면 몸에 얼마나 이가 많았던지 따스한 봄날이 되면 목 주위 검정 상의 에리(옷칼라)로 이가 기어 나왔다. 그친구 별명이 이가 득실거려 붙여준 별명 득실이…머리에 부스럼이 도장밥처럼 끊이지 않아 붙여준 별명 도장밥….노랑코가 수시로 들락 들락 반절은 입으로 먹고 반은 옷 소메로 닦아내고 반은 다시 콧구멍으로 들어가는 친구 별명은 노랭개코….마지막 나는 얼마나 구잡스럽고 꼴통짓을 많이 했던지 별명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꼴통…골래미…물개…산적…용촌백이….등등 거기에 얽힌 사연도 많아 다음에 이야기 하기로 하자.
그런 멤버들 중 그래도 내가.다른 친구들보다 체구가 컷 던 것도 아니고 싸움을 잘한 것도 아니었지만 대장노릇을 하고 있었다.이유는 온 동네 구잡스럽고 말짓거리를 다하고 꼴통짓은 다하고 다녔어도 큰 문제없이 해결을 잘 했다.내가 살고 있는 대항리는 6.25때 최씨 형제 3분과 몇몇인 하씨들 그리고 정씨집안이 피난을 와 정착을 하여 자손들이 퍼져 반은 최씨 집안이고 그중 반은 하씨와 정씨 집안이였다. 그런 3씨외의 성은 대항리에서 명함도 못내밀었다. 정씨 집안은 우리 외가쪽 가족이었다. 한 동네에서 흙담을 사이에 두고 정씨 처녀와 최씨 총각이 연애를 하여 어쩌다 태어난 게 꼴통 인 나였다. 크다보니 한집건너 사촌이고 육촌이고 외갓집 이였다.
이모,고모,삼춘,당숙등 모두 대항리에서 살았다.그래서 마을에서 아무리 꼴통짓을 해 문제를 일으켜도 뒷배경이 좋아 조용히 해결을 봤다.요즘 말로 빽이 좋았다.그래서 친구들한테는 쌈은 못했어도 인기가 좋았고 자연스럽게 개구대장노릇을 했다.
그런 개구대장이 3명의 부하를 이끌고 하교 길을 산길을 택하여 귀신고개를 너머가고 있었다.옷 속개와(호주머니의 대항리 사투리) 속에는 어김없이 성냥개비는 필수였다.
그렇게 꼴통짓은 항상 내가 주동이 되여 일을 저질렀다.속 개와 속에는 몰래 성냥을 갖고 다니면서 기회만 있으면 불을 피면서 놀았다.귀신고개를 반쯤 넘어서 솥 단지 바위 밑에 움푹 파인곳이 우리들의 아지터였다.노랭개코와 도장밥이 솔방울과 간솔을 준비하고 나와 득실이는 보리밭에 가서 잘 익은 보리모가지를 몇 개 잘라와 불을 피면서 구었다.향긋한 솔향기 연기가 나면서 빨갛게 불이 올라왔다. 까맣고 오동통하게 익은 보리 모가지를 손에 잘 비벼서 입속에 털어 넣으면 고소한 햇 보리맛이 났다. 새까만 손으로 몇번을 털어 넣으면 입주위가 새깧맣게 되여 서로 검은괭이가 된 얼굴을 바라보며 웃곤했다.
득실이는 조금전 캐어온 더덕을 구어 먹으면 맛있다며 불에 넣었다.
고소한 맛을 느낄 때 옆의 잔디와 갈때밭에 불을 지펴 봤다. 마른 잔디는 잘 탓다. 그러나 대장인 내 허락 없이 누구도 타오르는 불에는 손을 못대고 나의 화제진압 출동명령이 내려야 솔가지로 때려 불을 진압했다. 일명 소방진압훈련 놀이를 하고 놀았다.타오르는 불을 순식간에 끄고 다시 퍼지면 끄고 반복을 하는 놀이는 스릴(thrill)이 있었다.그러나 스릴있는 놀이도 오래가지 않았다.바람이 불면서 불이 퍼지기 시작을 해 우리 꼬마 소방원들이 총동원 되었지만 역 부족 이였다.불은 바람을 타고 산등성 위로 올라가기 시작을 했다.소나무 숲과 밤나무 숲으로 번지면서 하얗고 검은 연기가 동네에서 분간 할 정도로 하늘 높이 올라가고 있었다.더 이상 거기서 지체할 경황이 없어 책보를 잽싸게 챙기여 불이 나는 반대편을 향하여 존나게 튀기 시작을 했다.다행히 보리밭속에 몸을 숨길 수 있는 은신처가 있었다.보리밭에서 낮은 포복자세로 몸을 숨기고 사태를 살피느라 대가리를 살짝 들어서 현장을 살펴 봤다.다행히 마웅개 작은골에 위치한 208전투경찰 부대 군인들이 몰려와 불을 진압을 하기 시작했다.100여명 이상이 되는 군인과 마을 사람들이 한시간 정도 혼심을 다하여 불은 진압이 되였다.우리는 숨을 죽이고 보리밭 깊숙한 곳에서 사람들이 철수 하기만을 기다렸다.마음을 조리며 애가 타기 시작했다.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고 득실이는 때가낀 몸을 이가 무는지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노랭개코의 훌적거리는 소리도 유난히 크게 들려 코는 막고 입으로 숨을 쉬라고 명령을 했다.대장인 내 명령을 듣지 않으면 모든게 끝장이다. 그렇게 긴장의 시간이 지나고 보리 밭에서 목아지를 살짝 들어 사태를 살폈다. 모든게 조용히 끝난 느낌 이였다.천천히 조심스럽게 보리밭에서 안도의 숨을 쉬면서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새까맣게 타버린 산등허리가 2천평은 남짓 되였다.마을 입구에 도달했을 때 이장과 부대장이 사태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아주 태연하게 아무것도 모른척하고 지나 칠려고 했는데 이장이 우리를 불렀다.뻔히 이장은 알고 있는 느낌 이였다.나는 불을 한두번이 아닌 여러 번 낸 전과자 였다. 당연히 우리는 단호히 불을 안 질렀다고 오리발을 내놓으면서 전혀 모른 척 했다.그러나 보리구어 먹은 흔적인 손과 주둥이가 새까만데 소용이 없었다. 우리 모두 개와(호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는데 내 개와 속에서 성냥이 나왔다.현장에서 대장인 내가 주범으로 잡히고 노랭 개코와 득실이 도장밥은 공범으로 잡혔다.
다행히 이장은 내 고모부이며 중령인 부대장은 우리 큰집에서 방을 얻어 생활하는 직업 군인 이였다. 그래서 서로 아는 처지에 산 쥔과 적당히 합의를 보고 사건은 더 이상 확대가 되지 않았지만 집에 돌아가 부친한테 안 죽을 만큼 뒤어 지게 맞았다.
해가 바뀌여 온산이 푸르러 갈 때 새까만 산은 초목이 다시 피어나지 않았다.다음해 중학생이 되였어도 회복은 되지 않았다.조금씩 조금씩 해가 바뀔 때 마다 푸르러 갔지만 타버린 밤나무는 10년이 지나 내가 성년이 됐을 때 겨우 밤꽃이 피고 가을에 밤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귀신고개 밤나무골 산불사건은 끝이 났지만 지금도 그때 그 시절 그 장소가 생각이 난다.
그런 산천초목을 이번 구정에 고향에 들려 사진에 담아 우리카페 기본앨범에 실어 봤다.친구들은 별 의미 없겠지만 나에게는 곳곳이 어릴 적 추억이 있는 곳 이다.
첫댓글 구잡스럽고 말썽스럽기가 한이 없던 시절이었제. 지금도 그 버르장머리가 살아나서 가끔씩 철없는 야길 하고... 하여튼 넌 존 시절에 태어나서 다행이다. 지금 같아선 어림없는 소린데... 잘 읽었다. 나는 몇번 들은 야기라 재미가 들하다. 설을 잘 쇠었구나. 난 서울에서 쇠었다....
구정연휴를 지나 따분한 오후 점심먹고 나서 읽어본 추억담 참 재밌었다. 특히 네명의 개구장이에게 붙혀진 별명 배꼽뺐다. 따스한 봄날에 에리에 자꾸만 내려오는 이때문에 지어진 득실이, 도장밥, 노랑개코등... 경열이가 지금 지어준거지? 옛날생각 물씬난다.
그때는 참 구잡스러워써 왜그렇게도 구잡스러워는지 몰라 그래도 그때가 참생각 많이난다 순수해서 그런건가 지금 애들 보면 컴푸터 하고 노는것 보면 우리때 하고는 영아니지 세월의 흐름인가
덕규.옥.갑인이 구정 잘 ~~~보냈능가? 덕규는 항상 고마우이~~~메일 보냈는데 왜 않열어 보냐?
좋은때 태어나서 다행이네 그렇지 않으면 철장신세좀 졌어야 하는데 ....
철창에 가두어 놔도 용촌백이처럼 빠저 나올껄? 그런데 용촌백이 정확한 뜻이 뭔가? 아는 사람?
나병 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