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대통령께서 서거하셨습니다.
이 땅을 빛낸 또 하나의 큰 별이 떨어지셨습니다.
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고인의 못다 이룬 꿈이 아쉽습니다.
고인의 서거를 애도하며 저와의 개인적인 추억, 특히 문화예술에 대한 고인의 애정을 엿볼 수 있는 잊지 못할 일화 한가지를 소개합니다.
그 만남은 1993년의 겨울 어느날, <예술극장 한마당>이라는 허름한 소극장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 당시 고인은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대통령에게 패배한 뒤,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에 갔다가 돌아와 '아시아-태평양 재단' 일에 전념하고 계실 때입니다.
저는 극단아리랑의 대표겸 연출가로서 활동하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서편제」의 주연배우로 대중들에게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무렵입니다.
제가 창단공연으로 막을 올린 「아리랑」을 원안으로 하여, 권호웅 후배가 연출한「아리랑2」라는 작품을 공연하고 있을 때입니다.
뜻밖에도 '아시아-태평양 재단'으로부터 DJ께서 우리 공연을 보고 싶어 하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서편제」 영화를 관람하신 뒤 제가 극단아리랑을 운영하고 있다는 얘기를 잊지 않고 계시다가, 연극 공연 소식을 듣고 연락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1993년 11월 4일 일요일, 국회의원 10여명을 대동하고 공연시간인 3시가 되기 조금 전에 오신 DJ는 초대하겠다는 저의 호의를 무시(?)하고 굳이 티켓을 사서 관객들과 함께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소극장으로 들어가겠다고 우기셨습니다.
제가 대표를 겸하고 있던 <예술극장 한마당>은 대학로에서 성북동으로 들어가는 혜화동 골목 길가 허름한 건물의 지하에 세들어 있던 100여석 정도의 소극장으로 퀴퀴한 냄새가 배어 있고, 어두컴컴하고, 주차장도 없고, 좌석은 좁고 기다랗게 이어져 있는 초라한 곳이었습니다.
젊은 관객들이야 소극장이 당연히 그런 줄 알고 오지만, 이미 대통령 후보까지 지내신 정계의 거물을 그런 누추한 장소에 모시자니 송구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함께 오신 의원님들도 그 당시 난다긴다 하는 거물 정치인들인지라 소극장의 꼴이 그토록 험악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지, 다들 잘못 왔다는 듯 난처한 표정을 짓고 어쩔 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들이 생각해도 와주신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고문의 후유증으로 다리까지 불편하신 분이 그런 비좁은 의자에서 두 시간 동안이나 연극을 보신다는 것은 또다른 고문(?)과 같이 무리한 일이라, 죄송하다는 얘기를 하고 다음에 좋은 극장에서 공연할 때 모시겠다고 했습니다.
제 말을 들은 DJ께서는 웃으시면서 그런 걱정하지 말고 공연이나 잘하라고 하시며 의원들에게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는 할 수 없이 두 분만 앉을 수 있게 허름한 간이의자를 부리나케 준비하여 특별석(?)을 마련했습니다.
이희호여사의 손을 잡고 두 시간 동안 즐겁게 공연을 감상하신 DJ는 수고하는 단원들에게 저녁을 사겠다고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대학로의 소박한 고깃집에서 단원들과 국회의원들과 자리를 함께 하신 DJ는 식사가 나오기 전에 관람하신 공연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도 하고 감상도 얘기하시다가, 느닷없이 모 국회의원을 향해 이렇게 물어보시는 것이었습니다.
DJ : 어이, OOO의원!
모의원 :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예!
DJ : 자네 지금까정 연극 맻편이나 봤능가?
모의원 : (더듬거리며) 아...예....아직 한편도....
DJ : 이 사람아, 정치허는 사람이 연극도 안보고 댕기믄 쓰겄능가?
모의원 : 죄송합니다. 바빠서....
DJ : 아무리 바뻐도 연극을 자주 보러 댕기소.
모의원 : (앉으며) 예, 알겠습니다!
DJ : 서편제까지 허신 김대표가 여그 이렇게 열악한 소극장에서 연극으 열정을 불태우는디 정치인들이 적극 관심을 가지고 지원도 허고 그려야 된단 말이시.
의원들 : 맞습니다!
갑자기 일어난 해프닝에 모두들 웃으며 연극과 정치 얘기로 화기애애한 저녁 시간을 보내고 헤어졌습니다. 그뒤 DJ께서는 금일봉과 함께 극단아리랑 의 후원회원으로 가입하여 우리들을 한껏 격려해주셨습니다.
그뒤 그 분과의 인연은 국립극장장과 대통령으로도 이어졌습니다만, 제 가슴 속에는 제가 연극에 열정을 불태우던 시절에 허름한 소극장을 찾아주신 고인의 영상이 너무도 뚜렷이 박혀 있습니다.
누추한 골목길의 초라한 소극장에서 돈도 되지 않는 민족극을 하겠다고 땀을 흘리는 무명배우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격려하신 애정어린 관객,
초대 안하면 공연장에 오지도 않는 정치인들의 몰지각한 문화의식을 앞장 서서 깨뜨려주신 선구적 관객,
당당히 표를 사서 관객들과 함께 줄을 서서 입장해 주신 겸손한 관객,
추운 겨울 날의 오후를 소극장에서 함께 보낸 DJ는 제가 이제껏 만난 최고의 관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