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작가 | 주제 | 장소 |
1 | 권정생 | 외딴 오두막집의 성자 | 경북 안동 조탑마을 |
2 | 고정희 | 고통으로 가는 여전사 | 전남 해남 송정마을 |
3 | 김영랑 | 영랑과 모란이 숨 쉬는 곳 | 전남 강진 |
4 | 김유정 | 사랑과 문학의 순교자 | 강원도 춘천 실레마을 |
5 | 김중미 |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지킴이 | 인천 괭이부리말 |
6 | 박경리 | 모든 숨탄것들을 사랑한 대지의 딸 | 경남 하동 평사리 |
7 | 박완서 | 그 시대를 증언하다 |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
8 | 심훈 | 겨레의 마음에 늘푸른나무를 심다 | 경기도 안산, 충남 당진 |
9 | 오정희 | 불온한 젊은 날의 자화상 | 인천 차이나타운 |
10 | 유치환 | 사랑하였으므로 진정 행복하였네라 | 경남 통영, 거제 |
11 | 윤동주 | 내게도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 중국 연변시 용정마을 |
12 | 윤정모 | 시대의 문제와 정면으로 마주 선 르포작가 | 경기도 광주 퇴촌마을 나눔의 집 |
13 | 이육사 |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 경북 안동 원촌마을 |
14 | 이해인 | 사랑과 위로의 언어 |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 |
15 | 이효석 | 메밀꽃과 원두커피의 향기 | 강원도 봉평 창동마을 |
16 | 정지용 | 사철 발 벗은 아내가 이삭 줍던 곳 | 충북 옥천 |
17 | 조지훈 | 맑은 시혼과 드높은 지조를 지닌 선비 | 경북 영양 주실마을 |
18 | 최명희 | 살아 숨 쉬는 모국어의 바다 | 전북 남원 노봉마을 |
19 | 한용운 |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모두 님이어라 | 강원도 백담사 |
20 | 한하운 | 파랑새가 되고 싶었던 천형의 시인 | 전남 고흥 소록도 |
21 | 현기영 | 4.3보다 더 무서운 것은 4.3을 잊는 것 | 제주도 북촌 너븐숭이 마을 |
22 | 황순원 | 문학작품 속 식물나라로의 여행 | 경기도 양평 |
|
|
|
|
|
|
|
|
|
5. 국외 문학기행(다녀온 곳을 중심으로)
1. 일본
- 홋카이도/ 미우라 아야코의 '빙점', '총구' '시오카리 고개'
- 홋카이도/ 양귀자의 '아이누, 아이누'
도쿄 신주쿠/ 나쓰메 소세키의 ‘풀베개’ ‘그 후’ ‘도련님’ ‘산시로’
도쿄 아오모리/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사양’
에치고 유자와/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설국(雪國)’ ‘이즈의 무희’ ‘천 마리 학’
2. 중국
- 연안/ 조선희의 '세 여자'
- 난징/ 아이리스 장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난징대학실, 그 야만적 진실의 기록)’
3. 베트남
- 당투이쩜의 '지난 밤 나는 평화를 꿈꾸었네'
- 응웬옥뜨의 '끝없는 벌판'
- 반레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
- 방현석의 '랍스터를 먹는 시간’
- 박영한의 '머나먼 쏭바강'
- 안정효의 '하얀 전쟁'
-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
4. 캄보디아
- 프놈펜/ 바데이 라트너의 ‘나는 매일 천국의 조각을 줍는다(원제: 반얀나무 그늘 아래에서)’
- 씨엠립 앙코르왓트/ 추정경의 ‘내 이름은 망고’
5. 영국
- 요크셔 하워스 마을/ 샷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
- 요크셔 하워스 마을/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 바스/ 제인 오스틴의 '설득' '노생거 수도원 '
- 런던/ 버지니아 울프의 ‘델러웨이 부인’
- 런던/ 찰스 디킨즈의 ‘올리버 트위스트’ ‘두 도시 이야기’ ‘크리스마스 캐롤’ ‘데이비드 커퍼필드’
6. 아일랜드
- 더블린/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 ‘율리시즈’
7. 미국
- 아틀란타/ 마가렛트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 포크스/ 스테프니 메이어의 <트와일라잇1-4권> 시리즈
8. 네델란드
- 암스테르담/ 안네 프랑크의 '안네의 일기'
9. 독일
- 뭰헨 슈바빙/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뮌헨/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 뮌헨/ 잉게 숄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 칼브/ 헤세의 ‘크눌프’ ‘수레바퀴 아래서’ ‘페터 카멘치트’
- 베츨라/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바이마르/ 괴테& 쉴러
- 뤼백/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 토마스 만의 ‘토니오 그뢰거’
10. 러시아
- 생페테르부르크/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 모스코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 바이칼 호수/ 이광수의 ‘유정’
11. 발칸 반도(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알바니아, 마케도니아)
- 크로아티아/ 신영의 ‘두브로브니크에서 만난 사람’
-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파올로 코엘료의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 보스니아/ 스티븐 갤러웨이의 ‘사라예보의 첼리스트’
- 보스니아/ 조 사코의 만화 ‘안전지대 고라즈데’
12. 폴란드
- 아우슈비츠 수용소/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13. 멕시코(희망)
- 유카탄 반도 메리다 에네켄 농장/ 김영한의 '검은꽃', 문영숙의 '에네켄 아이들'
14. 캐나다(희망)
-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PEI)/ 루시 M 몽고메리(1874-1942)의 '빨강머리 앤'
15. 이란(희망)
- 테헤란 에빈 교도소/ 사하르 들리자니의 '자카랜다 나무의 아이들
----------------------------------------------------------------------
※ 내가 가보고 싶은 작가의 고향 혹은 작품의 무대를 열거해 보자.
1. ( )
2. ( )
※ 아래 외국문학의 배경지를 보고 작가와 작품, 그리고 장면을 적어 봅시다.
|
|
|
|
|
|
|
|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 미국 아틀란타를 찾아서
김명희(전 경북 봉화 재산중학교)
마가렛 미첼이 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Gone with the wind』는 박경리의 『토지』와 함께 정체성이 정립되기 이전의 나를 열정적이고 주체적인 성격으로 바꾸어 준 은혜로운 작품이다. 미국 남북전쟁 전후의 남부를 무대로 한 스칼렛,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역사의 회오리바람과 맞서 살아온 서희라는 여성!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역사의 질곡을 헤쳐나간 두 여인의 치열하고도 강인한 인생 여정은 당시 매사에 겁 많고 자신 없던 나에게 환호와 동경의 대상이 되었고, 나아가 평생의 자산인 용기와 힘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40년 간 내게 주어진 교단에서의 임무와 책임을 다 끝내고 가뿐하게 그간 숙원사업이던 외국으로 문학기행을 떠났다. 마침 미국 동부에 살고 있는 옛 제자들 4명을 아틀란타로 불러 모아 동시통역과 호위를 받으며 내 허접한 청소년기에 장작불을 지펴주었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배경지 아틀란타와 존스버러를 다녀왔다. 가히 꿈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의 증거를 몸으로 체득한 것이다.
‘존스보로’는 ‘타라’의 모델이 된 스칼렛의 어릴 적 놀던 고향이요, ‘아틀란타’는 성장한 스칼렛의 활동무대다. 그리고 ‘찰스톤’은 레트 버틀러의 고향이고, ‘서바나’는 스칼렛 엄마인 엘렌의 고향, ‘아일랜드’는 스칼렛의 아버지인 제랄드 오하라의 고향이다. 따라서 영국의 아일랜드만 빼고 미국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무대를 제대로 보려면 이 네 군데를 가 보아야겠지만, 아쉽게도 찰스톤과 서바나는 가지 못하고 스칼렛의 숨결이 묻어 있는 아틀란타와 존스보로만 중점적으로 다녀왔다.
‘아틀란타’는 스칼렛과 동의어
아틀란타 일대는 원래 체로키 인디언들의 땅. 1782년에 백인들이 강제로 땅을 빼앗고, 철도가 건설되면서 남부의 중심지로 발전해 나가 1845년 정식으로 아틀란타로 이름지어졌다고 한다. 드넓은 목화밭과 수많은 흑인 노예들을 거느린 최대의 목화 생산지이자 미국 노예제도의 중심지였으며, 목화 상권의 확보와 노예제도의 폐지를 원하던 북부와 심각한 대립을 계속하여 끝내 1851년 남북전쟁이 일어나고, 남군의 본부였던 애틀란타는 치열한 격전지로서 시가지 전체가 불탔다.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바로 이 무렵 아틀란타, 그리고 30여 킬로 떨어져 있는 존스버러를 배경으로 젊고 매력적인 스칼렛을 비롯하여 레트 버틀러, 멜라니, 애쉴리 등 4명을 중심으로 전쟁과 사랑 속에서 얽히고설키며 격랑기를 살아온 사람들의 긴 호흡의 이야기다.
작가 마가렛 미첼 여사가 신문사 동료였던 남편과 결혼해 1925-1932년까지 살면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집필한 당시 아파트 2층이 미첼 여사의 집이었으며 지금은 1, 2층을 모두 '미첼 하우스'라는 기념관으로 보존하고 있다. 피치트리 스트리트는 번역에 따라 복숭아 거리라고도 나오는데, 아틀란타의 중심에 있는 번화가로서 가로수가 과연 죄다 복숭아나무다.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풍경이다. 냉장고에 붙이는 자석 마그네틱에도 아틀란타의 상징으로 복숭아가 그려져 있는 걸 보면 과거 이곳이 복숭아가 유명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생전에 오직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한 작품으로 세계적인 작가가 된 M· 미첼은 복숭아나무 거리 중심가에 위치한 이 집에서 7년 동안 이 책을 썼고, 1939년에는 영화로 만들어져 온 세상 사람들이(내 생각에)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는 스칼렛의 용감한 말에 기운을 냈을 것이다. 절망 속에서 죽을 생각을 한 사람도 아마 마음을 고쳐먹었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그런데 책은 안 읽어도 영화는 봤을 테고, 영화조차 안 본 사람도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는 말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스칼렛의 유명한 이 마지막 대사의 영어 원본은 ‘After all, Tomrrow is another day. (어떻든 내일은 또 다른 날이다.) 참 어이없을 정도로 단순하고 밋밋한 이 문장을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것이다.'라니, 얼마나 멋진 번역인가. 이런 경우 문학작품은 원문으로 읽어야 한다는 말은 좀 빛이 바래지는 듯하다. 그러고 보면 원작보다 번역이 더 유명한 문장은 얼마든지 있다. 몇 해 전 신경숙이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을 표절했다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단편 「전설」의 한 부분, 원작의 ‘사랑의 기쁨을 알았으며~’ 라는 밋밋한 표현을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 라는 유려한 표현으로 번역한 이는 김후란 시인이다.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동시에 출판계에서는 저자에게 주는 인세보다 번역가에게는 혹독한 노동에 비해 보수가 턱없이 적다는 사실에 놀란 적이 있다.
그나저나 작가의 사진을 보면서 골방에 파묻혀 글만 쓰는데 이렇게 뛰어난 미모가 필요할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 곧 아, 아니다. 그 전에 기자였다니까 사람도 많이 만나고 인터뷰도 해야 하니까 외모가 떠받쳐 주면 나쁠 건 없겠지.
미첼 하우스에 들어서자마자 기념품 가게가 있어 하나라도 사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게 하지만 일단 내부부터 둘러볼 일이다. 여느 기념관처럼 작가의 일생을 소개하는 자료와 사진, 당시의 살림살이, 그리고 작품과 관련하여 각종 매체에 소개된 기사가 많다. 특히 영화에 출연한 배우 비비안 리와 클라크 케이블이 작가와 만나는 사진 외에도 1939년 12월 15일, 작품의 주된 배경인 아틀란타에서 처음 시사회를 열 때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 속에 화려한 거리 퍼레이드를 한 신문기사가 비중 있게 게시되어 있다.
한쪽 구석에는 작가가 기자 시절부터 소설을 쓸 때까지 옆에 끼고 살았다는 낡은 타이프가 있다. 저 시대 여기자들의 위상은 어떠하였을까? 남성들과 엄청나게 피 터지는 경쟁과 멸시 속에서 싸웠겠지 하는 생각에 타자기에 오랜 여성사가 묻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48세에 교통사고로 사망. 아아, 또 다른 대작이 나올 수도 있었으련만 아깝다 아까워.
|
|
3시간 40분짜리 대작인 이 영화가 아틀란타 그랜드 극장에서 시사회를 할 때 ‘흑인은 백인과 함께 영화를 볼 수 없다'는 조지아 주 방침에 따라 ’매미’ 역의 헤티 맥다니엘은 불참했다. 그러나 흑인 최초로 오스카 연기상 수상 자리에서는 레트 역의 클라크 케이블이 ’이 여성이 무대에 나오지 않으면 나도 불참하겠다' 하여 비로소 그 흑인배우가 참여할 수 있었다는 일화는 상당히 의미 있다.
미첼의 기념관에서 다시 복숭아나무 거리(피치트리 스트릿)로 나왔지만, 아무래도 작품 속 인물들이 숱하게 다니던 이 길에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침착할 수가 없다. 스칼렛이 타라 농장의 세금 낼 돈을 빌리러 커튼으로 멋진 드레스를 만들어 입고 레트를 만나기 위해 아틀란타 역에서부터 걸어가던 길도, 또 지치고 절망적인 모습으로 돌아나오던 흙탕길도 바로 피치트리 스트릿이요, 최대의 격전지 아틀란타가 함락하기 전 수많은 부상자들이 즐비하게 누워서 신음하고, 또 막 출산한 멜라니와 아기, 그리고 흑인 프리시를 태우고 레트와 함께 불타는 길을 마차로 탈출할 때도 이 길을 지나갔다. 그리고 타라를 떠나 고모집에서 지내며 애쉴리를 그리워하지만 레트 버틀러를 세 번째 남편으로 맞이하여 고생스러웠던 지난날을 보상 받기라도 할 듯이 대저택을 짓고 살았던 곳이다. 그 집은 이 복숭아나무 거리 어디쯤일까? 애쉴리의 집과는 뒤꼍에 다리로 이어져 있다고 했는데. 내 눈은 이미 환각현상으로 아까부터 제 정신이 아니다. 이 비슷한 느낌은 처음으로 『토지』의 무대인 하동 평사리, 그리고 2부의 무대이던 만주 용정에서도 일어났던 그 짜릿한 떨림과도 닮았다. 문학기행의 진정한 맛은 바로 이런 공간에 와 있을 때다. 그 시대로 갈 수는 없어도 공간은 가능하지 않은가. 인생 전편을 통하여 어느 특정 장소를 떼놓고는 그 사람의 삶을 말할 수 없는 곳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오감을 동원하여 이 거리에 오래도록 머문 이유다.
‘타라’는 스칼렛의 정신적 고향 아이콘
타라의 무대인 존스보로는 아틀란타에서 남쪽으로 30킬로쯤 더 내려가면 나온다. 이곳이야말로 스칼렛의 고향 타라가 구체적으로 그려진 곳이라고 작가 미첼 여사는 말했다. 외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계신 존스보로에 자주 와서 남북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귀가 닳도록 들었고, 실제로 이곳에서 '타라'를 구체적으로 구상하였다고 한다.
스칼렛은 타라를 지키려고 커텐으로 만든 옷도 입고, 레트에게 돈 빌리러 감옥소도 가고, 동생의 약혼자를 빼앗기도 하고, 이후 위기와 좌절을 맞을 때마다 타라를 생각하고 또 가기도 했다. 마지막 레트가 떠나면서 대단원의 막이 내리는 장면에서도 28세의 스칼렛은 절망과 슬픔에 잠기는가 싶더니 곧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이 다가오는 타라를 떠올리며 두 주먹을 불끈 쥔다. “그런 건 모두 내일 타라에 가서 생각하겠어. 그때는 버틸 힘이 생길 거야. 그이를 돌아오게 할 방법이 반드시 있을 거야. 어쨌든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니까.”
타라는 스칼렛에게 절대절명의 정신적 고향이요 영혼의 안식처인 것이다. 그러나 굳이 스칼렛 아닌 누구라도 슬픔과 절망에 젖을 때 절로 찾게 되는 마음의 안식처 ‘타라’는 있을 것이다. 세상에 그런 곳 하나 없다면 이 풍진 세상을 어찌 살아가겠는가.
'타라 박물관'에는 원작인 소설보다는 영화에 대한 기록으로 가득 차 있어서 영화만 본 사람에게는 반색할 만하지만 작품에 더 비중을 둔 나에게는 그저 호기심만 충족되었을 뿐이다. 따라쟁이 일본이 미국 것과 똑같이 만든 영화 속 스칼렛의 등신대 모형을 왜 여기에 세워 놓았을까. 하여간 세계를 다니다 보면 일본의 입김이 안 간 데가 없다. 세계 각국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포스터와 광고가 각 나라 언어로 전시되어 있고, 또 여러 나라의 번역책도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는데 본능적으로 한글이 있나 눈을 번득이며 찾아보니 아래 중앙에 옛날 어느 흑백시절에 번역 출판 되었음직한 한글 번역책이 보인다.
또 영화에 등장한 4명 주연배우들의 초상화도 걸려 있는데, 특히 스칼렛의 그 유명한 대형 초상화는 이곳 ‘타라 박물관'에서 보존하고 있다. 레트가 스칼렛의 마음을 얻지 못하자 거실에 거대하게 걸린 저 오만한 얼굴을 향해 술잔을 냅다 던지던 장면에는 예나 지금이나 공감이 간다. 어쨌든 집안에 자기 사진을 걸어 두는 건 삼가는 게 좋을 것이다.
| |
|
|
타라 뮤지엄에서는 버스투어를 한꺼번에 신청하면 입장료를 깎아 준다. 조그만 버스를 타고 시내를 돌아보자니 대저택의 집은 대부분 비슷해 보인다. 하얀 대리석 집에 하얀 기둥은 스페인의 건축 양식이라던가? 작은 도시 존스보로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가득하다. 특히 스칼렛과 레트 버틀러 거리 표지판이야말로 문학기행의 절정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런 것에 숨이 막힌다.
|
|
두 번째 읽었을 때는 두 사람의 엇갈림이 전보다 더 가슴이 아프고 슬펐다. 스칼렛이 긴 세월 마음에 품었던 애쉴리에 대한 사랑이 환상이었음을 깨달은 순간 레트에 대한 사랑을 비로소 깨닫고 처음으로 진심어린 사랑을 고백하며 ‘나는 이제 어떡하지요?’ 라는 말에 레트의 반응은 싸늘하였다. 아니 담담하였다. 이게 진짜 무서운 거다.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오.(I don't give a damn.)”
이 원문의 ‘damn’은 거의 욕에 가까운 저속한 말이라고 제자가 말해 주었다. 그런데 영화로 각색할 때는 순화시키려 하였으나 감독이 그대로 쓰도록 했단다. 하여튼 한국식의 차가운 말로 바꾼 이 번역 솜씨에 레트의 심리가 절묘하게 드러난다.
아틀란타에 재현된 스칼렛의 집
다시 아틀란타로 돌아와서 30분 거리에 있는 국립공원 ‘스톤 마운틴’으로 향한다. 진입로에서 왼쪽 샛길로 빠져 들어가면 19세기 남북전쟁 당시의 저택을 재현해 놓은 넓은 건물이 나타난다. 어떤 대지주가 기증한 저택을 박물관 형식으로 재정비하였다는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스칼렛의 저택을 방불케 하여 많이들 구경 오는 모양이다. 단 입장료를 내야 입장할 수 있다. 천천히 둘러보노라면 작품을 읽으면서 상상하던 것들을 좀 더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단박에 '맞아, 스칼렛의 집이 꼭 이랬어.' 라고 말이다. 대저택 안은 방마다 화려한 가구와 살림살이가 목적과 용도에 따라 잘 정돈되어 있다.
응접실, 거실, 식당, 침실, 음악실, 손님방… 등. 특히 존스보로 인근에서 허리가 17인치, 그런데 이게 말이 되는가? 17인치라면 43센티미터, 내 허리의 절반이요, 개미보다 더 가늘지 않나…. 하여간 비현실적인 17인치의 가장 가느다란 허리를 가진 16세 스칼렛에게 흑인 유모가 힘껏 코르셋을 조여 주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애를 낳은 후에도 침대 기둥을 꽉 붙들고는 "더 조여!" 하던 성깔 사나운 여자 스칼렛…. 바깥마당에는 흑인 노예들이 살던 통나무 오두막집도 내부까지 재현해 놓았는데 어쩌면 저보다 더 열악했을 것 같다. 그러나 백인 주인에 따라서 흑인 차별의 정도가 많이 달랐고, 스칼렛과 애쉴리 집안에서는 흑인을 상당히 인간적으로 대한 것 같다. 본문에서도 이들 집안의 흑인들은 해방이 되어도 주인 곁을 지키는 충직한 인물로 그려진다. 철저히 백인 중심이다.
|
|
|
|
당시에 사용했음 직한 비교적 호화로운 마차도 보인다. 스칼렛이 돈에 환장하여 제재소 일을 보러 혼자 위험한 흑인지역을 저런 마차를 타고 가다가 겁탈을 당할 뻔 한다. 그러자 두 번째 남편이던 윌크스가 그날 밤 흑인을 죽이다가 본인도 죽고 애쉴리는 부상을 당한다. 그런데 이들이 K.K.K(큐 클랙스 클랜: 백인우월주의, 반유대주의, 인종차별 등을 표방하는 미국의 극우 비밀 결사 단체)단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 레트가 이들을 구해 주는 과정… 등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이 대목을 도무지 알 수 없더니 두 번째에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정말로 미첼의 이 소설은 백인 중심이다. 흑인을 펌하하고 K.K.K를 정당화하다니….『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다분히 백인과 남부의 입장에서 충실히 쓰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 증거로 흑인 차별을 조장했다는 비난과 함께 언젠가는 작가의 집에 불을 지른 일도 있고, 최근 테네시 주 어느 유명 극장에서는 이 영화를 상영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도 한다.
또 한 사람 같은 아틀란타 출신 흑인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도 찾아보아야 균형이 맞을 것 같다. 흑인들이 수도 없이 성지 순례를 하러 온다는 킹 목사의 기념관과 생가, 그리고 묘소는 국립역사보존지역으로서 아틀란타의 ‘어번 거리’에 있다. 그의 유해는 물이 가득한 풀장 한가운데 위치한 석관에 안치되어 있는데 왜 물 위에? 아직도 답을 못 찾았다. 킹 목사를 기념하는 조형물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는 이 마을은 흑인들이 집단적으로 사는 것 같다. 생가와 주변 동네를 휘젓고 다니는 나에게 조심하라는 제자들의 경고가 있었으나 나는 평화인권운동가를 숭배하며 찾아오는 사람이나 그 동네에 사는 흑인들이 조금도 무섭지 않게 보였다.
마가렛 미첼 여사의 묘소에는 반드시 가 봐야 한다고 주장하자 제자들은 지당하다는 듯이 줄레줄레 따라온다. 작가는 아틀란타 교외의 오클랜드 묘지에 남편과 함께 누워 있다. 그런데 묘소 이름을 ‘미첼’로 찾으면 결코 못 찾는다. 남편의 성(性)) '마쉬'로 표시해 놓았기 때문이다. 젠장…. 작품에도 등장하는 남북전쟁 당시 최대의 격전지이던 아틀란타, 오클랜드 묘지에는 남부군 전사자들 외에도 저명인사도 잠들어 있다. 부부가 나란히 묻혀 있는 묘소 주변에는 미첼이 평소 좋아했다던 분홍빛 작은 장미가 향기로 가득 차 있다. 멜라니가 무명 북부군의 묘에도 풀을 뽑고 꽃을 심어 주자는 제안에 부인들이 질색을 했으나 결국 멜라니를 당하지 못해 착한 짓(?)을 해 버렸다는 그 묘지가 이곳일 것도 같다. 그런데 타의에 의한 선행도 선행이 포함해야 할지.
안동 길원여고 옛 제자들과의 만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요 행복이었다. 플로리다, 볼티모어, 보스톤, 그리고 아틀란타에서 서로 얼굴도 모른 채 선후배가 ‘모일래? 모이자, 모여라!’ 하여 만난 자리는 금세 국어교실이 되어 그 옛날 10대 시절보다 한웅큼 깊어진 독서토론회가 이루어졌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그 날이 5월 15일이라 불시에 스승의 날 기념식도 치렀는데, 스승의 은혜로 시작한 노래가 어찌하여 어버이 은혜로 끝난 걸 나중에 깨닫고는 웃음바다가 되었지만 뭐 어떠리. 하여간 멋-졌-다! 영어가 능통한 제자들 덕분에 가는 곳마다 동시통역이라 이 또한 얼마나 편리했는지 모른다. 나는야 국어 샘이니까 누가 흉 볼 사람도 없고…. 나는 그동안 영어를 참 많이 미워하고 의도적으로 배척해 왔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부지런히 영어공부를 해서 오늘날 나를 이끌어 주니 입장 정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대략 난감하다.
이미 인생을 살 만큼 산 제자들은 이제 나를 비판(?)하는 말도 서슴없이 해댄다. “선생님은 그때 우리들에게 스칼렛보다는 멜라니를 더 강조하셔야 했어요.”라고 말이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스칼렛처럼 나는 ‘나’의 주인으로 살고 싶었거든. 문학을 통해 훌륭한 사람을 본받기보다는 내가 가지지 못한 점을 가진 사람에게 매료당하고 또 그 힘으로 인생을 헤쳐 나갈 수 있었기에 은혜로운 인물로 생각하고 있어.” 좀 궁색한 변명이었을까?
마지막으로 새로운 문학교실을 창출해 낸 역사적인 현장에서 우리의 흔적을 남기고 싶다. 전쟁과 사랑, 스칼렛과 그 가족, 흑인들의 지위와 삶, K.K.K단, 그리고 이 대작이 스칼렛 나이 겨우 16세에서 28세까지의 이야기라는 데에 새삼 놀랐다는 등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어 댄 대저택 앞에서 ‘꿈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사진을 증거물로 남기며 이만 끝맺는다.
(※ 이 글은 2019년 전국국어교사모임 계간지 <함께 여는 국어교육> 여름 특집호에 게재됨.)
김명희 선생님의 책 ‘낯선 익숙함을 찾아서’ 중에서
1. 안동 조탑마을, 외딴 오두막집의 성자, 권정생
7평짜리 오두막에 사는 성자(聖者)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남안동 나들목을 나오자마자 안동 시내 방면이 아닌 왼쪽 ‘권정생 선생이 살던 곳’이라는 팻말이 조탑리로 꺾어들면 마을 앞 사과밭에 5층 전탑이 우두커니 서 있고, 그 맞은편에 일직교회의 뾰쪽탑이 보인다. 바로 이 동네가 혼자서 마음의 탑을 쌓아 올리며 오도카니 살다 간 외톨이 동화 작가 권정생(1936-2007)의 체취가 오롯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선생의 집은 교회 옆 골목으로 깊이 들어간 마을의 가장 안쪽, 빌뱅이 산 바로 아래에 있다. 빨간 슬레이트 지붕에, 울도 담도 마루도 없는 두 칸짜리 남루한 집이다. 길도 마당도 아닌 집 앞에는 난데없이 너른 바위가 턱 하니 들어앉아 있고 옆으로는 작은 시내가 흐르는 모습이 집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허름하기 짝이 없는 외딴 오두막이라고 할 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처음 이 집을 찾은 사람치고 충격을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쭈그려 앉아 간신히 밥을 해먹을만한 조그만 부엌 하나와 천장까지 빼곡한 책을 빼고 나면 발을 뻗고 눕기에도 비좁아 보이는 작은 방 두 칸이 다인 7평짜리 오두막. 허나 이런 집마저 선생에겐 호사였다. 평생을 지독한 가난과 병마에 시달려온 그가 난생처음으로 갖게 된 자신만의 보금자리였기 때문이다.
권정생 선생은 일본 도쿄 변두리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광복 이듬해인 1946년 귀국했지만 가난 때문에 가족들과 뿔뿔이 흩어져 지내야 했다. 생활고로 인해 늦깎이로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나무장수와 고구마장수, 담배장수, 가게 점원 등을 하며 힘겹게 생활하다가 돈을 벌기 위해 부산으로 갔으나 그곳에서 결핵과 가슴막염 등의 병을 얻어 평생을 병고에 시달리게 된다. 한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걸인 생활을 하며 유랑하기도 했던 선생은 1967년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에 정착해 교회 문간방에 머물며 시골 예배당 종지기로 생활한다. 그 후 1982년 마을 청년들이 흙벽돌을 직접 찍어 만들어주었다던가, 빌뱅이 언덕의 조그만 토담집에서 세상을 뜰 때까지 40여 년 동안 이곳 조탑리에 머물며 「강아지 똥」과 『몽실 언니』 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써왔다. 선생은 교회 문간방 시절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 이곳 교회 문간방에 들어가 살게 된 것은 1967년이었다. 전에 살던 집은 소작하던 농막이어어서 비워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어머니는 한평생 당신들의 집이 없었다. 가엾은 분들이다.
서향으로 지어진 예배당 부속 건물의 토담집은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웠다. 외풍이 심해 겨울엔 귀에 동상이 걸렸다가 봄이 되면 낫곤 했다. 그래도 그 조그만 방은 글을 쓸 수 있고 아이들과 자주 만날 수 있는 장소였다. 여름에 소나기가 쏟아지면 창호지 문에 빗발이 쳐서 구멍이 뚫리고 개구리들이 그 구멍으로 뛰어들어와 꽥꽥 울었다.
겨울이면 아랫목에 생쥐들이 와서 이불 속에 들어와 잤다. 자다 보면 발가락을 깨물기도 하고 옷 속으로 비집고 겨드랑이까지 파고들어 오기도 했다. 처음 몇 번은 놀라기도 하고 귀찮기도 했지만 지내다 보니 그것들과 정이 들어버려 아예 발치에다 먹을 것을 놓아두고 기다렸다.
개구리든 생쥐든 메뚜기든 굼벵이든 같은 햇빛 아래 같은 공기와 물을 마시며 고통도 슬픔도 겪으면서 살다 죽는 게 아닌가. 나는 그래서 황금 덩이보다 강아지 똥이 더 귀한 것을 알았고 외롭지 않게 되었다.
-「유랑걸식 끝에 교회 문간방으로」중에서
난방은 고사하고 찬바람이 숭숭 한데나 다름없이 들어오던 교회 문간방에 비하면 빌뱅이 언덕의 토담집은 그나마 한결 아늑했으리라. 20여 년 전 동료 교사와 처음으로 이 집을 찾아왔을 때 세 사람이 앉으면 꽉 차는 작은 방에서 선생은, “내 누운 자리에 그대로 흙만 덮으면 무덤이 된다.”라고 말했다. 그 모습이 마치 새 같고, 풀 같고, 천진한 어린아이 같았다. 댓돌 위에 놓인 검정 고무신 한 켤레와 작은 방문 위에 동글동글하고 예쁘장한 글씨로 손수 써 붙인 ‘권정생’이라는 문패만이 이 집에 권정생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조용히 말해줄 뿐이었다.
『몽실 언니』의 현장
■ 나의 동화는 슬프다. 그러나 절대 절망적인 것은 없다. 어른들에게도 읽히게 된 것은 아마 한국인이면 누구나 체험한 고난을 주제로 썼기 때문일 것이다.(중략) 설교를 듣는 것보다, 한 권의 도덕 교과서를 읽는 것보다 푸른 하늘과 별과 그리고 나무와 숲과 들꽃을 바라보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 고통을 겪는 것은 우리 인간만이 아니다. 한 포기의 나무와 꽃과 풀도 끊임없이 시달리며 살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억척같이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다.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자기만의 빛깔로 세상을 밝혀주고 있다.
-「나의 동화 이야기」 중에서
과연 권정생의 작품 속 인물은 모두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절망하지 않고 따뜻하고 굳센 인물들뿐이다. 토끼건 송아지건 풀이건, 심지어 똥까지도 모두 착하고 어질다. 선생은 일찍이 혼자서는 못 살아 세상 모든 것과 함께 산다고 말했다. 남들이 질겁하는 생쥐도 그에게는 친구고, 흙 묻은 발로 들어와 동화책을 읽거나 자고 가는 동네 꼬마들도 그의 소중한 친구들이다.
한평생 이 세상 외롭고 약하고 가난한 이들의 친구로 산 선생의 작품들 중에서도 장편소설 『몽실언니』를 가장 으뜸으로 꼽고 싶다. ‘몽실언니’에는 서러움과 배고픔과 아픔을 진정으로 겪어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가슴 아프고 진실한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몽실언니’의 공간적 배경은 권정생 선생의 삶의 행적과 일치한다. 공간적 배경이 어디인지 작품 속에서 정확히 드러낸 곳은 없지만 주요 무대가 선생이 실제로 살았던 노루실과 댓골인 것은 분명하다.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 사무국장 안상학 시인이 쓴 글 「권정생 소년소설 『몽실 언니』 현장 있다」(매일신문, 2010년 2월 7일)에 따르면, 노루실은 일직면 운산장터에서 남쪽으로 오 리 밖, 지금은 폐교가 된 망호리의 일직남부초등학교가 있는 골짜기라고 한다. 학교가 있는 왼쪽 마을이 노루실이고, 오른쪽 마을은 비내미라는 곳이다. 이 동네에서는 누구든지 붙들고 물으면, “저 짝이 노루골이씨더.”하며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하지만 지금 그곳은 아무도 살지 않는 그저 산자락일 뿐이다.
선생의 임종을 지킨 시인 김용락은 선생으로부터 직접 “노루실은 비내미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선생이 살던 당시는 그러하였는지 몰라도 지금의 비내미는 노루실 건너편에 있는 마을이다. 하지만 이는 행정구역상의 구분일 뿐, 노루실과 비내미는 한눈에 다 들어올 만큼 지척에 있다. 어떻든 노루골의 입구에 해당하는 이곳은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이 옮겨갈 예정지이자 ‘권정생 문학관’이 세워질 곳이기도 하다. 권정생 문학관이 들어설 일직남부초등학교는 선생이 1946년에 일본에서 돌아와 외가인 청송 현서면 댓골에서 2년 남짓 살다 아버지의 고향인 안동으로 옮겨온 뒤부터 다닌 모교이기도 하다.
작품 속에서 어머니 밀양댁은 아버지 정씨가 돈 벌러 나간 틈을 타서 몽실이를 데리고 야반도주를 하여 댓골에 사는 김씨에게 개가를 하였다. 그러나 몽실이는 여기에서 다리병신이 되어 고모 손에 이끌려 다시 노루실로 돌아와 친아버지 정씨와 살게 된다. 사장이 떳떳하지 못해 해방 후에 정착했던 살강마을로 돌아가지 못하고 노루실에 터를 잡은 것이다. 살강마을 역시 고운사 근처에 있는 살가리를 염두에 두고 지어낸 지명이다.
“깡통을 들고 장터 마을로 갔다. 신작로를 걸어서 오릿길을 가야 한다.”에 등장하는 ‘장터 마을’은 안동 일직면 운산리 운산장터를 가리킨다. 이 장터가 있는 읍내 거리에서 몽실이는 진달래꽃을 양동이에 가득 마아 팔고 있는 소녀를 만난다. 가여운 마음에 전 재산인 백 환을 주고 사려다가 그 소녀가 “꽃을 사려거든 삼십 환만 줘. 그럼 이것 다 줄게. 난 거지가 아니니까 공으로 돈 받지 않아.”라며 화를 내자 부끄러워 얼굴이 활활 달아올랐다는 대목이 있다. 선생은 평소 자신이 경험한 것들을 주로 썼으므로 이 일 역시 사실에 근거했을 가능성이 큰데, 그 어려운 시절에 그것도 도회지가 아닌 시골에서 흔하디흔한 진달래꽃을 꺾어다 파는 아이가 있고, 또 그 꽃을 사가는 사람이 있었다는 게 놀랍기만 하다.
또 ‘몽실 언니’에 자주 등장하던 기차 정거장은 운산역을 가리킨다. 노루실에서 운산역까지는 소설에서처럼 정확히 2킬로미터의 신작로다. 지금은 잘 포장된 아스팔트 길이지만 그 당시엔 먼지가 폴폴 날리는 비포장도로였을 터이다. 그런데 어른에게도 간단치 않았을 그 길을 몽실이는 어린 나남이까지 등에 업은 채 걷고 또 걷는다.
어디 그뿐인가. 의성역에서 청송 댓골 마을까지 걸어가자면 평균 5시간은 족히 걸리는 20킬로미터의 시골길이다. 이 길을 열 살짜리 어린 몽실이가 “아침 일찍 가면 저녁에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면 때로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때로는 먹을 것을 얻기 위하여 운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의성역까지 가고, 거기서부터 또 한참을 걸어서 댓골 어머니 집과 자신이 사는 노루실 사이를 오간 것이다. 훗날 선생은 몽실이가 오갔던 이 길을 일부러 걸어보았다고 하였다. 몸도 성치 않은 분이 무슨 생각으로 그 기나긴 길을 걸어가셨을까.
선생의 익살과 재치
‘몽실 언니’가 세상에 알려진 후, 부쩍 선생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아마 제대로 만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혹 만났다 하더라도 그다지 후한 대접을 받고 간 이는 드물 것이다. 아무리 멀리서 왔다 하여도 댑다 “가라!”, 그도 아니면 아예 문을 닫고 내다보지도 않을 때가 많았으니 말이다. 이는 쓸데없는 언론의 관심을 꺼려하던 칼칼한 성미 탓도 있었으나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건강 때문이었다. 오랜 지인이자 동화 작가 권정생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누구보다 노력했던 이오덕 선생에 따르면, 선생의 건강은 “상태가 좋을 때가 보통 사람이 지게로 한 짐 가득 지고 있는 것 같다.”라고 했으니 이런저런 세간의 관심이 버거웠을 것이다.
하지만 아는 이는 다 안다. 권정생 선생이 얼마나 우스갯소리를 잘하는 어른인지. 괜스레 선생 앞에서 바짝 긴장을 하고 있던 상대는 졸지에 허를 찔리고 만다. 권정생 동화의 한 축으로 ‘익살’과 ‘재치’가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선생의 이런 성격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상대에 따라 다르겠지만, 뭔가 어색하거나 주눅이 든 분위기를 당신이 먼저 풀어내려는 따뜻한 배려 때문에 보통은 그 앞에서 금세 마음이 편안해진다. 다음 시에는 선생의 그런 성품이 잘 드러나 있다.
■ 도모꼬는 아홉 살
나는 여덟 살
이학년인 도모꼬가
일학년인 나한테
숙제를 해달라고 자주 찾아왔다.
어느 날, 윗집 할머니가 웃으시면서
도모꼬는 나중에 정생이한테
시집가면 되겠네
했다.
앞집 옆집 이웃 아주머니들이 모두 쳐다보는 데서
도모꼬가 말했다.
정생이는 얼굴이 못생겨 싫어요!
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도모꼬 생각만 나면
이가 갈린다.
-「인간성에 대한 반성문2」전문
그런데 선생의 익살과 재치가 가장 통쾌하고 멋스럽게 발휘된 자리는 엉뚱하게도 자신의 장례식장이었다. 선생이 40여 년을 살던 동네, 안동 조탑리 5층 전탑 앞에서 치러진 장례식에서 선생의 유서가 낭독될 때, 적어도 그곳을 참석했던 사람들은 그날의 인상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 내가 쓴 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는 것이니 여기서 나오는 인세는 모두 어린이들에게 돌려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중략) 만약에 죽은 뒤 다시 환생을 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있다. 태어나서 25살 때 22살이나 23살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벌벌 떨지 않고 잘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환생했을 때도 세상엔 얼간이 같은 폭군 지도자가 있을 테고 여전히 전쟁을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환생은 생각해 봐서 그만 둘 수도 있다.
-「2005년 5월 1일 작성한 유언장」 중에서
제 예금통장 다 정리되면 나머지는 북쪽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보내주세요. 제발 그만 싸우고, 그만 미워하고 따뜻하게 통일이 되어 함께 살도록 해주십시오.
중동, 아프리카, 그리고 티벳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지요. 기도 많이 해 주세요. 안녕히 계십시오.
-「2007년 3월 1일 작성한 유언장」중에서
울다가 웃고, 웃다가 우는 이런 장례식장이 세상에 또 있을까? 선이 건네는 마지막 농담 같은 유언장에 다들 쿡쿡거리며 웃다가도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시계와 북녘의 어린이들을 걱정하는 대목에서는 다시 뜨거운 눈물이 마냥 흘러내렸다. 하지만 요사이 정부의 대북 정책을 보고 있너라면 전쟁은 가깝고 통일은 멀게만 보이니 선생이 환생을 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 같다. 무슨 선경지명이 있었나 보다.
여전히 선생의 빈자리를 슬퍼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겠지만 그 죽음을 지나치게 애달파하지는 않아도 될 것 같다. 마지막 가는 자리에서도 우리를 그와 같이 웃게 해준 것처럼, 선생은 오래 전부터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선생이 평소 꿈꾸었던 것처럼 그저 자연으로 돌아간 것이라 믿고 싶다. 자연이 그러하듯 언제나 선생은 거기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것이므로.
좀 외로우면 될 걸 가지고……
선생이 유지에 따라 재단법인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에서는 안동의 15개 공부방에 동화책 백 권씩을 전달하고 북한 어린이들을 위한 사과나무를 심는 일부터 시작했다.
이후 재단에서는 조성된 기금과 매년 들어오는 인세를 바탕으로 폐교된 일직남부초등학교를 구입, 권정생 문학관을 세우는 사업을 추진 중이며 국내외 불어한 어린이 돕기 사업, 동화 작가 발굴과 지원 사업 등을 벌이고 있다. 또한 선생이 살던 집은 우여곡절 끝에 권정생기념사업회로 넘어가 고인의 생전 소망과는 달리 그 집을 보존키로 했으며, 고인의 재산은 재단에서 맡아 관리하고 있다.
해마다 5월 17일에는 권정생 선생이 살다 간 그 집, 빌뱅이 언덕의 외딴 오두막을 찾아가본다. 선생 생전에도 사후에도, 낮에도 밤에도 언제나 그곳은 지나치게 외롭다. 그중에서도 ‘권정생’이라 직접 쓴 문패가 가장 외롭다. 그래서 눈물이 난다.
그러나 일찍이 고정희 시인은 말했다.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소설가 박경리도 말했다. ‘외로워야 자유롭다.’, 그리고 동화 작가 권정생은 이렇게 말한다. ‘좀 외로우면 될 걸 가지고…….’
13. 안동 원촌 마을,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이육사
보수와 진보가 ‘따로 또 하나’로 존재하는 안동
■ 어제의 햇볕으로 오늘이 익는
여기는 안동
과거로서 현재를 대접하는 곳
서릿발 붓끝이 제 몫을 알아
염치가 법규보다 앞서던 곳
옛 진실에 너무 집착하느라
새 진실에는 낭패하기 일쑤긴 하지만
불편한 옛것들도 편하게 섬겨가며
차말로 저마다 제 몫을 하는 곳
눈비도 글 읽듯이 내려오시며
바람도 한 수 읊어 지나가시고
동네개들 덩달아 댓귀 받듯 짓는 소리
아직도 안동이라
마지막 자존심 왜 아니겠는가.
* 차말로: ‘참말로’의 경북 지역 방언
- 유안진, 「안동」 전문
안동이 어떤 고장인가 물어오면 안동 출신의 시인 유안진의 시 한 자락으로 그 대답이 될 성싶다. 안동이라고 하면 즉각 ‘양반’과 ‘보수’를 떠올리는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이곳은 퇴계 이황 선생을 비롯하여 서애 류성룡 선생 같은 쟁쟁한 선비와 유생들이 많이 배출된 곳이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자기 고장을 ‘추로(鄒魯, 공자와 맹자)의 향鄕’이라고 자랑삼아 말한다. 도산서원, 호계서원, 병산서원, 안동향교들을 비롯하여 근교에 서당과 서원만 해도 40여 개나 되는 안동시는 시정 구호는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이다. 만만찮은 역사와 인물을 가지고 있다는 긍지와 자부심의 표현이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보수적인 곳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경북 안동은 또한 국난 때마다 자발적으로 일어나 나라를 지킨 의병들과 독립투사가 가장 많이 배출된 곳이기도 하다. 보수와 진보가 이처럼 한 곳에 밀집해 있는 지역도 그리 흔치는 않을 것 같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 독립 투쟁과 관련하여 스스로를 ‘독립운동의 성지’, ‘독립운동의 본향’이라고 했을 만큼 안동은 독립운동과도 관련이 깊은 곳이다. 항일 의병의 효시랄 수 있는 갑오의병의 발상지요, 1905년 이후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만 무려 열 명에 이르는 지사와 열사의 고장(전국 66명)이기도 하며, 갑오의병 이후 1945년 안동농림학교 학생항일운동에 이르기까지 51년 동안 쉼 없는 독립 투쟁을 전개 하며 단일 시군으로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유공 포상자(310여 명, 포상받지 못한 이를 포함하면 1천여 명)를 배출한 곳, 안동.
그런 항일운동의 역사를 기리기 위해 안동시는 2007년 8월 11일 임하면 천전리 옛 천전초등학교 자리에 안동 독립운동 기념관을 개관하였다. 주로 안동 지역을 중심으로, 안동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소개한 기념관으로서, 전국 지방자치단체의 힘으로 독립운동 기념관이 건립된 것은 처음이다.
독립투사 집안의 ‘눈물 안 흘리는’ 여섯 형제의 우애
안동에는 일제강점기에 만주로 독립 투쟁을 하러 떠나면서 노비 문서를 태워 노비들을 다 풀어주었다는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과 함께 퇴계 선생의 14대 손이자 항일 운동가요, 저항 시인인 육사 이원록(1904-1944) 선생의 집안이 있다.
육사의 어머니인 허씨인 집안 역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항일 가문이다. 또한 석주 이상룡 선생의 손자며느리와 육사의 어머니는 이종사촌이 되기도 한다. “새는 깃털이 같은 새끼리 논다.”라는 서양속담이나 ‘유유상종’이라는 말처럼 독립운동가 가문을 살펴보면 서로 혈연으로 이어져서 사돈에 겹사돈으로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바로 석주 선생과 육사 시인의 집안처럼 말이다.
육사는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에서 여섯 형제 중 두 번째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를 가장으로 한 육사 일가는 창씨개명에 불응함은 물론 항일 운동에 철저한 나머지 그 형제들은 항상 일제의 감시 속에서 살아야 했다.
어머니로부터 ‘눈물을 흘리지 말라’고 배운 이들 여섯 형제들의 우애는 유명하여 내 것 네 것이 없이 지냈으며, 지금까지도 다서 형제(원기, 원록, 원일, 원조, 원창, 막내인 원홍은 일찍 운명함)는 호적상 분가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형제들 중에서도 셋이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그중 가장 행동파였던 육사는 밀명을 받고 북경으로 가 북경군관학교에 적을 두고 있다가 1927년에 귀국하여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투척 사건에 연루되어 첫 번째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일평생 열일곱 차례나 겪게 되는 감옥살이의 시작이었다. 이때 죄수 번호가 264번이라 하여 이후 이육사로 불리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육사는 1944년 해방을 1년 앞두고 일본 헌병대를 기습한 뒤 체포되어 북경 감옥에서 사망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영상 자료에 의하면 이때 이육사의 시신을 인계받은 사람이 이병희(93세) 여사로, 육사의 시신과 유품을 수습해 국내 유족에게 전달하는 등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 96년 국가유공자가 될 때까지 50년 간 독립운동가였던 사실을 숨기고 살아야 했어.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했던 경력이 혹시 후손들에게 누가 될까 봐…….
감옥에 가 보니 이육사가 눈을 부릅뜨고 성난 얼굴로 죽어 있었어. 온몸이 고문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지. 내가 두 눈을 감겨 주었어. 펑펑 울었지. 이육사 시체를 어디 가 찾나? 나 아니었으면 못 했지. 이제 그 「청포도」니 「광야」니 그 시집을 마분지 조각에다 이만큼 쓴 거를, 그게 유물이야. 다 내가 가지고 나온 거야. 지금 국민, 중학교 교과서 책에도 나오잖아. 내가 그거 안 가져 왔어 봐라? 일본눔들 손에 들어갔어 봐라?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영상 자료, ‘이병희 여사의 증언’ 중에서
육사가 죽은 뒤 1946년 단 한 권의 유고 시집 『육사 시집』이 나온 데에는 이병희 여사의 공헌이 적지 않은 셈이다.
이병희 여사는 이육사 시인의 손녀뻘 되는 친척으로 18살의 어린 나이에 위장 취업한 회사에서 반일 파업을 이끌다 옥고를 치렀다. 또한 의열단 단원으로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육사 선생과 함께 체포된 적이 있다고 한다. 2010년 10월 27일 국치 100년을 맞아 안동문화방송국에서는 김락, 남자현 여사와 함께 이 분을 여성 독립운동가로 소개한 바 있다.
안동 원촌마을
서울 미아리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던 그의 유해를 고향에 이장해 온 것이 1960년이고, 낙동강 변에 첫 시비 「광야」가 세워진 게 1968년이다. 시비가 안동댐 민속촌 입구로 옮겨진 뒤 그 자리는 ‘육사로’라는 이름의 큰길이 조성되어 그를 기리고 있다.
그러나 안동댐이 생기면서 수몰지로 정해진 까닭에 도산면 원촌리에 있던 육사 생가를 시내 태화동 포도골로 옮긴 지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생가를 찾아가는 길에는 표지판 하나 없어 찾는 이들의 애를 먹인다. 애써 찾아가도 초라하게 방치되어 있을 뿐이고, 어쩌다 문이 열려 들어가보면 좁은 마당 한 귀퉁이에 ‘이육사 생가’라는 안내판 하나만 을씨년스럽게 서 있을 뿐이다. 그나마 나무로 가려져서 관심 있게 찾아보는 이의 눈에나 겨우 뜨일 뿐인지라 문화 도시 안동에 걸맞지 않다는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 감출 길이 없다.
안동 시내를 벗어나 도산 방향으로 25킬로미터쯤 올라가면 도산서원 입구가 나오고, 여기에서 국도를 따라 언덕 하나를 넘으면 퇴계의 생가가 있던 도산면 은혜리에 닿는다. ‘퇴계종가, 퇴계종가, 이육사 문학관’이라는 표지가 있는 오른쪽 작은 길을 따라 5킬로미터쯤 가면 육사가 태어난 원촌이 나타나고, 그의 수필 「계절의 오행」에 나오는 “내 동리 동편에 왕모산”이란 대목처럼 우뚝 솟아 있는 왕모산 저 앞쪽에 이육사 문학관이 아담하게 서 있다.
문학관 근처 작은 ‘청포도 시 공원’ 안내판에는 이 원촌마을을 예부터 ‘하늘이 아끼고 땅이 감추어둔 그윽하고 구석진 두메산골’이라고 불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지금도 동네 어르신들이 이곳을 가리켜 ‘먼데마을’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교통수단이 없던 예전에는 정말 까마득한 오지였음에 분명하다.
안동댐으로 인하여 물이 들어온다고 시인의 생가를 시내로 옮겼는데 아직까지 물이 예까지 차오른 적은 한 번도 없고, 시내의 생가는 폐가처럼 무너져가는 데다 정작 생가 자리에서는 동네 사람들이 여전히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문학관 안에 생가를 복원해내기보다는 차라리 시내로 옮긴 집을 다시 제자리에 갖다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예술가는 그를 사랑하는 고향 사람들이 만든다
1970년대 안동댐 건설로 300여 년 동안 번성했던 이 마을은 이제 옛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남은 유적으로는 원대정과 원대고택 등 몇 점이 있을 뿐이다.
이육사 탄생 100주년을 맞아 2004년 시인의 고향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 불미골 생가 터에 문을 연 이육사 문학관은 지상 2층 규모로 지어져 시인의 생애와 문학 세계, 글고 육사가 걸었던 항일운동의 가시밭길을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특히 2층은 낙동강이 굽이쳐 흐르는 원천리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시상詩想 전망대’ 등이 갖춰져 있어 이육사 문학관의 가장 핵심적인 공간이라 할만하다. 문학과 주변에는 연목과 분수대, 생가인 ‘육우당’, ‘청포도 샘’과 ‘청포도 밭’, ‘이육사 동상 등이 조성되어 시심을 즐기도록 해놓았다. 문학관 바로 뒤에 있는 산으로 3킬로미터 남짓 올라가면 시인의 묘소가 있으나 워낙 높은 곳에 있어서 애초에 관을 어떻게 이곳까지 옮겼는지 놀랍기만 하다. 묘소 참배를 강행하려면 마음을 단단히 다잡아야 할 것이다.
문학관에서 안내하는 ‘이육사 문학로드’를 따라가노라면, 원래 생가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청포도」 시비를 비롯하여 「절정」을 낳은 왕모산 칼선대, 그리고 「광야」의 시상이 떠오르는 쌍봉 윷판대 등에서 육사 시 세계의 전모를 느낄 수 있다. 특히 봉화의 농암종택까지 이어지는 ‘퇴계 예던길’은 절경 중의 절경이다. 단천리 전망대에 서면 멀리 청량산이 마주 보이고 월명담이며 학소대, 벽력암 등 우뚝한 기암절벽 아래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니 가히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이곳 문학관에는 4-5년 전부터 이육사 시인의 고명딸 이옥비(71세) 여사가 한복을 곱게 입고서 방문객에게 아버지의 문학과 삶을 알리는 해설사로 일하고 있다.
이옥비 여사는 “‘비옥할 옥沃’ 자에 ‘아닐 비非’ 자를 쓰지요. ‘기름지지 않다’, 즉 욕심을 부리지 말고 소박하게 살라는 뜻으로, 아버지가 주신 평생의 선물이라 생각해요.”라며 아이보리색 양복을 입으셨다는 것만 어렴풋하게 기억날 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언젠가 조지훈 시인 등 아버지와 벗하던 아들이 이 집으로 찾아와 말해주었다며, “아버지는 말을 달리면서 총을 쏘더라도 백발백중인 총의 명수였대요.”라고 잠시 지난 시절을 회상하기도 하였다. 아버지가 쓴 시를 비롯한 소중한 자료들이 6·25 전쟁 당시 폭탄을 맞아 소실된 것을 지금도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는 이옥비 여사는 더 늦기 전에 어머니의 회고와 지인들의 기억을 모두 모아서 조금씩 글로 정리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예술가는 그를 사랑하는 고향 사람들이 만든다고 한다. 그런데 이육사 시인을 기리겠다고 만든 문학관에 아쉽고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있다. 바로 입장료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문학관이 있는 곳은 버스가 하루에 세 번밖에 가지 않는 시골 후미진 곳이라, 특히 학생들이 찾아가기에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그런데 기껏 찾아간 이에게 입장료까지 받고 있는 것이다. 전국에 입장료를 받는 문학관이 이곳 말고도 두어 군데 더 있는데, 지자체마다 경쟁하듯 지역을 알리는 일에 엄청난 노력과 투자를 하는 마당에 굽이굽이 먼 길을 찾아온 사람에게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이 아닐까. 모름지기 문학관이란 여럿이 와서 지역 작가의 삶과 문학을 보여주는 데 목적을 두어야 마땅하거늘 입장료를 징수하는 것은 목적에 비추어볼 때 아무래도 적절치 않은 듯하다.
「청포도」의 산실
■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청포도」 전문
위 시 「청포도」는 오래 전부터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어서, 혹 사람들 중에는 안동이 청포도가 많이 열리고 돛단배가 오락가락하는 어촌인 줄 아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안동에는 청포도도 배도 없다. 이 점을 두고 포항시에서는 대보면 호미곶 등대박물관 옆에는 이육사가 1937년 요양 차 포항 송도에 머물면서 일원지 포도원을 찾기도 했다는 이유로 ‘여기가 청포도의 산실’이라고 주장하며 영일만 들머리에 이육사의 「청포도」시비를 세워서 기리고 있다.
그러나 이육사 문학관의 사무국장 이위발 시인은 포항의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어림도 없는 소리”라며, 옛날 이 마을에 많이 열리던 산머루를 ‘덜 익은 포도’라는 뜻에서 청포도라 했을 수 있고, 자나 깨나 고향을 사랑하고 그리던 시인이 누워서 푸른 하늘을 보고 ‘바다’라 이미지화하였을 것이라고. 그리고 원촌은 ‘시내에서 먼 곳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마을 사람들은 흔히 ‘먼 데’라 불렀으므로 시 속에 등장하는 ‘먼 데’란 바로 원촌리를 뜻하는 것이며, 더구나 이곳은 접빈객 문화가 발달하여 손님을 지극정성으로 대접하던 고을이므로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두렴’이라 시화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시를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 이런 사실 여부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겠으나 지역 사람들에게는 드높은 자손심의 문제이므로, ‘여기가 거기다’라고 함부로 발설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여전히 학교 현장에서는 이육사의 삶과 연관하여 모두들 독립을 염원하며 조국 해방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미래지향적이며 긍정적인 시인의 낙관적 자세라 가르치고 있다.
유명 시인이 잠시 거쳐 간 자취만 있어도 여러 개의 시비를 세운다는 선진국의 예를 보더라도 문학적 유산이 드문 포항 지역에서 위대한 시인을 기념한다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참에 여러 지역 골골마다 문학과 예술의 기념물들이 좀 더 많이 남겨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칼날 같은 저항과 여유만만한 시 「절정」
1930년대 독립군 자금을 모으기 위하여 여러 차례 만주를 왕래할 때 육사는 이 드넓은 광야를 달리면서 우리 민족에게 조국 광복을 가져다줄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애타게 기다렸나 보다. 그는 투사의 모습과 시인의 얼굴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으니 그의 시에 절로 고구려 장군의 우렁찬 소리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켜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제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절정」 전문
이 시는 자기 관조의 여유와 준엄한 선비의 자세로 드높은 자존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저항시다. 일제에 쫓겨 눈 덮인 매서운 추위의 북만주 벌판을 헤매면서도 ‘겨울은 강철도 된 무지개’라 말하고, ‘한 발 디딜 곳조차 없’고 ‘서릿발 칼날 진’ 상황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독립 전사의 기세가 서슬 퍼렇다.
「절정」의 시상이 잉태되었다는 도산면 원촌리 근처 왕모산 칼선대에 오르면 육사가 자랐던 생가 터와 이육사 문학관이 아스라이 보인다. 깎아지른 수직의 벼랑 아래로 시퍼런 강물이 흐르고 주변에는 들과 산이 완만하게 펼쳐져 있다.
우리는 시대가 어두울수록 신념에 찬 인간을 그리게 된다. 역사 속에 살다 간 인간을 평가할 때 먼저 그가 살았던 시대를 염두에 두고 살펴봐야 하지만, 그가 과연 얼마나 그의 생각과 행동을 자신의 삶과 일치시켰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이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을 살았는가를 결정짓는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남긴 시와 일생의 행적을 볼 때 육사는 자신의 신념을 삶과 일치시킨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선생님, 이런 촌구석에서 어떻게 그런 훌륭한 사람이 태어났어요?”
미래를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이 배울 점이 바로 현장을 보고 돌아가는 학생에게서 나온 이 감탄사에 있지는 않을까.
17. 영양 주실마을, 맑은 시혼과 드높은 지조를 지닌 선비, 조지훈
문향으로 가득찬 고장, 영양
예로부터 경상북도에서 3대 오지를 꼽으라면 봉화, 영양, 청송이라 할 정도로 이 지역은 그야말로 오지 중에서도 깡촌에 속한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옛말이고, 지금은 세 곳 모두 오지라고 하기엔 어울리지 않을 만큼 길이 매끈하게 잘 뻗어 있다.
그중에서도 영양은 몇 사람의 굵직한 문인을 낳았는데 영양읍 감천리의 시인 오일도, 석보면 원리의 소설가 이문열, 또 일월면 주곡리의 시인 조지훈(1920-1968)이 대표적이다. 그러니 영양을 ‘문향(文鄕)’으로 부르는 데 누구도 이의를 달지는 못 할 것이다.
조지훈의 고향인 영양 주실마을은 아무래도 이육사의 고향인 안동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도중에 볼거리가 심심찮게 있어서 흥미롭다. 안동댐과 임하댐을 지나 영덕 방향으로 달리다가 진보 삼거리에서 31번 국도로 빠지면 곧장 영양읍으로 이어진다. 영양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살짝 우회전하여 석보면으로 들어가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젊은 날의 초상』, 『사람의 아들』등을 쓴 소설가 이문열의 고향, 원리가 나온다. 가파른 언덕 위에 자리 잡아 개울과 밭을 아래로 내려다본다 하여 두들마을로 불리는 이곳은, 영양군에서 막대한 예산을 들여 지금은 마치 드라마 세트장 같은 동네로 탈바꿈되었다. 마을 곳곳에서 이문열의 소년기부터 성장기, 장년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생애와 문학작품 하나하나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돌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곳에서 나와 다시 온 길을 되돌아 영양 방향으로 계속 나가다 4킬로미터쯤 되는 오른쪽 길가에 이르면 시인 오일도의 시비가 있는 자그마한 공원을 만나게 된다. 오일도 시인은 조지훈과 같은 시대에 활동한 시인으로, 일제 하의 암울한 시대적 상황에서도 민족적 양심을 저버리지 않은 지사이자 항일 시인이다. 본명은 오희병으로, 24세에 등단하여 1934년에는 사재를 털어 순수 시문학지 <시원>을 창간하기도 했다. 한적한 공원에 들어서서 저녁놀을 바라보며 시비에 새겨진 시 「저녁놀」을 읽어보는 것도 나름 멋스러울 것이다.
■ 이 우주에
저보담 더 아름다운 것이 또 무엇이랴!
저녁놀 타고
나는 간다.
붉은 꽃밭 속으로
붉은 꿈나라로.
- 오일도, 「저녁놀」 중에서
공원에서 길을 건너면 맞은편 동네가 오일도 시인이 태어난 영양군 영양읍 감천리이다. 낙안 오씨들의 집성촌인 이 마을도 좀 지나온 이문열의 두들마을처럼 모든 집과 길, 담 등이 잘 정비되어 있다. 조지훈을 비롯하여 지역이 낳은 걸출한 세 문인들에게 영양군에서 얼마나 큰 사랑과 지원을 보내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마을 중앙에 터를 잡은 시인의 생가는 44칸짜리 커다란 고택으로, 경북 문화재 자료 제 248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유난히 감나무가 많은 동네를 천천히 걸어 오일도의 시비 동산에서 시인의 흔적과 함께 아름다운 저녁놀을 다시 바라보며 이제는 주실마을로 가보자.
시인의 마을, 주실
감천마을에서 되나와 영양 읍내를 지나면 이곳 사람들이 ‘주실’이라 부르는 작은 동네 주곡리가 나온다. 이 마을은 한양 조씨의 동족 마을로서, 한양 조씨는 조선 중기,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50년 전쯤에 조광조 친족의 후손이 사화를 피해 들어와 정착하게 되면서 주실 조씨라는 별칭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한다. 이곳 조씨 가문은 예전부터 내로라하 는 인물들을, 그것도 한 문중에서 참 많이도 배출해냈는데, ‘동’자 항렬만 따져보아도 지훈 조동탁을 시작으로 국문학도의 필독서인 『한국문학통사』를 쓴 서울대의 조동일, ‘독립운동사’ 연구에 빛나는 조동택, 인하대의 조동성 등 대학 강단에 선 교수만도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지경이다. 사정이 그러한즉, 주실에 와서 인물 자랑 하지 말라는 말은 과히 틀리지 않은 듯하다.
마을 어귀에 이르면 250여년 된 느티나무가 파수꾼처럼 서 있고, 고요하고 한가로운 길가에는 늦가을의 나무와 숲과 맑은 하늘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그야말로 시인의 마을다운 정취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느티나무 안쪽으로 시비가 서 있는 숲길이 보이는데, 그 길이가 겨우 50미터 남짓이지만 어찌나 아름답고 그윽한지 굳이 문학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단박에 반할 정도로 감미로운 숲길이다.
정강이까지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밟으며 한 걸음씩 들어가다 보면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찾아와 걷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 그런 길이다. 동행이 싫다면 김밥 한두 줄과 물 한 병, 책 한 권 들고 아무 데나 자리를 잡고 앉아 오래도록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도 좋겠지, 하는 생각으로 무심하게 걷다 보면 어느새 세월이 묻어있는 조지훈의 시비와 만나게 된다. 시비에는 가느다란 펜으로 그어놓은 듯 희미한 서체로 「빛을 찾아가는 길」이 새겨져 있다.
■ 사슴이랑 이리 함께 산길을 가며
바위틈에 어리우는 물을 마시면
살아 있는 즐거움의 저 언덕에서
아련히 풀피리도 들려오누나.
해바라기 닮아가는 내 눈동자는
자운紫雲 피어나는 청동의 향로
동해 동녘 바다에 해 떠오는 아침에
북받치는 설움을 하소하리라.
돌부리 가시밭에 다친 발길이
아물어 꽃잎에 스치는 날은
푸나무에 열리는 과일을 따며
춤과 노래도 가꾸어 보자
빛을 찾아 가는 길의 나의 노래는
슬픈 구름 걷어가는 바람이 되라.
-「빛을 찾아가는 길」 전문
조지훈의 시비라면 으레 그의 대표작인 「승무」가 새겨져 있겠거니 했는데, 뜻밖이었다. 시비를 둘러선 숲 저 너머로 주실마을이 어슴푸루하게 눈에 들어온다. 길 건너 숲에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조지훈의 형, 조동진의 시비 「국화」가 세워져있다. 조지훈이 시인이 된 것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형의 영향이라고도 한다. 평소 “형이 살았더라면 나까지 시를 쓸 필요는 없었는데…….”라며 안타까워했다니 한번 찾아가서 시비에 적힌 시를 읽으며 그 말을 직접 확인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드높은 자존심 ‘삼불차’
숲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가는 어귀에서 나무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 전통 한옥으로 커다랗게 지은 ‘조지훈 문학관’을 만난다. 그동안 일반인에게 문학은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 그러나 점차 국민 소득과 지적 수준이 높아지면서 지역마다 제 고장 출신 작가들의 문학관이나 기념관을 지어 널리 자랑하게 되었다. 심지어는 제 고장 출신이 아니더라도 특정 문학인의 작품에 제 지역이 등장하기만 하면 이를 기념하는 터라 문화 황무지를 겪은 자로서 일단 즐겁지 않을 수 없다.
지방자치 시대에 앞을 다투어 ‘문학관’이나 ‘기념관’을 급조하여 상품화하는 모양을 두고 눈살 찌푸리는 이도 적지 않지만, 이것은 달리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시간이 흘러 후손들로부터 조상의 빛나는 과업을 담아내는 기념관이나 문학관, 동상, 시비 하나 없이 뭐했느냐는 비난을 피하는 길이 이 길 외에 무엇이 또 있으랴! 사람의 정신에 힘 있고 아름다운 문장 하나 심어주는 것이 정신을 살리고 인생을 바로 잡아 주는 길이 아니던가.
문학관이란 것이 기본적으로 작가의 성장기와 활동 상황, 직접 쓴 원고 등이 전시되어 비슷비슷해보인다. 하지만 특별히 그 지역이나 집안의 역사를 비중 있게 다룸으로써 작가와 작품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기에 그 차별성이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특히 조지훈 선생의 문학관에는 선생의 성장기와 청록파 시절 등의 활동, 그리고 육필 원고 외에도 가계와 연보, 그리고 주실마을에 자리 잡은 한양 조씨 선조들의 빛나는 역사와 정신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왜 그렇게 많은지를 이해할 수 있다.
주실마을에 들어서면 마을의 역사와 유서를 대신하듯 오래된 기와집들이 가지런히 늘어서 있다. 집성촌답게 아직도 절반 이상의 주민들이 한양 조씨들인데, 실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일찍이 개화를 받아들인 고장답게 개방적이고 진취적이다. 박정희 정권 때의 ‘복잡한 의례 절차를 간소화하고 국민 생활을 합리화하자’는 가정 의례 준칙이 바로 이 마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나, 객지에 나간 자식들이 다 모일 수 있다는 이유로 그 시대에 드물게 양력설을 쇤 것도 결국 명분보다는 실리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합리적이고 진취적인 사고가 아니겠는가.
그런가 하면 예부터 ‘인물’과 ‘재물’과 ‘문장’을 빌리지 않는다는 ‘삼불차三不借’를 지킨 정신, 그중에서도 특히 다른 가문의 ‘인물’을 빌리지 않는다는 말은 곧 양자를 들이지 않는다, 대가 끊어지는 것을 받아들이겠다라는 뜻일 터. 그 드높은 긍지와 자존심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고전적이며 강직한 가풍을 이어받은 조지훈
조지훈 생가 옆에는 ‘호은정’이라는 현판이 붙은 별채가 있다. 이곳은 한때 이 지방의 정신적, 학문적 산실이었다 한다. 조지훈은 어린 시절 신식 보통학교에 들어가지 않고 가문에서 세운 월록서당에서 서당식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고 한다. 한학자인 그의 할아버지가 일본식 현대 교육을 받는 것을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조지훈의 증조할아버지는 대한제국 말엽 의병대장으로, 독립운동을 하다 을사조약 소식을 듣고 자결했다. 그의 아버지도 광복이 되기까지 호은정에서 청소년을 모아 신학문과 민족정신을 가르쳐 일제로부터 고초를 당했던 인물이다. 당연히 조지훈도 이런 가풍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조지훈은 1920년 12월 3일에 태어났으며, 본명은 동탁이다. 그는 열여덟 살 때 서울로 올라가, 같은 영양 출신의 시인 오일도 선생이 경영하던 출판사인 시원사에 머무르며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혜화전문학교에서 처음으로 정규교육을 받았고, 이때 불교적인 정신세계와 만났다.
그러나 그 당시 많은 문학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조지훈도 서구의 문학작품들을 접하면서 서구에 기반을 둔 문학적 체험과 어릴 적부터 몸에 밴 유교적 전통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겪었다. 그러던 무렵, 정지용이 ‘서구 취향의 시보다 한국적 풍토와 전통적인 서정시’를 쓸 것을 권고하여 조지훈을 <문장>지에 추천하자, 비로소 창작의 방향을 가다듬어 1939년에 등단했다. 그 뒤 조지훈은 우리 민족의 정신적 뿌리와 민족적 전통을 계승하여 「고풍의상」, 「봉황수」,「무고」,「승무」,「가야금」 등의 작품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오랫동안 수록되었던 그의 대표작 「승무」는 그가 열아홉 살 때, 현 경기도 화성시 용주사에서 승무를 본 뒤 그 감상을 바탕으로 쓴 것이라고 한다.
■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중략)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양 하고
이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승무」 중에서
1943년 가을, 조지훈은 일제의 탄압이 가장 극악했던 시절에 고향으로 돌아온 뒤 친일 단체의 입회를 강요받았다. 그러나 그 당시 그는 차라리 붓을 꺾는 쪽을 택했고, 나중에 「지조론」이라는 글을 쓸 만큼 변절에 대해서 완고한 입장을 가졌다. 『친일문학론』의 저자 임종국도 일제에 협력하지 않은 대표 문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조지훈을 손꼽는다.
그 뒤 광복과 6·25 전쟁을 거쳐 4·19 혁명을 겪으면서 조지훈의 시 세계는 고전적인 정서에서 점차 역사와 현실의 세계로 확대되어갔다. 그 뒤로도 세상이 어지러울 때면 그는 주저 없이 바른 소리를 함으로써 지사志士로서의 본분을 다하다가 1968년 48세의 나이로 운명하였으니, 그의 삶과 문학은 일치했다.
조지훈은 고려대학교 교수로 20여 년간 재직하면서 문학 외적인 저술 또한 많이 남겨놓았다. 그러나 그는 전통적 서정성을 현대 시에 접목시켜 이를 계승 발전시킨 대표적 시인이며,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청록파를 이룬 3인 가운데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다.
■ 『청록집』이 우리 세 사람 공동의 첫 시집이라는 것과 그리고 거기 수록된 작품들이 모두가 해방 직전 –주로 발표의 길이 막혔던 암흑기에 쓰여진 것들임은 이미 주지하는 사실이다.
우리 세 사람은 같은 시기에 시를 쓰기 시작했고, 또 같은 무렵에 <문장>이라는 같은 문예지에 추천 시인으로 시단에 등장한 사람들이다. 발표할 수 없던 시를 발표하게 된 해방의 감격, 혼란한 정치 조류 속에서 시의 바른 길을 제시하려는 의욕, 우리 시의 새로운 전개를 위한 교량으로서의 전통의 집성, 이런 것이 어울려서 『청록집』을 엮게 한 객관적인 기연奇緣이 되었지만, 이러한 의욕이 어째서 하필이면 윌 세 사람을 한데 엮음으로써 시도된 것일까.
- 조지훈, 「내 시의 고향」, 『조지훈: 청소년이 읽는 우리 수필3』(돌베개, 2003) 중에서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병에게』
그다지 넓지 않은 마을에는 골목골목마다 친절하게 팻말을 세워두어 길손을 흐뭇하게 한다. 단지 마을 가운데 산 아래로 ‘주실교회’라는 생뚱맞은 신식 건물이 눈에 거슬리지만 옥의 티라 생각하며 몇 걸음 걷다 보면 금세 ‘지훈 시공원’과 만날 수 있다.
작은 계곡 옆 산자락을 따라 오르게 되어 있는 시 공원에는 조지훈의 동상과 그의 대표 시 「파초우」, 「승무」, 「낙화」, 「고풍의상」등을 형상화한 조각상들과 함께 20편이 넘는 시를 돌에 새긴 시비가 줄지어 서 있다. 시를 읊어가며 한 걸음씩 공원으로 걸어 들어가다 보면 시와 무관한 사람들까지도 시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게다가 누가 썼는지 돌에 새긴 글씨가 우아하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보는 이를 편안하게 한다. 시를 좇느라 드문드문 걸음을 옮기던 중 문득 걸음을 멈추게 하는 시비가 있다. 유난히 병약하여 적지 않은 세월을 병상에서 보냈다는 시인의 삶을 엿보게 하는 시 「병에게」이다.
■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병에게」중에서
병을 의인화하여 ‘자네’라고 부르며 정다운 친구인 양 대하고 있는 이 시에서 시인은 병을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가 병을 ‘우울한 방문객’이라고 하다고 곧 ‘오랜 친구’라 인정하며, 병을 잊고 지낸 시간을 ‘뉘우치게’된 까닭은 무엇일까?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던 데다 기관지 확장증이라는 지병까지 있었던 조지훈에게 어쩌면 병은 물리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품고 가야 할 친구 같은 대상이었을 것이다. ‘우울한 방문객’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삶에 대한 외경을 가르치는 고마운 친구. 그 친구를 잊고 정신없이 바쁘게 달려온 자신을 뉘우치는 모습에서 얼핏 고전 산문 「축병문」이 떠오른다.
조선 휘 숙종 조의 문신이었던 오도일이 쓴 이 산문은 자신을 괴롭히는 병과 대화를 나누는 독특한 형식의 글로, 건강에 대해 말하고 있는 듯하지만 실상은 생활을 해나감에 있어 늘 스스로를 경계하고 절제해야 한다는 성찰이 담긴 글이다. 병을 통해 자신을 돌아본다는 점에서 두 글은 닮아 있다. 그러나 「축병문」이 스스로를 경계하고 바른 삶의 자세를 가질 때 병이 저절로 물러날 것이라 이야기하고 있는 데 비해 조지훈 시인의 「병에게」는 여기에서 한 걸은 더 나아가 자신을 괴롭히는 지병을 오랜 친구라 부르며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그야말로 대단한 긍정이 아닐 수 없다. 삶에 대한 성찰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번쯤 학생들에게 이 시를 읽어 주며 ‘자네’가 누가인지 생각해보게 함으로써 병을 대하는 자세를 가르쳐줄 만하다.
‘자네’를 한 음절로 답해보라 했을 때 어린 학생들이 눈망울을 반짝이며 듣다가 마침내 ‘병’임을 알아내기라도 하면 대견하기 그지없다. 혹 마지막 연에 나오는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하면/ 그대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라는 표현에서 병을 직면하면 물리칠 수 있을 것까지 알고 있을지 궁금하다.
꽤 오랜 시간 동안의 시공원 산책을 마치고 나면 마치 시집 한 권을 다 읽은 것처럼 감성이 풍부해지는 느낌이다. 호젓한 고샅길을 걸어나오며, 이 시인의 마을에서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조지훈의 문학 세계를 이해하고 주실마을과 숲의 아름다움을 경험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