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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러브 유’ 니콜스 혹은 홍상수
보수파들의 유시민 평가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맞긴한데 싸가지가 없어!". 홍상수도 그러지 않을까요? 일상 속의 허접함, 속물근성을 어찌 고롷고름 잘 찝어내는지, 위선적인 영화 속 주인공들은 어째 그렇게 나를 빼닮았는지, 그래, 맞긴한데 싸가지가 없어!
홍상수에 따르면, 사랑이란 워낙 통속적이고 허접해서 어느 개그맨 말대로 “그런거야?” 라는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홍상수는 예의 '싸가지' 없는 영화를 거듭 만들면서 한결같이 싸가지 없는 주제, 너덜너덜 헤진 넝마 같은 사랑을 연이어 양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3류 소설가와 유부녀 한 쌍이 변두리 여관방을 찾습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소설가가 여자를 포옹하면서 이렇게 말하죠. “만 원이나 싼데 참 아늑하지?”. 정사를 앞두고 웬 과일인가싶은데, 과일을 씼는 여자의 모습이 참 정겹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소설가의 말에 정나미가 똑 떨어지던 기억이 납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동시에 한국적인 풍경을 얄밉게도 찍어대는 홍상수가 참 싸가지(?) 없게 똑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이크 니콜스 역시 홍상수처럼 수식어는 싹 빼고, 처음부터 드라이하게 나가기로 작심한 듯 합니다. 변태 수준의 인터넷 채팅으로 시작해서, 적에게 총구를 들이댄 총잡이마냥 여자의 외도를 추궁해 들어가는 남자의 모습이 또한 그렇습니다. 할리우드 문법대로라면 으레 등장할 핑크빛 베드신조차 과감하게 생략한 것도 마찬가지지요. 그러나 홍상수와 니콜스는 디테일한 묘사방식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가령 상대와의 이별에 징징거린다든가, 애상어린 배경음악이 그중 하나인데, 아마 관객의 감정이입을 상승시키려는 상업적 장치가 아닐까 짐작됩니다. 그러나 이런 장면은 홍상수 영화에서 전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아예 배경음악이 없거나 <돼지...>에서처럼 불협화음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스토리 때문이겠지만, 관객들의 대책없는 감정이입과 몰입을 차단키 위한 브레히트 식의 ‘낯설게 하기’(거리두기)를 염두에 둔 것일 수도 있겠죠.
데뷔작 <돼지....>를 거쳐 <생활의 발견>, <극장전>에 이르기까지 홍상수의 주제는 한결같습니다. 요컨대 반복되는 일상을 통해 삶의 진부함, 남녀 사랑의 위선성과 허접함을 드러내려는 것인데, 홍상수는 일상에서 무시로 행하고 지나친 비영화적인 것을 영화적으로 요리해내는 데 탁월하고, 그의 영화가 특별한 것은 이처럼 일상의 평이한 소재를 아무런 여과없이 드러냈기 때문이겠죠. 그러나 과거의 영화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삶의 진상이야 어찌되었든 영화만큼은 실제와 달리 달콤하고 부드러워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그의 영화는 으레 ‘낯선 현실’ 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닙니다. 기이하다면 기이한 일인 것이죠. 현실을 여과없이 고스란히 보여주는데도 오히려 낯선, 실제의 도치가 벌어졌으니 기이하달 밖에요.
마이크 니콜스를 비롯해서 할리우드 제품 중 그래도 쓸만한 영화들은 되도록 인위적 연출을 배제합니다. 동시에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에릭 로메르, 홍상수처럼 일급 영화들은 논리적 설득력이 없는 관객의 감정이입을 직접적으로 요구하지 않습니다. <클로저> 경우 핑크빛 무드를 배제한다든가 결연한 자세로 사랑의 정체를 파헤치는 박진성은 노감독의 저력을 느끼게 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클로저> 역시 할리우드 문법에서는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유럽산 일 급에 못미치는 것은 결국 상업성을 염두에 둔 탓인데, 몇몇 신파조 장면이라든가, 다소 느끼한 배경음악이 등장하는 게 바로 그런 예이겠죠. 결론적으로 말해서 <클로저>는 예술성에서는 함량미달입니다. 짐작컨대, 상업성과 별도로 하드보일드풍으로 가려다보니 예비작업이 다소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되는군요.
‘알면서 모른 체 하기’
“ ‘최상의 인물은 정을 잊어버린다'는 노장 류의 말은 명백한 과장이다. 오히려 '정과 함께 정을 넘어가는' 알면서 모른 체하기가 세속의 실천철학으로서는 제격이다. 공의는 사정(私情)을 응연하게 물고 넘어가는 그 수동적 긴장, 섬세한 결기에 의한 '알면서 모른 체하기'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동정(同情)에 대한 니체의 매서운 결기가 초인이 아니라 동무로 나아가는 것은 너와 나를 위해서 오히려 고운 풍경이다.” - 김영민(한일장신대 철학)의 글 <반우>
매사가 그렇듯 사람 간의 정이란 좀 은근한데가 있어야 제 맛이 납니다. 뭐 은근함의 미덕은 꼭 정만 해당하는 게 아닐 터입니다. 남녀간의 사랑도 그렇고 사안이 더 클 경우조차 굳이 직접 드러내지 않아도 이심전심으로 알아가는 게 다반사입니다. 김영민 교수는 위 글뿐 아니라 다른 글에서도 ‘알면서 모른체 하기’를 종종 언급하는데, 문학비평가 레이몬 루셀에 따르면 모든 글은 오독(吳讀)의 결과물이라고 하니, 내 식으로 한번 오독해 보겠습니다.
전통적으로 우리 조상들은 속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보다 지긋이 담아놓는 ‘알면서 모른체 하기’를 생활의 미덕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되도록 겉으로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하지요. 그래서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끼면 당장 “네가 좋아 죽겠다”느니, “너 없인 하루도 살 수 없다” 며 호들갑을 떱니다. 속속들이 아는 체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세태인 거지요.
그러나 경우에 따라 사태의 진상, 혹은 어떤 것의 바른 이치라 칭해지는 진리마저 마음속에 지긋이 담아두는 건 현명한 태도가 아닐 듯 하군요. 대개 진중한 문제일수록 그 진상을 파악하는 일은 고통스럽고, 험난하기조차 합니다. 설사 사태를 파악했다 하더라도 뒤처리가 난감할 경우가 있지요. 하지만 사물의 진상은 되도록 철저하게 알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설사 그것을 안 대가를 혹독히 치루더라도 말이죠. 다만 이 경우 진실을 알았다 해서 굳이 드러내야 하는가 하는 것은 별도의 문제이겠습니다.
대개 진실이나 사물의 실체는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똑같지 않습니다. 굳이 ‘우상론’의 철학자 F · 베이컨을 들지 않더라도 인간은 본질적으로 온갖 편견과 환상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뿐만이 아니죠. 인간의 집착과 욕망은 실제를 실제 이상으로 과장 합니다. 원래 진실이란 너덜너덜한 넝마와 같은 것입니다.
평범한 개인사든 인류 역사든 진실의 실체는 참으로 참혹하다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가령 양차 세계대전을 비롯해서 600만명의 유태인들을 가스 학살로 죽인 홀로코스트 등 인류역사의 진실은 실로 참혹하기 짝이없습니다.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또 자식사랑을 빙자한 유형 무형의 폭력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사태가 이쯤되면 “사람이 꽃 보다 아름답다” 느니 “인간은 만물의 영장” 이니 하는 말은 차마 꺼낼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오죽하면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쓸 수 없다.” 라고 했을까요.
차마 겪지 못할 험한 꼴을 겪고 나면 누구나 인간에 대해 회의적이거나 냉소적이 됩니다. 더욱 심하면 자포자기하고 삶을 포기하는 경우마저 있지요. 바로 이런 경우, 예의 ‘알면서 모른 체 하기’를 떠올릴 수 있는데, 그것은 인간에 대한 회의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라는 역설을 뜻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진실에 따른 이해와 관용이 필요하다는 거지요. 이 점은 남녀사랑의 진실성을 따지는 <클로저>도 해당하는 문제이겠습니다.
‘나는 너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어’
오프닝 장면과 크레딧 타이틀에서 거듭 대미안 라이스가 부르는 “THE Blower's Daugher” 가 들려옵니다. 노래는 중간에도 계속되는데, 그때마다 "I can't take my eyes off of you"(나는 너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어) 라는 가사가 모티프처럼 반복됩니다. 차라리 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실제 그렇질 않습니다. 사랑하고 그리워하면서 미워하고 할퀴고 헤집는 것이 남녀 사랑의 실상이라는 거지요.
헤어지면 만나고 싶고, 만나면 다시 헤어지고 싶은 것.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녕 너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상태라니, 이런 아이러니가 어데 있을까요. 겉으로 보면 사랑같지만 실제는 허접한 욕망의 남루한 모습. 상대에 대한 애착이 사랑에서 비롯된 듯 하지만 실제는 욕망에 의한 집착이고, 끊임없이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사랑이 아닌 상태, 지으면 다시 허물어지고, 허물어지면 다시 짓는 모래 위에 집짓기, 혹은 사랑쌓기에 다름 아닌 것이죠.
“남자는 오늘 하루 종일을 여자와 이렇게 보낼 것이다. 여자는 다지 자신이 모래밭의 두꺼비집인 것처럼 생각됐다. 속의 공동을 넓히느라 손을 넣어 모래를 파내고 속을 비우는 찰나 무너져 내리는 모래집. 남자는 갈퀴손처럼 여자를 한없이 비우고, 여자는 부서져 내리고. 남자는 더 깊어지는 허기로 결국엔 나가떨어질 것이다. 늘 그랬다. 집착없는 관계. 이게 무슨사랑이야? 여자는 남자에게 한 번도 그걸 묻지 않았다. 남자도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언제부턴가 여자 스스로도 남자를 사랑하는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여자는 이 년이나 삼 년을 주리고 남자를 찾아왔다. 중독인가? 결핍인가? 그건 달이 차면 기울고, 매달 멘스를 하듯 생리적이고 본능적인 충동인 것일까.“ - 권지예 단편 <뱀장어 스튜>
차라리 헤어지면 될 터인데, 막상 헤어지지 못하는 건 왜 그럴까요. 사무치도록 고독해선가요? 아니면 사랑조차 이기적 대상인 탓일까요. ‘Closer’라는 제목이 또 재미있습니다. 한없이 가까워지고 싶지만, 마음 문을 닫은, 그래서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는 상태. 또 그런 사람들이라는 역설적인 제목은 어찌보면 부조리한 인간 실존의 양상을 상징적으로 말하는 듯 합니다.
욕망뿐인데, 이기적인, 지극히 이기적인. 사랑의 실체는 없고, 단지 사랑이라는 개념뿐인데, 있느니 사랑을 둘러싼 모호한 소문뿐인데. 그런데도 이들은 순도 100프로짜리 사랑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무리지요. 자신은 그렇지 않으면서 상대에게는 100프로를 요구하지 말이죠. 가능할까요? 아니, 순도 100프로짜리 제품이 있긴 있나요? 가능하지 않은 것을 찾으려 하니 남루한 넝마가 나타나고, 넝마조각을 들춰내니 다시 덧난 상처가 드러납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그치지 않고 거듭 상처를 헤집어 냅니다. 참으로 연민스런 일인 것이죠.
여러분, 정말로 순도 100프로짜리에 해당하는 쌈빡한 사랑이 있기나 한걸까요? 연구에 따르면, 설사 그게 있더라도 순도 100프로짜리 사랑의 유효기간은 기껏해야 6개월 남짓이라는군요. 그래서 90프로, 80프로 떨어지다가 결국 밋밋한 관계로 전락합니다. 자, 이쯤되면 이게 사랑인가 뭔가 애매해지고 급기야는 “차마 자식땜애” 어쩌고 하면서 그럭저럭 살기 마련입니다.
이 지점에서 마이크 니콜스의 전략이 놓여있습니다. 뻔하지만 더 밀어붙이겠다는 것이죠. 진부한 표현인데, 대체 사랑의 진실이 뭐냐는 겁니다. 니콜스에 의하면 순도 100프로짜리 사랑은 실제하지 않지만, 또 불가능하지만, 그냥 실제 한다고 가정하고 그 가능성을 한번 탐색해 보자는 겁니다. 픽션이니까요. 실제는 없지만 있음직한 허구적 이야기를 통해서 삶을 반추해 보는 것. 이게 바로 예술의 효용이자 임무가 아니겠습니까. 그나저나 이런 니콜스의 전략은 어데서 비롯되었을까요. 참고로 그의 현재 나이가 70대 노년인 점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산전수전 다겪은, 누구 말대로, 부부간의 사랑이란 "푹 곰삭은 된장 같은 것“ 이라는 이치를 이미 터득한 나이라는 거지요.
서로의 상처를 헤집고, 진상을 확인하려고 혼신을 기울이는 것은 일단 사태를 정확히 파악한 후 다시 돌아보려는 것이지요. 물론 진실을 알고나면 어쩔 수 없이 남루하고 실망스런 결과가 야기되겠죠. 등장인물의 대사 중에 “잘 못하면 짐승이 되니까”- 이 말은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에서도 나오는 대사입니다 - 라는 말이 나옵니다. 진실을 묻어둔채 그대로 가면 짐승 수준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비록 고통스럽더라도 정면으로 진실을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거겠죠.
그런데 아이러니컬한 것은 진실이란 알면 알 수록 서로를 힘들게 하고, 우리의 짐승스러움이 더 드러날 뿐입니다. 원래 인간은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 라는 말은 실제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그랬으면 하는 바람일 터입니다. 문제는 이 지점입니다. 진실을 대강 덮어둘 것인가. 아니면 더 파헤칠 것인가, 라는 문제입니다. 알고보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이죠.
앤딩 장면에서 앨리스가 댄에게 그럽니다. “사랑이 어딨어?” 그런 게 어디있는가. 그렇습니다. 있느니 사랑이라는 개념일뿐 그것을 둘러싼 모호한 사랑의 소문만 무성한 것이죠. 분명한건 사랑의 개념만 있을뿐 실제하는 것은 사랑과 유사한 느낌들일뿐입니다. 가령 홍상수 말마따나 너를 만나면 왠지 친근해지고, 손을 어루만지고 싶고, 또 만나고 싶을 따름입니다.
오늘날 서구문명은 진실을 정확히 파헤치는 쪽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계몽이성은 막다른 길에 도달하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이성을 신뢰할 수 없게 된 것이죠 그렇다고 이성을 용도폐기하거나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만약 이성을 부정한다면 인간이라 할 수 없을 테니까요. 사랑도 마찬가입니다. 사랑을 부정하거나 용도 폐기한 세상을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 청춘남녀, 아니 다 늙은 부부라도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 지점에서 역설이 나옵니다. 비록 진실을 알았더라도 ‘알면서 모른체 하기’. 달리 말해 상대에 대한 배려거나 이해가 요구되는 것이죠. 따라서 마이크 니콜스는 바람둥이 남녀를 심판하거나 남녀 사랑의 위선성을 고발, 혹은 남녀 사이의 고매한 도덕적 가치를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보다는 인간이라는 동물, 정확히 말하면 인간이라는 짐승을 보다 분명하게 알고 보자는 것이고, 나아가 상대를 위한 따스한 배려, 즉 '알면서 모른 체 하기' 를 강조하려는 게 아닌가 여겨집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역시 애수어린 주제음악이 낮고 부드럽게 들려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속삭입니다. "너에게 눈을 뗄 수가 없어” 정녕 너와 나는 그녀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습니다. 차마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이라서, 너무 사랑스럽기에 우리의 눈은 한순간도 그녀의 모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사랑이란 결코 환상이거나 신기루가 아닌 실제라는 것을 말이죠. 다시 한번 권지예의 소설을 인용하고 글을 맺겠습니다.
“격정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무엇이 남을 것인가. 한순간의 깊은 상처는 긴 세월 동안 흉터를 남긴다. 함께하는 세월 동안 남편은 그녀의 흉터를 핥아 줄 것이고 그것이 사랑이 아니어도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저 아름다운 하나의 습관, 견딤, 의리라 한들 어떨까. 생이라는 건 질긴 것이다. 구슬을 꿰는 실처럼. 하루하루 끊임없는 애증으로 엮어진 질긴 실인 것이다.”
“살아서 펄떡이는 것들을 모두 스튜 냄비에 안치고 서서히 고아 내는 일. 살의나 열정보다는 평화로움에 길들여지는 일. 그건 바로 용서하는 일일지 모른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 권지예 단편 <뱀장어 스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