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보령(報寧)의 정장로(靜長老)에게 드리는 글
영산(靈山)에서 단독으로 전하고 소실봉(少室峯)에서 은밀히 내려준 법은 세상무리에서 우뚝 뛰어난 이를 요합니다. 이들은 티끌바람에 풀이 움직이는 것을 증험하고 눈빛이 형형하여 푸르른 하늘을 뚫습니다. 산이 막혀 있어도 일어났는지 자빠졌는지를 알며 소리를 삼키고 자취를 없애서 털끝만큼도 남겨두지 않습니다.그러면서도 물결 거슬리는 파도를 일으키고 흐름 끊는 기틀을 움직입니다.
문턱에 올라가 사람을 물어뜯는데 날랜 매와도 같이 빨라서 그림자를 감추고 허공을 스치듯 합니다. 등으로는 푸른 하늘을 어루만지며 눈 깜빡할 새에 지나버리고, 붙들면 오고 밀치면 가니 참으로 초준하다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올바른 종지가 유전하여 훗날까지 표준이 되었던 것입니다.
누구라도 살인을 하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뒤에야 작가 선지식이 되었습니다. 황벽(黃蘗)스님은 태어나면서부터 이것을 알아 천태산(天台山)에 행각할 적에 나한(羅漢)이 파도를 타고 폭포 건너는 것을 보자 즉시 쳐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백장스님이 마조스님의 '할' 한마디에 사흘동안 귀가 먹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뒤로 물러나면서 혀를 내둘렀습니다. 이는 대기(大機)의 작용인 줄을 알지니, 어찌 견해가 좁고 견문이 얕은 사람이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 후 임제조사를 제접할 때는 온통 그대로 작용하여 눈썹을 아끼지 않고 가업을 이을 자식을 얻어서 천하 사람들에게 음덕을 입혔습니다.
뜻 있는 사람이라면 응당 충분히 알고 노련하게 단련하여 격식과 종지를 초월해야 합니다. 그런 뒤에 주린 사람의 밥을 빼앗고 농사꾼의 소를 몰고 가는 솜씨로 옛규범을 계승하여 방향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아무리 미세한 곳이라도 물방울이 스며들 수 없고 햇빛도 뚫지 못하며, 너그러이 한가한 때라도 모든 성인이 그를 찾아낼 수 없어야만 비로소 향상의 씨풀[種草]입니다.
오조봉의 노스님이 항상 말하였습니다. "석가와 미륵도 오히려 그의 노예이다. 필경 그는 누구이겠느냐?" 여기에서 어지럽게 송곳 찌르는 것을 어찌 용납하겠습니까. 있는 줄을 알기만 하면 조금은 옳다 하겠습니다.
무릇 장부의 기개를 떨쳐 상류(上流)를 뛰어넘고자 한다면 반드시 손을 써서 바로 얽매이지 않게 해주며, 불러도 되돌아보질 않아야 하며 중생을 이롭게 하고 기연에 응대해 주어야 합당한 것이니, 말쑥하여 깨끗한 경지입니다. 풀 구덩이 속에서 구르거나 귀신의 굴 속에서 도깨비와 희롱하지 마십시오. 현묘한 이성(理性)을 가지고 눈썹을 드날리며 눈을 깜빡이고, 손을 들고 다리를 움직이는 사이에 합당한 말만을 하여 실다운 법으로 세상의 남녀를 얽어묶지 말아야 합니다. 마치 한 봉사가 여러 봉사를 이끄는 것과 같으니, 어찌 방편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미 지위에 앉아 종사라 불리우는 사람은 참으로 쉽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자기의 분에 맞게 얼렸다 녹였다 하면서 고고하고 준엄하게 해야합니다. 마치 사자가 노닐 때 그 의기가 뭇 짐승을 놀라게 하듯, 나왔다 들어갔다 사로잡았다 놓았다 함을 끝내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갑자기 땅에 웅크리고 앉아 반대로 몸을 매달리면 모든 짐승이 달아나면서 겁을 집어먹으니, 어찌 수승하고 기특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사람이라면 3천리 밖에서도 이미 일의단서를 모두 살핍니다. 그래서 암두스님은 말하기를, "물 위에서 호로병을 누르는 것과도 같아 무심하여 호호탕탕한 경지는 억지로 잡아당겨 얽어매려 해도 되질 않고, 부딪치고 누르는 대로 천지를 덮는다"고 하였습니다. 잘 기르고 실천하여 이 경지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영산·소실과 함께 한 가닥 길을 나눈다 하겠습니다.
황벽·임제·암두·설봉 등의 스님은 서로 빈(賓)·주(主)가 되어, 바람이 불면 풀이 쓰러지듯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에 나온 것을 헛되게 하지 않고 30년 20년 법을 펼쳤습니다. 그들의 집안에는 같이 흐르고 함께 증명하여 통달한 사람이 저마다 있어서, 서로서로 보호하였습니다. 누가 변화의 구슬을 감정할 사람이 없다 하겠습니까. 나는, 용의 구슬은 어디에서도 항상 맑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