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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는 나라마다 그 나름의 차문화를 키워왔다.
그 문화의 밑바닥에는 저마다 국민적 정서와 문화,그리고 미의식이 깔려 있는 성싶다.
'차노유'에서 보듯 일본에서 차문화는 각별히 특수 일본적 미의식의 발로였다.
일본 다도에서 다인은 바로 미(美)의 뛰어난 감정가이며<산상종이기>를 비롯하여 야나기 무네요시에 이르기까지,일본 다서의 첫번째 주제는 차 자체보다도 다실과 다정(茶庭),그리고 다도를 향한 미학이요 예술론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곧 문제될 리는 없다.모든것이 진정 차를 향하고 있다면.
오카쿠라 덴신은 그의 ,<다서>(茶書,1906)에서 일본 차문화를 "일상 생활의 속된 것들 속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것에 대한 숭배에 뿌리를 내린 일종의 의식"으로 특징지었다.
예의바르고 섬세한 미의식을 지닌 이 민족에게 차는 예(禮)가되고 미학이 되어,마침내 심미적 종교,즉 '도'(道)로서 성별(聖別)되었다.
예부터 뭇 신들(八百萬神)과 군생(群生)한 이 민족은 식물을 성별하기를 즐겨 갖가지 수많은 도를 창출하였으니,
꽃에는 화도(華道),향나무에는 향도(香道)가 따라붙는 식이다.
'차노유'가 상징하는 참으로 특수 일본풍의 다도,그것의 본질은 무엇일까.
나는(작자 이광주)그것을 '이치고 이치에'의 미학에서 찾고 싶다.
그리고 그 모태는 또한 특수 일본적인 무사도의 미학으로 생각된다.
앞에서 지적했듯 일본의 차문화는 처음부터 상층 무사계급에 의해 뿌리를 내리고,다도는 바로 16세기 100년을 끌어온 전국(戰國)시대에 뿌리를 내려 양식화되고 번성하엿다.
차사는 싸움터에서 죽움과 맞서야 할 무사들에게 교양과 풍류 이상의, 이것이 '안심입명(安心立命)'이라는 큰 뜻을 지녔다.
한시도 검을 떠나지 못해 잠자리 머리맡에도 검을 간직해야 했던 무사들,그들도 다실에 들어설 때에는 검과 함께 살기(殺氣)를 풀어놓았다.
100년에 걸친 전국시대(그것은 세계사상 유례없는 대살육의 연속이었다)의 무사사회,'폭력'공동체는 그들의 도착된 삶의 리얼리즘을 '다도'라는 양식미를 통해 중화(中和)함으로써 끝내는 구제받고자 했던가.
현란한 벗꽃에서 '지는 미학'을 찾은 무사의 비장감이 일본 시가의 주조음을 이룬다고 하는데,그것은 다실에서도 향을 짙게 뿜어낸다.
당시 차가 다실을 벗어나면 '차'가 아닌 이유이다.
일본의 다인들은 '와비'를 '한미(閑美)'나 '놀이'로 표현한다.
그러나 무사풍의 정념이 떠도는 어둡고 그늘진 다실에는 한(閑)을 즐기는 느긋함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차문화가 장군의 당물 스키에서 뿌리를 내린 이후 다두(茶頭)로서 최고 권력자의 측근으로 봉사한 주코,조오,리큐,그리고 다풍을 19세기에 이르도록 이어내려온 무가 중심(大名茶)의 일본의 다도사에서,
우리는 한 사람의 육우산인도 찾아볼 수 없다.
차의 본성을 검덕(儉德)에서 찾은 육우, 차의 청정함을 군자의 덕으로 비유한 소동파,그리고 우리의 다인 초의선사에게는 한결같이 권력과 세상을 등진 선풍(禪風)일민(逸民)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러나 무사의 나라 일본의 다인은 일민과는 거리가 멀지 않았던가.
리큐도 "다도의 진미는 초암에 있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그것을 다다미 2조의 다실에서 구도자적으로 찾고자 하였다.
그러나,원래 '전중차(殿中茶:전중은 장군의 저택)에서 출발한 '와비'차는,주코 이후 리큐를 거쳐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이문명로(利門名路)에서 벗어날수 없었다.
그리고 그 다도가 낳은 것은 다실의 미학이 상징하듯 한유(閑遊)가 아닌 무사풍의 긴장이요 규율이며,은자풍의 일민과는 거리가 먼 이른바 명인 이었다.
리큐는 천하제일의 명인이자 무사들의 영웅이며 신화였다.
다도와 관련하여 또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비전으로서 스승으로부터 구전된 비밀주의이다.
"비밀로 하라!비밀로 하라!" 이것이 일본의 차문화에서 다서의 주제가 차 아닌 다기가 중심이 되고,다서가 끝내 '무용의 용(用)'이 된 까닭이다.
차사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예도에서 나타나는 이 비밀주의는 명인의 존재와도 관련된다고 할수 있다.
일본에서는 여러 분야에 걸친 명인의 존재가 놀라울 정도로 철저한 장인 정신을 낳았다.
그것은 다도를 비롯하여 모든 기예에 '격식의 엄중함',명인과 명인예에 대한 불가침의 숭배를 낳았다.
따라서 일본에서만 볼 수 있는 이른바 '이에모토(家元)'제도라는 세습적 봉건적인 특권 조직을 구성하였다.
이 '이에모토'중심주의는 오모테우라센케(表O千家)에서 알려진 대로 다도에서 가장 극심한 것으로 여겨진다.
금전옥루 속의 다다미 2조 다실,그 페러독스에 비추어서일까.
'와비'차의 명인들은 '현란하게 오만한 것들'을 차의 입장에서 긍정하고 화려함을 통한 '와비'를 다도의 미 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리큐가 그토록 비판한 '사이비 와비'란 무엇일까.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는 <국화와 검>(1946)이라는 상징적인 이름을 내세운 저술에서 일본 문화의 패턴을 이루는 이율배반적인 특징을 잘 분석하고 비판했다.
일본 문화의 이중성이 바로 다도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고 한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히데요시는 그의 성곽마다 다실을 몇개 마련 하였다.
다실들 가운데는 초암을 본받았다는 다실과 함께 '황금의 다실'도 있다.
3조반의 방천장.벽.기둥. 문턱에는 금박이 쓰였고,다구 또한 황금제였다.
그것은 조립식으로 운반할수도 있어 교토의 궁전에 그대로 옮겨서 다회를 열었단다.
마치 헐리우드의 로케이션 세트가 연상되어 참으로 재미있고도 우숩다.
히데요시는 1600명의 다인이 참가한 대다회도 열었는데,주제자는 다름아닌 리큐였다.
대다회를 치른 몇 해뒤 히데요시의 노여움을 산 리큐는 자결하게 된다.
그러한 리큐의 운명은 현대 일본 문학의 좋은 테마가 되어 권력과 교양의 상극이나,권력앞의 교양의 패배로 묘사된다.
"(차노유는) 표준 척도를 근본으로 하나,마침내 척도를 벗어나고 기교를 잊기" 바랐던 리큐. 그러나 그는 명인의 업(業)에서 얼마나 자유로웠을까.
나는(작자 이광주) 리큐의 비극을 와비차가 상징하는 일본풍의 심미주의의 파탄으로 이해하고 싶다.
일본 미학의 정통 계승자인 <설국>(雪國)의 작가 가와비타 야스나리나 <금각사>를 지은 미시마 유키오의 자결,그리고 내셔널리즘적인 미학에 기대어 장수를 누리고 있는 천황제,그를 위해 순시한 제2차 세계대전(그것은 성전으로 일컬어졌다)때의 '가미가제 특공대'의 무수한 젊은 무사들의 죽음,
일상적인 현실이나 그대로의 자연과는 담을 쌓은, 그럼으로서 성별된 2조의 다실,그곳에 가득찬 '이치고 이치에'의 기(氣).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감성의 특징으로 자연과의 지극한 친화를 강조한다.
그리고 그것의 상징으로 정원을 든다.고도(古都)나라,교토의 사찰 순례란 바로 명원(名園)을 찾아 상완하는 길이기도 하다. 도처에 좋은 정원들이 펼쳐져 있다.
그런데 나무와 이끼,돌과 모래,그리고 풀 한포기에 이르기까지 빈틈없는 양식미,명인예(禮)에 다다른 작정가(作庭家)들에 의해 완벽히 짜인 그 양식미에 감탄하면서도 기교에 가려진 자연이 안타깝기만 하다.
정원을 감상하다보면 (그것은 다실이나 다기와 마찬가지로 바로 감식의 대상이다) 우리의 경복궁.창덕궁. 후원과 담양 소쇄원이 펼쳐주는 반듯한 자연과는 사뭇 다르다.
어느 프랑스의 문필가는 그의 저서 <인간과 정원>(1975)에서 중국의 정원이 사람들을 구속에서 해방시켜 큰 지혜를 예감케 하는데 비해, 일본 정원은 사람을 구속함을 목적으로 하는 듯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배경으로 '쉽게 칼을 뽑는 무사도'를 들고 있으니,참으로 정곡을 찌른 지적이다.
선종이 일본에 전래 되었을때 엄격한 신분 질서에 근거한 무사 중심의 사회는, 선의 본질을 이루는 융통무애(融通無碍)의 경지보다 법도를 받아들이는데 급급하였던 것 같다.
그러한 경햐은 중국의 '백창청규'의 다법 보다도 무가의 예절을 보다 엄격히 강조한 "오가사하라류' 라는 일본 최초의 행다례의 제정을 볼때 더욱 분명해진다.
이후 오랜 무가 지배체제와 전국시대 속에서 무사도의 모럴과 미의식은,다도의 세계와 그것을 넘어 갖가지 도와 규율로서 국민 전체를 묵었다.
<무사도>(1899)의 저자 니토베 이나조의 말을 빌릴것도 없이, 지난날 일본과 일본인들을 만들어낸 것은 바로 무사도였다.
그리고 참으로 특수한 일본 다도의 요람도,(유럽 중세의 기사도와는 달리)검을 숭배한 긑에 보편적 사고와 모럴을 망각한 '무사도' 였다.
이나조는 20년이나 일본에 거주한 서양 여선교사가 일본 예법의 관습을 '참으로 우스꽝스럽게' 여겼다지만,
법도와 지나친 허레의 중심에 다도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면 지나칠 것인가.
야나기 무네요시는 일본 다도의 역사를 공죄(功罪) 비등한 것으로 비판하며 '차'가 '도'일수록 사이비 차가 된다고 하였다. 참으로 동감이다.
다도에서 잘 드러나듯이 양식에 꽉 짜인 완벽한 격식주의는 그릇된 역사주의를 낳고, 사람을 자페증으로 몰고 갈 위험을 안고 있다.
독일의 시인 실러는 미적인 것의 보편성을 '자유' 속에서 찾았다. 이때 자유란 '놀이' 로서 이해하고 싶다.
우리는'놀이'를 즐길때 가장 자유롭다.다선일미.반듯한 차는 우리를 훌훌 유연한 놀이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무사 사회가 낳은 다도의 미학은 격식,즉 자기 억제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가.
와비차가 양식의 미학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지은이는 이광주 님이다.작가의 주관적 견해와 예를들어 글을 진행하는 그대로 옮긴것임을 밝힌다.
일본의 다도에 대해 바른 이해를 하고 ,어떠한 차와 차인의 길이 바른길인지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첫댓글 茶에 관한 책이 참 많꾸나...^^
1~7까지 스크랲했습니다. 잘 보겠습니다.
스크랩합니다. 잘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