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궁면의 고마운 이들
전주권을 완전히 벗어나 삼례가 시야에 들어오는 뚝길을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벗삼아 걸었다.
그 덕에 무료하진 않았으나 아침나절인데도 벌써 땡볕이 숨통을
죄려는 듯 벅차게 했다.
좀처럼 갈증이 오잖는 특이체질인데도 찬 물을 갈망할 정도로.
배낭의 물은 이미 데워져 버렸고 자주 하는 대로 삼례교 직전의
주유소에 냉수 한 컵을 부탁했으나 없단다.
맡겨 놓은 물 달라는 것 아닌데 부드러운 표현이어야 할 까닭은
없겠지만 왠지 매몰차게 느껴졌다.
당장엔 야박한 느낌이었으나 떨어졌거나 미처 준비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고 이해되기도 해서인지 다시 참을 만 했다.
마침 삼례장날(3, 8일)이라 읍내는 붐비고 왁자지껄했다.
수퍼에 들어가 우유와 메로나를 번갈아 실컷 마시고 먹었다.
얼마 안가 우석대학교 앞에서도 그랬다.
얼마쯤의 휴식을 취하는 동안 또 하나의 결단을 했다.
삼례에서 왕궁 ~ 여산이 삼남대로의 정석이라지만 나는 금마를
경유해 여산에 도착하기로.
그런데 이같은 결정이 그만 왕궁(王宮)을 외면할 뻔 했다.
옛 마한과 백제의 궁터였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길을 가르쳐주는
이들의 무성의가 가중되어 결국 잘못들었고 꼬부랑 농로와 목장
지대의 특별한 냄새 속을 헤매어 왕궁에 당도했다.
길 사정에 밝으면 왜 묻겠는가.
모르니까 묻는 나그네에게 그리도 무성의하고 오도(誤導)하고도
마음이 편할까.
왜 역지사지 할 줄을 모를까.
살인적인 무더위에 반쯤 기진맥진 상태인 내 몸에 활력을 주입해
준 이는 왕궁면 흥암리(興岩) 정한조.
흥암오일뱅크 대표인 그는 지친 내게 얼음물병을 통째로 내주고
떠날 때 또 한병을 꺼내 주며 더위에 조심하라는 당부까지 했다.
불과 10리 사이의 전혀 상반된 현실을 어떻게 이해할까.
말로나마 크게 사례하고 시.군도 따라 금마(金馬)로 넘어가다가
허기가 심해 왕궁리 신정마을 길가 오성농장에 들어갔다.
국보 속에 국보가 수두룩이 들어있어 사계(斯界)를 진동시켰던
지척의 왕궁오층석탑(289호)마저도 별무관심일 정도였으니까.
새벽에 전주에서 깨질거리다가 만 이후 물과 우유, 메로나 외엔
아무것도 먹은 게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과, 배 가릴 것 없이 아무거나 사먹으려 했으나 주인 오병창은
돈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배낭에 꾸역꾸역 넣어주려 했다.
배낭이 무거워지는 것에는 아랑곳 없다는 듯이.
역시 물로 배를 채운 셈이지만 씹는 맛이 있어서 다른가.
맹위를 떨치던 더위가 한풀 죽는 시각이 되어서 였는가.
다시 힘이 나는 듯 해서 작은 고개 하나를 넘었다.
마을 이름이 암시하듯 마한과 백제의 고도였던 금마땅 동고도리
(東古都里)에 당도했다.
전북 지방의 대표적 민속놀이중 하나인 익산 기세배전수교육관
(旗歲拜傳受)을 지나 익산향교 앞에서 하루의 일정을 마쳤다.
향교의 소재지로 미루어 보아도 현 익산 시가지보다 더 비중이
큰 때가 있었던 지역이라 하겠다.
익산기세배전수교육관(상)과 익산향교(하)
근본이 서야 도가 생기는 법인데(本立而道生)
백두대간과 호남정맥 종주때 이 지방의 S교수와 함께 들른 적이
있는 익산시 인화동의 찜질방 스파랜드를 물어물어 찾아갔다.
그러고 보니 대간 정맥의 유산이 옛길에서도 유익하게 활용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자주 그럴 것 같다.
어제 마감한 동고도리 향교 앞에서 여산길에 올랐다.
매와 제비가 떼거리로 싸우다가 함께 묻혀있다는 전설의 매제비
고개를 지남으로서 다시 왕궁땅으로 접어들었다.
왕궁면 용화리(龍華) ~ 여산면(礪山) 원수리(源水)간의 1번국도
쑥고개(옛 이름이 炭峴이므로 숯고개가 맞는데)의 새 길 절개지
위로는 야생동물 이동통로(eco-corridor)가 조성되었다.
이런 통로용 터널이 날로 늘어나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겠으나
누누이 지적했듯이 과연 야생동물들이 자기네의 안전통행로라고
느낄 수 있을 만큼 친화적으로 만들고 있는가.
더구나 여기 구도로는 온통 쇠똥 저장고가 되어있으니 동물들이
더욱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쑥고개 에코브리지(야생동물 이동통로)
그런데 또 다시 향수가 꿈틀거리는가.
쑥고개 에코 브리지에서 지도를 펴놓고 살피기 시작했으니.
내 마음은 벌써 동북의 천호산에서 내려와 쑥고개를 건너 뛰고
용화산, 미륵산으로 서진하는 산줄기에 끌려가고 있었다.
계속해서 나아가면 금강하구뚝으로 떨어지는 금강기맥이라고?
옛길이고 뭐고 다 접고 당장 오르고 싶었으나 어쩌면 좋으냐.
마음뿐인 것을.
마음 다잡고 여산땅으로 들어섰다.
한데 여산 외진 지역의 버스정류장 대기소들은 목불인견이었다.
아무리 막보기라 한들 이토록 흉칙한 쓰레기장을 만들어 놓을까.
처인마을(옛길 18번 글 참조) 생각이 간절했다.
생전에 난초를 유난히 좋아하였던 국어학자 가람(嘉藍李秉岐)의
고향이며 그의 깨끗한 정신이 이어져 오는 여산면이라고 자랑을
하고 있으나 그의 생가가 있는 원수리의 버스정류장 앞에서 나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대원군의 척화비와 천주교성지, 옛 동헌, 향교가 있으니까 외진
곳들은 그렇게 방치해도 된다는 말인가.
버스정류장 대기소 (여산면 원수리)
거금을 들여 동물 이동통로를 만들면 무슨 소용이 있나.
그들이 다니기를 꺼려하거나 오히려 두려워 할 것이 자명한데.
고장 자랑에 명사와 역사적 사물들을 다 동원한들 또 뭐하나.
이미지 관리는 이렇게 견강부회식으로 하는 게 아닌데.
근본이 서야 비로소 도가 생긴다잖은가.(論語學易篇)
나도 어엿한 국군이었다
1번국도 타고 전북 여산면을 벗어나 충남 연무읍으로 북상했다.
전남~전북에 이어 두번째 도계(道界)를 넘은 것이다.
고내리 봉곡서원(鳳谷)을 지나 황화정리에 도착했다.
이왕조때, 전라관찰사를 비롯하여 새 임지로 가는 고급 관리들의
교체장 황화정(皇華亭)이 있었다 하여 그리 불려진 마을이란다.
그러니까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즘은 충남 연무읍에 속해 있지만
당시엔 여기가 전북 익산군 황화면이었음을 쉬이 알 수 있다.
대동지지에는 충남과 전북의 경계(忠全交界)라고 기술돼 있다.
세월이 무상해 지금은 황화정 비석만 엉뚱하게도 봉곡서원 앞의
여타 비석들 속에 끼어 서있다.
봉곡서원
도처에서 훈련병들의 복창(復唱)이 들려오는 구도로 타고 황화정
고개를 넘다가 미니수퍼에서 메로나를 먹고 있었다.
막 도착한 물건 공급차량의 기사가 내려서자 고대했다는 듯 주인
여인은 특종(?) 뉴스를 꺼냈다.
내게는 이름과 얼굴 모두 생소한 안 아무개라는 탤런트의 자살이
시골의 그녀에게는 특종 뉴스거리라니 내가 소외감 느껴야 하나.
이 자살자를 연구라도 했는지 이력서를 낭독하듯 하더니 자살의
원인 제공자라는 부채의 법적 문제까지 들고 나왔다.
TV의 위력을 새삼 실감하게 하는 그녀의 해박(?)한 논평이 좌충
우돌, 끝이 보이지 않은지 기사가 일어섰다.
하기는, TV 사극을 통해 역사를 배운다는 이들이니 시비할 수는
없지만 자살에 관한 한 이유, 상황에 관계없이 냉혹하게 비수를
들이대는(白岩斷片72,73,74글 참조) 나로서는 실소 불금이었다.
논산훈련소 무명용사기념비
바보처럼 실소를 거듭하며 황화정리 연무대 입소대대 맞은 편의
초대형 식당 '윤대감네'에 들어갔다.
널따란 방을 독차지하고 아침 겸 점심으로 냉면을 먹었다.
손님이 나 하나뿐인데도 식당은 위축되기는 커녕 활기가 넘쳤다.
이처럼 활기차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더구나 이런 집이 한 둘이 아닌데.
시골 작은 읍의 주민 모두가 맨날 외식만 하는가.
설영 그런다 가정해도 이 많은 음식점들을 다 웃음짓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전적으로 군 장병(신병포함)과 그 가족들이 고객이며
이들이 있기에 저 업소들이 활황일 수 있으리라.
.
하긴 연무읍의 생성과 발전은 이들을 제외하고 생각할 수 없다.
6. 25동란은 여기에 육군제2훈련소를 세우게 했다.
그리고 전국의 장정들을 몰아들였다.
이에 따른 거듭된 행정구역개편 끝에 논산시 연무읍이 되었으며
장병들과 그들과 관련된 이들에 의해 음식과 숙박업을 비롯하여
소비성 업소들이 성황을 이루고 있는 것 아닌가.
52년 전 일이라 가물 가물하지만 나는 1957년 4월 하순에 육군
훈련병이 되어 이 곳에서 8주간의 신병교육을 받았다.
최종 신체검사를 통과한 후 군번 10335992의 군표를 받는 순간
감개무량했던 기억만은 아직도 총총 생생하다.
한 동안 바로 앉지도 못하다가 좌객으로 나아진 후 겨우 목발에
의지하는 것 만으로도 다행이던 몸이 건강의 증표에 다름 아닌
대한민국 국군이 되었으니 어찌 아니 그러했겠는가.
군 복무를 면하려고 온갖 기발한(?) 방법을 동원했다가 발각돼
물의를 일으키는 사회적 병리현상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완료형 질병이지만 천형(天刑)처럼 낙인찍힌
병력(病歷)때문에 국군되기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신체검사때마다 징집이 유보되곤 했다.
그래서 재학중에 입대를 자원했으며 요행히도 훈련소의 마지막
관문(신검)을 통과하여 어엿한 군인이 되었으니까.
아마 건강콤플렉스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한민국 국군과 신체적 건강청년을 동의어라고 믿었기에 군인
되기를 그리도 열망했을 것이다.
사격훈련중인 훈련병들을 보며 잠시 상념에 잠기기도 했다.
관촉사 은진미륵
자꾸만 외도를 하려 함은 더위에 기가 빠져가는 탓일까.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한(恨)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었을까.
다리가 더 말을 듣지 않아 진도가 더욱 더딘 중에도 은진(恩津)
에서 반야산 관촉사(盤若山灌燭寺)로 갔다.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麻谷寺)의 말사에 불과하나 중국
명승 지안(智安)이 경내의 석조미륵보살입상(石造彌勒菩薩立像:
은진미륵)을 보고는 “마치 촛불을 보는 것처럼 빛이 난다” 면서
예불을 드렸다 하여 관촉사라 부르게 됐다는 사찰이다.
어렵사리 올라가 단지 대웅전과 미륵석불 등 경내를 일별(一瞥)
했을 뿐인데 불도도 아닌 내가 왜 이리 흐뭇했을까.
1953년, 휴전으로 이 땅에서 총성은 멎었으나 상경하지 못한채
목발에 의지하여 간신히 거동하던 때였다.
나는 친지들 따라 은진미륵을 구경하러 여기에 온적이 있었다.
18m로 5층 건물 높이만큼이나 키큰 미륵에 대한 호기심에 오긴
했으나 끝내 제대로 보지 못했다.
계단들을 오를 수 없고 부축받는 것도 싫어 포기하고 말았다.
목발을 던져버린 이후 꼭 들르고 싶었으면서도 산을 누비느라
차일피일,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다.
이런 나에게 삼남대로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는데 또 놓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은진미륵과 내 몸은 어떤 악연일까.
아예 볼 수 없었거나 무진 애를 써야 제 모습을 보여 주었으니.
내가 이 미륵불 앞에서 흐뭇해 한 까닭이 정녕 밝혀지나 보다.
마음과 몸이 각기 따로 가려 한다.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못한다.
어렵기가 유사한 상황에서, 두 번째 시도 끝에, 실로 55년만에
맛보는 성취감인데 당연하지 않은가 . <계속>
반야산 관촉사 전경(상)과 미륵석불(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