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고지 전적지에 대하여
1.서론
백마고지 전적지는 행정 구역상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산명리에 위치하고있다.
백마고지라는 이름은 6.25전쟁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면서 395미터의 무명고지 위에 무수한 포탄이 떨어져 하얗게 깎여 나간 모양이 하늘에서 보니 하얀 백마(白馬)가 누워있는 것 같다 하여 유래되었다.
이후 이 야트막한 고지는 북한과 마주보는 최전방지역이 되어 지금은 아군의 최전방 관측소가 운용되고있는 비무장지대 안쪽이 되었다.
2.본론
가.백마고지 전투 개요.
1952년 10월 6일 저녁 장융후이[江擁輝]가 지휘한 중국 인민지원군은 제38군단의 6개 연대에 지원부대병력을 합하여 총병력 4만 4,056명을 이끌고 철원 서 북방 395고지를 공격했다. 국군은 김종오 소장이 지휘하는 제9사단 예하의 제28·29·30연대 병력 2만 명에 국군 제51·52·53포병 대대, 국군 제53전차중대, 미군 제214자주포병대대,미군제955중포병대대 미군 제73전차대대 등의 지원을 받아 중국 인민지원군의 공격을 격퇴하였다. 9일 동안 12번의 공방전 끝에 중국군은 1만여 명, 국군은 약 3,500명의 사상자를 냈고 10월 15일 오전에 국군의 승리로 끝났다.
백마고지는 광활한 철원평야 일대와 서울로 통하는 국군의 주요보급로로 군사 지정학상 요충지였다. 이 때문에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는데 심한 포격으로 고지의 모습이 백마(白馬)같다 하여 백마고지로 불리게 되었다. 국군을 승리로 이끈 요인은 우수한 정보활동과 보병과 포병 사이의 적절한 협동, 공군의 항공근접지원, 전투부대의 적절한 임무교대 등의 요인이다.
나.백마고지 전적비
백마고지전적비
조국을 위해 몸 바치신 선열들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백마고지 전투에서의 승리와 교훈을 영원히 전하고자 기념비와 기념관을 세웠다
소 재 지 : 철원군 철원읍 산명리 215번지
건 립 : 서기 1990년 5월 3일
규 모 : 비- 높이 225m, 폭 2.0m, 5.1m / 건립취지문- 높이 105cm, 폭 250cm
재 료 : 철근 콘크리트 / 화강암 대리석
기 타 : 회고의 장(기념관) / 기념의 장(기념관) / 다짐의 장(기념관) / 상승각 (기념관
다.백마고지 전적지에 대한 의미
6.25전쟁 당시 쌍방 27만발의 포탄을 주고받으며 10일 동안 24차례나 주인이 바뀌며 사투를 벌였던 격전지인 백마고지에 5억 7천만원의 예산을 투입 7개월간의 공사 끝에 백마고지 남쪽에 전적지가 조성되어 1990년 5월 3일 그 준공식을 가졌다.이 전적지의 설계는 홍익대의 강건희 교수가 맡았다. 이 건조물에는 [회고의 장] [기념의 장][다짐의 장]등의 3부분으로 나누어 처절했던 격전의 현장을 재현하고 높이 22.5m의 기념탑을 세웠다. 철원읍 산명리 일대의 1만평 규모로 조성된 이 전적지의 [회고의 장]에는 3천 4백여명의 아군 사상자 및 중공군(38정예군) 전사자 1개 사단병력을 추모하는 위령비와 분향소가, [기념의 장]에는 통일의 염원과 전승을 기념하는 전적비와 35평 넓이의 기념관에는 당시 전투 상황을 보도한 신문 기사들과 육탄 3용사의 부조물 및 유물, 저서 등을 갖춘 동관과 당시의 백마부대장이었던 김종호 장군의 유품 등을 전시한 서관으로 나누어 전시 되고 있다.[다짐의 장]에는 전망대를 설치하여 휴전선 북쪽 395m의 백마고지 일대와 철원평야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했고 [자유의 종]도 건립, 통일의 염원을 종소리에 담을 수 있게 했다. 이 전적지의 준공식과 함께 일반에게 공개하고 아울러 주변 4만5천여평의 부지를 청소년 야영장으로, 또 전 국민의 안보교육장으로 개발하여 통일의 의지를 일깨우는 장으로 활용하였다
라.백마고지 전투의 영웅 김종오 장군에 대하여
- 김종오장군은 일제 치하인 1921년 5월 충북청원에서 태어났다.
전형적인 농촌이었던 집안이라 가정형편이 어려웠으나 집안의 장남이라 일본 주우오(中央) 대학 법학과에 1942년에 입학한다.
김종오가 2학년 때인 1943년에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육당 최남선과 당대 최고의 문필가인 이광수가 동경 유학생회관에서 일본에 유학 온 유학생들을 상대로 일제에 적극 협조하여 황군에 자진 입대할 것을 시국강연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하게 되자 회관은 아수라장이 되고 주모자는 잡혀가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이때 김종오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시시각각 조여 오는 강제징용을 피 할 길이 없음을 느껴 1944년 일본군대에 자진하여 입대 후 일본 육군 소위로 임관하게 된다.
-그러나 체 일년이 못되어 일본은 패망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김종오는 마침 미 육군 체이니 대령 주도하에 창설된 국방경비대에서 일본군출신, 만군출신, 독립군출신을 각 20명씩 모집한 60명의 기간장교에 일본군 장교출신자격으로 지원하여 면접 후 합격하여 군사영어학교를 이수하고 국군소위로 임관하게 되었다.
-소위로 임관한 김종오는 전북이리(지금의 익산시)에서 3연대를 창설하고 그 공로를 인정 받아 대령까지 진급 후 1950년 6월10일 당시 화천, 춘천, 양구를 방어하던 제 6사단장으로 발령 받아 춘천으로 오게 된다.
-6사단장으로 부임한지 15일만에 전쟁이 발발하여 국군의 전 전선이 붕괴되고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되는 사태가 발생하였으나 김종오가 지휘하는 6사단만은 굳굳하게 38선을 방어하였다.
-김종오 장군의 6사단이 버텨준 3일은 그 당시 가장 가까운 곳인 오끼나와에 있던 미군이 투입하는데 소요되는 최소 시간인 3일을 벌어주었으며 아군의 최후 방어선인 낙동강 전선의 형성과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가능케 하여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 맥아더 장군이 술회한 기록을 보면 처음 한국전쟁 상황을 시찰하러 한강을 순찰하며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하였는데 문제는 한국군이 상륙작전을 준비 할 동안 버텨줄지 가 문제요 관건이라 했는데 그 임무를 김종오 장군의 6사단이 전쟁초기 버텨준 3일과 이후 축차적인 저지를 하며 질서있게 지연전을 펼쳐줘서 가능하게 되었다고 술회하였다. 그런 상황은 전쟁 3일만에 서울을 함락한 인민군이 김종오 장군의 6사단으로 인하여 동부전선이 균형을 맞추지 못하자 진격을 멈추고 전선을 조정하느라 3일간을 지체 한데에서 기인한다.
-이후 전쟁 막바지에 김종오 장군은 9사단장으로 영전하여 이 백마고지 전투를 지휘하여 승리로 이끌게 되며 그 전공으로 9사단은 백마사단이라는 칭호를 부여 받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김종오 장군은 군내 주요 요직을 거치다 박정희 정권 하에서 육군참모총장을 지내고 1965년 예편 후 1966년 45세의 젊은 나이에 폐암으로 사망하게 된다.
만일 그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친일행적으로 인하여 어떤 평가가 내려질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수행해낸 전쟁 초기의 3일은 임진왜란때 전라도 지방만은 끝까지 사수하고 해전으로 왜군의 뒤를 차단하여 승리로 이끈 이순신장군 같은 역할에 버금가는 공적이었다.
마.백마고지 전투에서의 의문점 해소.
-아군의 사망자가 적군의 사망자의 반도 안 되는 이유.
è백마고지전투가 벌어진 시점은 전쟁막바지이며 중공군은 인해전술로 변변한 무기도 없이 밀고 오다 보니 희생자가 더 클 수 밖에 없었다.
-백마고지를 두고 그런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전투를 벌인 이유.
è백마고지는 분지형태의 철원평야를 빙 둘러서 감싸고 도는 산 능선들 중에서도 철원으로 들어오는 좌측 입구에 해당되는 곳이다. 우측 입구에 해당되는 곳은 김화 지역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피의능선, 저격능선 전투다.
바.백마고지 전적지에서 특기할 만한 사항.
-모윤숙 시인의 시비
è”백마의얼”이라는 시를 쓴 모윤숙 시인의 시비는 별도로 있었으나 친일행적이 문제가 되어 시비는 철거되고 전적지 초입에 마련된 분향소 전적비 뒷면에 화강암에 새긴 모윤숙 시인의 시가 남아있다.
-전적지 초입에 마련된 분향소 바닥의 운모석의 의미
è철원에서 나지않는 운모석이 전적지 초입에 마련된 분향소 전적비 하단에 깔려있는데 이 돌의 숫자는 백마고지에서 희생된 아군의 숫자인 3,500여 개에 이릅니다.
-기념관에 있는 동판부조물의 의미
è동, 서편의 기념관에 있는 동판의 전투상황도 부조물은 당시 백마고지전투에서 사용된 탄피를 모아 주조된 동판이다.
-기념관에 진열된 무기들의 의미
è기념관에 진열된 무기 중 기관총 총열이 위로 휘어있는데 총을 만드는 쇠는 휠 수가 없는 주물인데도 너무 많은 사격으로 총열의 탄소 성분이 빠져버려 일반 쇠처럼 휘어져 버린 것이다.
-백마고지 전투 기념탑의 의미
è홍익대학교 강건희 교수가 설계한 조형물은 높이 22.5미터로 기도하는 손의 모양을 형상화 하였으며 기념비 뒷면의 동판 부조물은 머리가 없는 영혼을 상징하는 의미다.
사.백마고지전투전적지 안내 시나리오
*백마고지전투전적지는 한 곳에서만 설명할 수 없는 관계로 인솔하며 설명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설명의 시작은 전적지 초입에 마련된 분향소부터 시작한다.
è안녕하십니까?
백마고지전투 전적지를 찾아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그럼 본격적인 안내에 앞서 앞에 마련된 분향소에 자유를 지키다 희생된 젊은이와 먼 이국 땅에서 숨져간 희생자 모두에게 묵념을 실시하겠습니다. 일동묵념.
앞에 보이는 전적비는 백마고지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진 기념비로 기념비 뒷편에는 “백마의 얼”이라는 모윤숙 시인의 시가 화강암 판에 새겨져 부착되어 있으며 전적비 하단에 있는 운모석판은 백마고지전투에서 희생된 아군의 숫자인 3,492개입니다.
그럼 다음은 기념관으로 이동하여 설명 드리겠습니다.
기념관은 동관과 서관으로 구분되어 동관에는 12차까지의 백마고지전투 개황도와 치열했던 전투의 상황을 말해주는 당시 사용되었던 무기, 그리고 고착된 전투를 승리로 이끈 백마3군상이 있으며 서관에는 당시의 지휘관인 김종오 장군의 유품과 일생 그리고 백마고지전투에 투입된 전체적인 상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서관을 보시며 설명 드리겠습니다.
백마고지는 지금은 일반인은 물론 군인들도 극히 제한된 인원만이 갈 수 있는 비무장지대 안에 있습니다.
앞에 보시는 설명문에 나와있는 것처럼 395미터의 야트막한 봉우리인데 실제로는 철원 땅이 평균 해발 2백 미터에 달하여 보시는 사진에 나와있듯이 높이 1백 미터가 채 안 되는 낮은 산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낮고 작은 산을 가지고 그렇게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지키려고 했을까요?
백마고지는 지평선이 보일 만큼 광활하고 년간 쌀의 생산량이 80키로 1백2십5만 가마가 생산되는 철원평야를 빙 둘러싸고 내려다 보고있는 산중에서도 철원으로 들어오는 좌측 입구에 해당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 백마고지를 누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들어가는 입구를 통제하여 철원평야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곳 입니다.
그러다 보니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요 휴전 상태인 만큼 언제라도 다시 전투가 벌어지면 백마고지는 북으로 진출하기위한 발판이요 남으로 남하하는 부대를 저지하기위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차지 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사진을 보시면 저 작은 산에서 희생된 수많은 영혼이 너무 안타까우며 다시는 그런 비극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다음은 여기 사진을 보시면 잘생긴 젊으신 분이 백마고지전투를 지휘한 김종오 사단장입니다.
김종오 장군은 1921년 충북청원에서 태어나 1943년 일본 주우오 대학 법학과에 재학중 1944년 일본군에 지원하여 일군 소위로 임관하게 되나 채 일년이 안되어 일본이 패망하고 김종오 장군도 귀국하게 됩니다.
귀국 후 김종오 장군은 미국 체니 대령의 주도하에 창설된 2만5천명의 국방경비대에서 기간장교를 60명을 뽑게 되는데 일본군 장교출신에 할당된 20명의 자격으로 지원하여 합격하여 군사영어학교를 6개월 수료 후 1946년 소위로 임관하여 이리, 지금의 익산시에서 3연대창설을 주도하고 그 공로로 중령까지 진급 후 1연대 부연대장을 지내다 대령으로 진급하여 전쟁이 터지기 15일전인 1950년 6월10일 당시 화천, 양구, 춘천 축선을 방어하던 6사장으로 영전하게 됩니다.
앞서 말씀 드린 데로 부임 후 15일만에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전쟁 초기 아군은 전 전선에서 대책 없이 밀리게 되고 급기야 3일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게 됩니다.
그러나 김종오 장군이 지휘하던 6사단만은 뒤로 밀리지않고 춘천,화천,양구를 3일동안이나 굳건하게 막아내고 있었습니다.
이때 버텨준 3일로 서울에 진군한 인민군이 당초 세웠던 7일만에 제주도까지 점령한다는 작전을 수정하여 지체하게 된다.
당시 에치슨 라인으로 필리핀이 아시아의 방어선 끝이었던 미군이 한국전쟁에 긴급 투입 가능한 부대는 오끼나와에 있던 스미스 부대인데 백악관에서 전쟁 소식을 듣고 미 의회에서 파병을 결정하고 이동하고 투입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최소 3일이었다.
그 시간을 김종오 장군의 6사단이 버텨준 3일로 인하여 미군이 오산 축선에 처음으로 투입하게 되고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나중에 회고록에서 처음 전선에 나온 한강변을 바라보며 이 전쟁을 역전 시킬 수 있는 작전으로 인천 상륙작전을 구상하였는데 한강을 건너 무질서하게 후퇴하는 한국군을 바라보며 상륙작전을 준비 할 때까지 과연 버텨 줄 것인가가 가장 염려스러웠다고 했습니다.
아무튼 김종오 장군의 6사단이 벌어준 3일로 인하여 대책 없이 후퇴하던 국군은 최후의 방어선으로 낙동강 전선을 형성하게 되고 급기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를 역전시키게 됩니다.
그 후 김종오 장군은 50년 9월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고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38선을 회복하기까지 6사단장으로 재직 후 9사단장으로 영전하여 백마고지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종전 후 육군사관학교장과 5군단장, 박정희 정권에서 육군참모총장을 지내다 1965년 예편 후 1966년 폐암으로 4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87세입니다.
그리고 앞에 보시는 동판 부조물은 실제로 백마고지전투에서 사용된 탄피를 수거하여 제작한 동 부조물입니다.
그럼 동관으로 이동하여 마저 설명 드리고 상승각으로 가시겠습니다. 동관은 앞서 말씀 드린 데로 12차에 걸친 전투 상황과 당시 사용된 무기를 수거 전시하여 당시 치열했던 상황을 재현하였습니다.
다음은 상승각으로 이동하시겠습니다. 여기 보시는 이 탑은 높이 22.5미터로 홍익대 강건희 교수가 설계제작 하였는데 전체적인 모양은 기도하는 손의 모습입니다.
탑 뒷면에 붙어있는 동판의 부조물은 자세히 보시면 목이 없는 사람의 모습으로 백마고지에서 희생된 군인들을 형상화한 것 입니다.
상승각은 평화의 종소리를 북녁 땅까지 울려 퍼지게 하고자 제작된 종입니다. 철원군에서 해마다 제 야의 종을 타종하고 있습니다.
전방을 보시면서 실제 백마고지를 설명 드리겠습니다.
오른쪽에 야트막하게 세 개의 봉우리가 보이는데 그 봉우리 뒷편에서는 전투준비를 하는 부대가 대기하던 곳입니다.
백마고지 사이로 직벽의 봉우리가 있는 산이 보이는데 그 산은 고암산으로 일명 김일성 고지라 하는데 그 연유는 철원평야의 전투를 김일성이 고암산에서 관망하면서 지휘하고 종래에는 철원평야를 빼앗기고 식음을 전폐하고 3일을 탄식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합니다.
백마고지 위에 보이는 건축물은 국군 병사들이 올라가서 전방을 관측하고 감시하는 G/P라는 곳 입니다. 이상으로 설명을 마치겠습니다. 궁금하신 점은 질문 하시면 답변 드리겠습니다.
3. 결 론
백마고지전투 전적지를 안내하고 설명해드리고자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몇 가지 포인트를 꼭 파악 하여야 한다. 첫째. 백마고지가 어떤 의미를 가지길래 그런 희생을 치러야 했는가, 둘째. 백마고지는 지형상, 전략상 어떤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곳인가. 셋째. 안보와 관련하여 케케묵은 이념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의미를 퇴색하지않게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 넷째. 그러면서도 철원이 한반도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이며 통일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가장 먼저 화해를 해야 하는 평화의 땅임을 교묘하게 부각 시켜야 한다.
첫댓글 위 안내서에 대하여 필여시 쪽지 주시면 바로 연락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