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환(李重煥 호는 淸潭, 1690년생 )이 쓴 택리지(擇里志)에는
우리 고향 청천이라는 산골 마을이 거론 되었을까?하는 의구심에 쌓였던 때가 있었다.
1980년 초반에 문고판으로 택리지를 읽어보고는
우리 고향의 오랜 역사와 지리적으로 중요한 곳이라는 인식하게 되었다.
의외로 택리지는 청천에 대하여 소상하게 그리고 중요하게 다루었던 사실이 엿 보였다.
왕이 기거하던 서울이나 수원, 개성 경주나 같은 중요 지역은 계획도시일 수 있지만
청천 장터가 계획된 관제 마을을 이였으며,
또 그런 곳에 5일장을 서게 한 예도 흔한 일이 아니다.
또, 창말(倉里)이 거대한 창고가 있었음은 청천을 청천창이라고 일컬은 것으로
충분히 추측이 가능하고 본다.
창고가 있었다면 중요한 군사요충지라는 확증과 함께,
장터(市場) 한 가운데 돛대가 있었던 연유도 택리지에서 알게 되었다.
다만 택리지의 역본이 여러개 여서 청천시장에 관한 세세한 기록이 적힌 문고판 택리지를
다시 찾으려는 노력이 무산되어 자료를 제시하지 못함을 송구스럽게 여긴다.
우암 송시열의 묘를 명당자리로 만들려고 그 아래의 장터에 사람이 많이 모이도록
여건을 마련하고, 풍수상으로 맞은편에 보이는 구구리 봉에서 건지산(혹은 건조산)에 이르는
거대한 산줄기가 군병마(軍兵馬)상을 이루었다는 이야기가 자못 흥미롭다고 본다.
또한 시정잡배 행세나 하던 풍운아 대원군, 그가 대원이 대감이 되기 전의 왕손 이하응이
조선 팔도를 유람하며 거들먹대다가 매를 맞은 곳도 청천 화양동이니
이 고장 사람들의 기질 또한 예사롭지는 안은 것으로 은유된다.
택리지는 청주 동쪽에 대한 설명에서 오직 괴산이외에는 청천을 중심으로 한 화양동, 송면,
용화, 귀만 만 거론하였다 그만큼 이 고장을 중시한것이다.
이조 숙종 때를 전후한 시기 (1690년 이후)의 상황 뿐이 아니다.
아니 그 이전에도 삼국시대나 고려에 이르기 까지 군사요충지였음을 익히 알게 된다.
청주의 상당산성이나, 보은의 산성과 함께 도명산의 남매 산성은 싸움터의 상징이 아니던가?
택리지는 단순한 지리서라기보다는 과학적인 자료가 풍부한 중요서적인 때문에
이를 베껴 쓴 유사본이 몇 개가 있다,
그중에서 을유문화사에서 출판한 이익성(李翼成)의 역문(譯文)중에서
청천창(靑川倉)에 관한 내용만 아래에 옮겨놓는다. <그 책 92쪽참조>
인용본문:
청주 동쪽으로 거대령을 넘으면 상단산성이 있고 또 동쪽은 청천창(靑川倉)이된다.
창(倉) 서편은 신(申)씨의 마을이고, 남쪽으로 작은 영을 넘으면 인풍정(引風亭)ㆍ옥류대(玉流臺 )가
있는데 변(卞)씨가 사는 곳이다. 큰 산 사이에 냇물과 바위가 제법 그윽한 경치를 이룬다.
또 동쪽으로 큰 시냇물을 건너면 귀만(龜灣)이며 시내와 산의 경치가 아주 훌륭하다.
상당ㆍ청천을 아울러 산동(山東)이라 한다.
지대가 산위에 있으므로 바람기가 차가워서 청주의 들보다는 못하다.
남쪽에는 속리산이 있고 동편에는 선유산(仙游山)이 막아있다.
북쪽에는 속리산 줄기가 북쪽으로 뻗은 것이 고리처럼 감싸 안았다.
북쪽은 막혔고, 남쪽은 통했는데 그 안에 유명한 마을이 많다.
지방에 쇠(鐵)가 산출되고, 또 관곽(棺槨)과 궁실(宮室 )을 지을 재목이 넉넉하여
평야지대에 사는 사람은 여기 와서 교역하게 된다.
청천에서 동북쪽으로 수 십리 지점에 송면촌(松面村)이 있다.
문경, 괴산, 청주 세 고을의 경계에 위치하였고, 시내와 산이 제법 아름답다.
청천의 남쪽에 용화동(龍華洞)이 있다. 서남쪽으로 속리산과 아주 가까우나 몹시 험하지 않고,
자그마하게 들판이 열렸으나 땅은 매우 메마르다.
산골 백성의 부락이 있고 남쪽은 율치(栗峙)이다.
용화동의 물이 청천에서 속리산의 물과 합쳐서 북쪽으로 괴산 송계(松溪)에 흐르는데
남쪽과 위 아래로 물을 따라서 경치 좋은 곳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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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6.25때 국군이 후퇴할 때도 구방리-청천-지풍골-금관으로 남행하고 괴뢰군들은 용화 -귀만-청천-청안으로 줄행낭... 남부군 빨지산은 청천면이 소굴로 삼었습니다. 빨지산 총소리와 아시보장총에 꽃힌 창을 보며 방안에 같혀있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감발한 신발을 신고 방에 들어와 초져녁에 먹다 남겨둔 고구마를 주머니에 쑤셔넣던 핏빛어린 눈동자도 기억이 나지요. 전란은 언제나 청천면 주변을 빗나가지를 않었나 봅니다.
6,25 전쟁을기억하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