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제1부 폭풍전야
제4장 신군부와 민중의 대격돌
6. [5.17쿠데타](중)
7공수, 전남대등 [충정작전] 개시
[33.35]대대 31사 96연대 전격 배속
학생지도부 급습 1백12명 체포해
13일 KBS.MBC등에 이미 경계병...18일 전남.북 34개학교 병력배치완료
80년 5월 18일 새벽 1시께 전남대 공대 5호관 앞. 특전사 제 7여단 제 33대 대원들은 눈앞에 황급히 달아나는 인영을 목격한다.
[꼼짝 마! 움직이면 죽인다.]
그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한채 체포된 이들은 바로 전남대 총학생회 부회장 이승룡을 비롯 권창수, 오진수(전남대 총학생회간부)등 4명이다.이들은 이날 자정무렵 정문과 후문으로 밀어닥치는 공수부대원들을 피해 학교를 빠져 나가려다 붙잡힌 것.
한편 같은 날 자정께 공수부대와 합수부(경찰,안기부,보안대)는 예비검속자 명단에 올라있는 전남대 복적생 정동년과 김상윤, 조선대 양희승 김윤기 유재도 유소영 등을 체포하기 위해 가택수색을 펼치는 등 대대적인 연행작전을 실시힌다.
육군군사연구실이 5·18청문회를 통해 제시한 「광주소요사태교훈집」이라는 자료에 따르면 이날 공수부대와 합수부는 학생운동지도부 및 재야 민주인사에 대한 예비검속 결과 전남지역 22명의 지도부중 12명을 검거한다.
이 자료는 또 5·17광주지역 대학교에 대한 군진주의 배경을 이렇게 기록한다.
「전국계엄령 선포에도 데모는 연차 격렬화됨에 따라 경찰능력으로는 광주시의 질서유지가 곤란하다고 판단, 계엄당국은 부득불 군병력을 투입 저지및 진압작전에 임함」
7공수 명령체계 달라
이어 이 자료는 5월13일부터 17일까지의 군의 움직임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5월13일 17시 군 충정작전부대 비상대기 및 출동준비
▲5월13일밤 19시 31사단병력을 투입, MBC CBS KBS 전일 빌딩을 시설보호를 위한 경계병 투입(장교 5명 사병 70명)
▲5월 17일 10시 40분 31사단 병력에 의하여 전문대학을 포함한 8개대학에 병력을 진주 진압작전에 임함」
이들은 당시 전교사의 작전명령 아래있었던 병력들이었으며 주로 전남대의 정후문 경비를 담당한다.
반면 전남대와 조선대등 학원안으로 진입, 학생들이 주요 투쟁 거점으로 사용하던 건물을 점령하고 남아있던 학생들을 연행했던 군인들은 이들과는 명령체계가 또다른 군인들로 밝혀진다.
황주청문회를 통해 드러난 정체는 바로 전북 금마에 주둔하던 특전사 제 7여단(여단장 준장 신우식,제2군배속)산하 제 33,35대대병력으로 장교 82명, 사병 6백 4명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이날밤 전남대에 도착 도서관 총학생회실등에서 철야를 하던 학생회들을 급습, 곤봉과 군화발로 무자비하한 구타를 가한 후에 체포한다. 점령군들은 제 33대대(대대장 권승만중령)가 전남대와 광주교대를 새벽 2시께 점령완료, 교내에 있던 학생 69명을 체포했으며 제 35대대(대대장 김일옥중령)는 조선대를 점령완료, 학생43명을 체포한다.
전남대 부학생회장 이승룡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17일 밤 전남대 총학생회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데 11시께 군부대 트럭이 교내에 들어왔다.그들은 통신점검차 들렀다고 하면서 횡설수설했다.자정이 되자 공수부대들이 정문과 후문에서 계속 밀어닥쳤다. 총학생회 사무실에 있던 7명중 3명은 무사히 빠져나가고 권창수 오진수 나외에 1명이 붙잡혔다.]18일 02시 30분께, 각대학에 진주했던 33,35대대는 비로서 31사단 96연대에 배속된다. 어어 31사단 96연대는 사단 잠정부대를 배속받아 전대,조대를 제외한 각 대학을 점령한다. 「31사 전투상보」 에 따르면 이들은 호남신학대 서원보건전문대 동신전문대 대건신학대 서강전문대 성인경상전문대 기독간호전문대 송원전문대등에도 진주한다.이들은 각 방송국에 대한 점거에도 나서 KBS MBC CBS VOC등을 차례로 접수한다.
합수부에 의한 예비검속 역시 이날 새벽 5시께까지 착착 진행된다. 당시 인문대 학생회장으로 활동했던 박선정은 예비검속당하던 순간을 이렇게 증언안다.
[5월17일은 집회가 없어 시내에 나가 친구들과 술자리를 함께 한후 그동안 여러행사로 집에도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옷을 갈아입기 위해 서동에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서 속옷을 입고 있는데 보안대 형사 3명이 권총을 들이밀고 내방으로 들어왔다. 그때가 밤 11시 50분 정도였다. 부모님이 보는데도 수갑을 채우고 속옷차림 그대로 끌고가 검정지프차에 태웠다. 그들은 나를 차에 태우더니 검은 안경대로 눈을 가렸다. 내가 도착한 곳은 505보안대였다. 5월 19일밤 예비검속자들과 함께 군트럭의 적재함에 머리를 처박은채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갔다. 여기서 나외에 예비검속된 정동년 김상윤 하태수 박영선 김운기 양희승 유소영 윤목현 등 조대와 전대 학생운동 지도부를 만났다.]
한편 이날 일부 전남대 학생회 관계자들은 뭔가 낌새를 눈치채고 산장으로 집단도피한다. 이들은 당시 CBS 사회부기자였던 송정민씨(현 전남대 신방과 교수)로부터 서울쪽의 긴박한 소식을 전해듣는다.
합수부 대대적 예비검속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 총무부장이었던 양강섭은 이회여대에 집결, 향후대책을 논의하고 있던 학생회간부들이 모두 연행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일단 산장을 피신한뒤 복적생이었던 김상윤에게 긴급히 전화를 한다.
김상윤은 양강섭에게 전화가 걸려오던 긴박한 상황을 이렇게 증언한다.
[5월17일 밤에는 총학생간부들과 이병철 노금노씨와 함께 19일 북동 성당에어 열릴 예정이었던 가톨릭농민회 전국대회 관계로 만나기로 돼있었다.그전에 전남대 학생과장이었던 서명원씨, 윤한봉씨와 함께 학생회문제로 얘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고 있는데 총학생회 총무부장인 양강섭에게 전화가 걸려왔다.「지금 산장입니다.이화여대에서 학생회회장단이 모두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집단 피신을 하고 관망중입니다.확인좀 해 주십시오. 저희는 대지호텔에 있겠습니다.」전화를 받자 윤한봉씨에게 무슨일이 생긴것 같으니 몸을 피하라고 한후 헤어졌다.이병철, 노금노 총무와 함게 서점으로 와서 서울로 확인을 하는데 모두 통화중이었다.지금 생각하니 저들이 사전에 차단시킨 것 같았다.서울로 연락이 되지않자 MBC로 전화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 CBS로 전화를 해 상황을 물었다.그들은 막무가내로 전화를 끊는다고만 했다.그래서 송정민기자를 찾았으나 대답해주지 않았다.이렇게 전화를 하다보니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리고 시청앞에 있는 대주호텔로 밤 10시 30분께 전화를 했다.「모든게 사실이다.아마 확대계엄일 가능성이 있으니 이 전화가 도청된다고 생각하고 지금 즉시 피해라.」]
김상윤은 이렇게 전화를 한뒤 자신도 도피를 해야겠다고 생각한뒤 서점의 셔터를 내린다.밤 11시 30분쯤 누가 셔터를 탕탕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혹시 후배가 왔나싶어 셔터를 눈높이까지 올리는 순간 사복을 입은 합수단 한명이 목에 총을 들이댄다.그는 곧바로 대기중인 지프로 태워져 보안대 지하실로 끌려간다.
전교사 작전일지는 학교에대한 점령과 예비검속 상황을 이날 새벽 2시 20분자로 이렇게 기록한다.「계엄령 확대실시 조치에 따라 전북 14개학교와 전남 20개 학교에 병력배치완료/
주모자 검거, 전북 46명중 6명 /
전남 22명중 8명.
이와함께 학교에서 체포인원
전남대 69명 ,
조선대 43명,
전북대 34명 ,
원광대 23명」
당시 전남대에 고용직으로 근무했던 고광윤씨는 [새벽2시쯤 되었을 것이다.발자국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문을 쾅쾅 차는 소리가 들렸다. 공수부대가 진입한것이다.그들은 내게 중앙도서관 열람실의 비상키를 요구하더니 도서관 열람실을 샅샅이 수색한 후 공과대학 본관으로 갔다.이어 학생들이 끌려나왔고 마구잡이로 두들겨맞았다] 고 당시의 상황을 회상한다.
18일 새벽 조선대 군투입
[한편 같은 시각 조선대 역시 동일한 사건이 벌어진다.당시 조선대 학생이었던 진호림씨의 증언.
80년 5월17일 조선대학교 본관에 위치한 방송국에서는 조선대 방송국 개국기념식 및 학원자율화를 위한 선후배간담회가 있었다. 1부는 방송국 개국행사 2부는 선후배 간담회로 그후까지 철야농성을 하기로 되어있었다. 밤 11시쯤 31사단 소속 통신장교 1명과 사병 2명이 학교 통신물을 점검한다는 이유로 본관의 방송국으로 올라왔다. 형식적인 점검후 그들이 나가자 나는 화장실에 갔다.잠시후 방송실에서 험한 욕설이 흘러나오고 뭔가 부서지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요란했다.교내에 계엄군이 진입한 것이다.그때가 밤 12시쯤이었다.]
80년 5월18일 새벽은 이처럼 많은 사람들에 대한 체포와 구금, 그리고 민주화에 대한 절망과 함께 밝아온다.
군부의 쿠데타에 조직적으로 대응할수 있는 당시 유일한 세력으로 보였던 학생운동은 이미 예비검속으로 지도부를 잃어 우왕좌왕할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16일까지 가두투쟁을 통해서 사태추이를 지켜보자던 학생들은 당시 지도부가 남긴 유일한 지침인 「계엄이 확대되면 도청앞으로 모이자」는 말 한마디를 간직한채 18일의 아침을 맞는다.그리고 자신들의 학교정문이 군인들에 의해 굳게 폐쇄된 것을 발견한 이들은 [도청으로, 도청으로] 의 구호와 함께 금남로를 향해 밀려가기 시작한다.
이와함께 광주 전역에서는 전민항쟁의 장엄한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한다.
<안찬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