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까지도 유럽에서 여성은 고상한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애처로운 존재로 여겨졌다. ‘
레이디 퍼스트’라는 말이 그렇게 여성에게 예의바른 말은 아닌 것이다. 여성이 모자라고 약하니 보호해줘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서양 문화에서 약자를 돌보는 것은 미덕에 속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렇다고 인상파 화가들이 드가처럼 모두 여성 혐오증을 드러낸 건 아니다. 마네가 은근히 여성 화가들을 일컬어 “모사는 잘하지만 독창성이 없다”고 평했지만 그렇다고 인상파 화가들이 여성을 싫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인상파 화가들만큼 여성에 호의적이었던 예술가들도 없었을 것이다. 인상파는 드물게 베르트 모리조나 메리 카사트 같은 여성 화가들도 참가했던 화파라는 점을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겠다.
불행한 가족사와 드가의 예술
 그러나 아무리 드가의 여성혐오가 당시 시대상을 체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역사적 과거라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떡밥’은 항상 우리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하는 법이다.
드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여성혐오를 애써 가족사와 관련해서 바라보고 싶은 이들도 있는데, 이들에게 드가는 ‘불행한 가족사가 불행한 천재를 낳는다’는 고전적 믿음을 확인시켜줄 수 있는 좋은 증거일 뿐이다.
드가의 아버지는 유명한 이탈리아계 은행가였고, 어머니는 그보다 한참 어린 아름다운 크레올 여인이었다.
크레올은 백인과 흑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계인데, 드가의 어머니는 이국적이고 뇌쇄적인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다.
이 정도 이야기였다면 별스러울 것도 없겠지만, 드가의 어머니는 남편의 남동생과 깊은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드가의 아버지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너무도 그 여인을 사랑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비밀에 부치고 묵인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드가의 어머니는 32살의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고,
그 여파로 아버지는 거의 폐인으로 전락해버린다. 이때 드가의 나이 13살이었다.
평생토록 여성용 향수를 싫어하고 꽃무늬 장식이라면 질색을 했던 드가의 취향을 기구하다면 기구하다고 할수 있는 그의 가족사와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을까? 모를 일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드가가 법률 공부를 그만두고 화가의 길로 뛰어든 게 너무 사소한 일처럼 보인다.
드가가 출세의 지름길을 포기하고 화가가 되고 싶다는 뜻을 밝혔을 때, 그의 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었다고 한다.
1854년 20살이 되던 해, 그는 법률가의 길을 포기하고 그토록 그리던 화가 수업의 길에 들어선다. 그로부터 9년 뒤에 루브르에서 거장들의 그림을 모사하면서 그림 공부에 열중하던 드가는 우연히 마네를 만난다.
드가는 자신의 그림을 우연의 산물이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새로운 역사는 가끔 우연의 얼굴로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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