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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월명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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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천사 → 해병대 기념비 →수시탑 → 바다조각공원 → 채만식 문학비 → 3.1운동 기념탑 → 점방산 봉수대 → 청소년회관 극기훈련장 (일제 잔재 처리물 보관) → 은적사 |
수시탑
현재 월명공원의 기념물로 시민들이 가장 많이 찾는 것이 수시탑이다.
수시탑의 본래 이름은 성시탑이었다고 한다.
군산시의 부시장이었던 방병기씨(군산시 개정동 509)에 따르면 수시탑은 1967년에 만들어졌는데
당시 군산의 경제사정이 매우 어려워 군산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 군산시민의 의지와 뜻을 모으려는 취지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수시탑의 명칭은 군산시의 번영을 뜻하는 의미로 '성시탑'이라고 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수시탑은 군산의 경제를 형상화해 제작되었는데 군산항에 배가 많이 드나들어야 한다는 뜻으로
탑의 모형이 배와 봉화모양으로 설계되었다.
이 수시탑의 설계자는 당시 홍익대 미대교수로 알려지고 있으며 예산이 모자라 본래 설계(30m)보다
2m가 낮게 만들어졌다고 한다.
또 당시 설계자의 생각은 지금의 수시탑 주변에서 4개의 조명을 비추면 봉화가 타오르는 모습이 재현되도록 설계하였다고 당시 부시장은 증언하고 있다.
현 수시탑의 높이는 28m로 알려지고 있으며 얼마 전에는 조명경관을 설치하여 형형색색의 레온이 수시탑의 야경을 밝혀주고 있다.
채만식 문학비
1930년대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펼치기 위한 중심지였던 군산,옥구 지방의 미두장을 배경으로 식민지 민족의 슬픔과 사회상을 처절하고 풍자적으로 막힘없이 써내려간 소설 탁류.
채만식은 소설 탁류의 작가이다.
채만식은 전북 군산시 임피면 축산리 31번지에서 1902년 부친 채규섭과 모친 조우섭의 5남 1녀중 막내로 태어 났다.
중앙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 부속 제일고등학교 문과를 중퇴했으며 그의 말년은 빈곤과 실의속에서 폐결핵으로 1950년 (음)5월 27일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등졌다.
그가 가장 처음 쓴 작품은 '과도기'로 1956년 4월 '현대문학'에 발표된 유작으로 중학교를 졸업할 때
쓴 것이라 한다.
채만식은 그 후 '세길로'가 1924년 12월 '조선문단'에 발표되면서 정식 문단 데뷔를 하였다.
1950년까지 장편 11편,중편 7편,단편 69편,희곡 68편,잡문 64편,평론 32편,수필 76편,꽁트 7편,
동화 3편,동극 1편,시나리오 2편,좌담 3편,자해 15편,기행문 10편,서평 6편,방송극 1편 등 모두 345편에 이르는 많은 희곡,장,중,단편소설,수필,꽁트,동화 등 폭 넓은 분야를 두루 써오면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대표 작품인 '탁류'는 1937년 조선일보에 실렸던 글로 그는 당시 1934년부터 해방전까지 일제의
탄압이 날로 심해졌던 시기에 풍자성이 강한 작품을 많이 써 문학의 황금기를 누렸다고 후세사람들은 평가한다.
군산월명공원 수시탑에서 3.1운동 기념비 쪽으로 100여m를 가면 무신송신소 앞에 그가 말했던 탁류가 흐르는 서해를 바라보며 서 있는 채만식 선생 문학비를 만날 수 있다.
1984년 6월 11일에 세워진 것으로 홍석영씨가 글을 썻고 군산문화원에서 세울 것이다.
3.1운동 기념비
명산동 사거리에서 군산여고쪽으로 100m쯤 올라거면 동신교회가 위치하고 교회 옆으로 난 산길을
따라 20분쯤 걸어가면 예전에는 밤나무가 많아 '밤골'이라 불리웠던 곳이 나온다.
지금은 체육공원이라 칭한다.
체육공원 바로 옆에 1986년 12월 3일에 세워진 3.1운동 기념비가 있고 오른쪽으로 7m정도 떨어진 곳에
길이 4m,폭 1m로 만들어진 3.1운동 만세상이 있다.
군산의 3.1운동은 1919년 3월 6일 설애장날을 기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그리고 예수병원 직원들이 주동이 되어 벌였다.
이날 시위에는 그 전날까지 영명학교 숙직실에서 밤을 지새며 만든 독립선언문 3천 500장과 태극기 500장을 나누어 들고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특히 30일 밤에는 시민 1천여명이 횃불시위를 벌여 일본인 관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으며
31일에는 투옥된 애국자들의 공판중인 법원 군산지원에서 만세 시위를 벌이는 등
독립운동은 나라를 빼앗긴 민족이 나라를 찾고 자존과 자주,자립, 자유와 평화를 누리려는
최선의 길이요,방법이였으며 마땅하고 엄숙한 주장이었다.
(군산사랑)
월찾사
http://cafe.daum.net/wellbeingG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