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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둥근달
선교, 자기중심적 세계의 포기
본문: 사도행전 10: 9~16
아프가니스탄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한국의 젊은이들이 탈레반에게 인질로 붙잡히고, 기어코 희생자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그 어떤 생명이든 소중한 것이기에 무겁고 가벼운 차이가 없지만, 특별히 무고한 생명이 희생을 당하고 또 누군가를 돕고자 하는 선한 동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고통을 겪을 때면 우리의 마음은 더욱 착잡해집니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고통을 겪는 이들이 그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기도하고,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그 상황에서 그 밖의 다른 어떤 것도 우선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사태와 어떻게든 연루된 사람들에게는 그와 같이 불행한 사태가 재연되지 않기를 바라는 뜻에서 그 사태가 함축하는 의미를 냉정하게 생각하며 대안을 찾아야 하는 과제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사태에서 가장 근본적인 물음은, 애초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공격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 그리고 이후 다른 여러 나라들의 군대와 함께 우리나라의 군대가 그곳에 파견된 상황이 정당한 것인지 하는 물음일 것입니다. 여기에 불행한 사태의 씨앗이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지상명령으로 생각하는 선교에 관한 물음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진정한 선교일까요?
선교의 진정한 본질은 무엇인가
불과 100여 년 전에는 한국이 피선교국이었지만, 이제는 무려 16,00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할 만큼 선교대국이 되었습니다. 선교사 파송규모 면에서 한국은 미국에 두 번째 선교대국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자랑꺼리인지는 의문입니다. 선교현지의 문화나 관습을 무시한 채 이뤄지는 일방적인 기독교 신앙의 전파는 과거 제국주의 시절 서구 교회들의 전도활동의 악습을 답습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선교기관간의 무분별한 경쟁으로 많은 문제들을 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이슬람권에서의 선교는 이슬람이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성서를 원뿌리로 하고 있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 기독교권과의 극한적인 대결이라는 불행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점 등 양 측면을 충분히 헤아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선교활동이 이뤄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결국은 무산되었지만 지난해 한국의 선교단체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대대적인 선교행사를 벌이려고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일방적 선교활동이 유별나게 이뤄진 탓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인은 곧 기독교 선교사로 인식될 정도이고 그만큼 혐오와 공격의 대상이 되기 쉽다고 합니다. 이번에 피랍된 한국 젊은이들의 활동은 기독교 신앙을 전하는 ‘선교’와는 다른 현지인들에게 필요한 ‘봉사’ 활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그들을 보낸 분당 샘물교회는 이슬람권 문화에 대한 이해를 강조하고 있는 교회이고, 여러 가지 면에서 한국교회의 평균적인 수준을 뛰어넘는 건강성을 갖추고 있는 교회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슬람권 현지인들 특히 탈레반과 같은 무장세력에게 그런 차이가 유효하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중동언론들이 피랍자들을 ‘한국인 기독교도’ 또는 ‘선교사’로 일컫고 있는 것은 그런 사정을 반영합니다.
이쯤 되면 기독교인으로서 선교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겉으로 드러난 형태로 그렇게 ‘선교’와 ‘봉사’를 구분할 수 있는지, 나아가서는 선교의 진정한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베드로가 처음으로 이방선교를 하게 된 동기와 배경을 일러 주는 말씀입니다.
길을 가던 베드로 일행이 요빠 근처에 머무르고 있을 때였습니다. 시장기를 억누르며 식사를 기다리던 중 베드로는 무아지경에 빠졌습니다. 아마도 지치고 피곤한 상태에서 사르르 잠이 들었겠지요. 그런데 하늘이 열리고 큰 보자기와 같은 그릇이 끈이 달려 내려오고 그 안에는 온갖 네 발 달린 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짐승과 날짐승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한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베드로야, 일어나서 잡아먹어라.” 그러나 경건한 유대인이었던 베드로는 유대 전통에서 부정한 것들로 간주하는 것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부정하고 속된 것을 한 번도 먹은 일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다시 음성이 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 이런 대화가 세 차례나 오고 간 뒤에 그 그릇은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선교란 기독교 세계의 확장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세계의 포기
그 그릇에 구체적으로 어떠한 짐승들이 들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완강히 거부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경건한 유대인들로서는 입에 댈 수 없는 짐승들이 함께 들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돼지나, 또는 땅을 기는 짐승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뱀과 같은 것까지도 들어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여간 유대인으로서는 입에 댈 수 없는 그런 짐승들이 들어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먹으라 하니 당연히 거부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묘한 일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본 환상이 대체 무슨 뜻일까 하면서 어리둥절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마침 로마군대의 장교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찾아와 베드로를 초대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베드로가 체험한 환상을 전하는 대목만 함께 읽었지만, 이 말씀의 앞뒤를 볼 것 같으면 그 환상의 의미는 매우 분명합니다. 로마군대의 장교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던 고넬료가 천사로부터 계시를 받고 베드로를 초청하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앞에 나옵니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베드로는 환상을 체험했고, 그 체험 직후 고넬료의 초대를 받아 고넬료의 집에서 설교를 하게 됩니다. 이방인의 집을 방문하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금기되던 일이었는데,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의 집을 찾았고 거기에서 성령임재를 경험합니다. 유대인들의 상식으로는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하리라고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는데 그들에게도 성령이 임하여 그들이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방인에 대한 선교가 이뤄지는 결정적 계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으로서 이제껏 유대인들만을 구원의 대상으로 여겨 그들에게 복음전파 활동을 해 왔던 베드로의 입장에서 이방인은 큰 관심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방인의 선교가 굉장히 자연스러운 과정을 통해 곧바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역사를 볼 것 같으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이방인의 구원 문제는 쉽게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이방인이 구원을 받으려면 유대인이 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본래 혈통이 다른 이방인이 어떻게 유대인이 됩니까? 여기에서 문제가 된 것이 율법이었고, 그 가운데 핵심적인 사안이 할례의 여부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방인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그저 예수만 믿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유대인이 되기 위한 절차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 바울이 율법과 할례의 문제를 그토록 집요하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베드로 역시 그와 같이 생각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속되고 부정한 것은 한 번도 먹은 일이 없습니다.” 이 말은 철저하게 유대인의 입장을 고집하는 베드로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 이 음성은 베드로의 태도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들의 그 자기중심적 태도를 넘어선다는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는 열정과 사명의식이 없었겠습니까? 베드로는 선교의 열정과 사명의식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는 베드로의 처신으로 보아 베드로 역시 이방인의 구원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사명의식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 세계 안에 머물렀던 한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방인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유대인 중심적 가치관을 이방인에게 전파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 율법을 전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특별한 환상의 체험을 통해 자기중심적인 그 세계에서 비로소 벗어납니다. 이방인의 집, 이방인의 자리로 내려가 그들의 입장에서 진정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 사건은 진정한 의미의 선교가 무엇인지 오늘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가를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리로 내려와 그 뜻을 전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그 뜻을 전하고자 할 때 전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자리에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이 이야기는 새삼 환기시켜 줍니다. 선교란 단순히 기독교 세계의 확장 또는 기독교인 규모의 확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세계의 포기를 뜻하며 그 자리에 진정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구현되는 것을 뜻합니다.
캐나다연합교회 선교의 개념 “자선에서 정의로” 변화
제가 지난 5월에 캐나다연합교회를 방문했을 때, 캐나다연합교회의 선교 개념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설명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평소에 충분히 생각하고 있었던 내용이었지만, 개념상으로 구분해서 설명하는 방식이 매우 설득력이 있었고 명쾌했습니다.
캐나다연합교회는 선교 개념의 변화를 “자선에서 정의로”라는 말로 압축했습니다. 선교의 개념이 자선(charity), 봉사(service), 옹호(advocacy), 정의(justice)로 점차 발전해 왔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개념의 차이를 푸드뱅크를 예로 들어 설명하는데, 아주 적절하다 싶었습니다. 예컨대 자선은 즉각적인 필요에 응하는 것으로, 봉사는 사람들과 협력하여 푸드뱅크에서 일하는 것으로, 옹호는 공동체의 부엌과 신용협동조합 등을 만듦과 아울러 정부에 로비활동을 펼치는 것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의는 공정한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활동하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사실상 특정한 가치관을 강요하는 ‘전도’와 같은 의미의 선교 개념은 이미 뛰어넘고 있습니다. 어떤 가치관, 사실상 전하는 사람의 자기중심적인 가치관을 일방적으로 전하기보다는 이른바 선교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을 선교로 보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시혜자와 수혜자 관계 안에 있는 선교의 한계를 뛰어넘어 모두가 공평하고 정의로운 관계의 형성을 지향한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자선도 좋고, 봉사도 좋고, 옹호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베푸는 사람과 베풂을 받는 사람이 구별됩니다.
여기서 베푸는 사람은 자칫 함정에 빠집니다. 은연중 자기를 과시하게 되고 동시에 자기의 요구를 베풂을 받는 사람에게 강요하게 됩니다. 그 모든 것이 선한 동기에서 비롯되는 활동이지만, 그 선교대상이 되는 이들을 수동적인 존재들로 만들 수 있는 위험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정의는 그 불균등한 관계를 뛰어넘어 서로 동등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진정한 평화를 이루는 관계입니다. 그것이 곧 선교의 본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의 의미를 현실에서 구현하는 것이 곧 선교의 본질입니다.
흔히 선교단체들이 이슬람권 지역이나 아프리카 등지를 ‘미전도종족지역’이라는 식으로 딱지를 붙여놓고 선교활동을 펼칩니다. 많은 경우 그와 같은 인식에서 출발하는 선교활동은 자기과시적 활동으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의 문제와 그들의 고통을 들여다보지 않고, 그곳에 깃발 하나 꼽는 것을 자랑거리로 내세운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선교가 아니라 자기과시적 활동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는 그것이 사실 갈등과 분쟁의 씨앗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들은 그 삶 자체가 진정한 의미의 선교를 이루는 것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선교라는 별도의 행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진정한 선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중심적 세계의 확장이거나 자기과시적 활동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삶으로서 구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 두렵습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어떻게 감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대로 구현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차라리 전도지를 들고 전도에 나서고, 자선을 하고 봉사를 하고 누군가를 위해 옹호하는 것이 성과도 분명하고 내가 뭔가 하고 있다는 성취감을 맛볼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 생각할 것입니다. 좋습니다! 그 모든 것을 우리가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 삶의 정당성만을 확인하고, 그것이 자기과시적 활동에 머물고, 그것이 자기중심적 세계의 확장만을 초래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과 타인들을 함정에 빠트리는 결과를 낳을 뿐입니다. 우리는 그 함정을 뛰어넘어 우리들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동등하게 그 은혜를 누리게 되는 삶의 희망을 지녀야 합니다.
우리가 어째서 신앙을 추구하고 반복되는 예배 속에서 그 신앙을 확인하고자 합니까? 우리는 누구나 예외 없이 한계를 지니고 있고, 누구나 예외 없이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예배는 그 한계를 하나님 앞에 드러내놓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 한계를 뛰어넘기를 소망하기에 우리에게 절실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함께 한 까닭입니다. 우리들 모두가 각자가 지니는 한계를 뛰어넘어 하나님께서 무한히 베푸시는 은혜의 세계 안에서 진정한 삶의 기쁨을 누리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천안살림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