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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재는 고려시대 국자감(國子監)에 두었던 7재(齋)로 재는 오늘날의 학과 정도로(사학과, 국문과 등)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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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재는 구체적으로 말하면 무학(武學)을 배우던 곳입니다.
1109년(예종 4) 7개의 전공강좌(專攻講座)인 여택재(麗澤齋:周書) ·시빙재(侍聘齋:尙書) ·경덕재(經德齋:詩經) ·구인재(求仁齋:周禮) ·복응재(服膺齋:戴禮) ·양정재(養正齋:春秋)와 함께 무신을 양성하기 위해 둔 것인데 본래 이름은 강예재(講藝齋)입니다.
한자순(韓自純) 등의 8명이 처음으로 합격되어 재에 입학하였는데, 정원은 17명이었습니다.
윤 관 장군 등을 지원하던 예종이 무신들의 지위향상을 위해 만들었던 무학재를 이자겸이나 김부식 등이 활동하던 인종 때에 폐지하였다는 것은 많은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국학칠재 (國學七齋)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고려시대 국자감(國子監)에 설치한 7개의 전문강좌를 말합니다.
1109년(예종 4) 사학(私學)에 뒤진 국학의 진흥을 위해 설치하였는데 당시 발달하고 있던 최충(崔
《주역(周易)》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던 여택재(麗澤齋), 《상서(尙書)》를 강의하던 대빙재(待聘齋), 《모시(毛詩)》의 경덕재(經德齋), 《주례(周禮)》의 구인재(求仁齋), 《대례(戴禮:禮記)》의 복응재(服應齋), 《춘추(春秋)》의 양정재(養正齋) 등 6재와 병학(兵學)을 강의하던 강예재(講藝齋)를 7재라 하였지요.
이 가운데 앞의 6재를 유학재(儒學齋), 병학의 강예재를 무학재(武學齋)라고도 하여 문·무 양학으로 구분하였으나, 유학재의 학생수는 60~70명이었던 것에 반하여, 무학재는 8~17명에 불과하였습니다.
예종은 당시 북방에서 일어나는 여진족을 정벌하기 위하여 무관을 양성하고자 했습니다.
그리하여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국자감에 무학재를 설치했으며, 오히려 뒤에는 정원을 조정해서 무학재에 인원을 더 배정했습니다.
그러나 1133년(인종 11)에 무학재인 강예재를 폐지함으로써 7재는 6재로 개편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학으로 과거를 보면 급제하기 쉬워 다른 재의 학생들이 전공을 버리고 무학재로 몰려들었으며, 또한 무학이 성하면 유생(儒生)과의 대립·불화가 생길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으나 사실은 상문경무(尙文輕武)의 풍습 때문이었고, 이것은 후에 무신정변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국가교육이 얼마나 험난하고 또 중요한 것인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역사문의 김 모가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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