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역: 2009-1-25, 제1차 개정: 2009-6-19, 제2차 개정: 2013-4-12
본 정보는 "위키피디아 영문판"의 해당 항목을 '크메르의 세계'가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캄보디아 역사 제1장 : 초기 역사 (고대사) 개론
Early history of Cambodia
1. 선사시대의 캄보디아 Prehistoric Cambodia
캄보디아의 선사시대에 관해서는 알려져 있는 정보가 많지 않다. 캄보디아에서 가장 이른 시대의 유적으로 알려진 지역은 랑 스삐언(Laang Spean: 밧덤벙[바탐방] 소재) 동굴인데, 이는 이 나라의 북서쪽 지역에 위치한다. 랑 스삐언 동굴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최초의 시기는 기원전 7000년 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주1) 또 다른 중요한 유적으로는 삼로웅 센(Samrong Sen: 껌뽕 츠낭소재) 지역이 있는데, 이 유적지에는 기원전 약 500~230년경 사이에 사람이 살았다.
캄보디아 지역의 사람들은 기원전 2천년경부터 가축을 사육하고 쌀을 경작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600년 무렵의 캄보디아인들은 철기를 만들었고, 이윽고 기원전 100년 경에 이르면 인도 문화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다.
고고학적 증거들은 우리가 오늘날 '캄보디아'(Cambodia)로 부르는 지역 일부에서, 기원전 2천년 내지 1천년 무렵부터 사람이 살았음을 보여주는데, 이 신석기 문화는 중국 남부에서 인도차이나 반도로 전해진 것일 가능성이 있다. 서력 기원 무렵(1세기 경), 이 지역 주민들은 비교적 더 정착민화되고 조직화된 사회를 발전시키며, 문화와 기술적 측면에서 이미 원시적 단계를 훨씬 능가하는 수준을 보여주었다.
가장 진보된 집단은 해안지역 및 하(下)-메콩 강(Mekong River) 지역의 계곡들과 삼각주 지대에 살았다. 그들은 여기서 벼를 경작하고 가축도 사육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사람들이 현재의 태국과 라오스 지역에 정착했던 이웃의 주민들보다 먼저 이주해왔다고 추측하기도 했다. 아마도 이 사람들은 그 기원 면에서 오스트로아시아인(Austroasiatic)이었을 것이고, 오늘날 동남아시아(Southeast Asia)의 섬들과 태평양 여러 도서 지역에 거주하는 민족들의 조상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청동기와 철기를 포함하는 금속들을 사용했으며, 항해술도 보유하고 있었다.
최근의 연구는 원형의 토목공사 흔적들을 찾아냈는데, 그 연원은 캄보디아의 신석기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주2)
(주1) Sara Louise Kras, Cambodia.
(주2) Gerd Albrecht, Circular Earthwork Krek 52/62: Recent Research of the Prehistory of Cambodia, PDF.
(지도) 캄보디아와 베트남에서 발견된 관개사업과 관련된 황토의 분포도.
2. 건국신화 Mythology
캄보디아의 건국 설화는 나가(Nāga) 설화이다. '나가'는 파충류 종족으로서, 태평양 지역에 거대한 제국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 설화는 나가 왕국의 공주가 [오늘날의 인도 북부지역인] 깜부자(Kambuja, 깜보자)의 왕과 결혼해 캄보디아 민족을 탄생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날 캄보디아인들은 스스로를 "나가의 후손"이라 부른다.
(역주) 산스끄리뜨어 '나가'(Nāga)는 한자 문화권에서 전설적 동물 '용'(龍)으로 번역되곤 했다. 가령 '공(空) 사상'을 정립한 초기 대승불교의 대논사 나가르주나(Nāgārjuna)는 한역 이름으로 '용수'(龍樹)라고 번역됐다. 이는 아마도 중국에서 '용'이란 동물울 신성한 이미지로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인도에서 사용된 용례들은, 용보다는 큰 뱀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이 글의 영어 원문에서도 '용'(dragon)이라는 용어는 등장하지 않고, '파충류'(reptilian)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3. 푸난 왕국 Funan
서유럽이 지중해 연안의 고전적 문화와 제도들을 받아들이고 있을 때, 대륙부 동남아시아와 도서부 동남아시아에 살던 사람들은, 이전의 1천년 동안 인도에서 흥기한 문명의 자극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동남아시아의 인도문화화(Indianization)는, 인도양에서 교역량이 증가하면서 나타난 현상 중 하나였다. 이 시기에 웨다(Vedic, 베다) 종교와 힌두교(Hindu), 정치사상, 문학, 신화, 그리고 예술적 영감 등이 서서히 동남아시아 문화의 내재적 요소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비록 카스트 제도(caste system: 4성 계급제도)(역주)는 채택된 일이 없었지만, 인도문화화 현상은 고도로 조직화되고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발생할 수 있게 만든 자극제가 되었다.
(역주) 카스트제도는 인도의 사회구조를 특징짓는 사회적 계급제도이다. 통상적으로 브라흐만(사제계급), 끄샤뜨리야(왕족, 무사계급), 와이샤(상인, 혹은 평민), 슈드라(노예)로 구성된다고 생각된다. 또한 이 4종의 계급에도 끼지 못하는 이들도 존재하는데, 이들을 "불가촉천민"이라고 한다. "카스트"라는 말은 15세기에 포르투갈인들이 사용한 용어이다. 하지만 인도인 자신들은 이에 직접 대응하는 용어로서 "와르나"(Varna": "색깔"이란 의미)를 사용하는데, 아마도 아리안 민족주의적 이념에서 피부색을 빗댄 일종의 이념형 구분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현실적인 구분으로 인도인들은 "자띠"(jaatii: "태어나다"는 의미의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란 용어를 사용한다. 이것은 일종의 직업적 분류로, 어떤 지역에서는 1천 종류 이상의 자띠가 존재한다고 할 정도로 복잡한 형태를 띠고 있다. 아주 극단적인 예를 들어 본다면 쓰레기 청소를 하는 사람은 분뇨 청소를 하는 이를 천하게 여겨 혼인을 하지 않는다.
푸난(Funan, 扶南, 부남)은 가장 먼저 인도문화의 영향을 받았던 국가이며, 일반적으로 이 지역 최초의 왕국으로 여겨진다. 푸난은 기원후 1세기 경 건국되었으며, 오늘날 캄보디아의 남동부와 베트남 최남부라 할 수 있는 메콩 삼각주 하류 지역에 위치했다. 그 수도인 위야다뿌라(Vyadhapura, 브야다푸라)는 아마도 현재의 쁘레이웨잉(Prey Veng, 프레이벵) 도, 바프놈(Ba Phnom) 읍내 인근에 위치했을 것이다.
푸난에 대한 최초의 역사적 기록은 3세기 무렵 이 지역을 방문했던 중국 사신의 저술이다. '푸난'이란 명칭은 대체로 '산'(山)을 의미하는 고대 크메르어 '프놈'(Phnom)에서 파생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푸난인들의 기원은 오스트로아시아 계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푸난인들 스스로 자신들을 무엇이라 불렀는지는 알 수 없는 상태이다.
푸난의 초기시대에는 인구가 주로 메콩 강 연안 및 떤레 삽(Tonle Sap, 톤레삽) 아래쪽인 떤레 삽 강(Tonle Sap river)을 따라 위치한 촌락들에 집중되어 있었을 것이다. 교통과 운송은 대부분 이러한 강들 및 메콩 삼각주 지역의 조공국들을 통한 수상운송이 대부분이었다. 이 지역은 어업과 벼농사에 기반한 경제가 발전하기에 매우 적합한 지역이었다. 푸난의 경제가 내륙의 광범위한 관개수로를 통해 생산된 벼의 잉여생산물에 기반했다는 주목할만한 증거가 존재한다. 해상무역은 푸난의 발전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 왕국의 주력 항구로 생각되는 옥 에오(Oc Eo 혹은 O'keo: 현재는 베트남의 일부) 유적에서는, 로마와 페르시아, 인도와 그리스의 공예품들까지 발견되었다.
5세기 무렵의 푸난 왕국은 메콩 강 하류와 떤레 삽 호수를 둘러싼 지역을 통치했다. 또한 오늘날의 캄보디아 북부와 라오스 남부, 그리고 태국 남부와 말레이 반도 북부에 위치했던 소규모 국가들도 조공국으로 삼았다.
인도문화화는 인도 아대륙을 여행했던 상인과 사신들, 그리고 지식인 바라문들(Brahmins: [역주] 힌두교의 사제 혹은 수행자)의 빈번해진 교류를 통해 그 기초를 다졌다. 5세기 말에 이르면, 상류층 문화는 철저히 인도문화화했다. 왕실 의례 및 정치적 제도의 구조는 인도의 것을 모델로 했다. 언어적 측면에서는 산스끄리뜨어(Sanskrit, 범어)가 광범위하게 사용됐다. 인도의 법전인 <마누법전>(Laws of Manu)이 채택되었고, 인도의 문자체계에 근거한 문자도 만들어졌다.
6세기 초에 일어난 내전과 왕권다툼은 푸난의 안정성을 잠식해 들어갔다. 그리하여 북부지방에 위치한 조공국이었던 첸라(Chenla, 眞臘)가 힘을 키우기 시작했고, 푸난은 정략적 결혼을 통해서만 현상유지가 가능한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크메르계 왕조인 첸라에 흡수되어 그 조공국으로 전락하고, 7세기에 이르면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4. 첸라 왕국Chenla
첸라(Chenla, 眞臘) 사람들은 크메르 민족이었고, 산스끄리뜨어로 기록을 남긴 푸난인들과 달리 크메르 문자를 사용했다. 첸라(진랍) 왕국이 역사에 최초로 언급된 것은 중국의 역사서인 <수서>(Book of Sui, 隋書)로서, 첸라를 '푸난의 조공국'이라 기록했다. 첸라를 푸난의 통제에서 벗어나도록 만든 왕은 스뜨루따와르만(Strutavarman)이었다.
후대의 왕 바와와르만(Bhavarman [바와바르만])은 푸난을 침공해 합병했다. 일단 푸난을 병합하고 나자, 첸라는 3세기에 걸친 정복활동에 착수했다. 그들은 오늘날의 라오스 중부 및 북부를 복속시키고, 메콩 삼각주 지역을 병합했으며, 오늘날의 캄보디아 서부와 태국 남부지방도 직접 통치했다.
이 시대의 왕들 가운데 마헨드라와르만(Mahendravarman [마헨드라바르만])은 이웃국가였던 참파(Champa: 현재의 베트남 중부에 위치)와 혼인을 통해 평화를 유지했다. 중국 역사가에 따르면, 그 뒤를 이어 616년에 왕위를 계승한 이샤나와르만(Ishanavarman [이샤나바르만])은 2만 가구 규모의 새로운 수도로 천도했다고 한다.
문화적 측면에서 볼 때, 첸라 왕조는 인도문화의 영향을 받은 푸난왕조의 초기적 정치, 사회, 종교적 제도들을 유지하고 있었다. 첸라는 인도에서 전해진 불교 등 다른 종교에 비해 힌두교(Hinduism)를 더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8세기에 첸라의 왕궁에서 당파싸움이 벌어져 왕국은 남, 북조로 양분되었다. 중국의 사서들은 이 두 나라를 '내륙 첸라'(상첸라, 육첸라)와 '해안 첸라'(하첸라, 수첸라)로 구분했다. 내륙 첸라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지만, 해안 첸라는 지속적인 불안정에 빠져들었다. 부분적으로는 자바인들을 비롯한 해상세력의 영향 때문이었다. 자바(Java)에 있던 사일렌드라 왕조(Sailendra dynasty)는 적극적으로 해안 첸라의 영토를 통제하려 했고, 마침내 조공국의 지위로 복속시켰다. 해안 첸라의 마지막 왕은 790년 경 자신이 공격에 나섰던 자바의 왕에게 도리어 살해되었음이 분명하다.
첸라의 내부 분열에서 최종적인 승자는 메콩 삼각주 북부에 있던 작은 크메르 국가의 통치자였다. 크메르 민족을 자바의 통치에서 해방시키고, 크메르 제국을 개창한 이 사람이 바로 자야와르만 2세(Jayavarman II [자야바르만 2세]: 802~850년)였다.
5. 크메르제국 (=앙코르 왕국)
'앙코르 시대'(Angkorian period) 혹은 '크메르 제국'으로 불리는 이 시대는 9세기부터 15세기까지이다. 문화적 성과와 정치적 권력 면에서 이 시기가 바로 크메르 문명의 황금기라 할 수 있다. 현재의 시엠립(Siem Reap [시엠 리업]) 근처에 위치한 거대한 사원들의 도시는, 자야와르만 2세의 계승자들이 위대했음을 보여주는 영원한 기념물이다. 심지어 자신들 조국의 거의 모든 과거와 유산들에 대해 적개심을 분출했던 크메르루주
(Khmer Rouge) 정권조차, 이 격조있는 앙코르 시대 사원을 자신들의 국가인 '민주 캄푸치아'의 국기 문양으로 채택했을 정도이다.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의 국기에서도 동일한 동기를 찾아볼 수 있다.
자야와르만 2세에 시작된 이 대제국은 오늘날에도 '캄보디아'(Cambodia) 혹은 '캄푸치아'(Kampuchea, 껌뿌찌어)라는 이름으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9세기 초부터 15세기 중반에는 이 왕국이 '깜부자'(Kambuja)란 국호로 알려졌는데, 이는 일찍이 북인도에 자리했던 고대국가이자 민족의 이름이었다. 오늘날의 국가명인 '캄보디아'(껌뿌찌어)도 바로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자야와르만 2세는 해상세력인 자바인들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해 떤레 삽 북쪽에 정착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앙코르 유적지 인근에 수도인 하리하랄라이(Hariharalaya)를 건설했지만, 그 이전에도 몇 곳의 도읍들을 건설한 바 있다. 인드라와르만 1세(Indravarman I [인드라바르만 1세]: 877~889)는 태국의 코랏 고원(Korat Plateau)까지 머나먼 서쪽으로 통제권을 확장하고, 수도의 북쪽에 위치한 천수답들에 관개시설을 제공하기 위해 거대한 저수지의 건설도 명했다. 그의 아들 야소와르만 1세(Yasovarman I [야소바르만 1세]: 889~900)는 저수지인 '동 버러이'(Eastern Baray)를 조성했다. 이 유적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으며, 그 수로의 길이는 6 Km가 넘고, 폭도 1.6 Km에 달한다. 인드라와르만 1세 및 그 계승자들이 건설한 운하와 저수지들의 정교한 체계는, 500년간 번영한 깜부자 왕국을 이해할 열쇠가 되고 있다. 불확실한 계절적 몬순(장마)에만 의존하는 것을 탈피하기 위해, 그들은 '초기 녹색혁명'(early green revolution)이라 할만한 성과를 일궈냈고, 이로 인해 국가는 대량의 잉여 쌀 생산량을 확보하게 되었다.
13세기부터 14세기에 걸쳐 깜부자 왕국이 쇠퇴한 것은, 아마도 이러한 치수체계의 낙후가 촉진됐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현재의 태국 및 여타 국가들의 침략과 왕가 내 라이벌들이 벌인 내부 분열로 인해 체제유지에 동원됐던 인적 자원의 분산이 초래됐고, 그로 인해 점진적 쇄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앙코르의 위대한 왕 중 한 사람인 수랴와르만 2세(Suryavarman II [수리야바르만 2세]: 1113~1150)는, 베트남 중부 지역에 있던 참파 왕국 및 북부 베트남의 남 비엣(Nam Viet), 그리고 서쪽 변방인 버마의 에야와디 강(Irrawaddy river [이리와디 강]) 유역의 여러 몬족(Mon) 소국들을과 일련의 전쟁들을 성공적으로 치루면서 영토를 확장했다. 그는 중국 남부의 운남(Yunnan) 지역에서 이주해온 태국민족(타이족)을 봉건적 관계로 예속시키고, 자신의 통치권을 말레이 반도(Malay Peninsula) 북부까지 확장했다.
그의 위대한 업적 중 하나가 바로 '앙코르와트'(Angkor Wat) 사원군의 조성이다. 앙코르와트는 세계적으로도 가장 거대한 종교적 건축물 중 하나이며, 동남아시아 최대의 단일 건축물로 간주되고 있다.
하지만 수랴와르만 2세가 다이 비엣(Dai Viet)을 침공하는 과정에서 전사하면서, 영토 확장은 제동이 걸렸다. 이후 참파는 다이 비엣의 지원을 받으면서 자국 영토에서 크메르 제국의 세력을 신속하게 몰아냈다. 수랴와르만 2세의 사후 30년 동안 불행한 왕위 계승 갈등이 벌어졌고, 이웃국가인 참파의 보복 침공도 한 차례 있었다. 참파 왕국은 1177년 크메르제국의 수도를 침입하여 앙코르 도시를 파괴했다.
(사진) 전쟁용 코끼리로 무장한 크메르 전사가 참(=참파) 왕국을 향해 진격하는 모습. [12세기에 조성]
이러한 참파 왕국을 마침내 몰아낸 왕은 자야와르만 7세(Jayavarman VII [자야바르만 7세])였다. 그의 재위기간(1181~1218)은 깜부자 왕국의 국력이 정점을 찍는 시기였다. 전임 왕들이 힌두교적 신왕(神王) 숭배를 채택한 것과 달리, 자야와르만 7세는 대승불교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자신의 정체성을 보살(菩薩, bodhisattva)(역주)로 규정한 그는 '앙코르 톰'(Ankor Thom) 사원군 및 바이욘(Bayon) 사원을 열정적으로 건설해나갔다. 바이욘 사원의 석탑에는 216종의 붓다, 보살, 왕들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역주) 상좌부불교(소승불교) 최고의 역할모델은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Arahat)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일이 자신만을 위한 편협한 일이라고 비판하고, 소위 "모든 중생이 깨닫기 전에는 성불(부처가 되는 것)조차 미룬다"고 하는 자세의 "보살"을 새로운 역할모델로 제시하였다. 인도에서 이러한 정치철학에 기반해 나라를 다스린 왕은 바로 아쇼까 왕인데, 아마도 자야와르만 7세가 아쇼까 왕을 역활모델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또한 그는 자신의 왕국 안에 200여곳의 휴양소와 병원을 세웠다. 로마의 황제들처럼 자야와르만 7세 역시 제국의 수도와 지방도시들을 잇는 도로를 건설했다. 역사학자 조르쥬 세데스(George Coedès)에 따르면, "캄보디아의 다른 어떤 왕들도 이렇게 많은 돌들을 운반하진 못했다"고 한다. 흔히 규모를 크게 하고 공기를 단축할 경우 질적인 측면은 무시되기 마련인데, 호기심을 가지고 둘러봐도 바이욘 사원에서 그러한 흔적을 찾아 보기는 거의 어렵다. 이곳의 조형들은 오늘날의 캄보디아에서 볼 수 있는 목조건축과 별반 다름없으며, 앙코르인들의 일상적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인상적인 석조 건물들은 왕족들이 거주하기 위한 건축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왕과 왕가가 신봉하던 힌두교 및 불교의 신격들이나 혹은 불성(佛性, buddhahood [역주] 인간이 본성적으로 가진 붓다가 될 수 있는 소양)을 칭송하고 예경하기 위한 것이었다. 세데스는 이 조형물들이 사원과 무덤의 두 가지 기능을 겸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형태적으로 보면, 이 조형물들의 배치구도는 힌두교의 신화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앙코르와트의 중심부에 자리한 다섯 개의 탑들은, 우주의 중심이라 전해지는 수메루 산(Mount Meru, 수미산[須弥山])의 정상을 표현한 것이다. 또한 외벽은 이 세계의 가장자리를 둘러싼 산맥을 형상화한 것이고, 해자(垓字, moat [역주] 방어전을 위해 성곽 바깥으로 빙 둘러 판 연못)는 우주적 바다를 표현한 것이다. 다른 여러 고대 조형물들과 마찬가지로, 앙코르 지역의 기념물들 역시 막대한 자원과 노동력이 투여된 것으로, 그 정확한 목적에 관해서는 아직도 미궁에 싸여 있다.
앙코르인들의 사회는 엄격한 계급사회였다. 왕은 신성한 존재로 간주되었고, 그 영토와 신민들의 소유자였다. 왕과 왕족들의 바로 밑에 바라문 사제들이 위치했고, 그 다음으로 소수의 행정계급이 있었는데, 10세기에 이들의 수는 4천명 정도를 헤아렸다. 그 다음은 평민들로 과중한 부역(corvée: 강제노역)의 의무를 지고 있었다. 또한 다수의 노예계급도 존재했는데, 이들이 바로 앙코르 시대의 영속적인 기념물들을 건설했다.
자야와르만 7세가 서거한 후, 깜부자 왕국은 최종적인 소멸에 이르는 기나긴 쇠퇴기로 접어든다. 이 무렵 제국의 서쪽 변방에서는 태국의 세력이 위협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또한 몬족 왕국들을 경유하면서 스리랑카에서 들어온 상좌부불교(Theravada Buddhism, 소승불교)는 왕가의 힌두신앙 및 대승불교 숭배에 도전장을 던졌다. 엄격한 금욕생활과 스스로의 노력을 통한 개인의 구원을 주장한 상좌부불교는 사실상 대중의 노예화에 기반을 두고 있던 부유한 왕가의 지배체제에 이념적 배경을 제공하진 못했다.
(역주) '보살'이란 역할모델을 주장했던 대승불교도들은, 상좌부불교를 편협한 것으로 폄훼하여 '소승'(Hinayana, 小乘)이라 불렀다. 산스끄리뜨어 단어 '소승'(Hina-yana)은 '작은 수레'란 의미이다. 반면 '대승'(Maha-yana, 大乘)은 '큰 수레'란 의미이다
1353년, 태국(시암)의 군대가 앙코르를 점령했다. 크메르인들은 이를 곧 수복하긴 했지만, 전쟁은 계속됐고 수도도 여러 차례 약탈당했다. 오늘날 라오스 국경에 해당하는 크메르 제국의 북부지방 영토는 라오스 왕조인 란상(Lan Xang)에 빼앗겼다.
1431년, 태국은 앙코르 톰을 점령했다. 그 이후 앙코르인들은 16세기 중후반 25년 정도의 짧은 시기를 제외하고는 왕국의 수도를 두 번 다시 방어하지 못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