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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파평장로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산지기
생태영성과 생태목회
곽은득 목사(작은교회 담임)
지난 봄 영남신학대학교 학우들이 텃밭가꾸기 시작예배를 드리면서 격려를 해달라기에 다녀왔다.
몇 해 전 신대원생 서아무개가 찾아와 학내에 생명운동프로그램으로 텃밭가꾸기 활동을 하겠다길래 조언을 해주고 그렇게 시작된 활동이 지금껏 이어져 오고 있으니 그동안 여러 학우들의 수고가 많았는 줄 안다.
올해도 가보니 참여 학생도 늘어나고 몇 분의 교수님도 오셨고 격려차 오신 지역의 목회자들의 얼굴도 보였다.
교회 일로 봉사를 하고 바쁘게 강의실을 오가며 공부하는 학우들이 그래도 무슨 까닭으로 왔던 흙에서 농사를 직접 지어보겠다는 어린 후배들을 보며 이 일이 예사로운 일은 아닐 것이다는 생각이 든다.
난 십여년 넘게 ‘농사’를 화두로 삼으면서 나름대로 ‘생태영성’을 추구해왔는데 생태영성을 통하여 깨닫는 큰 축복이 있다면 신학에 대한 생각이 좀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건 신학의 장벽이 무너져 내리고 자연에서 배우면서 교수와 학생의 경계도 완전히 해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때 우리는 신학이라고 하면 머리도 좋고 공부도 잘하는 사람이 외국에 유학 가서 비싼 돈 들여가면서 수많은 세월이 흘러 유명한 신학대학에서 석사, 박사 학위 얻고 하는 것이 신학이라고 생각했지. 그러나 신학을 배우는 것은 아무나 배울 수 있는 것이고 책을 통해서 배우는 신학만이 아니라 논과 밭, 흙을 만지고 밟고 아무 모양도 없는 질그릇 같은 바닥을 통해서 신학을 배우고 기도를 배우고 진리를 깨닫고 제자의 삶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말하자면 생태영성을 통해서 학교와 강의실 안에서 하는 공부의 틀을 훌쩍 뛰어넘어 버린 것이다.
하나님은 온 창조물이 서로 살림의 길을 주고 받는 것, 이것이야말로 신학의 참 이유이고 목표이며 이것이야말로 생태영성을 통해서 신학적으로 발생시키고 싶은 궁극 목표 가운데 하나이다.
난 이런 후학들이 저 텃밭에서 옛날 이사야가 꿈꾸고 예수가 꿈꾸고 한 때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가 아일랜드의 진정한 행복과 독립은 공장의 굴뚝 연기가 아니라 늦가을 가을걷이 하는 곳에서 온다는 꿈. 일본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가 그의 시(詩) ‘6월’에서 ‘어디선가 아름다운 마을은 없을까?’, 전후 일본 사회의 비탄과 절망을 보면서, 일본 대다수가 대국(大國)을 꿈꾸며 헛된 소망 상에 사로잡혔을 때 그 ‘마을’을 꿈꾸었듯이, 그 노리코의 ‘6월’시를 80년대 육중한 감옥 현실에서 그 ‘아름다운 마을’을 유토피아로 삼고 그 고난의 세월을 버티었던 서준식씨의 꿈, 그 꿈을 꾸기를 바란다.
저 텃밭에서 생태영성을 사는 축복을 한없이 누리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생태란 근복적으로 하나님의 자기전달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
하나님이 우리의 ‘집’(오이코스)이 되어주심에 대한 증거이며 찬양이라는 것을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보다 더 충만하고 아름답게 체험하고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어린 후배들과 나눈 이 감흥이 아직도 내 마음 한 구석에 잔잔한 여운으로 남아 있는데 이번엔 서울 장신대에서 수업시간에 이런 강의를 한다니까 좀 늦은 감이 들기도 하지만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 일인지 모르겠다.
이번 강좌가 ‘교회사를 통해 본 창조신앙, 생태영성’이라고 하니 난 여러분에게 먼저 ‘창세기를 읽어라’고 권면하고 싶다.
1930년대 작가 정지용은 새롭게 작가에 도전하려는 지망생들이나 신인들에게 옛날 이광수의 어법을 흉내내어 ‘창세기를 읽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지용은 왜 당시 ‘창세기를 읽어라’고 했을까? 그렇게 말해줄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은 뭘까? 그건 한마디로 새로운 시대일수록 총체적 신화에 대한 안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거다.
1930년대라면 일제강점기에다 대동아전쟁으로 온 세상이 혼돈과 절망, 좌절의 때, 그 모든 혼란스러움을 극복하고 강력하게 그러한 것을 이겨낼 만한 총체적 이념은 무엇인가?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총체적 설계도를 꾸미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 설계도를 그리기 위해서는 어떠한 참신한 정신적 빛이 필요한 것일까? 이상적인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사상과 이념, 어떤 삶의 형태가 그려져야 했을까? 이런 벅찬 고민이 정지용의 말속에만 깃들어 있으면 되겠나?
‘창세기를 읽어라!’
이 말은 창세기 내용을 잘 알아야 된다거나 무슨 신앙을 키우라는 말보다는 우리 민족의 처지를 그러한 창세기적 이야기 틀에 대입시켜 보자는 말일 것이다.
창세기에는 다른 민족에게 노예 상태로 핍박받았던 한민족의 수난과 방황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고통 등이 담겨 있다.
이러한 고난스러운 과정을 헤쳐 나갈 수 있게 강력하게 이끌어 간 우주적 총체성의 별빛이 광야의 하늘에 빛나고 있다.
보기로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을 이야기할 때 그건 우주적 지혜에 연결시킨 것이다. 우주론적 목표와 사명감으로 무장하여 자신의 주체적 창조 정신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나라를 건설할 때 무미건조하고 황량한 현실 속에서 이러한 낭만적 창조 이야기가 있다는 건 우주적 꿈을 그들의 이념 속에 깃들게 한 거대한 사상이 식민지 종속으로 우리의 주체적 창조력이 바닥이 났을 때 창세기의 창조신앙이 필요했던 것이다.
창세기의 상상력과 사유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난 21세기에 다시 창세기를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창세기적 과제를 풀어나가야 한다.
창세기의 주체적 창조력, 창세기적 상상력, 원초적인 낙원의 상상력을 되찾는 것- 이게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상상력이란 뭘까? 이미지를 재구성하는 능력이다.
상상력이 빈곤한 사람은 세계를 재구성할 줄 모른다. 그는 남이 구성한 세계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
창세기는 우리가 꿈꾸는 상을 우리게게 생생하게 보여준다.
창세기는 상상력의 덩어리다. 그 상상이 그 어떤 현실보다 강력해 우리의 심장이 고동치고 맥박이 빨라진다. 뿐만 아니라 그 상상에 자극을 받아 우리의 상상력 또한 기민한 활동을 시작한다. 상상은 상상을 낳는다. 그게 진정한 상상력의 힘이다. 하나님은 그 상상력의 지휘자다. 창세기에 나타난 그 광대하고 세심세밀한 온 우주를 지휘하는 지휘자이다.
그 광대하고 숭고한 우주적 예술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내던지게 된다. 내 지식과 의식으로 아니라 그 모든 인간의 것은 다 내려놓고 나 자신을 그것에 전적으로 내맡기게 된다.
피카소는 ‘나는 찾지 않는다. 발견한다’고 했다.
의식과 지식으로 찾으면 늘 등잔 밑이 어둡고 답답해진다.
이성은 저렇게 빛나고 있는데 왜 해답은 보이지 않니?
하지만 그 앞에 그냥 나를 내맡기면 갑자기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이 가을에 나에게 상상력을 불어넣을 대상을 찾아보자.
나를 내던질 기회를 가져보자. 자기를 내던져 보지 못한 인생만큼 세상에 슬픈 게 없다.
인생이 답답하고 뭔가 새로운 길을 찾고자 한다면 ‘창세기를 읽어라’.
창세기는 창조와 인간의 기원을 보고하고 설명한 하는 게 아니다. 날마다 낙담과 실의와 좌절의 처지에 살 때 하루가 새로 시작되면 오늘은 뭔가 달라질까. 내일은 희망이 있을까 하며 하루를 조마조마하게 시작하고 또 하루를 그렇게 고난 속에 낙담한 사람에게 주는 메시지다.
내 인생은 캄캄해 혼돈이야 공허야 어두워. 어디서 빛이 생길까? 어디서 희망이 나올까? 아 나도 ‘빛’이 생길 수 있단 말인가? 아 그래 나도 빛이 생길 수 있구나. 지금 내 고난이, 혼돈이, 공허와 흑암이 그냥 고난이 아니구나. 이 고난이 창조의 재료가 되는구나. 내 어둠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내 인생의 의미가 될 수 있구나. 그래서 어둡고 고난에 처했던 내 人生이 빛으로 탄생할 때, 내 삶이 빛으로 새로 바뀔 때 빛으로 탄생한 그 시간이 태초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태초의 사건을 만들고 싶어한다.
수면으로 운행하셨던 하나님의 영이 사람들을 오늘도 빛으로 인도한다.
사람과 따뜻함, 생명에 대한 간절한 돌봄, 이런 하나님의 영을 듬뿍 받아 상대를 감싸안으면 상처가 아물고 새롭게 부활한다.
영의 힘이 중요하다. 어떤 에너지를 뿜어내는가, 어떤 에너지를 뿜어내며 살고 있는가? 저 친구는 내뿜는 기가 달라, 얼마나 멋있나.
이 창조의 영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 그 사람 안에 들판이 생기고 꽃이 생기고 구름과 달이 생기고 하늘의 별이 반짝일 것이다. 땅이 푸른 움을 돋아내듯이 마음의 땅에 온갖 아름다움이 창조될 것이다.
창세기는 ‘생태영성의 보고’이다.
그리고 그 키워드는 창세기 2장 15절의 ‘다스리다’이다.
‘다스리다’는 히브리어 ‘라다’로 ‘살게하다’는 뜻으로 ‘살리는 일’, ‘살게 하는데’ 더 목적을 둔 말이다. 이젠 정복, 번성, 충만, 성공(창 1장 28절)이 중요한 게 아니라 ‘다스리다’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살리는 일에, 살리는 데 모든 에너지를 집중해야 한다.
앞으로 우리 사회도 산업화 100여년 동안은 ‘이기주의’로 달려왔지만 이젠 ‘타산적 이기주의’로 갈 것이니, 남을 살려야 내가 살 수 있다는 것으로 서서히 진화해 가기에 여기에 기독교가 중요한 사명을 부여받게 되는데 그걸 ‘생태목회’ 또는 ‘생명목회’라 부른다. 하나님 얘기 한마디 없으면서도 하나님을 드러나게 하는, 그래서 인간의 깊은 심연을 울리는 선교를 해야 될 것이다.
그러니까 ‘삶’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면서, 삶에서 가장 깊은 하나님을 끌어올릴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얘기를 깔고 작은교회가 하고 있는 중요한 몇 가지 사역들을 소개하면서 생각을 나누고 싶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해묵은 질문 같지만 사실 가장 원초적인 질문으로 영원한 사유가 될 수밖에 없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지역 공동체’에서 찾으려 했다. 교회라는 공동체가 인간됨의 진보를 촉발하는 장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직 개인과 교회의 역량을 강화하는 데 힘쓰다 보니 지역사회의 변화를 위한 도모는 아직 큰 기여가 없는데 물론 도시 목회 때는 교회 밖의 사람들과도 연대하면서 그들과 함께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경직된 지역 사회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이런 시도는 몇몇 개인을 변화시키기도 하고 진보된 자아를 형성하여 공동체 운동에 어느 정도 기여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변화와 운동의 결과물도 따지고 보면 자본과 물질이 지배하는 도시 문명의 거대한 기계 부속품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 깨닫게 되었다. 한계에 직면하자 마침 80년대 말 엄청난 사회 변화와 함께 새로운 진로(?)를 찾게 되었고 새로운 대안을 찾기 위해 기도와 성서 탐독으로 ‘농업’과 ‘생명’을 만나게 되었고 환경신학과 여러 인문 공부 등으로 사유의 폭을 넓히는 계기와 더불어 그때부터 새로운 시각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새롭게 해석하는 능력이 생겨났다고나 할까? 그때부터 자연, 흙, 농촌, 생명을 화두로 인간과 세상, 신학과 신앙의 세계를 다시 보게 되었다.
1999년 이곳 매곡리에 들어오면서 교회도 옮겨오게 되고 나 역시 흙과 더불어 생태적 삶에 젖어 살고 있다. 아직도 내 의식의 언저리에는 도시의 삶이 내 생활과 의식에 묻어나오기도 하지만. 그리고 지금 농촌이란 게 도시의 생활 방식에 지배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농촌이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훨씬 많이 지니고 있기에 희망을 갖고 여러 실험들을 해오고 있는 것이다.
첫째, 스물다섯집의 커뮤니티(생태마을공동체)
우리가 인류역사를 너무 국(國, 나라), 읍(邑)이나 군(郡), 도시(都市) 중심으로 기술해 왔다는 건 그 속에 거대한 거짓이 꾸며져 있지 않을까?
인간의 역사는 거실 ‘마을의 역사’리고 생각한다.
마을-인간사의 가장 작은 최하의 무리형태이며 자연환경을 떠나서 얘기할 수 도 없다. 이게 중국 제도사에 보면 전문술어로 ‘里’(리)라고 부르고 결국 마을의 역사는 중국제도사에서는 (한국사에도 마찬가지) 里制論으로 압축되는 것이다. 따라서 고대사를 연구한다면 이 里制가 연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里는 갑골문에는 발견되지 않지만 금문(金文)에는
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지금 글자와 비슷하다.
‘里’는 문자꼴에서 알 수 있듯이 田(논, 밭)과 土의 결합이다. 里와 土의 형상은 갑골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田은 갑골문에는
후대 금문에 내려오면
흙 ‘土’는 갑골문에는
이것은 가만 보면 땅 속에서 생명력을 토해내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우리가 토한다 토해낸다고 할 때 吐라고 하는데 이것도 土와 동일한 뜻으로 훈계열에 속한다.
그래서 里도 田, 즉 인류에게 농업경작경제가 정착된 이후에 형성된 마을임을 알 수 있으며 그것은 강력한 지연성과 혈연성을 기반으로 한 경작생활공동체인 동시에 종교적공동체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씨족공동체의 장관을 書經에서는 里君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요새 우리말로 里長(리장, 동장)에 해당되는 말이다.
또 里의 규모는 禮記의 祭法에는 二十五家로 나와 있다. 그러니까 한 마을의 가구는 25집이 적합하다는 것이다. 다섯 집을 한 린(隣)을 이웃으로 하고 다섯 ‘린’을 한 里로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里가 스물다섯 농가의 규모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古來의 무리형식을 반영한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말로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이웃’이라는 말도 알고 보면 다섯집 정도의 어떤 행정체제 단위에서 유래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우리의 언어가 자연발생적인 것 같으면서도 제도사적 측면에서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스물다섯 집 정도의 한 마을, 이 마을의 규모는 里라는 字意의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도 입증될 수 있다.
우리는 거리를 나타낼 때도 그 단위로 里를 쓴다. 일상에서 십리, 이십리라는 말도 알고 보면 태고적부터 고제를 반영한 것이다. 동양인의 도량(度量) 방식은 희랍인의 도량방식(플라톤이 말하는 절대도량)과 달리 상대적 도량방식을 취한다. 그리고 그 방식은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기에 그 기준이 되는 것은 항상 인간의 몸이다. 따라서 동양인의 1里라는 거리 개념은 나의 몸이 걷는 행위의 기준에 따라 정하게 되는데 평균 성인이 걷는 걸음으로 300보를 일리(1里)로 삼았다.
이게 다시 한대(漢大) 이후 360보로 바뀌게 되었다. 결국 里는 한마을(里)이란 300보 거리의 지형이 모여 있는 25家 정도의 취락으로서 사당(예배당, 영적공간)이 있고 田野의 농경지를 낀 씨족공동체를 말한다.
자 이렇게 옛 글에서 분석해 놓고 보니까 우리는 매우 목가적이고 전원적인 그림이 살며시 펼쳐진다.
작은교회가 올 10월이면(네째주일) 창립된 지 27주년이 된다. 30주년을 바라보면서 제 2의 도약이랄까, 이렇게 말하니까 또 무슨 새로운 일을 벌리려나, 그런 게 아니고 마음을 다시 한번 조아보자는 것이지. 우리는 아주 작은 꼬물거림이지만 지금 인류 역사의 끄트머리에서 태풍의 눈을 키워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교회는 지나치게 크려고만 한다. 작은 공동체를 추구하는 교회는 매우 적다. 대형교회는 조직일 뿐 교회라고 하기엔 어렵다. 그것은 오늘날 도시화된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형태와 매우 일치한다.
상당히 많은 도시인들은 ‘익명성’을 선택한다. 이웃에 살아도 ○○동 ○○호로 통하면 그만이다. 몇 년을 살아도 얼굴이나 약간 알 뿐 전혀 그 외의 다른 것은 알 수 없다. 대형교회도 그렇다. 교인들 간의 친교도 없다할 만큼 어려워졌다. 친교가 긴밀하지 않다면 그건 벌써 교회는 아니다. 몇 천 몇 만 명을 넘는 교회는 도시에 맞는 생활형태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변질된 교회의 모습이다. 아무리 좋게 본다 하더라도 대형교회 조직이 잘 짜여져 있고 돈으로 치장된 교회에서는 결코 예수를 따르거나 그리스도를 체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곳에 머물러서 누구인가를 기다린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모든 곳에 다 계신다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를 만날 수 있는 곳은 따로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삶을 매우 삼가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조직은 생명을 메마르게 하고 역동성을 제한한다.
교리가 정교하고 탄탄하면 신학은 있을지 모르나 생명과 자유는 없다. 그것이 없는 곳에 생생한 그리스도 체험이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한국교회가 살아서 움직이는 교회가 되려면 몇 가지 실천할 것들이 있는데 중요하게 얘기하고 싶은 한 가지가 있다면 한국교회는 한국의 지금 상황, 정치, 문화, 경제, 분단, 생태, 사회 문제에 깊이 관여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특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 즉 자연과 문화의 문제를 도외시하고는 불가능하다. 작은교회는 개척 시작부터 이런 인식과 의식을 가지고 꾸준히 실천해왔다. 그리고 소박한 걸음으로 가고 있다. 이런 의식을 가지고 소박한 걸음으로 한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새로 만들고 새로 찾아야 할 교회공동체라고 본다. 작은교회는 지금 미조직 교회이다. 난 영원히 미조직으로 남고 싶다. 그러나 앞에서 얘기한 스물 다섯 집의 작은교회를 만들고 싶다. 새로운 삶의 언저리를 서성이는 사람들, 경계를 넘고 싶은 사람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따로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아직은 뭔가 분명하게 보이지 않지만 성채 안과 성채 밖의 이분법을 넘어서 새로운 영역이 열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마음․관계․삶의 의미․정(情)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영역이 아이의 생존과 성장에 가장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들, 돈의 흐름이 아니라 사람의 흐름을 볼 줄 아는 사람, 의미 있는 존재로 내 자녀를, 이웃의 자녀를 키워내 보자고 모일 수 있는 사람, 즉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돈 많은 부모가 아니라 ‘한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 하나님 나라(운동)는 농촌공동체(농촌 마을)안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 국가와 시장과 자본으로부터 해방과 지속가능한 삶의 대안은 농촌공동체라고 믿는 사람들, ‘마을’이 소멸되는 시대에 아이를 위한 마을을 만들기에 뜻이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스물 다섯 집’으로 찾아 오시기를….
지금과 같은 경쟁과 적대와 불안의 시대에 억만 금보다 중요한 것은 우정과 환대의 기운이 살아 있는 ‘스물 다섯 집의 마을’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다.
이제 스물다섯 집이 모여 천천히, 가만히, 조금씩 움직이며 서로를 일깨우며 연결하고 초대하면서 판을 키워가는 것이다. 이것이 21세기 종말을 말하는 이 시대 마지막 자구책인지 모른다. 우리가 지켜내고 보호하고 살려 낼 사회인 것이다. ‘스물다섯 집의 커뮤니티(마을)’은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가 될 것이다.
둘째, 365일 인문학당
‘365일 인문학당’은 말 그대로 1년 365일 날마다 인문학당 프로그램을 열겠다는 말이다. 그건 그만큼 교회(작은교회)는 이제 설교와 교리 말고도 나눠야 할 것들이 많다는 것이지. 지금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재복음화’를 위해, 교회를 다니지 않는 대중들에겐 진짜 필요한 것을 제공하겠다는 뜻이다.
그냥 우리끼리 해보는 신학담론이 아니라, 단순히 우리 교회를 개방한다는 수준이 아니라, 교회 공간이야 으레 누구든 오갈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니까 그건 자랑할 일도 못되고, 이미 많은 교회들이 하고 있는 프로그램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무슨 신앙강좌, 비젼, 성경공부, 큐티, 제자훈련, 신학강좌…, 이런 것들은 하지 않겠다는 거다. 한국교회가 해야 할 것들을 하지 않고 있는 것, 아예 의식도 못하고 있는 약한 부분에 비중을 두고 할려는 거지.
우리는 신앙강좌니 신학강좌니 하고 공부하면 대개 루터, 칼빈, 어거스틴 이야기로 끝내 버릴 때가 많다. 아니 거기서 지치게 만들어 버리지. 그래서 거꾸로 공부해 보는 거다.
현실을 놓고 현실을 붙들고 이해하고 들어가다보면 결국 신학적 질문으로 들어오게 되니까 그 때 신학이야기를 하자는 거다.
지금 교회에서 문화, 문화 선교한다고 야단들인데 문화가 뭐냐? 문화(文化)는 결국 사람 사는 삶의 방식(양식)인데 거기서 출발해야 되는데 문화 영역을 너무 협소화시켜 삶의 중요한 전 영역으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게 문제이지. 사실 ‘인문학당’ 그러니 나를 아는 사람은 그 사람 어디 출신이야, 학위 있어? 그런 사람이 무슨 인문학이야 뭐 이란 말을 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인데, 사실 그 사람 말이 맞지요. ‘인문학’ 그러면 유명한 대학의 교수님들이나 가르치는 거지 그렇게 보통 생각하는데 사실 조금 따지고 보면 ‘인문학’(學)이 아니라 아니 인문학이라기보다는 인문 ‘삶’ 이 말이 더 좋을 것 같다. 그래서 그동안 강의해오면서 ‘논어’를 이야기하거나 무슨 ‘푸코’를 얘기할 때나 나는 한번도 ‘학’(學)으로 얘기하지 않을려고 했지. 그냥 삶으로 얘기하는 거다. 앞에서 말한 대로 나는 무슨 ‘학’(學)이 있는 사람이 아니지. ‘신자유주의’니 ‘통일’, ‘평화’ 이런 말도 잘 쓰지를 않지. 그러니까 ‘이것이 진리니까 이렇게 살아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나는 이렇게 산다. 이렇게 살아 볼려고 한다.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당신과 나와 함께 살지 않겠니. 그대 진리를 찾으려 하는가? 그대 길을 찾고 있는가? 그대 사랑을 배우려고 하는가? 뭐 이런 식이지.
난 인문지성이 ‘학’(學)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거지.
‘학’(學)과 ‘삶’은 머리의 가슴의 문제인데, 아무리 ‘사랑學’을 전공하고 공부한다고 해도 사랑을 잘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젠 ‘학문’이 아닌 ‘삶’을 보여주는 목회자
학문이 아닌 사람을 보여주는 교수
학문보다 삶을 배우는 ‘365일 인문학당’이 되기를 바라는 거지.
365일 인문학당은 재야(在野)공부시스템으로 짜여져 있다.
이 독야청정한 재야공부는 결코 대중들에게 아부하지 않는다. 때로는 좀 삐딱한 이야기도 한다. 이 공부는 답을 넘어 ‘찾음’과 ‘발견’이다. 이 공부는 무슨 단체에서 하는 인문학공부나 무슨 문화센터 같은 곳의 시험 입시, 취미, 자격증, 학위 등과는 무관한 영성과 사람으로 알아야 할 지적인 뼈대를 도란도란 함께 배우는 자리이지.
삶의 자리에 인문학을 놓겠다는 말이기도 하지.
자본에 휘둘리고 빼앗긴 학습권을 바로 찾아 뭘 배워야 하는지를 성찰하는거지.
이 공부는 작은교회의 정치경제학이다.
대안적 삶이요. 대안경제의 출발이다.
작은교회는 마을이요 학교이다. 한마디로 ‘에코스타일’이다.
공부내용은 아래와 같다.
맞춤강좌, 수시회원 모집도 하고, 원하는 시간에 모든 강좌는 맞춰주고 있다.
․ 인문(人文)강좌
- 고전, 생태와 환경, 건축, 글쓰기, 문학, 성서와 종교, 철학사, 한국 근․현대사, 예 술과 미학, 마르크스주의와 자본주의, 다문화인문, 자연치유, 생태마을 만들기, 생 명농업과 귀농, 예술사, 그 밖
․ 체험
- 도예, 서각, 목공, 천연염색, 생태집짓기, 자연식 요리, 숲 체험, 농사체험, 생태 체험, 그 밖
․ 학교
- 텃밭학교, 귀농학교, 된장학교, 농부학교, 전공부(일반부), 신학훈련, 생태학교, 효소학교, 영성학교, 생명학교, 인문학교(어린이, 청소년, 청년, 주부), 엄마학교, 그 밖
셋째, 로칼푸드 ‘착한 살림’ 칠곡점 개점
‘착한 사람’은
1. 더불어 착한 경제를 만들어 나간다.
2. 로칼푸드(Local food, 지역농산물)을 원칙으로 한다.
3. 착한 소비가 착한 살림(살이)이다.
4. 소농, 농업, 생태계를 살린다.
5. 다른 가치를 이야기한다.
6. 예술과 문화, 지역(마을)을 어우르는 새로운 커뮤니티이다.
7. ‘건강’과 ‘안전성’을 넘어 ‘삶의 방식’이다.
8.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살림이다.
‘착한 살림’은 ‘착한’과 ‘살림’을 부친 말인데 ‘착한’은 대중성, ‘살림’은 운동성을 나타내며, ‘착한’은 몇해전부터 착한 소비, 착한 기업, 윤리적 소비… 이런 말이 유행처럼 나왔는데 이 말도 기업 방식이 착한 기업이 되자 소비방식도 착한 소비를 하자는 말일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실제로 생협이나 아름다운 가게, 교회 바자회 등에서 공정무역물품을 사기도 하고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으면 그동안 우리는 착한 소비가 아니었고, 비윤리적 나쁜 소비를 했다는 말이 된다. 아무튼 좋다. ‘착한’이란 말이 윤리적 차원에 고착되어 있거나 착한 ‘척(?)’하고 있는데 그래서 아름다운 가게 가서 헌 옷 하나 사오거나 공정무역커피 사다 마시면 뭔가 착한 일(?) 한 것 같고 글쎄 한마디로 이게 ‘착한 소비’인지.
조선시대 ‘얼개화꾼’이라는 말이 있는데 당시 조선에는 신지식인, 개화 바람이 불면서 많은 개혁가, 개화꾼들이 나타났다. 요즘 말로 하면 진보운동권(?) 이런 말이 되겠다. 사람들은 신사양복에 자전거를 타고 혁신적 사상을 표방하는 개화꾼들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기도 했지. 그래서 덩달아 생겨난 것이 ‘얼개화꾼’들이다. 얼개화꾼들은 개화꾼이 아니면서 개화꾼인 ‘척’ 외모와 사상, 지식 등에 이런 개화꾼의 겉모습을 치장하는 이들을 일컫는 거지.
그렇지 요즘도 마찬가지 어디서나 이런 얼개화꾼들은 개화꾼 흉내내기에 바쁜 거지. 공정무역 커피를 마시는 ‘착한 소비자’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그뿐인가 기업마저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착한 기업’만이 생존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고 너도 나도 착한 기업이고… 교육운동 심지어 묵회, 귀농, 생태 교육에까지 얼개화꾼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렇게 빵빵한 지식과 윤리의식까지 갖춘 시민들이 늘어나는데도 세상은 어째서 이 모양일까?
우리에게 시급한 건 현란한 개념이나 최신 정보의 습득 따위가 아니다. 옆집 아주머니에게 ‘신자유주의’라는 단어를 발설하지 않고 신자유주의를 설명할 수 있는가이다.
그건 한마디로 글자 그대로 ‘착한 사람’이 먼저 되는 것이다.
사람이 착해지지 않고 착한 ‘척’해서는 그 모든 일이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두부 한 모, 배추 한 단-착하게 만들고 착하게 나누는 것이다.
소비자는 찾아오는 게 좀 멀고 불편해도, 값이 어떤 물품은 좀 비싸더라도 ‘착한 살림’에서 장을 보는 것이 ‘착한 사람’이요 아니 이 시대 ‘영성’이다. 우리 ‘착한 살림’은 윤리적 차원이나 얼개화꾼들이나 착한 ‘척’하는 삶의 방식을 넘어서자는 거지.
또 하나 중요한 건 우리 ‘착한 살림’은 현실적인 ‘이윤(이익)’에 기초를 두는 것이 아니라 값을 치르는 삶의 바탕, 현실적인 희생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이게 세상의 계산법과 기독교 계산법의 차이요. 전혀 다른 가치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좀 더 하기로 하고… 이어서 얘기해 보자.
1. 아무리 제 3세계 가난한 민중들이 생산해낸다 하더라도 그 물품들도 먼 거리에서 오고 있다는 것이다. 착한 소비, 공정 무역에서 취급되는 제품이라 해도 먼거리에서 수송되어 오는 건 ‘푸드 마일리지’(음식이 이동한 거리)에서 자유로운가? 운반과정에서 많은 화석연료를 소비하고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해 환경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면 생산과정이 유기농으로 지속가능한 방식이었다 하더라고 공급과정에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한다면 유기농의 의미는 순식간에 잃게 된다. 생태계를 위협하는 문제를 등한시한 채 안전성이나 경제적 인간관계의 고려만을 생각해서 공급하는 건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이다.
2. 그래서 지구온난화와 식량자급을 악화시키는 국제교역이 아니라 각 지역의 자급, 자립, 순환, 협동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도움될 때 윤리적 소비가 될 것이다.
3. 단순한 제 3세계 민중의 물품을 사주기 보다 그 지역의 지역 자립, 지역 순환적 생활양식을 이룰 수 있는 지원연대의 길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4. 우리 농업에 피해주지 않는 수입 먹거리는 없다. ‘먹는 행위는 농업 행위다’는 웬델벨리의 말처럼 우리가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우리 농업의 모습이 달라진다.
5. 지역 농산물의 지역 소비 없이 지속가능한 농업, 생명은 어렵다.
6. 지구온난화를 줄여가는 음식이어야 한다.
어떤 형태라 할지라도 먹을거리의 장거리 이동은 기름을 낭비하고 이산화탄소를 배출해 지구온난화를 부채질한다. 설탕, 커피 같은 기호식품은 그것을 재배하기 위해 대규모 열대우림까지 파괴하기 때문에 지구의 자정능력마저 줄어들게 한다.
7. 음식은 우리 생명의 문제이다.
지속가능하지 않은 화석에너지에 의존한 생산, 이동하는 먹을거리는 우리 인간들의 생명을 언제라도 갑자기 멈추게 할 수 있다. 자본의 논리와 산업적 사슬에 길들여져 있는 식습관은 우리가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될 일이지 협동의 힘으로 확산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윤리(倫理)와 선(善)이라는 단어만 내세운다고 해서 품고 있는 반생태적 요소가 없지는 것이 아니다. 지구적 생명위기를 극복하는데 보탬이 되는가에 따라 윤리적 소비, 그 의미도 부여해야 할 것이다.
오늘도 ‘나의 식습관’은 식량자급을 가져오는 가까운 먹을거리인가?를 생각해보자. 최근에 나온 ‘밥상혁명’(강양구 외 지음, 살림터출판)에서 먹을거리 우선 순위를 밝히고 있는데
첫째는 유기농업으로 생산된 지역먹거리(로칼푸드)
둘째는 관행농업을 생산된 지역먹거리
셋째는 유기농업으로 생산된 먹거리
넷째는 공정무역으로 생산된 먹거리이다.
여기서 까다로운 쟁점들도 나올 수 있는데, 보기로, 지역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지역먹거리라고 해서 다 안전한가? 관행농업을 외국 유기농산물이나 공정무역물품보다 왜 옹호하는가?
이런 여러 쟁점들은 다른 글에서 소개해 드리기로 하고 궁금하신 분은 앞에 소개한 ‘밥상혁명’을 한번 읽어 보면 잘 안내해 줄거다.
시인 이문재가 말했듯이 ‘삼십여년 전, 우리 집 둥근밥상은 우리마을’이었는데 지금의 식탁은 지구이자 문명전부가 개입해있는 식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세계화 먹을거리가 아닌 지역먹거리를.
초국적 기업이 아닌 소농을.
식량안보가 아닌 식량주권을.
무역(기업)이 아닌 자급을.
생협이나 ‘자연드림’을 넘어 ‘착한 살림’으로.
무엇보다 나 자신부터!
지금 생각은 ‘착한 살림’을 작은교회부터 시작해서 우리교단(예장통합)내 전국교회와 대구지에 10개점을 열려고 목표를 하고 있다.
오랜 세월 뜻을 같이 해온 청주 쌍샘자연교회(백영기목사)가 지난 5.29일 ‘착한 살림 청주점’을 교회 내에 개점하였다. 이런 뜻을 갖고 같이 활동해보고 싶은 교회나 단체(공동체)는 언제든 연락주면 개점에 필요한 여러 정보와 실무적인 일들을 도와드릴 수 있다.
아마 작은교회와 쌍샘자연교회 두 교회만 개점되어도 교단과 지역 안에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이제 ‘착한 살림’은 산발적인 생명운동의 정체성을 확립해 내는 것이다. ‘착한 살림’이야말로 이상적인 생태적 삶이요.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삶이 될 것이다.
이젠 ‘살림’을 좀 얘기해야 되는데 ‘경제’라는 말이 원래 ‘살림’(살이)을 말한다. 살림살이라니까 집에서 빨래하고 밥하고 아이 돌보는 것도 맞는 말로 중요하지만 이 말은 사람을 살리고 자연을 살리는 일을 말한다.
‘살림’이라는 말이 쓰여지기는 1987년인가 김지하 시인이 ‘살림’이란 제목으로 책을 내면서 ‘살림의 미학’ 또한 ‘한살림운동’에 쓰여지다가 200년엔 장택희 박사가 ‘살림의 원리’란 책을 내면서 널리 쓰여지기 시작한다. ‘착한 살림’도 이런 바탕을 깔고 있지만 우리는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창조질서원리로 접근한 ‘살림’을 얘기하는 거지. 그게 차별성이요 다른 가치요. 원칙일 것이다.
넷째, 응추리 마을에 ‘생태형’ 교회 개척
사실 이게 ‘생태형 교회개척’이라니까 ‘전원교회’ 그러면 사람들이 아 전원교회하며 퍼떡 연상을 하는데 ‘생태형 교회’라니 좀 생소하게 느껴질 분도 계실 거다. 생태형교회라니 경관 좋은 곳에 예배당도 무슨 흙벽돌이나 나무로 자연친화적으로 예쁘게 지으면 그게 생태형 교회인 줄 알면 안되지 그건 껍데기이고 내용, 정신, 본질이 항상 중요하니까 무슨 얘긴고 하니 지금 세종시 문제니, 지방분권이니 하는 말도 들어보았고 실제적으로 지방자치시대에 살고 있지.
그런데 실제적으로 선거 당일 나가서 표 한 번 찍는 일 외에는 그 어떤 주권도 허락된 바도 잘 없고, 행사한 봐도 잘 없다고 생각한다. 이름만 지방자치이지 권력이 중앙정부→광역단체→기초단체로 군대의 계급처럼 서열화되어 지방자치의 반민주성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지. 그래서 시와 군, 도와 광역시의 단체장들과 의원들은 지역 주민들은 외면하고 정당 공청권을 가지고 있는 지역 출신 중앙정치권의 국회의원 눈치나 보고 비위만 맞추려는 게 지금 현실이다.
이런 관행을 바꾸기 위해서 박승옥은(환경과 생명 2009년 가을호) 주권자인 국민들이 스스로 기초공동체를 조직해야 한다고 했다. 말은 맞는 말이지만 그 방법은 사실 새로운 것이 없는데, 그동안 시민운동가들이나 진보정치인들이 지방분권을 전제한 제도자치주의의 조속한 실현을 위해 애쓰고 직접 그 제도 자치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지금처럼 참담한 실패로 끝난 현실에서 또 다시 실패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을까 적정되서 하는 말이다.
그래서 한마디로 얘기하면 이같은 뼈아픈 실패를 교훈삼아 지금은 오히려 제도 자치를 철저히 보이콧하고 전혀 다른 차원의 지역주민공동체 재건운동이 필요하지 않을까? 말해 보는 거다.
자치와 지방분권이란 중앙정부의 선심으로 주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지차제 장(長)들은 너무 선심을 기대하거나 바라고 있다. 주민 자신들의 ‘자치’과 ‘자급’을 통해 쟁취해나가야 한다. 자급과 자치의 쟁취가 전제되지 않는 자치는 거짓이다. 그래서 지역 기초 자급 공동체가 되지 않고서는 지역기초자치공동체는 있을 수 없다.그런데 지금 지역 주민들은 물론 시민운동가들마저 ‘자급’은 없이 국가와 시장에 철저히 의존하면서 자치와 주권을 요구하는 자가 당착에 빠져 있다. 심지어 농민단체나 농민들도 모든 농민문제를 정부가 나서서 해결해줄 것을 요구한다. 정부란 본질적으로 관료와 정치인들을 위한 수탈조직인데 거기다 국민이 무엇을 원한다는 것은 그 수탈조직을 오히려 정당화하고 공고화한다. 이제는 산업주의, 시장주의, 수탈정부와 함께 제도로서의 지방자치도 과감히 철저하기 버려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주민 스스로가 시장과 국가에 의존하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불복종 자급공동체를 새로 만들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자치를 비롯한 자자(自字)돌림의 모든 인간다운 가치는 실현할 수가 없다. 그 불복종 자급소농공동체가 앞에서 말한 소농(小農)이고 그 중심에서 일하게 될 교회를 ‘생태형 교회’라고 불러보는 것이다.
그리고 지역(마을)이 매곡리와 응추리, 북창까지 해서 엮어지게 될 뿐 아니라 ‘스물다섯 집의 커뮤니티’의 식구들까지 염두에 두는 ‘다목적(多目的)활동’이 필요해서 응추리에 제 2의 공간을 생각한 거지.
‘생태형 교회’에서 전원, 문화, 복지, 생산, 대안교육, 생명농업, 영성을 다 아우러내는 상위개념의 사역들이다. 앞으로 이걸 하나하나 풀어내보는거다.
이곳은 여유로운 전원생활과 생태적인 농업을 꿈꾸는 낭만적 귀농, 귀촌자에게는 그래도 추천할 만한 곳이다. 귀농인이 현지인과 어우러져 팔공산 생태계도 지켜내고 지역농업도 살리고 예술과 문화가 한데 어울려 독특한 커뮤니티를 형성해볼까 한다. 기독교영성을 바탕으로 생산, 교육, 예술들이 잘 결합된, 그 동안의 공동체 운동의 폐해를 경계하면서 전통적인 마을 공동체나 두레 마을과는 개념을 달리하는 좀 더 진보적인 ‘마을’을 말할 수 있다.
여기까지 긴 얘기를 나눴다.
잡다한 얘기들을 여러분이 정리를 하시고 새로운 상상력과 영감이 틔여지면 좋겠다.
생태목회의 중심인 ‘농업’(생명농업)을 얘기하지 못해 아쉽다. ‘농업’(농사)에 대한 치열한 고민도 했으면 한다.
빠진 얘기들은 강의시간에 나누기로 하고 활발한 토론도 기대하면서 글을 마친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