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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 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년 전의 되풀이다.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박재삼 시인의 ‘천년의 바람’>
서러움을 미학으로 이끈 자유인, 박재삼
<장미> 담배를 샀습니다. 박재삼 시인은 장미라는 이름을 가진 담배만 피운다고 했습니다. 장미담배는 담뱃갑에 장미그림이 그려져 있고 빨간 색이 반 이상을 차지한 보기 드문 미학이 자리한 담뱃갑이었습니다. 장미라는 상징성이 말해주듯 여자들이 즐겨 피우는 담배였지요. 그날은 처음으로 시인을 만나는 날이었지요. 박재삼 시인이라고 했는데 제게는 이 세상의 시인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을 처음으로 만나기 위해 찾아가는 길이었지요. 기분이 약간은 들뜬 상태였습니다. 저는 사실 등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시인이란 직업이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 아는바가 없었지요. 벌써 제법 세월이 흘러간 이야기지요.
우연한 기회에 등단이란 관문을 통과했는데, 심사평을 써 준 분이 박재삼 시인이셨습니다. 작은 체구에 검은 피부, 그리고 참 몸이 약해 보인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제 개인의 삶이 결코 가볍지 않았지만 시인을 처음 만난 날, 박재삼 시인에게도 삶은 가볍지 않은 무게로 자리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지금도 박재삼 시인을 떠올리면 가난과 연관되어지고는 합니다. 등단 인사를 가서 들은 이야기가 아들 학비마련 걱정이었습니다. 마침 동아일보에서 받은 인촌 문학상 시상금으로 겨우 이번 학기 학비마련을 했다는 이야기였지요. 담배를 몇 대를 피우고 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 세월이 잊어버리라고 시킨 일에 충실했다면 우습지요. 박재삼 시인은 참 따뜻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야기 도중에 잠시만 있으라면서 커피값을 먼저 계산하고 왔습니다. 제가 할 일을 빼앗긴 기분이었습니다. 계산 하고 와서 하시는 말씀이 손님이 찻값을 내게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면서 다시 앉으시더군요. 가난해 본 사람이 더 배려에 대해 마음을 두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박재삼 시인은 그만큼 삶에 대해, 그리고 사람에 대해 온혈의 정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삶은 참 난감한 일이거든요. 어찌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가난이라는 것은 결코 죄가 아니지만 벌을 받는 것 같지요.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죄 없는 사람이 벌을 받는다고 하면 얼마나 억울합니까. 가난이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었지요. 타고난 머리가 있는 사람은 공부로 성공하고, 근육이 발달한 사람은 노동으로 돈을 벌지요. 용기 있는 사람은 모험을 하든가 사업을 해서 성공할 수 있습니다. 가진 것 없고 약한 몸과 여린 마음의 소유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난감해지는 것이 세상입니다. 자본주의는 무엇이든 가진 자의 편이지요. 경쟁이 주는 의미가 그렇지요. 승자에게 돈과 명예를 안겨주는 구조거든요. 패자에게 배려는 없습니다. 승자에게 영광과 박수는 주어져도 패자를 위한 장치는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에게 밥벌이를 제대로 하느냐는 것은 존재가치를 부여받는 관건이 되고 있습니다. 시인에게 밥벌이가 그렇게 난감한 일인지는 후일 알았지요. 밥벌이라는 단어가 원초적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원초적이지요. 그만큼 밥벌이는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일입니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몸이 약하고 마음이 여린 사람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해봐야 합니다. 시인은 마음이 여리고 감상적인 내면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지요. 글 쓰는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몽상적인 면을 가진 사람이 시인입니다. 박재삼시인의 경우는 그러한 자질이 더 두드러집니다.
박재삼 시인의 시는 서정성이 돋보이지요. 서정적이라는 덕목은 마음이 여리고 아름답다는 것을 의미하는 지도 모릅니다. 순수한 것은 여릴 수밖에 없습니다. 강함과는 어떤 면에서는 대비되거든요. 박재삼 시인의 시에 들어있는 장난, 간지러움, 풀잎, 아침 이슬, 밤하늘의 별이라는 단어들이 보여주듯이 그렇습니다. 시에 강렬함이 보이지 않습니다. 왜소한 몸만큼이나 시에 힘보다는 여린 감성과 직관이 보입니다. 감성으로 시를 이끌어가고 직관으로는 삶을 관통하고 나서 얻은 진리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감성이 먼저 보이는 것을 어쩔 수 없습니다. 이렇듯 소심한 마음을 가진 시인의 시는 사람을 그대로 닮았습니다. 아주 소소한 자연현상을 ‘장난’이라는 시어를 통해 유장한 자연의 진리를 끌어내고 있습니다.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 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이 시에서 시로서 성공하게 하는 요소는 한 단어가 주는 각별한 느낌 때문입니다. 그 단어가 이 시 전체를 살아있는 시로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다른 것들은 어디에서고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시어지요. 이 단어도 마찬가지로 흔하고 일상적인 단어지만 특별하게 다가오게 합니다. 그것이 시인의 능력이지요. 누구나 사용하고 어디에서고 만날 수 있는 단어를 특별한 느낌을 가지게 하는 것은 큰 시인이 할 수 있는 능력이거든요. 그 단어가 바로 ‘천년’이란 단어지요. 별스럽지 않은 일상의 일, 소나무 가지에 쉴 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일을 천년을 반복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무엇이 특별하다고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고 마음을 알싸하게 하는가를 하는지 머리를 갸우뚱하게 하지요. 그것은 다음 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하찮은 일, 나무에게 간지럼을 타게 하는 일을 천년 동안 해온 일을, 지치지 말고 계속하라는 말에서 아하, 하고 강한 압박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사소하지만 세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일임을 깨우쳐 줍니다. 직접적으로 그러한 것을 시인이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그러한 것을 알아낼 수 있을 만큼 장치를 해 놓았습니다. 인생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할 말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우리에게 버릇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서의 ‘장난’이라는 단어와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하루 일과를 살펴보면 버릇, 즉 습관이라는 것과 긴밀하게 연결되어있고 그 사소한 버릇의 차이가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놓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인생이란 것이 오늘의 누적으로 만들어지는 긴 여정이거든요. 그만큼 오늘 내가 무엇을 했느냐 하는 것이 내 운명의 하루치 삶의 퇴적인 셈이지요. 하루치의 인생을 만든 게지요. 우리가 사소하다고 하는 것들이 실은 가장 중요한 일들임을 확인하게 되지요. 밥 한 끼, 잠자기, 이야기하기 같은 일들이 얼마나 중요한 일들입니까. 삶의 중요요소 중에서도 앞에 끼는 것들이거든요.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사소한 것들이라고 합니다. 역설적인 이야기 같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더 중대사로 보는 경향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명예나 권력 같은 것이 더 중요하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 앞에 열거한 밥과 잠자기와 대화가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지요. 그러한 면에서 박재삼 시인의 시는 사소함으로 삶의 통찰을 잘 익힌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33년 일본 동경에서 출생하여 김소월에게서 발원해 김영랑·서정주로 이어지는 한국 전통 서정시의 맥을 이은 시인이지요. 박재삼의 유년시절은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사천 앞바다의 품팔이꾼 아버지와 생선장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중학교 진학도 못하는 절대궁핍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태어난 그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봅니다. 그러한 일을 겪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조심스러운 면을 가지고 있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어느 쪽에도 서기 쉽지 않은 머뭇거림이지요.
박재삼 시인은 삼천포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중학교 진학을 못하고 삼천포여자중학교 사환으로 들어가 일하였는데, 이곳에서 교사이던 시조시인 김상옥을 만나 시를 쓰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 뒤 삼천포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해 중퇴했지요. 1953년 그러니까 만 30세에 시조 '강물에서'가 문예 11월호에 발표되고 1955년 현대문학 추천을 통해 '섭리'(유치환 추천), '정적'(서정주 추천)이 되어 등단했습니다. 1997년 6월 10여 년 투병 끝에 작고했습니다.
시집으로는 「춘향이 마음」」「햇빛 속에서」「천년의 바람」「어린 것들 옆에서」「뜨거운 달」「비 듣는 가을 나무」「추억에서」「대관령 근처」「찬란한 미지수」「사랑이여」「해와 달의 궤적」「꽃은 푸른 빛을 피하고」「허무에 갇혀」「다시 그리움으로」등 15권이 있으며, 수필집 8권이 있습니다.
박재삼 시인의 시어는 순수 한국어로 다듬어져 있습니다. '한'이라 불리는 슬픔과 비애, 전통 한국의 감정을 잘 버무려서 토속적인 향기를 만들어내는 시인입니다. 박재삼 시인의 시에는 강, 시내, 나무, 잎, 바람, 햇살, 달빛 같은 자연적인 이미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박재샘 시인의 시에서 자연은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삶과 내재적인 아름다움을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그 아름다움의 완성은 세계를 끌어안는 상징에 있습니다. 그래서 박재삼 시인의 시는 조근조근한 일상의 일들을 이야기하지만 세계를 이해하는 단초를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상황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통합하는 과정을 이 시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조용하고 개인적인 소리에 기대서 할 수 있음은 대단한 힘이지요.
박재삼 시의 출중함은 무엇보다도 한국적 가락에서 돋보입니다. 유연하고 부드럽지요. 꾸밈이 없어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특질도 있더군요. 우리말을 의미·개념에만 맞추어 쓰는 것이 아니라 운율에 몸을 맡기는 탁월함이 보입니다. 자연의 물흐름 같은 것을 태생적으로 알아차린 시인이었습니다. 전통적 가락에 향토적 서정과 서민생활의 고단함을 실은 시세계를 구축했지요. 평자 중에는 '한을 가장 아름답게 성취한 시인', '슬픔의 연금술사'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혹자는 '퇴영적인 한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다면적인 평가는 필요합니다. 그리고 비판도 수용해야 하는 것도 현실입니다.
순수하고 맑아서 죄가 되는 사람, 시인
〈울음이 타는 가을강〉은 '생활과 직결된 눈물을 재료로 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 주었다는 평자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울음이 타는 가을강> 보다는 <천년의 바람>의 독자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받아들임의 문제인 듯합니다. <천년의 바람>이 틀이 크고 쉽거든요. 시를 분석하면서 읽는 사람은 드물지요.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 하지요. 한 번에 울림이 없으면 다음장으로 넘어가지요. <울음이 타는 가을강>은 곱씹어 음미해야 맛이 나는 시거든요.
그럼 시를 만나보지요. <울음이 타는 가을강>입니다.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겄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 가는
소리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겄네
<울음이 타는 가을강>
이 시도 마찬가지로 인생사에서 작은 일들로 만들어진 시지요. 거대담론이라는 것의 허상에 대해 간접적으로 이야기했지만 박재삼 시인은 사람이 살아가는 일에 대한 열거로 우주적인 자연법칙이나 삶의 울림을 이끌어내는 아주 특별한 시인입니다. 소소함으로 거대한 세계를 보여주는 아주 별난 능력을 가진 시인입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거든요. <못 앉아 있는 마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 <가을햇볕으로 동무삼기> <눈물 나는 일>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 같은 일들을 나열해 놓고는 끝마무리로 어쩌면 뚱딴지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해질녁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겄네>라고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가만 음미해 보면 이 구절에서 보일 듯 말 듯한 시의 주제를 만나게 됩니다. ‘울음이 타는 가을강’이란 부분에서 자꾸 발이 머물러지거든요. 마무리의 각별함도 각별함이지만 <울음이 타는 가을강>이라는 벅찬 이미지가 주는 감동 같은 것 때문인 듯합니다. 노을이 타는 강이 아닌 울음이 타는 강, 그것도 가을강이기 때문이지요.
박재삼 시인의 시는 아름다운 언어의 수식이 없는 소박하고 순한 시지요. 그럼에도 여운이 오래 남는 것은 매듭을 느슨하게 죄어서 그렇습니다. 시를 마무리 짓는 결론부분에서 부분을 통합하는 힘이 강박이 아니라 느슨함으로 마무리하기 때문에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됩니다. 한 번에 옥죄지 않고 머뭇거리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 머뭇거림은 망설임보다는 끌어안음의 미학을 가지고 있거든요. 포근하게 끌어안는 것이었습니다. 떠나는 사람을 향해 가지 말라고 잡지 않고 눈물만 흘리는 조선의 여인 같습니다. 한국인의 정한을 박재삼 시인은 다 말하지 못하고 마무리 짓는 듯한 기법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 가는 / 소리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겄네>라는 부분도 전연과 비슷한 마무리입니다.
박재삼 시인의 시는 그가 평생을 끌어 살았던 가난과 설움에서 우러나온 정서를 다듬어 시어로 끌어안았습니다. 전통적 가락에 향토적 서정과 서민생활의 고단함을 실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가난과 더불어 죽을 때까지 고혈압ㆍ뇌졸중ㆍ위궤양 등 병에 시달리며 만년을 보냈습니다. 생전에 고인의 유일한 '직업'은 신문에 바둑 관전기를 쓰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처음 장미 담배를 사가지고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도 바둑을 두는 기사들과 함께 사무실을 쓰고 있을 때였습니다. 담배연기 가득한 사무실을 피해 다방으로 갔었던 기억이 납니다. 허름한 다방 구석에 앉았습니다. 창가였지요. 그 때도 시인은 초췌한 모습이었습니다. 왜소한 몸이 더욱 그렇게 느끼게 했습니다.
지금도 가지고 있는 시인의 명함을 받는 순간 ‘이런 명함도 있네’ 라는 느낌이었지요. 하얀 종이에 손을 제대로 못써 떨리는 필체로 ‘박재삼’ 이라는 이름을 꾹꾹 눌러서 쓴 것이 다인 명함이었지요. 이름 외에 직함이나 소속이 없었습니다. 밑에는 작은 글씨로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지요. 인쇄업을 하는 장남이 찍어준 것이었다고 합니다. 저는 명함을 받고서 참 소시민적인 분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자신의 자리를 이 넓은 세상에서 조금만 차지하고 사는 분이라고 느꼈습니다. 아주 작은 삶에 충실한 사람이라는 생각이었지요. 시도 주인을 닮아 잔잔한 생활의 일들을 길어 올려서 시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1952년 피난지 부산에서 고인을 처음 만난 이래 박재삼 시인의 절친한 친구였던 민영 시인은 박재삼시인의 시와 삶을 동일시하는 것은 통속적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박재삼 시인은 가난 때문에 구차하지 않았으며, 누구보다 '속 깊은 정'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생애 자체를 가난이나 슬픔, 한으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라고 민영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박재삼 시인을 만해와 소월, 미당으로 이어지는 전통적 서정시의 법통을 이어받은 시인이라는 평을 받기도 합니다.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 새길이 움을 트고 있습니다. 쭉쭉 자라겠지요. 하늘길을 만들어 줄지도 모릅니다. 하늘 한 자락을 끌어올 수 있는 하늘문이 활짝 열리겠지요. 좋은 시를 만나면 이러한 기분이 듭니다. 시는 구성이 잘 짜여지고 교과서적인 시작법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좋은 시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박재삼 시인의 <천년의 바람>은 좋은 시지요. 짧지만 읽고 나면 가슴에 무언가 한 자락의 울림이 크게 자리해서 긴 여운을 가지게 합니다.
박재삼 시인, 그는 갔습니다. 시인의 묘는 충남 공주에 있습니다. 시비는 경남 사천시 서금동 노산공원에 <천년의 바람>이란 시가 세워져 있습니다.
사천시는 예전에 삼천포라 불리던 곳이지요. 제가 이 땅을 처음 만난 것은 여행을 하다 여수에서 충무로 가려는데 여비가 모자라 삼천포까지 가는 배를 탔지요. 그 때는 아주 조그만 어촌이었지요. 판잣집 같은 식당과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지금은 사천시가 되었고 제게는 거대도시처럼 보였습니다.
박재삼 시인은 <한 경험>이란 글에서 이러한 글을 남겼습니다.
언덕은 바다가 바로 눈앞에 보여 오는 곳에 있었다. 가만히 앉았기도 어줍은 일이기도 해서, 머리를 땅에 닿을 만하게 물구나무서서 두발 사이로 바다를 보았다. 그때 웬일인지 내 눈에선 눈물이 괴더니 그것이 얼굴로 젖어 내렸다. 바다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늘 보는 바다가 훌륭한 경치로서 내 눈에 도달해 온 것이다. 그때까지 바다는 이웃 사람의 얼굴을 대하듯 별것 아닌 것으로 내 마음에 자리하여 있다가 별안간에 아름다워 왔기 때문이다. 은금이라 한다면 좀 속된 표현일 것이고, 하여간 눈물의 꽃이 꽃 피어 난 꽃밭인 양 바다는 온통 현란한 경개로 내게 밀어 닥쳤는지 모른다.
하나 더 박재삼 시인의 생활 한 면을 들여다보면서 글을 마칠까 합니다. 박재삼 시인의 아내, 김정립 씨가 한 이야기이니 자신의 입으로 술회한 것보다도 객관적이겠지요.
저야 뭐, 문학에 대한 상식이 없기 때문에 애들 아빠가 글을 쓰실 때 어떻게 해 드리는 것이 도움이 되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요. 그냥 수선을 떨지 않는 것이 고작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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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으셨던 시절에는 지나칠 정도로 약주를 드셨지요. 매일 밤 12시가 돼야 집으로 들어서는 골목 어귀에서 노래소리가 들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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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가정사에 무관심했었나 하면,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집에 양식이 떨어졌지요. 출근하는 아빠에게 양식이 떨어졌으니 좀 일찍 들어오시라고 했지요. 제가 융통성이 없는 여자인데다가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기 싫어하는 성격이라서 쌀이 떨어졌으면 쌀가게에 가서 어떻게 변통해 볼 수도 있었으련만, 그걸 못 했지요. 그날도 애들 아빠는 <12시 5분전>이라는 별명이 허명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결심이라도 한 듯이 또 만취해서 12시에 들어오시는 거예요. 그것도 빈 손으로.....
시인으로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지는 알지만 그로 인해 힘들어 하는 것은 자신보다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면 시인은 죄인인 셈이지요. 순수하고 맑아서 죄가 되는 사람이 있지요. 바로 시인입니다.